
제11화 아련한 첫사랑
용대와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또 한 사람,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박선화.
그녀와 처음 만난 건 해질 무렵 공동우물가에서였다.
물을 길어 오라는 할매의 말에 나는 언제나처럼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갔다.
거기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 아이를 만났다.
키는 나와 비슷했다. 아름다운 까만 머리칼을 뒤로 묶었고, 비칠 것 같은 투명한 피부에 콧날이 오뚝한 얼굴. 그리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정말로 예쁜 여자아이였다.
“저, 저기…”
나는 물통을 껴안은 채 조심조심 말을 걸었다.
“아, こんにちは (콘니찌와, 낮 인사말).”
그녀가 당황하며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순간 놀란 표정으로 해가 지는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 こんばんは (콤방와, 저녁 인사말) 로 해야겠네요.”
하며 조금 수줍은 듯이 웃었다.
‘웃는 얼굴은 훨씬 더 예쁘다…’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쳐다보며,
“네, こんばんは… 네요.”
하고 그녀를 따라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그녀가 인사를 하는 나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당황스런 표정으로,
“앗, 미안합니다. 조금 더 하면 끝나거든요.”
어설픈 손놀림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렸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간신히 끌어올린 두레박에는 물이 조금밖에 들어있지 않아 좀처럼 그녀의 물통이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퍼뜩 생각난 듯,
“제가 해줄게요!”
하고 그녀의 손에서 물 긷는 두레박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우물 속으로 던지듯 떨어뜨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우물 속에서 물이 가득 찬 두레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굉장하다!”
“뭐, 굉장할 것까지야…매일 하는 일이라서요.”
“매일? 어머나, 정말 대단하다.”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물통에 물을 채워주었다.
“고마워요, 정말 도움이 됐어요.”
그녀는 인사를 하고 물이 가득 찬 물통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저... 제가 들어다 줄까요?”
그녀는 순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고마워요, 근데 괜찮아요, 우리 집은 바로 저기거든요.”
그녀는 물통을 안아들며 우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등불이 켜진 집 쪽을 쳐다보았다.
“어? 저 집은 어제까지 빈집이었는데.”
“난, 오늘 이사 왔어요.”
그녀는 물통을 내려놓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박선화라고 해요.”
“앗, 저도 반갑습니다, 김해수라고 합니다.”
나도 긴장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이름이 ‘해수’군요. 근데, 해수 군은 몇 학년이에요?”
“4학년입니다.”
“그럼, 나보다 한 학년 아래네.”
기분좋은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선화누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지?”
“해수가 참 친절한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져서,
“서, 선화누나도 그래요. 친절한 것 같아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엉뚱한 대꾸를 해버렸다.
“선화라고 불러도 괜찮아. 왜냐면 해수는 남자니까.”
“그럼, 저한테도 그냥 해수라고 불러요, 한 학년 아래 이니까.”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도 기쁜 듯 나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물통을 안고 쏜살같이 우물가로 달려갔다.
목적은 당연히, 오로지 선화를 만나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너무 앞서 갔다.
근처 나무 그늘에 몰래 숨어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물가에 나타난 것은 시끄럽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아줌마 군단뿐이었다.
“오늘은 안 오는 걸까?”
해도 뉘엿뉘엿 저물고 그만 돌아가려 했을 때, 눈부시게 빛나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 갑자기 내 눈에 확 들어왔다.
‘선화다!’
나는 허둥지둥 물통을 안고 휘파람을 불면서 우물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머, 해수야, 안녕.”
“아, 선화야, 우연히 만났네. 나도 지금 막 할매가 물을 길어 오라하셔서 왔거든.”
나는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며 우물 앞에 내 물통을 내려놓고는,
“내가 떠 주지!”
건방지게 신사흉내를 내며 선화가 들고 있던 물통을 집어 들었다.
“고마워, 해수야.”
나는 으쓱대고 웃으며 우물물을 길어 선화의 물통을 채워 주었다.
이윽고 둘의 물통이 가득차자 우리 둘은 근처에 있던 아줌마들이 빨래를 할 때 걸터앉는 의자에 앉았다.
“학교에서 들었는데, 해수는 일본에서 왔다며?”
선화의 말에 나는 순간 머뭇거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선화도 일본을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응, 1학년 때 이곳에 왔어.”
“그렇구나, 그럼 여기 와서 겨우 3년 쯤 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선화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싫은 눈빛으로 보기는커녕 반대로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대단하다, 겨우 3년 만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조선말로 얘기할 수 있게 되다니. 어제 얘기 할 때도 전혀 몰랐었거든.”
“앗, 정말?”
“응, 정말 대단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구나.”
나는 선화의 표정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선화는 어디에서 이사 온 거야? 경상남도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서울이야.”
“그렇구나, 아주 고운 말을 쓴다고 생각했어.”
“서울은 지금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데모도 엄청 많고, 때때로 군과 게릴라의 총격전도 벌어져서 무척 위험하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그래서 갑자기 이쪽으로 이사 오게 된 거야.”
선화는 그렇게 말하며 순간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지 내가 물으니, 그녀는 서울에 있는 사범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혼자 그곳에 남아있다는 얘길 해주었다.
그 후로 나와 선화는 급속히 친해지게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상냥했고, 별 것 아닌 일에도 환하게 웃는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매우 엄격한 분이라 결혼 전에 남녀가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터무니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국은 유교의 영향이 강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여긴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만나 이야기 할 때는, 그녀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하게 되었다. 마치 어른들의 ‘밀회’같아 더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밤이 되면 선화는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왔다. 그 때를 계산해 나도 우물가로 갔다. 대체로 시간은 미리 약속했지만, 나는 그녀보다 먼저 가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일본은 어떤 곳이야?”
“서울은?”
“음식은 뭘 좋아해?”
“어머니와 떨어져 있어서 쓸쓸하지 않아?”
그녀와 그렇게 시시콜콜 나누는 대화가 무엇보다 즐거웠다. 어쩌다 귀가가 늦는 것이 걱정된 그녀의 아버지가 대문 밖까지 나와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허둥지둥 우물 뒤로 숨었다.
그런 스릴이 더없이 즐거웠다.
*제12화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쩝... 다른 분들의 첫사랑은 왜 이리 일찍인지.. 쩝쩝... 난 왜 이런 이쁜 경험이 없을까...쩝쩝... 부럽습니다용. 미영씨 이런 부분은 분량을 좀 많이 늘려줘유 ~~~ ㅎㅎ
ㅋㅋㅋㅋ
ㅎㅎㅎ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_____^
고맙습니다! ^^
ㅎㅎㅎㅎㅎ
그냥 이런 반응밖에 안 떠오르네요.
11살, 12살이 나누는 대화가........
다음화를 기대할게요~
아..가슴 떨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