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에 작용한 절대 변수는 박정희였다 -- 한반도에 전혀 없던 경제(중화학공업과 전자산업 등)를 창조한 박정희
중화학공업으로 통칭되는 일관 제철소, 조선업, 석유화학 공업 등과 기계, 전자산업 등은 주로 세계의 강대국들에 포진되어 있는 강대국형 산업들이며 그 것은 오늘의 한국에서도 활성화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런 강대국형 산업 구조가 한국에 장착, 활성화되어 있는 걸 매우 당연한 걸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우선 그런 강대국형 산업구조라는 게 세계의 많은 나라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며 불과 몇몇 나라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며 거기에 지금 한국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박정희가 5.16 혁명을 일으킨 1961년 당시만 해도 그런 강대국형 산업 구조를 한국이 가진다는 건 너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박정희를 제외한 세계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포항제철소를 만들고 전자산업을 육성하는 일 등등. 그 당시엔 누가 봐도 어림없는 일이었으며 당시 3천만 국민 그 누구의 꿈에서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박정희만이 그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고 강력한 의지로 해 낸 것이다.
1961년 당시 상황에서 박정희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외국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이 생각한 한국의 경제 발전 계획이란 그저 경공업을 순차적으로 발전시켜 국민의 일상 소비재를 생산, 공급하는 수준에 그친 것이었지 상기한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장착하는 게 주된 목적이 아니었으며 설사 그런 목적이 조금 있었다고 해도 그들이 주장한 순차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50년, 100년이 걸려도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한국에 장착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1961년 당시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는데 박정희의 집권이 끝난 1979년에는 이미 중화학공업, 포항제철, 조선업, 전자산업 등 강대국형 산업구조의 기반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면 이는 당연히 박정희의 공로이며 박정희가 변수로 작용한 결과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에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창조, 장착한 것이다.
[참고] 경제 개발의 공로는? 박정희 80, 국민 20
http://cafe.daum.net/great6070/bWD5/6
1961년 이후 55년이 지난 2016년 현재에도 모든 한국인들이 강대국형 산업구조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 역시 전적으로 박정희의 덕분이다.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한국에 장착하는 일이 어림도 없었던 1961년 이후 박정희와 5.16과 10월 유신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2016년 현재의 한국에도 포항제철 등과 같은 강대국형 산업구조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변수는 오로지 박정희와 5.16 혁명밖에는 없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한국은 포항제철을 만들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경제와 당시 국내외 정세를 모르는 사람들이거나 오로지 박정희를 비난하는 게 목적인 양아치들이다.
■ 세계 경제 호황의 막차를 놓치지 않은 박정희, 대한민국
먼저 세계 정세 면에서 한국이 포항제철 등 중화학공업을 건설할 적기(適期)는 1970년대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6,7,80년대 당시가 세계 경제의 장기 호황기(성장기)로서 물론 1, 2차 석유파동 등과 같은 위기와 여러 기복은 있었지만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면 대체로 세계 어디에서든 팔리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황금같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적기에 포항제철 등 중화학공업을 미리 건설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박정희의 강력한 의지와 추진력, 판단력, 결단력, 지혜, 애국심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박정희가 1972년에 10월 유신을 하지 않아서 정권이 바뀌었다면? 포항제철 등 중화학공업을 적기에 건설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인물은 당시 김영삼, 김대중 등 민주팔이 세력들 중에 그 누구도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당시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국가적 위기와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할 것이다.
만약에 포항제철의 건립이 10년 정도 늦어졌다면 한국은 80년대의 3저 호황이라는 것도 누리지 못하여 큰 성장을 하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나라로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한국이 평범한 나라로 머물고 만다는 건 곧 한국의 멸망이 시간 문제라는 걸 뜻한다.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국제정글역학을 아는 이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국제적으로 3저 호황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 것을 활용할 산업적 기반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건 상식이다. 각종 공산품, 수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철, 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반이 있어야 하며 철이나 합금, 화학처리 기술이 들어가지 않는 공산품은 별로 없다. 만약 70년대에 박정희가 미리 포항제철 등 중화학공업을 한국 땅에 <창조>해 놓지 않았다면 쇠와 합금 등은 모조리 해외에서 수입해 써야 했을 것이며 그리 되면 공산품의 단가가 높아져 수출에 불리해진다. 그러면 80년대의 3저 호황도 활용할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70년대의 포항제철 건립과 80년대의 3저 호황 누리기, 이는 따로 떼어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며 포항제철, 중화학공업을 수십년(사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것이므로 무한대년) 이상을 앞당겨 미리 건설해 놓은 선견지명의 애국자 박정희에게 우리 국민 모두가 경의를 표하고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다.
참고로 중국의 경우 8,90년대에 와서야 개혁개방으로 경제 건설을 시작하여 성공했으므로 경제개발은 시기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중국과 한국은 경우가 다르다. 중국은 땅이 넓고 천연자원도 어느 정도 있으며 인구가 많아 공장 건설과 운용에 필요한 거대 자본의 형성이 쉽고 내수 시장의 확대가 가능한 등 마음만 먹으면 경제의 대외 의존도를 줄일 수 있어 제철소를 언제 짓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땅도 좁고 천연자원도 부족하고 내수만으로 경제를 운영해 갈 정도의 인구도 되지 않는 한국은 다르다. 그런 한국은 어쩔 수 없이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철소를 국내 철(鐵)의 수요만 보고 지을 수 없으니 짓는 것보다는 가동과 유지가 더 큰 문제가 된다. 만들어진 철 제품을 사 줄 곳이 많아야 수지타산이 맞아 제철소 유지가 가능하므로 내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거대 자본의 형성이 어려운 한국은 해외 수요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즉, 한국은 제철소 등을 만들 경우에도 해외 시장의 상황, 해외 경기의 호황 여부도 살펴야 하기 때문에 그 건립 시기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박정희는 세계 경제의 장기 호황기에 포함되는 70년대에 매우 적기에 포항제철을 건립한 것이다. (더구나 70년대 당시 빨리 제철소를 가동하여 철을 수출하여 번 돈으로 외국에서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으니 세계 경기의 호황기 여부는 한국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 새로운 경제 창조를 위해 국내 정치를 장악한 박정희. 정당하고 필요한 독재였다 -- 박정희는 민주팔이들의 선동에 넘어간 우중(愚衆)들과도 싸워야 했다.
다음으로 국내 정치 면에서 포항제철을 비롯한 강대국형 산업구조 건설은 <장기 독재 정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박정희의 독재는 시대에 부합한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었으며 대한민국을 살린 자랑스럽고 위대한 독재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는 196,70년대 당시 미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나라의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이 반대했고 한국내의 김영삼, 김대중 등 모든 야당이 반대한 일이 바로 포항제철을 비롯한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박정희가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지 않고 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포항제철 건설 등에 계속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은 어떻게 투입하나? 당시 상황에서 만약 박정희가 소위 민주주의라는 걸 전면적으로 허용했다면 당연히 김영삼, 김대중 등 야당 세력들은 포항제철 건설 등에 막대한 자금을 계속 투입하는 일에 반대했을테고 따라서 강대국형 산업구조 장착은 무산되고 말았을 것이다.
보통의 경제 개발이 아닌 강대국형 산업구조 장착 계획에서는 장기적인 안목이 더욱 필요하고 따라서 장기 독재 정권이 아니면 정책의 일관성이 보장되지 못한다. 박정희의 독재를 욕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박정희가 만약 1972년에 10월 유신을 하지 않아서 그 몇 년 뒤에 야당 세력이 집권했다면 그들이 과연 1970년에 시작된 포항제철 등 중화학공업 건설과 유지에 계속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겠는가? 당장 다른 데로 예산을 돌리고 말았을 것이다. 뭐든지 예산이 없으면 실천하지 못한다.
"당시 세계개발은행(IBRD)에서도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서도 한국같은 나라에서 제철공장 건설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차관 제공을 거절하였다."
"자,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에 제철산업 구상을 했으나, 대일청구 자금 1억불을 가지고 실제로 공사가 시작된 때는 1970년이었다. 그리고, 그 1억불을 농업용이 아니라, 산업용으로 쓰기 위한 허락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내는 것이 그렇게도 힘들었다."
"그리고 포항제철 건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당시 대통령이 박정희였다는 사실이 있다.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구상만 해 놓고 예산이 확보되기 전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면 포항제철 건설이 계속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참고] 박정희의 포항제철 건설 이야기 (역사학도)
http://cafe.daum.net/great6070/bpnM/1
보라. 당시 박정희가 아닌 누가 있어 무려 1억불이나 되는 돈을, 그 것도 조상의 피의 댓가인 대일청구자금의 상당 부분(사실상 절반 이상)을 포항제철에 투입하려는 결단을 낼 수 있었겠는가.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그럴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야당 인사들은 대일청구자금을 강제징용과 위안부 등으로 실제 피해 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발언을 하는 등 <경제개발의 밑천으로서의 대일청구자금>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으며 설사 그런 개념이 조금 있었다고 해도 무려 1억불이나 되는 돈을 포항제철이라는 위험 부담이 큰 단일 사업에 투자할만한 강력한 의지와 비젼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지만원)
당시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포항제철을 건설하겟다는 불굴의 의지를 갖고 끝까지 노력한 정치 지도자는 오로지 박정희 뿐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박정희라는 변수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포항제철도 중화학공업도 전자산업도 없는 것이며 이를 부인하는 행위는 양심을 속이고 박정희의 은공을 폄하하는 배은망덕한 짓이다.
■ 보다시피 박정희는 대한민국에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창조, 장착했다.
이는 경제학적으로는 기존에 없었던 실물 내지 하드웨어를 창조하여 한반도에 장착한 것으로서 이 게 바로 박정희 평가의 주안점이 되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는 주로 창조라는 관점에서 봐야지 운영과 지표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되는 것이다. 공장, 생산 시설, 과학기술, 응용기술, 인프라 등과 같은 실물 내지 하드웨어가 있어야 그에 대한 운용도 하고 각종 경제 지표라는 것도 생기는 것이지 아무런 실물도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박정희가 5.16 혁명으로 집권하기 전에는 대한민국에 실물다운 실물은 없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창조의 시대인 박정희 시대를 무슨 경제성장률이니 실업률이니 물가상승률이니 하는 수치로만 평가하는 건 창조의 고마움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짓이며 또한 창조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빚어지기도 한 시행착오와 무리수, 편법, 불협화음들을 창조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로지 박정희를 비난하는 소재로만 사용하려는 건 후세의 지탄을 면치 못할 비열하고 악의적인 짓이다.
대한민국 경제는 창조의 시대와 운용의 시기로 구분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는 위대한 강대국형 경제 기반을 창조하는 시대였고 1980년 이후 전두환, 노태우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운용과 조정, <후퇴>의 시대로 명명하는 게 합리적이다.
박정희의 경제 <창조>가 없었으면 전두환, 노태우 시대와 그 후의 발전도 없으며 오늘의 IT 첨단산업들도 없는 것이다. 창조의 시대와 그 후 운용, 조정, 후퇴의 시대를 동급에 놓고 평가해서는 안되며 평가의 잣대도 달라야 한다. 창조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빚어지기도 한 시행착오와 무리수, 편법, 불협화음들도 창조의 한 과정으로 이해해야만 박정희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 창조가 없으면 운용도 없다 -- 정보통신 기술(IT 기술), 인터넷 기술, 한류의 진짜 공로자는 박정희, 전두환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전자산업과 그에 기반한 정보통신 기술(IT 기술), 인터넷 기술 등도 그 기반은 이미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창조>해 놓은 것으로서 김대중 정권의 덕이 아니다.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이미 만들어 놓은 인적, 기술적 기반과 추진 관성이 있었기에 그 후에는 김대중이 아닌 누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기존 관성에 따라 <운용>만 하면 IT 산업이 발전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이미 길러 놓은 인력과 기술이 한국의 IT와 인터넷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킨 것이지 김대중 정권의 공이 아닌 것이다. 김대중은 박정희, 전두환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고 생색만 낸 것이다.
IT 기술을 활용하는 사회적 여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2016년 오늘 한국의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영화산업, 드라마, K-POP 등 대중문화가 소위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떨칠 수 있게 된 게 김영삼, 김대중 등의 민주화, 규제 완화로 인한 문화예술 소재의 다양화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것은 그야말로 단견이 아닐 수 없다.
소위 민주화, 규제 완화로 인한 문화예술 소재의 다양화라는 건 김영삼, 김대중 등과 같은 민주팔이 세력이 아니었더라도 박정희 계열의 인사들이 <유신의 연착륙에 의한 규제 완화, 민주화>라는 순차적 과정으로 이루게 되어 있었던 그들의 몫이었으며, 실제로 박정희는 임기 말년에 유신을 완화하고 대통령직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할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그런 순차적 과정의 전개가 오로지 대통령 병에 걸린 김영삼, 김대중 등 민주팔이 세력이 국민을 선동하여 중간에 끼어 드는 바람에 무산되고 국가 발전이 후퇴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10.26 사건과 5.18 등으로 이어지는 혼란 사태와 그 후 민주팔이 세력의 득세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0.26과 5.18이 없었다면 한국은 이미 일본,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 최강국이 되어 있을 것이며 남북통일도 이미 되었을 것이다.)
6,70년대 박정희 시대와 80년대 전두환 시대를 다 살아 본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전두환 시대에 야간통금이 해제되고 해외여행이 자유화(1981년 8월 1일부터 해외여행 자유화 취지를 담은 여권법 시행령이 시행, 이후 규제를 점점 완화하다가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 1월 1일에 전면 자유화) 되는 등 얼마나 많은 규제 완화와 자율화가 이루어졌는지를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기조라는 게 박정희가 집권 말년에 유신 완화의 뜻을 내비치며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런 순차적 기조로 나아가는 게 김영삼, 김대중 일당들의 <선동적 민주화>라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규제 완화를 달성하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했을 것이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규제 완화와 자율화는 김영삼, 김대중 등 민주팔이 세력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들 민주팔이 세력이 정권을 잡고 난 후 너무 무분별하고 급속하게 규제를 완화하고 너무 심한 자율화를 하여 <떼법>이 난무하는 바람에 국가 기강과 전통이 무너지는 분야가 나타나는 등 큰 부작용이 생겨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정과 국민 생활에 큰 부담을 주고 있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민주화라는 것도 사실은 박정희, 전두환 계열의 인물들이 순차적으로 챙기게끔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를 김영삼, 김대중 등 대통령 병에 걸린 민주팔이 세력들이 도둑질 한 것으로 보는 새로운 시각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야 할 것이다.
■ 이상에서 보다시피 오늘의 경제대국 한국을 있게 한 6,70년대 한강의 기적에 작용한 최대 변수이자 절대 변수는 바로 박정희 1인이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고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 박정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도리일 것이다.
유신만세, 2016-10-24
위대한 박정희
http://cafe.daum.net/great6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