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씨[羅氏]의 연원은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중국 예장[강서성 예장도 남창현]의 축융씨[祝融氏]에서부터 전해져 광정공이 주나라때 공을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써 나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나씨는 나주[羅州], 금성[錦城], 안정[安定], 군위[軍威], 의성[義城], 비안[比安] 정산[安山] 등 55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나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성나씨에서 분적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남 나주에는 금성부원군 나총례[羅聰禮]를 시조로하는 금성나씨와, 고려때 상장군 나부[羅富]를 시조로하는 두집안이 있어 상대의 계보를 놓고 혼란과 이설이 있었으나 서로 다른계통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오늘날 나씨는 전라남북도에 집중세거하고 있으며 멀리 신라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속에는 훌륭한 위업을 남긴 선조들이 많아서 충효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군위 나씨 (軍威羅氏)**
1> 시조 : 나 인[羅認]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군위(軍威)는 경북 중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노동멱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때 지금의 군위로 고쳐 숭선군(선산의 옛지명)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때는상주에 귀속하였으며,남쪽에 적라산이 있기 때문에 한때 적라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895년군위현을 군으로 개칭하고, 1914년 지명 개편시 인근의 효령,·의흥,·비안 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금성나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알려진 군위나씨(軍威羅氏)는 고려조에서 첨의정승을 역임한 나인(羅認 : 일명 윤)의 막내아들 문서(文瑞)가 삼중대광에 이르렀고 나라에 공을세워 적라백(군위의 옛지명)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군위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적라백 문서(文瑞)의 손자인 혁(爀)이 고려 말에 지신사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의성으로 내려가 은거하여 백이숙제의 충절을 기렸고, 지중추부사 명우(明佑)의 아들 중 장자인 [빈]은 조선조에서 찰방을 지냈으며, 차남 [옥]은 4 대조인 혁(爀)의 행장을 짓는일로 세인의 미움을 사서 대정현(제주도)으로 귀양갔다가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한편 진도군수 광수(光秀)의 아들 희준(希俊)이 경기도사를 지냈고, 손자 사륜(嗣倫)은 참봉으로 임진왜란 때 황해도 금천으로 이거하여 슬하에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차남 기수(麒壽)가 참봉을 지냈으며, 3남 인수(麟壽)는 어모장군으로 훈련원 판관을 지내다가 병자호란때 순절하여 이름을 떨쳤다. 1985 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군위 나씨(軍威羅氏)는 남한에 총 112 가구,489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성 나씨 (錦城羅氏)****
1> 시조 : 나총례[羅聰禮]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금성(錦城)은 전남 중서부에 위치한 도시로서 본래 백제의 발라군을 통일신라에 와서 경덕왕이 금성(일명 금산)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주로 개칭하였다.
중국 고대 축융(祝融)의 후예로 알려진 금성나씨는 기원전 759년(주나라)에 광정공이 공을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나씨(羅氏)의 시초가 된다고한다.
「금성나씨대동보」에 의하면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 때 나라에 공을 세우고 예장군에 봉해져서 예장나씨가 되었다가, 그의 후손 지강(至强)이 당나라 태종때 상서좌복야로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다가 미움을 받자 동래(東來)하여 백제의 땅인 발라현(지금의 나주)에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나씨의 시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보상에 나타난 금성나씨의 시조는 고려초에 일등공신에 오른나총례(羅聰禮)이며, 그의 아들 은고(恩誥)가 금산군에 봉해진것을 시작으로 11세손에 이르기까지 3명이 대광의 벼슬에 오르고 4명의 부원군과 5명이 봉군되어 벌족의 지위를 차지했다.
한편 판호부사 득황(得璜)의 아들 유(裕)는 고려 원종때 김방경과 함께 삼별초를 토평했고, 충렬왕조에서는 변경에 침입한 거란을 격퇴시켜 회원대장군의 호를 받아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고려 말엽에 주로 명성을 떨쳤던 금성나씨는 금성군 익희(益禧)의 손자 문규(文奎)가 충숙왕때 서해도 안렴사로 나가 치적을 남겼으며, 상장군 수겸(守謙)의 9세손 계종(繼從)은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조선 중종과 명종대에 문명을 떨쳤던 세찬(世纘)은 문규(文奎)의 7세손으로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세찬의 증손 무춘(茂春)도 광해군때 기개높은 학자로 명성을 떨쳤고, 그외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득황(得璜)의 13세손 치용(致用)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막하로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그의 사촌 대용(大用)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막하장으로 거북선과 해선을 제작하는 데 공을 세워 삼지창과 청룡도를 하사받아 평양성 방어에 공을 세운 승윤(承潤)과 함께 충절(忠節)의 가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금성나씨(錦城羅氏)는 남한에 총 9,490 가구,39,903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전남 나주군 세지면 죽동리, 죽제리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용천리
전남 나주군 문평면 동원리, 오용리
황해도 금천군 동화면 매서리, 매남리
경북 달성군 공산면 백안동
****나주 나씨 (羅州羅氏)*****
홈페이지: http://my.netian.com/~jamesna/
1> 시조 : 나 부[羅富]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나주(羅州)는 전남 중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백제의 발라군이었으며 신라 경덕왕때 금산군으로 고쳤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로 개칭하였다.
고대 중국 백익(伯益)의 후예로 전하는 나주나씨(羅州羅氏)는 시조인 나부(羅富)가 중국 강서성 예장(豫章)으로부터 동래 (東來)하여 고려조에서 상장군을 역임하고 나주에 정착한 것이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가 실전되어 부(富)의 후손으로 영동정에 오른 득규로부터 1세조로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며, 특히 득규의 증손 수영(守永)의 아들 5 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가문의 중흥을 크게 이루었다.
수영의 맏아들 위(位)는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호조전서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나주에 은거하여 금양처사로 불리워졌으며, 그의 아들 동길(東吉)이 증주목사로 나가 자손들이 용강과 성주 등지로 이거하면서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일족을 이루었다.
수영의 둘째 아들인 계(桂)는 고려에서 벼슬이 중서시랑에 이르렀고, 자손들이 주로 경기도에 집중세거하며 시랑공파(侍郞公派)를 이루었다.
그의 묘소가 한양성내에 있는 것으로 기록에 전하나 실전하여 1978년 후손들이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봉천산 남쪽에 6대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향사 하고 있다. 금양군 파조(派祖)인 석(碩)은 고려때 금양군에 봉해졌으며 학문이 뛰어났고,나주로부터 김제로 이거하여 자손들이 김제파라고도 하였다. 그의 묘소는 김제의 북조산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후손들이 1954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종산(宗山)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 향사하고 있다.
네째 아들로 연안군파 (延安君派)를 이룬 세(世)는 연안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묘소가 실전되어 후손들이 1957년에 충남 서천군 마서면 옥산리 순제동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하고 있다.
수영의 막내아들로 나주에 세거했던 원(源)은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가 되었고,묘소는 공조전서를 지냈던 아들 진(璡)과 함께 나주 송현에 있으며 3월 3일에 향사하고 있다.
인물을 살펴보면 조선 세종때 이조판서 겸 세자시강원 찬선을 지낸 득강(得康)과 나성군에 봉해진 공언(公彦), 양천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던 흡(恰)이 유명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나씨(羅州羅氏)는 남한에 총 23,284 가구,99,089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남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옥산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전북 김제군 김제읍 용동리
전남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제주도 남제주군 일원
****안정 나씨 (安定羅氏)*****
1> 시조 : 나천서[羅天瑞]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안정(安定)은 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옛지명으로 신라시대에 아시혜 또는 아을혜로 불리우다가 신라때 안현으로 고쳤으며 고려조에 와서 안정현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세종조에 안비현으로 하였다가 그후 비안현으로 고쳤다.
안정나씨(安定羅氏) 시조는 고려 공민왕때 삼중대광 문하시중을 지낸 나천서(羅天瑞)이다.
그는 금성나씨의 시조 나총례의 10세손인 윤[允]의 둘째아들이다.
공민왕 19년 이성계가 요동를 정벌하고 귀환할때 추위와 기근으로 아사지경에 이른 만오천여 군사를 나천서(羅天瑞)가 수백석의 양곡을 구하여 무사히 생환시킨 공으로 안천군과 안정백에 봉해지고 안정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안정으로 삼게 되었다.
나씨의 인물로는 천서의 현손 유선[裕善]이 양산군사를 지냈고 맏아들 계종[繼宗]은 한성부 참윤을, 둘째 연종[連宗]은 청산 현감을 지냈으며 막내 사종[嗣宗]은 선전관이 되었다.
조선 선조때 윤침[允沈]의 아들 급[級]은 평산부사를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아들 만갑[萬甲]의 공으로 영의정에 가증되었다.
만갑은 인조때 형조참의와 공조참의를 역임했으며 만갑의 5대손 열[烈]과 걸[杰]이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