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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3 유학 바로 알리기 강의
다산은 저속한 성리학자이며 간신의 표본이다– 대구 동학방 강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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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호
1. 광복 시기의 상징조작 – 간신 다산을 충신으로 만들다
어린 시절 다산과 이순신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령쯤 됩니다. 이순신은 세계 최초의 잠수함을 만들었으며, 다산은 기중기를 만드는 등 과학기술에서 만능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선은 실제 전쟁에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거의 똥배에 가깝습니다. 딱하게도 지금도 거북선의 신통성을 믿는 자칭 연구가들이 있으며, 이들은 거룩한 조국애를 발휘하여 평생을 바쳐 위대한(?) 거북선을 연구합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군량미를 마련하고, 선박을 수리하며, 거북선을 만들어 보기도 하며, 바닷길을 관찰하는 등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한 성설성에 있지 거북선의 위대함과는 무관합니다. 13척의 배만 남았다는 명량대첩에 거북선은 없었습니다. 있었다한들 빠른 물살에 가라앉지 않았으면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다산은 청렴결백하며 수많은 책을 쓴 천재적 지식인으로 포장되어 다산이 위대하도록 믿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다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중기를 발명하여 수원성을 쌓았다는데 그런 사실 없습니다. 청나라에서 거중기를 수입하여 사용했습니다.
더욱이 실학자(實學者)라고 합니다. 이는 20세기 전반에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철학이 미국을 발전시킨 것으로 한국인들이 이해합니다. 이 싸구려 철학 또는 운동은 1870년대에 C.S.퍼스에 의해 주장되었고 19세기 말에 W.제임스에 의해 전세계에 퍼졌으며 20세기 전반(前半)에 와서 G.H.미드와 J.듀이(1859-1952)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두산 백과 인용)고 합니다. 미국의 발전은 무자비한 토착민 살해와 1차와 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군수품 수출이었습니다. 이익만 되면 사람을 죽이어도 상관없다가 바로 실용주의 아닙니까.
1945년 광복이 되자 한국인들이 위대한 한국을 만들기 위해 상징조작을 합니다. 대한민국에도 실용주의(實用主義)가 있었으니 그것은 실학(實學)이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이 무덤에서 걸어 나와서 실학을 선도한 위대한 철학자가 됩니다. 다산이 썼다는 여유당전서는 거의 500권에 육박합니다. 이 방대한 책 속에 실학(實學)이란 글자는 딱 두 번 나옵니다. 그것도 과거 시험을 볼 경우에 요긴한 암기용 요약 노트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입시용으로 말하면 족집게 선생의 컨닝 노트쯤 됩니다.
게다가 다산이 17년 유배생활(1801-1818)을 하였다고 불의와 맞선 정의의 사도쯤으로 여깁니다. 따져봅시다. 다산은 유배생활은 천주교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럴까요. 정조(正祖1752, 재위1776-1800)가 죽고 난 이후에 바로 유배를 갑니다. 1791년 종교문제로 교난(敎難)이 있었으나 무관하다고 풀려납니다. 정조가 죽고 순조(1790, 재위1800-1834)가 즉위하자 바로 유배를 당합니다. 유배자들은 유배지에서 죽거나 풀려나서 권좌에 복귀하는데 다산은 그런 일 없습니다. 죽어야 할 만한 죄가 없었다면 유배 생활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지금의 새누리당 대표 이정현이나 우병우 같아서 서울이라는 공간에 같이 두고 싶지 않은 놈이었죠. 우병우가 박가 옆에 붙어 있을 때는 아무도 말 안 하였죠. 그러나 서울법대, 사법고시 동기생들이 아니라도 역겨운 놈이라는 걸 알죠. 요즘 서울 법대 출신 중에 다산 같은 놈 참 많죠.
간신은 군주의 말에 반대를 안 하죠. 군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반대하죠. 더구나 정조 같은 멍텅구리 군주에게는 반대할 것이 많아야 하죠. 다산은 최태민이나 최순실처럼 권력자 정조에게 찰싹 붙어 있었던 놈이죠. 다산이 유배를 간 것은 정조 임금 때가 아닙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2. 간신은 군주의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가. 당태종과 위징
먼저 군주가 하는 짓에 반대하는 것이 충신이라는 명제를 말하기로 하죠. 당태종(唐太宗 李世民599-649)과 위징(魏徵580-643)의 관계를 들죠. naver 검색에서 그대로 올리겠어요.
위징(魏徵)은 황태자 이건성(李建成589-626)의 시종관으로 있을 때 진왕 이세민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러 번 권유했다. 당태종(唐太宗 李世民599-649)이 이건성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다.
누군가가 위징이 이세민을 죽이려고 했다고 고발했다. 이세민은 위징을 불러다가 따져 물었다. “네놈은 어이하여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했느냐?” 그러자 위징은 당당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황태자께서 소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좌우 대신들은 위징이 죽을 말을 했다고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도리어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위징의 정직함을 높이 산 이세민은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했다.
626년에 태종이 장병을 징집할 때 한 대신이 18세가 안 되어도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한 남자라면 징집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조서를 작성했는데 위징이 그 조서를 하급 기관으로 내려 보내지 않았다. 태종이 여러 번 재촉했지만 위징은 말을 듣지 않고 조서를 발송하지 않았다. 노기충천한 태종은 위징을 불러 엄하게 꾸짖었다. “짐의 조서를 깔고 앉아 발송하지 않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느냐?” 그러자 위징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폐하의 조서에 찬성할 수 없사옵니다. 군대가 강대한가 강대하지 못한가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군사를 어떻게 훈련하고 어떻게 지휘하는가에 달려 있사옵니다. 이는 연못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사옵니다. 연못의 물을 다 없애면 한꺼번에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만 나중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18세가 안 된 남자들도 모두 징집하신다면 앞으로 어디 가서 병사를 충당하시겠습니까?”
태종은 위징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그러자 위징은 좀더 언성을 높였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으신 것이 벌써 몇 번째입니까? 이러시면 백성들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태종은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히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으며, 18세 이하의 남자는 징집하지 않는다는 조서를 새로 내렸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中華上下五千年, 馮國超 저, 이원길 옮김).
나. 한유(韓愈)의 쟁신론(諍臣論)
초학 시절에 고문진보를 읽을 때였다. 한유(韓愈768-824)의 쟁신론(諍臣論)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유가 살던 당나라 때에 고상한 행위로 이름을 얻은 양성(陽城736-805)을 자에게 추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게 하였다.
누군가 양성은 간의대부가 될 적에 양성은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고, 그 벼슬자리에 5년이나 있었으나 그의 덕행을 보면 여전히 초야에 있을 때와 같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부귀 때문에 그 마음을 바꿀 사람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양성을 이처럼 존경하였다.
한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다. <역경> 고괘(蠱卦)에 이르기를
임금은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일만 고상히 지킨다(不事王侯 高尙其事)는 말이 있소이다.
지금 陽城은 실로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소.
벼슬자리에 있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천하의 정치의 득실을 익히 들어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천자가 양성을 대우함이 융숭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일찍이 정치에 한 마디 언급도 없소이다. 남의 나라 일처럼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나 슬픔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오. 그의 벼슬에 대해 물어보면 간의대부라 하고 그의 녹봉에 대하여 물어보면 하대부의 녹을 받는다고 하면서, 정치에 대하여 물어보면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니, 올바른 도리를 가진 선비라면 정말 이럴 수가 있겠소이까.
또한 내가 듣자하니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의 직책을 다할 수 없을 때는 자리를 떠나야 하고 간언의 책임을 진 사람이 임금의 말에 반대하는 바가 없다면 떠나야 한다고 하니, 지금 陽城은 그 말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소이까.
그가 말해야 할 것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과 그가 말할 수 없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둘 다 옳지 않은 일이오이다.
陽城은 봉록을 위해서 벼슬할 것인가요. 벼슬은 가난하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는데 봉록을 위해 벼슬하는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오. 그렇다면 마땅히 ‘높은 자리는 사양하고 낮은 벼슬을 할 것이며 부귀는 사양하고 가난한 자리에 처신해야 할 것이니 문지기나 야경꾼 같은 것이 좋을 것이오(MZ10050001孟子曰, “仕非爲貧也, 而有時乎爲貧, 娶妻非爲養也, 而有時乎爲養. MZ10050002爲貧者, 辭尊居卑, 辭富居貧. 辭尊居卑, 辭富居貧, 惡乎宜乎? 抱關擊柝. - <맹자> 인용문임).
한유는 임금의 말에 반대하지 않는 대부는 문지기나 야경꾼이 되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의 박가 정권에 유승민 의원이 옳지 않은 결정에 반대를 하니 말하기를 자기 정치한다고 말하였다. 한유의 쟁신론과 반대로 이해하는 거다. 그리고 언제든지 옳지 않다고 말해야 할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배신자라고 몰아세우면서 자신들은 진박이며 비박은 떠나라 하였다.
반대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정조는 어떤 임금이었으며 다산은 정조의 어떤 정책에도 반대하지 않았음을 기억해 두고 따지어야 한다.
다. 정조(正祖)는 현군인가 암군인가
정조(正祖1752, 재위1776-1800)는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현군으로 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정조의 정책을 살펴봅니다.
1. 탕평책;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閣臣)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抄啓文臣) 강제(講製)도 주관하였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갔다.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정조 [正祖] (두산백과). →
규장각 제도를 나쁘게 본다면 원로 신하들 대신에 말 잘 듣는 신진 관료를 뽑는 것이므로 왕권강화의 하나이니 호오, 선악을 평가하기 어렵다.
정조는 숙종·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784년에 지은 《황극편(皇極編)》을 통해 주자·율곡의 시대에는 붕당정치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여 전자가 우세한 정치를 꾀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각 붕당 안에 군자·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두산백과).
→ 탕평책은 왕권 강화의 일환이며, 사색당정이 그치건 말건 위민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2. 관리 직접 뽑기; 인재의 양성을 위해서는 초계문신 문강(文講), 선전관 무강(武講) 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성균관 월과(月課:월별 수강과목 지정)제도를 시행하고, 유생들이 관내에 상주하면서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사찰 승려들의 회식제도를 도입하여 식당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도에서 행해지는 소과(小科:흔히 道科라고 불렸다)도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했다. 빈흥과는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이것을 규장각신이 가지고 현지에 내려가 과장에서 개봉·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하였다(두산백과).
→ 정조를 폭군이다. 관리 임명에 임금은 도외시되어야 옳다. 그래서 과거제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과거 시험에 급제한 인재들은 임금에게 충성하지만 비판적 시각과 자긍심을 갖게 된다. 정조처럼 뽑으면 멀고먼 안동에서 과거 급제한 퇴계 선생 같은 인물은 국정에 참여할 방법이 없게 된다. 왕이 선호하는 인물만 뽑게 되면 간신만 남게 된다. 다산 정약용이 이런 방식의 시험에 여러 번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박가가 최순실의 말을 듣고 자신이 선호하는 인물만 뽑은 것과 다르지 않다.
정조시기에 관리가 되려면 서울 살아야 되며, 정조의 측근에서 경연을 들을 수 있는 명문가의 자녀여야 한다. 다산은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라 궁중에 요즘 말로 문서촉탁관으로 들어가서 왕에게 얼굴을 익히고 승승장구한다. 요새 말로 정조‘s Kids 중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 높은 벼슬을 내리기 미안하였던지 여러 번의 정조‘s Kids의 경시대회 후에 정식 과거에 나가라 한다. 2등을 하였는데 정조가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건 무언가. 문제까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면 온 나라의 선비가 모두 정조의 신하인데 왜 아쉬워하는가. 다산도 아들에게 서울에서 멀리 벗어나지 말라고 한다.
3. 백성 만나기;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上言)·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일성록(日省錄)》과 실록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두산백과).
→ 많은 백성을 만나서 호소를 듣고 처리하여 한 바는 현군으로서의 훌륭함이다.
4. 화성축조;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園所)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수원부는 화성(華城)을 새로 쌓아 옮기고, 정약용에게 수원성 축성에 필요한 기술서인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짓게하였다.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두산백과).
→ 이명박의 4대강 사업과 같은 것이죠. 왕이라 하나 개인의 효를 위해서 성을 쌓는다는 것은 국가적 낭비요 허례허식이죠. 화성 축조가 끝난 후 다산이 시를 지어서 바치는데 정조를 요순에 비교하고 정조의 효를 상찬합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아들이 효를 할 수는 있으나 국가적으로 선양할 인물은 아니었어요. 미치광이 살인자였죠. 할아버지 영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철부지라고 해야 할까요. 아부에 도가 튼 놈이 다산이죠.
5. 저술과 간행;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볼 수 있으니 유보해야겠어요. 그렇지만 『무예도보통지』를 남긴 것은 암담하군요.
임진왜란(1892-1598) 때에 일본에 밀린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으나 신식 무기 조총이 없었던 탓이 가장 크죠. 그런데 정조(正祖1752, 재위1776-1800)는 대략 200년 나중 사람이죠. 총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요. 정조는 멍청한 거죠. 정조 사후 100년 후 1910년에 조선이 망하죠. 이런 임금을 훌륭하다고 말해도 좋을까요.
정조가 위민을 위해서 백성을 많이 만난 것은 긍정적으로 본다손 치더라도 국방에는 소홀히 할 수가 없죠. 그런데 당시에 양반들이 사노비를 많이 소유하여 국가가 필요한 세금도 병력 자원도 없었어요. 사노비들은 병역의 의무에서 면제되었으며,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어요. 당시의 상업자본이 발흥한다고 하였는데 양반들의 사노비를 해방하여 양민으로 환원시켰더라면 상업자본이 발흥할 수 있었을까요. 빈부격차에 의한 상업자본의 흥기, 이게 말이 돼요. 조선의 빈부격차는 끝 간 데까지 간 것이 아닐까요.
왕이라면 첫 번째 책무가 외적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키는 것인데 정조는 무엇을 했었나요. 자신이 직접 과거를 보면서까지 뽑은 신진 관료들은 조선을 개혁할 혁명 동지였어야 하는데 무엇을 하였나요. 다산 같은 놈은 조야에 흘러넘치던 여론이었던 노비해방에 반대한 놈이죠.
정조는 세종이나 숙종처럼 북변을 개척하여 영토를 확장하지 못하였다. 10만 양병설이란 10만 명의 병력 자원이 있을 때 가능하다. 양반들이 양민의 9배에 가까운 사노비를 소유한 신분구조를 개혁하지 못하였다. 100년 후 일본과 싸울 수 있는 병력 확보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일본과 싸워 이기려면 산업화에 성공해야 하며, 산업화는 이루지 못하더라도 총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총은 만들지 않고 무예도보통지라는 칼춤 춘 정조가 왜 현군인가.
다산은 암군 정조에게 단 한 번의 반대도 하지 않은 자이다. 간신인가 충신인가.
정조가 세종을 제외하고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보는 견해가 옳다고 치더라도 다산이 정조의 어떤 시책에는 반대해야 하며, 나쁜 임금일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다 스스로 떠나야 합니다.
다산이 인식하는 세계와 치유방법
가. 현상에 분노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말하지 않는다.
다산은 비분강개조의 시를 남겼다. 이는 다산을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김구나 안중근도 비분강개 하지만, 이완용 전두환 뉴라이트도 한다.
그럼에도 다산은 이런 시를 썼다.
애절양 哀絶陽 (양인 남편이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것을 슬퍼하며) - 다산 정약용 (丁若鏞 )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는 통곡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출정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다네
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은 지났으며 갓난애는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조자손(祖子孫) 삼대 이름 모두 군적에 실렸네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里正咆哮牛去皁(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아이 낳은 죄로 고생길에 드는 걸 한스러워 그랬다네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閩囝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민나라 자식이 환관이 되려고 거세함도 슬픈 일이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騸馬豶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불깐 말 불깐 돼지 그도 서럽다 할 것인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대 이어갈 백성들이야 말을 더해 무엇하리오
豪家終世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 부잣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粒米寸帛無所損(립미촌백무소손)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객창에서 우두커니 『시경』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
번역 ; 한국고전번역원, 양홍렬의 번역을 참조하여 가다듬음.
다산의 애민 정신을 여러분들이 믿는가.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군역의 부담을 지게 될 운명을 한탄한다. 아들을 낳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양물을 잘라 버렸다는 소문을 듣는다. 다산은 양인의 참상에 슬퍼한다. 비통한 현실비판의 시를 읊지만 자신의 집에 있는 노비들 해방에는 반대한다. 10에 9이 노비요, 10에 1명이 양민이라 하였다. 노비를 해방하면 양인이 많아지고 군역의 부담이 가벼워진다. 근본적 원인을 세움에는 반대한 다산의 우국지정 말이다.
나. 다산의 맨 얼굴 - 노비제 폐지를 반대하였다
조선의 계급은 양반, 중인, 양인, 천민(노비)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의 군역(병역 의무)은 양인(良人)이 담담하였다. 노비들은 병역 의무가 없었다. 양반들은 노비들을 군역에 종사케 하지 않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부려 먹을 수 있었다. 노비가 많아지면 군역을 담당할 양인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양반들은 양인을 윽박질러 노비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를 압량위천(壓良爲賤)이라 한다. 이에 세종대왕은 모두 돌려보내라는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양반은 노비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노비는 군역을 담당하지도 군포(국방 관련 세금)도 내지 않았다. 노비가 많아지면 양민이 줄어든다. 조선의 병역 체계는 큰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양민들은 군역을 감당치 못하여 도망을 가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군역에 종사하지 못하는 양인에게는 군포라는 세금을 바치게 하였다. 당시의 양반들은 꿩 먹고 알 먹는 제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노비를 줄이고 양민을 늘리어야 한다는 상소문이 조선 500년 내내 이어졌다. 노비를 줄이는 방법이 무엇인가. 당장에 노비를 모두 해방시킬 수 없으므로 노비의 자식이 노비가 되지 못하게 하여 결국에는 노비를 모두 없애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다. 다산처럼 99칸을 소유한 벌족은 노비의 노동력으로 재산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므로 노비를 줄이거나 폐지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였다.
21세기 한국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다산이 어느 쪽을 편들었겠는가. 미안하게도 다산은 자기 이익에 철저한 인간형이었다. 그는 노비 해방을 반대하는 정도를 넘어 노비 세습이 완화된 제도를 고치어서 노비를 늘리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혹자는 다산이 군정의 문란을 비판하는 한시 애절양(哀絶陽)을 짓지 않았는가. 그는 애민 사상의 화신 아니겠는가고?! 역사적으로 다산 같은 인간형은 많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70살의 간디는 남들에게는 금욕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10대 소녀와 sex를 즐겼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되겠다고 함은 공직을 맡겠다는 것이다. 병역은 공적인 일이다. 병역을 기피하거나 아들의 병역은 불법으로 면제 조치하는 사례를 많이 보지 않았는가. 그런 자는 대개 대쪽, 청렴결백의 탈을 쓰고 애국심을 강조한다.
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2005-2013년 재임)는 잦은 자위로 손목골절상을 당했다. 그의 나이 84세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쇠퇴와 세속화에 맞서 교회의 전통적 가치 회복을 주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 성향으로 가톨릭의 현대화를 가로막았다는 교황이었다. 이는 인간적 육신과 관련된 일이므로 이해할 수 있다. 교황청에서는 손목이 부러진 골절상에 대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심각한 부상이 아니라고 했다. 우습다만 교황의 정력에 축하를 보낸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썼다. 진보적 가치의 화신이다. 말끝마다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다산이 노비제 존속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 이럴 수 없다.
다산의 글은 목민심서(牧民心書 卷八 禮典六條)에 나온다. 한국고전종합에는 한문 원문만 나오고 번역본이 나오지 않는다. 서울대학교의 논술문제에도 이를 출제하였으므로 이를 통해 확인해 보자. 2010학년도 정시모집 인문계열 논술고사에서다. 지금까지 번역하여 출간된 『목민심서』에서 다산이 노비가 많아져야 한다고 주장한 글은 삭제해 버리고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다.
http://admission.snu.ac.kr/file_down/2010nonsul_hum.pdf
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3번 문항 제시문 (나), (다)를 찾아보라.
유형원의 주장 ; 노비제를 폐지하자
(나)
……
지금 당장 변통할 수 있는 방법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한결같이 고루 적용하는 것이다. 양녀(良女) 소생이면 양인이 되게 함을 이름이다. [중략] 왕도(王道)가 행해져서 여러 가지 제도가 바로 서고 편루(偏陋)한 풍속이 제거되면 노비법이 반드시 혁파될 것은 명백하다. [중략] 우리나라에서는 노비법이 오래되고 그것이 풍속을 이루어 사대부들이 모두노비에 의지하여 집을 유지하는 까닭에 갑자기 개혁하기 어렵다. 반드시 풍속이 점점 변하고 상하 모두 살림이 넉넉해지고 고공(雇工: 머슴)이 점차 늘어난 후에야 노비제를 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노비제를 폐지한다는 것은 갑자기 현재의 노비를 모두 폐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노비 신분을 당대에 그치게 하고 대대로 노비가 되게 하는 법을 폐지하자는 것이다.
(유형원 『반계수록(磻溪隨錄)』, 1670년)
다산의 주장 ; 노비제를 폐지하면 안 된다. 노비가 더 많아지도록 노비법을 바꾸라
(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군신(君臣)과 상하(上下)는 예가 아니면 그 질서가 정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성인(聖人)이 개물성무(開物成務: 만물의 뜻을 밝혀서 인간의 질서를 마련함)의 문채(文彩)를 만들어 귀천(貴賤)을 표시하였으니, 소위 황제(黃帝)·요(堯)·순(舜)이 의상(衣裳)을 드리우자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하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공복(公服)의 문채에 등급이 있고 깃발의 술에도 등급이 있으며 수레에도 등급이 있으며 지붕의 골에도 등급이 있으며 제사에도 등급이 있어서 그 질서가 정연하여 상하의 등급이 명백하였으니, 이것이 성인이 세상을 통솔하고 백성을 안정시킨 대권(大權)이다. 우리나라 습속에도 변동이 자못 엄하여 상하가 오로지 각각 그 분수를 지켰다. 근세 이후로 작록(爵祿)이 한쪽으로 치우쳐 귀족이 쇠잔하자, 호리호맹(豪吏豪甿: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아전과 백성)이 틈을 타서 기세를 부려서 이들의 집과 말치장의 호사스러움과 의복과 음식의 사치스러움이 모두 법도를 넘어, 아래가 위를 능멸하고 위는 시들게 되어 다시 등급이 없어졌다. 장차 어찌 사회를 유지 결합하여 그 원기를 북돋아 그 혈맥을 통하게 하겠는가. 귀천을 밝히고 지위의 서열을 구별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무(急務)이다. [중략] 옹정(雍正) 신해년(영조 7년, 1731년) 이후로 무릇 사노(私奴)의 양인(良人) 신분 처(妻) 소생은 모두 양인 신분을 따르게 되었다. 그 이후로 상층은 약해지고 하층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들의 뜻이 흩어져서 통솔하고 이끌 수 없게 되었다. [중략] 신해년 이후 귀족은 날로 시들어 가고 천민은 날로 횡포해져서 상하의 질서가 문란하여 교령(敎令)이 행해지지 않으니, 한번 변란이 일어나면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스러지는 형세를 능히 막지 못할 것이다. 군왕은 이미 멀리 떨어져 있고 수령은 나그네와 같아서, 마을 이웃 간에 어리석은 무리를 통솔하고 이끌 방도가 없으면 어찌 어지럽지 않겠으며 또 무엇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노비법을 복구하지 않으면 어지러움으로 망하는 것을 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1818년)
이 글에서 『무릇 사노(私奴)의 양인(良人) 신분 처(妻) 소생은 모두 양인 신분을 따르게 되었다』는 종모법(種母法)이라 한다. 아버지가 노비, 어머니가 양인이면 태어난 자식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 되는 법이다. 다산의 주장은 아버지가 노비이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어야 하고, 어머니가 노비라면 아버지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게 하자는 것이다. 다산의 주장대로 하면 노비의 숫자가 늘어나지만 유형원의 주장대로 종모법을 행하면 노비의 숫자가 줄어든다. 다산은 요, 순, 『예기』를 들먹이면서 종모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왜일까. 자신의 집에 노비가 많으니까. 임금을 주지 않고 착취할 수 있으니까. 다산에게는 군역을 담당할 인원이 부족하다는 국가적 재앙에는 관심이 없다. 다산은 오직 자신 집안의 노비를 많이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렇게 노비를 잘 유지하더니 노비 1000여 명의 가산을 잘 유지하였는지 『여유당전서』라는 방대한 책을 일제강점기 1930년대에 출간한다. 만주사변과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조선, 일본, 대륙 할 것없이 어려울 때였다. 의열단 등의 광복군 활동에 전 재산을 투자할 때였다. 간신 또는 매국노 집안의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어떤 다산 연구가는 이런 견해가 일부 학자의 견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속으로 웃긴다 여기었다.
서울대학교 논술 문제는 한 사람이 내지 않는다. 일부 학자의 견해는 입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통상 문제를 내는 시점으로 수십 년 전의 연구 성과가 쌓인 후에 문제로 나온다. 이 논술 문제는 다산 우상화 풍조가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서울대 교수들의 함의가 합의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산 연구가들을 경계하라. 들은 얘기다. 직접 들었지만 수사가 진행되면 좀체 입을 열지 않겠다.
어떤 서예가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전시회를 열고 싶었다. 수소문하였는데 정부 관계자가 다산의 글을 쓰면 지원을 하겠다는 거였다. 그는 내가 듣기로 2010 무렵 3억을 지원 받았다고 하였다. 매국노를 회억하는 글씨를 쓰면 돈이 쏟아진다. 그대가 인테넷으로 조사하여 다산학회에 전화를 걸어보라. 대부분 전화를 받는다. 만약 다른 이름의 학회가 있어 전화를 해 보라 아마도 착신이 어디론가 연락이 되거나 통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산 학회는 지방자치단체의 눈 먼 동이 빼곡히 지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단체가 전국적으로 부지기수이다. 노비 해방에 반대하던 바로 저런 놈 다산 정약용을 위해서 예산이 물 쓰듯이 펑펑 새나간다.
아래로 더 이어지는 글은 강의하는 시간에 프린트물로 제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