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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2005년) 11월초 지중해 연안 3개국 국외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지 2주일도 안되어 나는 또 다시 국외여행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미독립정신을 계승, 실천하고자 하는 민족운동단체인 3.1동지회 김해지부의 뜻있는 20여명의 회원들은 안중근의사의 독립정신을 오늘에 되새기며 조국통일의 길에 함께 하고 싶어 11월 26일부터 3박4일 동안 중국 여순에 있는 안중근의사 유적지를 답사하기로 한 것이다.
2005. 11. 26(토) 이른 아침 관광버스로 김해를 출발한 우리는 중국 대련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인천항으로 이동하였다. 오후 3시경 인천항국제여객터미널에 들어서니 중국으로 향하는 많은 보따리 상인들이 배에 실을 커다란 짐보따리를 꾸리느라 대합실을 한바탕 전쟁터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서울 동대문시장 등지에서 구입한 듯한 갖가지 종류의 상품보따리들이 즐비하였는데 그들과 다른 줄에 서서 입항수속을 마친 우리 일행은 처음 보는 이 광경이 신기하여 고개를 돌려 자꾸만 처다보았다. 그들과 같이 소상인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역도 연간 규모로는 엄청나리라 추측이 되었다.
사진 1) 출발전 인천항 여객터미널 앞에서
대합실에서 1시간여를 기다린 후 드디어 중국 대련행 배에 올랐는데 오후 5시에 인천을 출발한 이 배는 다음날 아침 10시에 대련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17시간의 긴 항해를 가진다고 하였다. 시간이 되자 우리를 실은 배는 뱃고동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경쾌한 화음을 이루어내며 황해바다 위를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인천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위 경계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도달하였는데 어둠이 짙게 깔려 사방을 둘러보아도 불빛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진 2) 배안에서 인천항을 바라보며
우리 일행은 선내 휴게실에 모여 이번 답사의 의미에 대해 토론을 하며 조국통일의 결의를 다졌다. 중국 하얼빈에서 동양평화를 외치며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하고 대한 남아의 기상을 세계에 알린 안중근의사. 그 분이 세우신 민족정기는 어디로 갔는지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하고 조국은 둘로 분단된 채 아직도 아픔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은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 3) 선상 토론
배가 크기 때문에 멀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라는 말만 믿고 아무 대책 없이 그냥 있었는데 몇 시간이 지나자 배의 흔들림이 느껴지면서 속이 울렁이기 시작하였다. 안되겠다 싶어 선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비상용 멀미약을 한 알 얻어먹고는 선실 2층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였다. 일기가 비교적 괜찮고 파도가 잔잔하여 그런대로 큰 불편 없이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사진 4) 선실의 2층침대
다음날(27일) 아침, 선실복도의 술렁이는 소리에 잠이 깨어 나와 보니 어느덧 날이 새어 드문드문 섬들이 보였다. 붉은색 오성 깃발들을 흩날리며 바다 위를 항해하는 낮선 배들은 우리가 이제 중국 영내로 들어 왔음을 알려주었다.
사진 5) 중국 근해의 섬
대련항에 도착할 무렵 선내식으로 아침을 먹고 입국수속을 위해 잠시 선상에서 대기하였다. 중국은 사회주의국가이고 우리보다 후진국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도시가 빈약할 줄 알았는데 선상에서 바라본 대련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여 놀라웠다. 대련은 인구 6백만의 도시이며 경제특구로서 중국 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도시답게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고 중간 중간 보이는 공장들의 규모도 상당히 커 보였다.
사진 6) 도착 후 선상에서 대련항을 배경으로
사진 7) 선상에서 바라본 대련항의 모습
잠시 뒤 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마친 다음 현지 조선족 가이드의 안내로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랐다. 우리일행이 탄 버스는 대련시내를 빠져나와 해안가를 달렸는데 창가에 비쳐지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여느 해안을 돌아보는 듯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이곳에서는 교통수단으로 중국 내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현지 가이드는 이것이 대련에서 만 볼 수 있는 경제특구의 특색이라고 자랑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가용이나 택시, 버스로 이동을 한다는 것이다.
사진 8) 대련항 여객터미널 앞에서
이곳은 계절풍 대륙성 기후에 속하면서도 해양성 기후의 특징을 가져 날씨가 따뜻하고 사계절이 비교적 뚜렷하여 중국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즐기러 온다고 하였다. 삼면이 바다에 접한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는 이곳을 조차하여 “따리니”라고 명명했다고 하는데 “따리니”는 멀고먼 도시란 뜻이라고 한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러시아 풍 건물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그 안쪽에 건축한 일본식 건물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이채로운 광경을 연출하였다.
이 처럼 대련은 열강들의 침략 속에 아픈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며 한편 요동반도의 끝 부분으로서 그 옛날 고구려의 땅이기도 하다. 대련시 여순구는 군사전략지구로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일본은 203고지에서 2천명의 전사자를 내고 당시 여순 인구의 2/3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곳 주민들은 아직도 일본인에 대한 증오가 가시지 않아 여기서는 일본 제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가이드는 말하였다.
여순감옥으로 가기 전에 그 길목에 위치한 대련시 외곽의 노호탄공원(
사진 9) 노호탄 공원
광장의 가운데는 노호탄 공원의 상징이 있는데 세계최대 규모로 2천톤의 화강암으로 조각한 6마리의 호랑이가 바다를 향해 표호하면서 무리를 지어 서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곳에는 인어를 습격하는 호랑이를 한 청년이 물리치고 인어를 구한 후에 자신은 결국 목숨을 거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호랑이조각상 너머로 산허리를 완전히 감싼 새장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관광객을 위한 세계최대의 새장이라고 하였다.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산을 통째로 감싸 새장을 만들고 관광수입을 얻는 중국인들의 기지가 새삼 감탄스러웠다.
사진 10) 노호탄 공원의 호랑이 조각상
사진 11) 호랑이상 우측으로 새장 그물이 보인다.
개방을 기치로 무섭게 발전하는 중국이지만 다른 한편 재래의 흔적도 많이 보였으며 이곳에서 난장을 펼쳐 관광객을 상대로 별 볼품없는 물건들을 팔기위해 호객행위를 하는 중국인들의 남루한 옷차림새 등은 대련시내를 지나오면서 보았던 벤츠를 타고 다니는 갑부들과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이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발생케 하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20km에 이르는 해안도로를 지나오면서 잘 가꾸어진 유럽형 별장들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첫눈에도 계획적으로 만든 별장지구임을 알 수 있었다. 대다수가 중국의 부호들이나 외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여름 한 철을 사용하고 비워 둔다고 한다. 아직도 중국에는 땅은 국가가 소유하고 있어 그 땅의 사용권만을 사고 팔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별장도 건물만 소유할 뿐이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국가의 소유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최근에 미국이 북경대사관을 지으면서 140년간 사용권을 부여 받았다고 한다.
해안도로의 끝에서 만난 산 정상의 성곽은 눈을 의심케 했다. 마치 중세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의 이름은 다름 아닌 조개박물관이라고 하였다. 박물관 하나를 지어도 멋들어지게 짓는 이곳 시 행정이 부러웠는데 일정이 촉박한 관계로 방문하지 못하는 것이 참 아쉬웠다. 조개박물관 밑에 위치한 고층아파트는 이곳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로 평당 1,500만원을 넘는다는 말에 이제 중국이라는 나라는 결코 우리가 만만히 볼 수 없는 경제적 상황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12) 조개박물관
사진 13) 초고층 고급아파트
조개박물관과 고층아파트가 바라 보이는 곳에 대련 도시건설 100주년 기념으로 인민폐 7억원(한화 약 910억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바다를 메워 만든 성해광장(星海廣場)이 있었다. 바다와 접한 성해광장 내에는 온갖 꽃들로 펼쳐진 정원이 있는데 그 크기만 15만 평방미터라니 광장 전체는 얼마나 큰지 능히 짐작이 될 것이다. 해안가와 맞닿은 곳을 배경으로 설치된 한 권의 책을 펼쳐놓은 형상을 한 백년기념비는 후손들에게 피눈물 나는 대련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광장관람용 마차를 타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대련의 10대 풍경중 하나인 성해광장의 멋에 푹 빠져 들었다.
사진 14) 성해광장 책 펼침 형상 위에서
사진 15) 책 형상 위에서 바라본 성해광장
이번 여행의 주된 목표인 여순감옥 방문 일정이 오후로 조정된 관계로 근대 초 서구열강들이 동양에서 각축전을 벌일 때 처음 대련을 차지했던 러시아인들이 만들었다는 러시안 짝퉁거리를 다음 행선지로 잡았다. 대로를 따라 쭉 뻗은 거리의 양 옆은 러시아식 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 앞에는 중국 상인들이 갖가지 물건을 진열해 놓고 손님들을 모으고 있었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행인들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고 한산하였다. 짝퉁시장이라는 이름이 주듯 중국은 세계 짝퉁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이곳의 상인들은 이 제품이 명품인양 설명에 열을 올렸다. 몇 군데 들려 진열된 물건을 구경하면서 지난 학기 인제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배운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상인들과 가격흥정을 해보았는데 제법 말이 잘 통하여 흐뭇하였다.
사진 16) 러시안 짝퉁거리
이곳에서 약 1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근처 식당에서 중국식 점심을 먹은 다음 드디어 진짜 목적지인 여순으로 향했다. 여순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현지 가이드는 몇가지 꼭 지켜야할 주의사항을 당부 하였다. 여순은 군사도시로 외국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이 시설은 대련시나 여순구의 관할이 아니라 우리로 치면 국가정보원 격인 중국 사회안전부 관할이라 만일 문제가 생기면 억류될 수가 있는데 대련에서는 누구의 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국인도 외국인이라 입장이 불가하지만 중국지인을 통해 다리를 놓아 우리에게는 특별히 볼 수 있도록 했으니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를 해 달라고 하였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붉은색 벽돌로 길게 둘러싸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저 건물이 오늘 목적지인 여순감옥임을 알 수 있었다. 청일전쟁으로 요동지방을 차지한 일본을 삼국간섭으로 몰아내고 이 지역을 조차한 러시아가 1902년 이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러시아군의 병영과 야전병원으로 사용하였는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이곳을 재점령한 후 감옥을 확대 건축하여 1907년에 완공하고 ‘관동도독부감옥서’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감옥 전체가 푸른색의 시멘트 건물과 붉은 벽돌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푸른색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벽돌건물은 일본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전체의 2/3정도가 붉은색 건물로 되어 있었다. 유신말기 반독재투쟁으로 당시 서대문구치소에 구금된바 있는 이광희 지부장은 감옥 전체를 둘러본 후 붉은 벽돌건물은 지금의 서울 서대문감옥공원에 있는 일제시대의 감옥과 색깔과 내부구조가 꼭 같다고 증언하며 지난날의 생각에 눈시울을 적셨다.
사진 17) 밖에서 보이는 여순감옥건물의 일부
이 감옥을 관람할 수 있도록 힘쓴 사람으로 보이는 또 다른 안내자는 다시 한 번 우리들에게 주의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먼저 일행 중 한복을 입은 사람은 입장이 불가하니 겉옷을 입도록 하고 관람 중 한국말을 많이 하지 말 것과 사진은 절대로 찍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곳은 지난날 사상범, 정치범, 공안관계로 체포된 사람들을 수감하고 사형을 집행했던 곳인데 항일운동을 하였던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공산주의 활동을 하였던 중국인 등이 많이 수감되어 고초를 당했기 때문에 중국은 이 감옥을 1971년부터 역사전시관으로 바꾸어서 관리하고 있으며 1988년에는 '전국중점보호단위'로 지정하였고, 1994년에 대련시정부가 ‘애국주의교육기지’로 지정하여 한 해에 약60여만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버스가 여순감옥 광장에 도착하자 일렬로 내려 매표를 한 다음 가이드의 안내로 긴장된 마음으로 감옥 안으로 입장 하였다. 입구에는 제복을 입은 중국 남녀 공안원 여러 명이 지키고 서있었다. 역사책으로만 보아서 알고있던 이곳을 직접방문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감옥의 모습은 1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비교적 잘 보존 된 듯했다. 감옥 입구에서부터는 한명의 중국 여자 공안원이 우리를 안내하였다.
사진 18) 여순감옥앞 광장
사진 19) 여순감옥 입구, ‘旅順日俄監獄舊址’‘(여순의 일본러시아 옛 감옥터)
입구의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음침하고 무거운 감옥 특유의 분위기를 느꼈다. 먼저 감옥 전체 구조를 작은 모형으로 유리관에 전시해 놓은 방에서 개괄적인 설명을 들었는데 감옥의 크기는 대략 2만 7천 5백 평방미터로 감방 253개와 지하감방 4개 그리고 15개의 부설공장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2,000명을 수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감방으로 안내되어 맨 처음 들어간 ‘몸수색실’에는 7, 80년전 당시에 사용했던 낡고 푸른 죄수복이 수십 벌 걸려 있어서 당시의 살벌하고 엄혹한 분위기를 더욱 실감하게 하였는데, 수형자들이 강제노역차 부속공장을 출입할 때 엄동설한에도 여기에서 모든 옷을 벗고 간수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감방들을 관람하는 중 앞서가는 일행들이 안내 공안원을 멀찍이 따돌리는 틈을 타서 일부러 뒤처진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숙연한 마음으로 역사적 증거물에 대해 사진을 촬영하였다.
82칸 2층으로 되어 있는 서쪽감방에는 2층에서도 아래층을 감시할 수 있도록 복도의 중앙에 긴 쇠창살로 구멍이 나 있었다. 일반 감방의 모습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영화에서 보듯 감방 입구에는 수감자가 누구인지 나타내는 나무패쪽이 붙어 있고 문 밑에는 음식을 날랐을 작은 구멍이 나 있었으며 감방 안 마루바닥에는 엷은 모포가 깔려있고 직사각형으로 구멍을 낸 변기통과 식수통이 옆에 나란히 있었다.
지난날 2평도 채 되지 않는 이곳에서 추운 겨울날이면 감방 위쪽에 사각형으로 나있는 쇠창살사이로 들어오는 살을 에는 비바람과 눈보라에 고통을 당했을 애국지사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영하의 그 차가운 겨울을 견디면서 애국지사들은 꺼져가는 생명을 다하여 조국광복을 외쳤을 것이다. 이제는 녹이 슬어 검붉게 변한 쇠창살을 바라보며 조국이 독립되어 발전된 오늘에 사는 우리들은 그것이 바로 이 분들의 피눈물과 고난의 덕분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마음을 다졌다.
사진 20) 감방복도에서
복도를 돌아서니 밖으로 향하는 문이 나있고 문을 나서자 벽면에 낯익은 글이 눈에 번쩍 들어 왔다. 바로 안중근의사가 수형되었던 감방의 안내문이었다. 가슴이 뭉클하였다. 동판으로 된 안내문에는 한글과 중국어 그리고 영어와 일본어로 안중근 의사의 역사적 거사에 대한 기록과 함께 안의사의 사진도 새겨져 있었다. 안의사께서는 거사 후 체포되어 취조 받고 수감되는 과정에서 의연한 자세로 고매한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당당하게 피력하여 일본인조차도 안의사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안중근의사의 방은 원형그대로 잘 보존이 되어있었다. 문이 잠겨져있어 뿌연 창을 손으로 닦아 안을 들여다보니 작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서예를 위해 놓여 진 긴 탁자, 몇 가지 책, 벽면에 걸려있는 글과 거기에 찍힌 안의사의 손바닥 자국을 볼 수 있었다. 안의사를 내심 존경하게 된 일본인 감옥서장은 안중근의사를 일반 흉악범이나 정치범과는 달리 그의 애국적 행위를 다소나마 인정을 해주어 중요한 인사로 분류하면서 일반 감방의 두 배 정도의 크기의 감방에 침대와 책상 등을 제공하여 어느 정도 대우를 해 주었다고 한다.
사진 22)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
바깥을 돌아 동쪽감방으로 건너가니 그 중심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으며 정면과 양 옆 감방을 바라볼 수 있는 Y형 구조의 복도가 나타났다. 한 자리에서 감방의 모든 움직임을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한 일본인의 치밀한 계산에 혀를 내둘렀다. 중앙에 서서 눈을 돌리니 모든 감방의 문이 훤히 들어 왔다.
어둠침침한 복도를 지나니 한눈에 보기에도 소름 끼치는 고문도구들이 가득한 고문실이 나타났다. 사람을 큰 대(大)자로 엎드려 눕게 하여놓고 매질을 하는 도구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섬찟하게 하였다. 옆에는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녹슨 쇠사슬이 나무로 된 선반 밑으로 놓여 있고 갖가지 쇠로 된 형벌 도구가 전시 되어 있었다.
사진 23) 고문실
계속이어지는 어둡고 칙칙한 감방 복도를 지나가던 중 다시 눈에 띄는 글이 나타났다. 신채호 선생이 갇혔던 감방 안내문이었다. 일필휘지의 문필로 평생 조선의 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 신채호”선생이 수감되고 목숨을 다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음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언저리에서 형언할 수 없는 울분이 솟아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해 민족사관을 수립하여 당시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뒤에는 민중이 주체가 된 폭력혁명의 의한 독립을 쟁취해야 함을 주장하였던 단재, 선생은 몸소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면서 활동하시다가 1928년 지룽항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바로 이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조국 광복의 밝은 날을 보지 못하고 1936년 2월21일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옥사하여 순국하셨다. 그 방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있노라니 너무도 쓰리고 슬픈 감회가 가슴을 적셨다.
사진 24) 신채호선생이 구금되었던 감방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겨 다시 바깥으로 나와 건물 뒤로 돌아서 가보니 철조망이 길게 놓여 진 형무소 붉은 담벼락을 따라 작은 언덕이 보였다. 이 길은 죽음의 길로서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찌푸린 날씨는 결국 진눈개비를 날리면서 그 길을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머리에 망태기가 씌워지고 포승줄로 묶인 채 걸어갔을 그 길을 그 때 그 순간의 비애를 느끼며 걸어올라 갔다.
사진 25) 사형장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언덕 아래로는 이름 없는 들풀이 증인이라도 서는 듯 제각기 모습을 드러내며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언덕위에 올라서니 수많은 애국지사와 항일운동가가 처형당했던 사형집행실이 나타났다. 이 건물은 1934년에 신설된 곳으로서 안중근의사가 사형당한 곳은 아니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에는 둥근 밧줄이 매달려있고 그 아래 바닥에는 사각의 구멍이 있었으며 다시 그 밑 지하에는 목이 매달려 떨어지면 시신이 다리가 구부러진 채로 쏙 들어갈 수 있는 항아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공안원의 제지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싸늘한 기운이 돌고 분위기가 너무 섬찟하여 여기서는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사진 26) 어딘지 알 수 없음(사형집행실 지하에서 위를 보고 찍은 사진 같음)
그곳을 지나 감옥의 각종 역사적 유품을 전시해놓은 전시장 건물을 돌아서니 드디어 안중근의사께서 사형을 당해 돌아가신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 한 모퉁이에는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사형실”이라고 쓰인 동판이 붙어있었다.
사진 27)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사형실
안의사의 순국에는 어머니의 초인적인 거룩한 행동의 이야기가 뒤따르고 있다. 안의사가 사형을 언도받은 후 항소하여 또 재판을 받으려하자, 안의사의 어머니는 면회하는 자리에서 “네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에 부담을 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항소를 하는 것은 일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니 항소를 포기하고 조선의 남아답게 의롭게 죽어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면회 후 안의사는 즉각 항소를 포기하고 어머니가 주신 흰 모시한복을 입고 1910년 3월 26일에 이곳에서 순국하셨다.
사진 28)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사형실 앞
잠시 눈을 감고 안중근의사의 혼과 만남을 가져본다. 아! 아! 슬픔에 목이 메고 눈물이 가슴을 타고 흐른다. 이 땅의 가장 위대한 애국지사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도 통곡할 일인데 광복 후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까지도 고인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그 시신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조차 확실히 알 수 없다니 이보다 더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루 빨리 남북이 함께 선생의 유해를 발굴하여 조국의 품으로 모셔 와야 할 것이다.
이제 여순감옥의 마지막 코스로 들어섰다. 발굴된 유해들을 합장해놓은 묘소가 있는 곳인데 형장에서 죽음을 당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어린애 한명 들어 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대나무 망태기에 넣어져 땅에 묻혀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곳에서만 1945년 패전 때까지 수천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만도 700여명이 처형당했다고 하며,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한 다음날에도 교수형을 집행하였다고 한다. 일제의 잔인무도함에 치가 떨렸다.
오랜 세월에 낡아버린 망태기는 절반은 부서져 버렸고 그 사이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인골이 삐쭉 나와 있었다. 죽은 이후에도 이들의 영혼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구천의 객이 되어 나의 손을 잡고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곳에서 당장 위령제라도 드리고 싶었으나 미처 준비하지도 못했고 곁에서 감시의 눈치를 거두지 않고 있는 중국 공안원 때문에 묵념으로 대신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감옥출입문을 나섰다.
여순감옥 견학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5시경이 되었다. 숙연해진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시내 모처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숙소에 가서 여장을 풀었다. 중국에서는 호텔 등 숙박업소를 주점(酒店)이라고 한다는데 시내 곳곳에 붙어있는 대형 간판을 보고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29) 대련시내 거리 풍경
3박 4일 일정의 여행이지만 오고 가는 날은 배에서 숙박을 하므로 중국 현지에서는 1박만 하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 날 밤이 중국 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 되는 셈이었다. 한번밖에 없는 저녁시간을 그냥 보내기가 섭섭하다하여 우리 일행은 오후 9시경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시내 어느 빌딩 꼭대기에 있는 단란주점으로가 맥주를 한잔하며 기예단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빌딩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대련시의 야경은 우리나라 어느 대도시 못지않게 아름다웠고 가로등 불빛은 우리보다 오히려 훨씬 더 밝아보였다.
사진 30) 빌딩 옥상에서 바라본 대련시내 야경
한 시간 남짓 공연하는 기예단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에 감탄을 하며 많은 박수를 보냈으나 위험한 연기를 하는 나이 어린 단원들을 보니 혹시 돈벌이에 이용되어 혹사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 때문에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측은하고 씁쓸하였다.
사진 31) 기예단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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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관람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정치문제로 장시간 토론하다가 밤12시를 전후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따로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발 맛사지를 하라는 낯선 여자의 전화도 외면하고 침대에 누워 깊은 잠자리에 들었다.
사진 32) 숙박한 호텔
다음 날(11월 28일)아침 호텔에서 식사를 한 후 고구려 유적지인 “비사성”답사를 위해 버스를 타고 대련시 외곽의 어느 산으로 이동하였다. 이 산은 중국명으로 대흑산(大黑山)인데 대련시 금주현성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는 해발 663.1m이다. 대흑산의 남쪽 두 개 산봉우리 등성마루 위에 청회색 석회암으로 쌓은 거대한 산성이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비사성이라고 한다.
비사성은 고구려가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영류왕 14년(631년) 12월부터 보장왕 6년(647년)까지 16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성인데 삼국사기에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고 묘사된 것처럼 실제로 가보니 천혜의 요새로 되어있었다. 우리 일행은 산 아래 매표소에서부터 산성도로전용 소형 승합차에 나눠 타고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도로를 따라 성 안에 있는 주차장까지 올라갔는데 입구에서 보니 최근에 중국 측에 의해 정비된 것으로 보이는 성문의 위쪽에는 비사성(卑沙城)이란 글자의 팻말이 뚜렷이 새겨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중국 이름인 ‘대흑산산성’이란 글자가 새겨진 표지석이 서있었다.
사진 33) 비사성 성문
사진 34) 대흑산산성 표지석
사진 35) 성내 주차장
망루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옛날 이곳이 전부 고구려 땅이었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한편 지금은 그 넓은 땅이 모두 중국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속이 쓰리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비사성 안에는 당왕전(唐王殿), 서쪽 기슭에 향수사(響水寺), 조양사(朝陽寺)와 산 내지에 관음사(勝水寺)가 있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등 주변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볼거리가 많았으니 갑자기 진눈깨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몰아쳐 오래 있지 못하고 곧 하산하였다. 우리를 싣고 온 중국인 승합차 운전자는 도로가 얼어붙을 것을 염려하여 거친 표현을 써가며 하산을 재촉하였으나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비사성의 실제 흔적을 확인하고 돌아온 용감한 일행도 있었다.
사진 36) 망루위에서 비사성을 배경으로
궂은 날씨로 인해 비사성에서 빨리 내려온 까닭에 점심을 먹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오후 3시로 예정된 인천행 배를 탈 때까지 짬을 내어 대련시 해안가에 있는 밀랍인형관과 공룡원을 관람하였다. 밀랍인형관에는 세계유명인사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는데 어떤 것은 진짜 사람인지 인형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표정까지 똑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바닷가 공룡원으로 가니 멀리서 보는 해안 절벽의 모습이 흡사 공룡이 바다에 머리를 처박고 물을 마시는 형상이었는데 그 정도의 해안 경관은 우리나라에도 흔 한 것이어서 별로 신기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사진 38) 밀랍인형관 측면
사진 40) 공룡원
시간이 되어 대련 여객터미널로 이동하여 다시 배를 타고 인천항을 통하여 귀국하였다. 28일 오후 3시 30분에 대련을 출발한 배는 다음날 오전에 인천에 도착하였는데 돌아 올 때는 배가 조금 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 배의 흔들림이 따라 좌로 굴렀다 우로 굴렀다하며 잠을 청하였다.
사진 41) 귀국후 인천항 부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일행은 다시 선상에 모여 이번 여행의 의미를 되새기는 평가회를 가졌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시간 속에 묻혀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현실은 물론 미래와도 연결되어 대화하고 숨쉬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이번 역사탐방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동양평화란 대의를 위하여 거사를 치룬 후 형을 집행한 일본인조차도 감동을 받을 정도로 의연하게 순국하신 안의사의 행적을 직접 살펴보니 작은 일에 집착하여 일비일희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매우 부끄럽게 느껴졌다.
현재 중국의 무서운 성장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만 한편 우리나라 주변의 역학관계의 변화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힘의 균형을 지혜롭게 활용하고 이들과 대등할 정도의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 민족 대망의 과업인 통일을 위해 애쓰지는 못할 망정 아직도 냉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색깔논을 울궈먹는 수구꼴통들이 득세함은 통탄할 일이다. 우리는 이제 좀 더 시야를 넓혀 대의를 위한 행동으로 역사에 떳떳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기행문은 함께 동행했던 박경원님의 글을 바탕으로하고 이광희 지부장의 글을 참고자료로 하여 내 생각에 맞게 표현을 가감 첨삭하여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한 책임은 모두 필자에게 있음을 밝힙니다.)
글 : 이수훈, 사진출처 : 박경원카메라, 허종록카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