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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지역신문 '울산저널'에 <소박한 밥상>이란 이름으로 칼럼을 쓰는데
생활 속의 현미채식이야기를 짧게 써 보내다 이번에는 지난 번 '채식평화연대' 에 올린<나는 어떻게 현미채식안내자가 되었는가?>를 보냈더니 기획기사로 실렸네요..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은 '대안문화공간 페다고지'에서 울산저널 가족들이 현미채식으로 식사하는 모습입니다.
페다고지 안의 '채식평화연대 현미채식두레협동조합'은 현미채식의 아름다운 가치를 세상 속으로 퍼뜨리려 노력합니다.
공부모임, 공개강좌, 부모교육, 밥상나눔, 방과후 식생활교육 등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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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종 되돌아봅니다
'나는 어떻게 현미채식안내자가 되었는가?’
시골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시골에서 생활했는데 항상 또래보다 허약했습니다. 키는 제일 컸는데 잘 아프고 환절기 때는 기침이 심해서 누우면 힘들어 방 귀퉁이에서 앉아서 자는 적도 있었습니다. 읍내에 있는 의원에도 종종 갔었고요. 버스를 타고 가면 멀미도 심했고 토하기도 잘 했습니다. 그 당시 또래보다 생리가 빨라 놀라기도 했습니다.
엄마께서 제게 안 주어도 되는 것들을 주셨기 때문에 또래 친구들보다 약했다는 것을. 제가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 먹을거리와 자연치유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요. 다른 집들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탓에 분홍 소세지, 빨간 게맛살, 어묵, 노란 달걀, 고소한 멸치 반찬이 들어간 도시락을 싸 주셨지요. 친구들은 나물 반찬에 김치반찬 도시락이었는데... 제 도시락은 깔끔해서 책가방에 국물이 별로 흐르지도 않았어요. 엄마는 나물반찬이나 김치도 맛나게 잘 담그시는 분이셨는데 그게 좋은 거라 생각하셨던 거지요. 엄마 따라서 양계장에 달걀 사러 갔던 기억도 납니다. 장마철에 도랑 물 넘치면 아버지랑 양동이 들고 미꾸라지 잡으러도 같이 다녔지요. 엄마는 추어탕도 잘 끓이셨어요.
부모님께선 원기소영양제나 전지분유도 사 주셨고 소풍 때는 과자도 제일 푸짐했지요. 도시에 사시는 큰 어머니께선 저희 집에 오실 때마다 귀한 초코파이를 사 오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시내에서 다니게 되어 자취생활을 할 때는 점심시간에 라면을 먹거나 우유와 달걀을 먹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 땐 빈혈도 심하고 생리통도 엄청나게 심했지요.
대학교에 다니면서 조금씩 육식이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막연하게도...
아마도 그 때 환경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과 연관이 있기도 했던거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횟집 수족관의 물고기가 먹는 대상으로만 보여지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모임에서 잘 먹는다는 게 고기를 먹는 것으로 통하는 게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인간이 쓰레기를 너무 많이 남기는 것 같아서 화장도 안 하고 머리에 염색이나 퍼머도 점점 안 하게 되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사상과 소로우의 자연생활과 루소의 자연주의에 끌렸지요.
결혼해서 제 손으로 밥상을 차리면서부터는 자연에 가까운 제철 채식 위주의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샀던 요리책 중에 <산채요리>< 채소반찬><이상구박사의 자연식요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요리책도 있었지만.
첫 아이를 임신하고 태교 육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엄마로서 가장 잘 해 줄 수 있는 건 모유를 먹이는 것이고 그 모유는 엄마가 먹는 것에서 나온다!!! 임신했을 때 가공품은 가능한 안 먹으려 노력했는데 라면은 딱 한 번 먹었던 거 같습니다. 사실 그 때는 자연에 가깝게 살고자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려운 신혼살림이라 시골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농산물 위주로 먹는 게 돈을 절약하는 방법이기도 했구요.
그런데 첫 아이를 자연분만은 했는데 딸아이는 태변을 다 싸고도 엄마젖을 먹으면서 계속 설사를 했습니다. 설사가 하도 심해서 엉덩이가 헐어서 피가 나오니 한 겨울에 천기저귀도 벗겨야했습니다. 아기는 밤에도 낮에도 깊은 잠을 자지 않아 업고 재워야 했고 눕혀 재우면 금방 깨어나서 엄마인 저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 먹는 게 아기한테로 가니 나름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주위 어른들과 동네의원에서는 모유를 끊고 우유를 먹이면 낫는다고 하는데 왠지 그건 자연스럽지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백일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할아버지 의사의 말을 믿고 젖을 계속 먹이니 신기하게도 백일 무렵 설사가 멎고 엉덩이가 깨끗해지니 맑은 하늘을 보는 거 같았습니다. 첫째아이는 엄마가 임신하기 전에 잘 모르고 먹었던 안 좋은 음식들에서 나온 독이 엄마 몸 속에 쌓인 것을 먹고 뱃 속에서 자랐으니 그렇게 힘들었다는 갈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아이가 엄마를 힘든 게 아니라 잘 몰랐던 엄마 때문에 아이가 힘들었던 거지요. 자라면서도 잘 먹지도 않고 아파서 때로는 예방접종 맞히러 병원을 찾으면서 병원을 수시로 찾아야 한다는 게 답답하고 뭔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둘째아이도 자연분만으로 낳았는데 둘째 아이는 백일 무렵 일 주일쯤 고열이 나고 다치지도 않았는데 입술에서 피가 나서 여러 병원을 헤매이다 ‘가와사키병’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공해병이라고 했습니다. 공업도시 울산에 살지만 거의 매일 숲으로 산책을 가고 그 당시 살고 있는 아파트는 외곽에 있는 숲 속 아파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니 임신했을 때 새 아파트에 입주해서 임신 내내 토하고 힘들었던 시멘트콘크리트새아파트 그리고 백일 무렵의 예방접종 때문이었던 거 같습니다. 열흘 입원하고 퇴원할 때 의사 선생님은 합병증이 생기면 심장에 무리가 올 수 있는데 5년 안에 이상이 없으면 완치 된 거고 그 동안은 면역력이 없으니 필수 예방접종도 맞히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때 만 5년동안 예방접종을 못 맞힌 게 오히려 다행인 것을 모르고 그 때는 종종 재발 가능성에 불안해했지요.
그래서 사람 많은 도심에는 가지 않고 산으로 들로 다녔고 또래가 유치원에 갈 무렵 유치원 보내는 대신 친환경먹을거리협동조합원들끼리 품앗이육아를 하며 맑아도 흐려도 비가 와도 산으로 들로 다니며 키웠습니다. 둘째는 다행히 별 탈 없이 자라 초등학교 때는 육상선수도 했었고 거의 모든 운동을 잘 하는 편입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항상 자연에 가깝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가끔씩은 아프고 또 도시와 아파트 생활이 뭔가 뿌리가 없고 의존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연하게 돈이나 병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게 삶의 뿌리에 다가가는 것이라 생각해서 주말 농장을 가고 귀농학교를 다니고 귀농하신 분들을 찾아다니다 시골마을로 터를 옮겼습니다.
시골로 이사해서 낳은 셋째 아이는 자연스럽게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백일 무렵 예방접종의 부작용을 알고 그 이후로 모든 예방접종을 전혀 맞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촌집에 살다 새 집을 지을 때 가능한 자연에 가깝게 흙, 나무, 돌, 한지를 쓰고 시멘트나 자연으로 돌아가기 힘든 자재들은 덜 쓰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과 아이들이나 부모님 주변 사람들이 병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종종 답답했습니다.
고맙게도 현미채식과 자연치유의 깨달음을 전하시는 농부의사님과 같이 공부 모임을 하면서 먹을거리와 건강 뿐 아니라 삶에서 고민하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현미채식이 인간으로서 항상 고민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가볍게 해 주는 가장 근본적인 작지만 큰 힘을 가진 실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경쟁, 싸움, 질병, 기아, 빈곤, 대기오염, 방사능, 물 부족, 수질오염, 지구 온난화, 쓰레기, 에너지 부족... 등등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내려놓으려면
사랑, 평화, 행복, 공존, 공동선, 정의, 자유의 세상을 만들어 가려면
나부터 일상생활에서 현미채식을 실천하면 된다는 지혜를 깨달았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육식은 생명의 단절입니다.
땅이나 바다에서 나는 고기를 먹으려면 살아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은 동물을 죽여야 합니다. 죽은 동물은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어느 날 새벽 마을 축사에서 불이 났는데 소들이 도망가지 못하고 불에 타 죽는 걸 보고 생각했습니다. 불에 타 죽는 거랑 어느 날 사람 손에 끌려가 도살장에서 죽는 거랑 별 다르지 않을 거 같다고.
상당이나 교회에서 부활절 행사로 삶은 달걀을 포장해서 나누어 먹는 관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달걀에서 새 생명이 나와서 건강하게 닭으로 살아가는 게 부활인데...
창조주가 인간만을 위해 이세상을 만드신 거 는 아니라고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전하시려는 사랑은 인간만을 위한 사랑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세 아이를 젖 먹여 키울 때를 생각하면 사람들이 우유를 먹기 위해서 키우는 젖소의 고통이 같이 느껴집니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새끼를 빼앗기고도 계속 젖을 짜내야 하는 고통이 같은 어미로서 느껴집니다. 사육방식이 공장식 축산이든 유기축산이든 별 차이는 없겠지요.
채식은 생명의 순환입니다.
고구마는 봄에 심어서 여름내 줄기와 잎을 먹고 가을에 수확해서 봄까지 맛있게 먹고 봄 되어 저장성이 떨어질 무렵 섞기 전에 싹을 틔워 밭에 심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는 나무에 매달린 채로 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따서 맛있게 먹어도 사과나무는 건강하게 살아서 이듬해 다시 사과가 열립니다.
현미는 생명이 살아 있어서 다시 땅으로 가서도 싹을 틔우기도 하고 사람이 먹으면 사람을 살립니다. 생명이 살아 있기에 밥을 했을 때 시간이 지나도 색이나 맛이 그대로입니다.
백미는 생명이 없기에 땅으로 돌아가 싹을 틔울 수 없고 사람이 먹어서 병이 나게 됩니다. 생명이 없기에 밥을 해서 시간이 지나면 누렇게 색이 변하고 맛이 없어집니다.
현미채식은 나와 이웃과 지구를 살리는 먹을거리요, 사랑과 평화의 먹을거리입니다.
나에게 이로운 건 사람뿐 아니라 다른 모든 생명에게도 이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먹을거리 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러하지요.
먹을거리에서부터
입고 신고 생활하는 삶의 곳곳에서 생명의 순환을 생각하기에
가느한 한 순 식물성의 옷을 낡을 때까지 입고,
수세미 하나라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씁니다.
수족관의 동물도
동물원의 동물들도 사람의 볼 거리로 보다는 그들이 원래 사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저는 현미채식안내자가 되었습니다.
막내는 학교에서 아프리카 친구들을 돕기 위한 사랑의 저금통을 가져와서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친구들 모습을 영상으로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합니다. 우는 막내에게 ‘엄마가 현미채식을 하고 집에서 현미채식 먹을거리만 주는 건 배고프고 병든 친구들을 돕는 길’이라고 말해줍니다. 사랑의 저금통에 돈도 채워주지만요.
한 인간으로서 , 부모로서 삶을 고민하면서
공업도시 핵발전소로 포위된 울산이라는 도시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도시와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하려는 남편과 자식들과 이웃들에게 현미채식의 가치를 알리는 게 제가 살아가는 이유요 의미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요 주변에 원자력발전소가 가장 많은 도시, 울산의 어느 시골 마을의 <숲속오이네>에서 <바람결에 전하는 현미채식 이야기>가 조금씩 퍼져 나가 울산이라는 도시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구라는 별이 진정 사랑과 평화기운이 가득한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꿈꾸며 사랑과 평화의 먹을거리로 현미채식밥상을 차립니다.
첫댓글 감사한 글 잘 읽었습니다~
삶이 녹아든 글..그래서 마음 깊숙하게 다가옵니다.
채식밥상을
아름다움으로승화시킨 모습을보고있노라니
이보다 더조흘순없다~~참좋습니다
소박한 삶, 식생활이 고귀한 성인의 성품이지요~^^
풍성하고 넉넉한 마음을 느끼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