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성서비평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구조주의 비평
성서비평은 성서의 의미와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이러한 출발점에 서서, 우리는 본문비평에서부터 경전비평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다. <본문비평>은 가장 순결한 본문의 형태를 회복하는 작업이다. <자료비평>은 자료의 배경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료비평은 자료의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지형을 밝혀냄으로서, 본문'만'을 회복하려 하였던 본문비평의 한계를 넘어선다. <양식비평>은 본문의 삶의 자리를 밝히려는 작업이다. 양식비평은 자료비평의 자료의 배경에 대한 모호한 자세를 양식을 통하여 보완한다. <전승비평>은 본문 전승 과정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전승비평은 전승 과정의 깊은 의미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굴하여 양식비평을 넘어선다. <편집비평>은 본문 전승 과정에 삽입된 편집자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작업이다. 편집비평은 전승비평에서 비교적 간과하였던 편집자의 신학적 의도와, 최종형태에 더 깊은 관심을 보여주면서 전승비평을 극복한다. <경전비평>은, 성서는 그 자체 안에 경전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히는 작업이다. 경전비평은 기존 성서비평의 해체적(destructive) 독해를, 경전의 권위를 매개로 하여, 구성적(constructive) 독해로 새롭게 전환한다. 사회학적 비평은 본문이 등장한 정치 경제적 지층을 탐구함으로서 본문의 의미를 더욱 더 명확하게 확보해 내려는 작업이다. 기존 성서비평들의 한계지점인, 본문과 그 당시의 정치 경제적 함수관계를 사회학적 비평은 새롭게 복원해 낸다. 본문비평에서 사회학적 비평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는 이제 구조주의 비평을 만난다.
구조주의 비평의 고향은 성서비평학이 아니다. 성서비평학으로서의 구조주의 비평이라는 꽃은 '구조주의'라는 뿌리에서 피어났다. 우리는 성서비평학으로서의 구조주의 비평을 탐구하기 위하여, 그의 모태인 구조주의를 추적해 들어가려 한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는 구조주의 비평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조주의를 만나기 전에 전이해로 두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우선 구조주의는 1940년대 후반 불란서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구조주의는 하나의 사조라기보다는, 인류 문명의 전개 과정에서 등장하는 방법론이나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구조주의는 사조나 이론이라는 국소적인 차원의 발상이라기 보다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동시대적인 성향이나 경향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단순한 구조주의 비평학을 포함한 문학의 차원이 아니라 예술, 사상은 물론 수학, 윤리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언어학, 철학, 인류학 등 거의 모든 과학에 스며들어 있는 새로운 차원의 발상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조주의에 있어서 '구조'라는 관념은 인류 문명의 기나긴 전진 가운데서 획득한 숭고한 관념이다. 또한 세계를 구조로 이해하려는 구조주의의 모든 시도는, 결코 이 세계는 와해될 수 없는 '하나의 근원'위에 있거나, 그 위에 있어야 함을 열망하는 진지한 시도이다.
구조주의의 사상적 계보
구조주의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사상고고학적 계보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러시아 형식주의이다. 둘째는, 구조언어학이다. 셋째는 구조인류학이다. 넷째는 실존주의적, 역사주의적 방법론에 대한 반기이다.
러시아 형식주의
러시아 형식주의는 실증과학과의 관련성 안에서 올바른 역사적 지위를 발견할 수 있다. 19세기의 과학은 검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실증주의적인 방법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과학은 문학연구에도 밀려온다. 이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유럽의 문학 연구를 주도하던 방법은 자연과학적 인과율을 문학현상에서 찾아보려는 실증주의적 방법으로 거세게 확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형식주의는 이러한 문학의 실증주의적 태도를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한다. 즉 문학이 함의한 구조와 기호들의 체계, 그리고 문학의 재료에 대한 발견을 러시아 형식주의에서는 관심을 갖고 분석하려 한다.
빅토르 어얼리치는 형식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실로 문학적 대상에 직면했을 때 형식주의 비평가들은 왜, 또는 누가 그것을 창조했는가 하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만들어졌나 하는 점을 알고자 했다. 그들은 ..... 특정한 문학의 유형에 내재하며 작가에게 부과된 미학적 규범들을 연구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 빅토르 어얼리치(박거용 역), "러시아 형식주의의 기본 개념들", 『신비평과 형식주의』 (서울: 고려원, 1991), p.130.
특히 러시아 형식주의의 노선을 밟고 있는 프롭의 러시아 동화연구에 관한 성과는 이후 우리가 다루어야 할 구조주의 비평이나 민담, 설화, 신화분석, 심지어 구조주의적 성서본문의 해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형식주의자들의 이론화 및 서술적 연구 태도에서 생겨난 가장 귀중한 점은, 작품 및 문학 일반을 시스템으로 본 것과, 시스템의 역사 자체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본 것이라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 러시아 형식주의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모태가 되었고 그것은 구조주의라는 하나의 사조로 세력을 형성.확산하게 된다.
) 프롭은 <민담의 형태론>에서 100여 개의 러시아 민담을 분석하여,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일곱 가지의 역할과 서른 한 가지의 계속적인 행동을 취한다는 사실을 도식화 해서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의 기능은 주인공과 비주인공, 영웅과 악한 등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프롭은 민담 역시 장기 게임처럼 일정한 틀 또는 구조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장일선, 『구약성서와 설교』 (서울: 전망사, 1993), p.145 참조 ; 프롭이 제시한 31가지 "실제 등장인물의 기능"에 대하여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장일선, 『히브리說話의 文學的 理解』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5), pp.216-217.
) 이상섭,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 『신비평과 형식주의』 (서울: 고려원, 1991), p.164.
구조언어학
구조언어학은 스위스 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에 의해서 등장한다. 소쉬르는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하여, 언어에는 결코 불변할 수 없는 구조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놀라운 발견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랑그(la langue)와 빠롤(la parole)이다.
구조언어학과 구조주의적 분석방법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일반언어학강의>(Cours de linguistique g
n
rale)에서 그는 랑그와 빠롤이라는 두 개념의 경계선을 확실히 구별하였다. 랑그는 사회적 측면이고 빠롤은 개인적 측면이다. 랑그는 사회공동체가 형성하고 공유하는 언어의 체계이다. 빠롤은 개인이 수행하는 언어의 체계이다.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랑그는 본질상 사회적이며 개인과는 무관하다. 빠롤은 부차적인 것으로 언어활동의 개인적인 면이다."
) Ferdinad de Saussure(최승언 역), 『일반언어학 강의』 (서울: 민음사, 1990), pp.19-26.
) 소쉬르는 빠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신적 부분 역시 전부가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적인 면은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수행은 결코 집단에 의해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개인적이고, 개인은 언제나 수행主이다. 우리는 그것을 話言(parole)이라 부르겠다." ; Ibid., pp.24-25.
) Ibid., p.30.
개인은 사회를 결코 외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의 나를 중심으로 과거의 사회를 볼 때, 어쨌건 사회는 개인보다 앞선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수행하는 언어 체계 또한 사회가 공유하는 언어체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빠롤은 랑그를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오히려 사회적 언어규칙인 랑그가 개별적이고 경험적인 빠롤의 현현을 규정하고, 빠롤은 랑그가 규정하는 세계 외부로 발을 디딜 수가 없기 때문에 랑그가 더욱 실제적인 요소가 된다. 한 개인의 고유하고 실존적인 빠롤은 랑그에 비해 큰 의미와 역할을 할애받지 못한다. 오히려 그 고유하고, 실존적인 빠롤이 어떻게 랑그의 체계 안에서 가능하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즉 개인의 언어세계는 그에게 주어진 사회의 언어세계 내부의 놀이에 불과함을 주장한다. 결국, 랑그는 빠롤의 전제이다. 그리고 빠롤은 랑그를 반영한다. 또한 랑그는 빠롤과는 관련없는 독자적인 영역이다. 소쉬르에 있어서, 빠롤은 빙산의 일각이고 랑그는 수면 아래에 잠긴 거대한 빙산이 된다.
둘째 기표와 기의이다.
구조언어학에서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
)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우리가 기의와 기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쉬르의 언어기호에 대한 정의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언어기호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한 사물과 한 명칭을 결합시키는 것이 언어기호이다." 즉 저 책상위에 핀 장미와 '장미'라는 명칭의 결합이 언어기호라는 것이다. 언어기호를 통하여 대상으로서의 장미와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으로서의 '장미'가 결합된다는 것이다. 우리 외부에 있는 대상으로서의 신과,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하느님', 'God', '神'을 결합시키는 가능성이 언어기호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언어는 신이란 <사물>과 '하나님', '하느님', 'God', '神'이라는 <낱말>의 대응관계를 알리는 목록집이다. 사물에 대한 낱말의 버케블러리가 언어이다.
하지만 소쉬르는 그런 언어를 부정한다. 소쉬르는 말한다. "언어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영상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개념과 청각영상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내 앞에 한 송이의 꽃이 있다. 심지어 한 달 후에 꽃이 다 마를 지라도 나는 한 달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꽃을 생각할 수 있다. 입술이나 혀를 전혀 움직이지 않더라도 '꽃'을 우리는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이 "개념"이다. 그렇다면 청각영상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은 생각 안에 있는 '꽃'을 "꽃"이라고 성대와 입술을 통하여 발음한다. 미국인은 그 '꽃'을 "플라워(Flower)"라고 발음한다. 독일인은 "블루메(Blume)"라고 발음한다. 이러한 "꽃"과 "플라워"와 "블루메"라는 발음이 청각적인 자극을 통하여 구체적인 꽃과 같은 영상을 발생시킨다. 이것을 청각영상이라고 한다. 소쉬르는 '꽃'이라는 개념과 "꽃", "플라워", "블루메"라는 청각영상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언어라고 한다. 그리고 소쉬르는 개념을 기의(signifi
)라고 하고 청각영상을 기표(signifiant)라고 하였다.
) Ibid., p.84.
다른 차원을 통하여 기의와 기표의 관계를 이해해보자. 우리는 스승의 날에 교수님들께 꽃을 달아드린다. 그 꽃의 의미는 무엇인가? 학생은 스승의 날을 통하여 교수님께 스승을 존경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표현하려 한다. 그 마음의 표현이 바로 꽃과 선물이다. 우리 마음에 '저희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라는 추상적 관념이 기의(signifi
)이고 그 기의를 선생님께 전하는 매개로서의 꽃이 기표(signifiant)이다. 기호는 기의로서의 우리의 마음과 기표로서의 꽃의 결합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의 기호는 선생님께 전달된다.
) 소쉬르는 언어학자이기 때문에 기표를 음성이미지만으로 환원시켰다. 하지만 언어학의 범주를 넘어서 이해한다면, 기표는 어떤 이미지라도 상관없다. 기표를 <기호의 이미지>라고 해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기표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서는 다음을 참조.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1994), pp.18-39.
기표는 '표시하는 것'이고 기의는 '표시되는 것'이다. 기의라는 알몸은 기표의 옷을 입어야만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꿈틀거리는 기의는 영원히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사장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기표의 형식 또한 기의의 내용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기표라는 존재의 기반이 사라진다. 기표는 기의의 표현이고 기의는 기표의 실체이다. 기표는 기의에 의한(!), 그리고 기의를 위한(!) 참여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표라는 실재는 기의가 처소하는 미지의 세계와 관계하는 유일한 접촉점이다.
) 전 철, "유모어 분석과 분석의 유모어", 『한신교지 1994년 18호』, pp.63-74 ; 이 글은 기의와 기표의 관계속에서 유모어의 의미론적 구조를 분석한 글이다. 이 글에 있어서 유모어는 <사회안에서 일반화된 기의와 기표의 공고한 끈을 해체시킴으로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착란현상>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기의와 기표의 엇갈림의 꽃이 바로 '덩달이 유모어'이다. 그리고 이 덩달이 유모어는, 기표에 정당한 기의를 부여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암울한 모습을 반영하는, 우리네의 현실의 리트머스시험지이다. 동시에 덩달이 유모어는 암울한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반응양식이다. 단지 덩달이의 현실에 대한 저항은, 현실의 모방으로 나타난 것 뿐이다. 모방을 통한 저항이 덩달이의 근본적 멘탈리티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꽃'이라는 개념은 하나이다. "꽃"과 "플라워"와 "블루메"와 같은 청각적 영상은 우리나라, 미국, 독일 각각 다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꽃'과 "꽃", '꽃'과 "플라워", '꽃'과 "블루메"의 관계를 통하여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자의적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선생님을 존경하는 기의는 '꽃'과 '선물'로만이 아니라, 또한 성실한 '리포트'와 수업시간에 초롱초롱한 '눈망울'로도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듯이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자의적인가?" 그것은 즉 기의를 드러낼 수 있는 매개 없이는 기의, 즉 인간의 사고는 모호한 세계에만 방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의적이라도' 끊임없이 언어기호를 통하여 자신의 기의와 임의의 기표를 관계시킨다. 결국 모호한 덩어리와 같은 기의의 자기시간을, 즉 기표를 확보해주는 과정이 인류의 언어화의 과정이다.
) 이런 의미에서 이형원 교수의 기의와 기표에 대한 이해는 넌센스이다. 그는 소쉬르의 기의와 기표를 설명하면서, 다수의 언어체계를 가질 수 있는 근거를 기의와 기표로 나누어진 기호체계로 이해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소쉬르가 기의와 기표를 통하여 말하려 했던 본질적인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소쉬르는 인류의 문화적 언어활동의 다양하고 풍부한 사례를 통하여 기의와 기표의 자의적인 관계를 엿보았다. 왜냐하면 인류의 언어활동은 모호하고 순수한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문명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인류는 자신의 내면적인 모호한 세계, 즉 기의를 밖으로 끄집어내려 함에 있어서 기표가 필요불가결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거기에서 기의와 기표의 자의성이 등장한다. 소쉬르는 이러한 언어문명사적 전망 안에서 기의와 기표를 새롭게 주창한 것이지, 다수의 언어체계를 확보할 수 있는 근거로서 기의와 기표를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형원 교수의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다음을 참조. 이형원 저, "구조주의적 비평", 『구약성서비평학 입문』 (대전: 침례신학대학 출판부, 1991), p.245 ; 소쉬르의 기의와 기표의 관계에 대한 전개는 다음을 참조. Ferdinad de Saussure(최승언 역), 『일반언어학 강의』(서울: 민음사, 1990), pp.83-97.
세 번째는 언어의 통시적 구조와 언어의 공시적 구조이다.
언어의 통시적 구조는 시간의 흐름을 통하여 변화하며 형성되는 구조이다. 언어의 공시적 구조는 한 시간에서 다른 시간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배제한 언어의 정태적 구조이다. 언어의 통시적 구조는 문법과 언어양식의 역사적 변천과정의 구조이다. 언어의 공시적 구조는 일정한 시간에 공존하는 언어체계의 구조이다. 그런데 소쉬르에 의하면 기존의 언어학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통시적인 구조에 대한 관심에 몰두하였다고 평가한다. 다음과 같은 예는 그것을 잘 드러내준다. 독일어의 Gaste(손님이라는 의미 ; Gast의 복수형)는 옛날에는 gasti라는 점을 밝혀내는 작업이 언어의 통시적 차원의 작업이다. 하지만 공시적 구조에 있어서 gasti를 아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Ibid., p.101.
소쉬르는 언어의 통시적 구조보다는 언어의 공시적 구조가 더 본질적이라고 이해한다. 그는 말한다. "확실한 것은 공시적인 면이 통시적인 면보다 우월하다는 점인데, 그 까닭은 말하는 대중에 있어 공시적 면이야말로 진정하고도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언어체계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역사적 발전을 괄호치고 주어진 시간에 존재하는 언어의 요소들을 강조한다. 따라서 구조분석은 역사적 방법과 다르게 체계들의 통시적 영역이 아니라 공시적 영역을 검토한다.
) Ibid., p.109.
) 김준호 외, 『구조주의』 (서울: 고려원, 1992), p.ii.
구조인류학
구조인류학의 통찰 또한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의 사상적 계보이다. 구조인류학은 한 마디로 말해, 인류의 문화의 배면에는 인류문화를 생성하는 구조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 소쉬르가 언어의 무의식적 구조를 밝혔다고 한다면, 레비스트로스는 인류 문화의 무의식적 구조를 밝혔다고 할 수 있다. 전경갑에 의하면,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활동, 친족체계, 토템 체계, 신화의 논리, 요리체계, 결혼규칙 같은 모든 문화적 현상은 상징체계이며, 이는 개인수준의 의식이나 실존적 결단과는 무관한 집단적 표상이며, 이러한 집단표상은 개인의 의식과 무관한 사회적 무의식 속에 체현된 이원적 대립체계를 반영한 것이다.
) 전경갑,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 『현대와 탈현대의 사회사상』 (서울: 한길사, 1993), p.40.
특히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에 대하여 구조주의적 방법을 동원하여 폭넓게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1955년 출간된 한 논문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이 논문은 후에 800여 편의 신화를 분석한 <신화론>(Mythologiques) 전 4권으로 발전되었다. 그의 신화 분석의 모델은 이후에 성서비평학에 적용이 되어 성서의 신화를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pp.96-97.
실존주의, 역사주의에 대한 반기
서양의 문명은 17세기를 시작으로 하여 19세기까지 약 300년의 시기를 통하여 근대화를 이루어낸다. 이 300여 년간 서양의 문명은 주체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세계에 대한 이해의 자신감이라는 찬란한 훈장을 수여 받는다. 그러다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의 류(類)적이고 보편적인 전망에 대한 치명적인 한계를 노정한다. 그 암울한 세계현실에 대한 직시가 실존주의의 창궐을 가능케 하였다. 실존주의는 보편의 의미보다는 개인 실존의 의미에 더욱 더 가치를 부여한다. 실존주의에 있어서, 실존 없는 보편은 공허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샤르트르) 그리고 역사주의는 역사의 '역사성'의 의미에 더욱 가치를 부여한다. 역사 자체의 의미보다는, 역사를 통하여 전개된 의미에 가치를 부여한다. 실존주의는, 실존은 결코 보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면, 역사주의는, 역사적 의미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항한다. 구조주의에 있어서 실존주의는 실존을 가능케 하는 보편적 구조와 원리에 대한 탐구를 값싸게 포기한, 유토피아를 상실한 자의 슬픈 운명으로 비추어진다. 구조주의에 있어서 역사주의는 상이한 역사의 편린과 그 좁은 의미에만 머물러 있을 뿐, 매 시대마다 다양한 역사의 의미를 산출하는 보편적인 역사의 구조와 원리를 간파하지 못한 자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구조주의자는 실존주의나 역사주의가 일찌감치 손을 떼어버린 실존과 역사의 보편성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전개한다. 구조주의에 있어서, 구조에 대한 문명의 발견은 문명의 진보와 상응한다.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의 배경과 특징
구조주의의 성서비평학으로의 유입
우선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은 역사비평에 대한 한계에서 등장한다. "역사비평은 성서본문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회의에서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은 출발한다. <본문비평>은 '그 당시의' 가장 순결한 본문의 형태를 회복하는 작업이다. <자료비평>은 '그 당시의' 자료의 배경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양식비평>은 '그 당시의' 본문의 삶의 자리를 밝히려는 작업이다. <전승비평>은 '그 당시'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본문 전승 과정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편집비평>은 본문 전승 과정에 삽입된 '그 당시의' 편집자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작업이다. <경전비평>은, 성서는 성서가 전개된 '그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 안에 경전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히는 작업이다. 사회학적 비평은 본문이 등장한 '그 당시'의 정치 경제적 지층을 탐구함으로서 본문의 의미를 더욱 더 명확하게 확보해 내려는 작업이다.
사실 본문비평에서부터 사회학적 비평까지 기존의 비평은 '그 당시'를 그 당시의 편집.사회.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재현해 내려는 방법론적 접근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라는 과거가 오늘 우리에게 정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가? 만약 기존의 역사적 비평의 목적이 이러한 것이라면, 그 학문은 결코 존속할 수 없거나 학문적으로 무용하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연구의 대상을 그 시대의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정확하게 재현해 내는 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로 역사적 시간의 끊임없는 전개는 텍스트의 온전한 재현에 가장 치명적인 장애요소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주의적 성서해석'에 대한 한계는 이제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을 통하여 극복된다.
) 그런데 역사주의적 성서해석과 구조주의적 성서해석 사이에 방법론적 가교를 우리는 하이데거나 불트만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의 실존성 분석과 불트만의 탈신화화 프로그램(Entmythologiesierungsprogramm)과 같은 신학적 해석학은, 역사주의적 성서해석의 한계를 넘는데 기여를 했고 이러한 작업은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의 방법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하는데 많은 모티브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예수에 대한 역사적 방법론의 좌초와, 민중신학에 있어서의 새로운 신학적 해석학에 관한 자료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김진호,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및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 (미발표논문, 1996).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의 특징
첫째, 구조주의가 주목하는 것은 성서본문이 아니라 성서본문의 내재적 구조이다.
구조주의의 취급대상은 본문의 표층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표층구조와 '심층'구조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심층구조란 텍스트의 배후.측면.주변에 암암리에 또는 무의식으로 깔려있는 구조이다. 구조주의는 텍스트를 산출하고 있는 광범위한 내재적 구조를 밝혀내려 한다. 이것은 구조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된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모든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p.9.
) Terence J. Keegan, Interpreting the Bible - A Popular Introduction to Biblical Hermeneutics (New York : Paulist Press, 1985), p.56.
우리는 위에서 랑그와 빠롤의 관계에 대하여 이해한 바가 있다. 구조주의 언어학에 있어서 빠롤은 랑그 안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구조주의는 개별적인 발화자의 빠롤에 주목하기보다는 보편적인 랑그의 체계에 주목한다. 빠롤은 랑그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은 성서기자가 기록한 성서 텍스트(빠롤)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텍스트를 산출하고 있는 내재적인 구조(랑그)를 탐구하려 한다. 또한 우리는 구조주의 인류학에 있어서 문화 이면에는 일정한 원리가 내재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떠한 문화와 어떠한 텍스트이든 그것은 구조적 기초에 의하여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기자의 지위에 대한 질문을 해 볼 수가 있다. 성서기자는 무엇을 하는가?
구조주의에 있어서 성서기자는 텍스트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없다. 단지 성서기자는 텍스트를 통하여 자신과 사회가 위치한 심층구조를 반영할 뿐이다. 실존주의적 해석학에서는, 성서기자의 실존은 보편에 앞선다. 하지만 구조주의적 해석학에서는, 실존은 보편의 반영이 되는 것이다. 빠롤은 랑그의 반영이다. 단지 성서 텍스트는 성서기자가 창조할 수도 만들 수도 없는 이면의 구조가 기자의 손과 입을 통하여 드러난 것 뿐이다. 성서기자는 텍스트를 통하여 의미를 만들 수 없다. 단지 의미가 성서기자에게 부과되었다. 결국 구조주의는 저자가 쥐고 있는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저자에서 구조로 빼앗아 버렸다. 여기에서 구조주의의 정신은 한 마디로 간결하게 모아진다 : "누가 말하든 무슨 상관이야!"
) "저자의 글쓰기는 특수한 사회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저자는 자신의 의식과 세계관을 설화적 담론의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형주, "삼손 설화의 문학적 성격", 『신학연구 37』 (오산:한신대학교 신학부, 1996), p.289.
둘째, 구조주의에서 텍스트의 계열은 컨텍스트의 계열을 필연적으로 반영한다.
구조언어학의 용어로 전자는 빠롤이다. 후자는 랑그이다. 기호로서의 빠롤은 체계로서의 랑그를 반영하고 표현한다. 구조인류학의 용어로 전자는 표층구조이다. 후자는 심층구조이다. 그리고 표층구조는 심층구조를 반영한다. 설화분석에 있어서도 전자는 이야기(Story)이다. 후자는 담화(Discourse)이다. 중요한 것은, 전자의 계열은 후자의 계열을 분명히 반영한다는 점이다. 이 반영은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반응이 아니다. 오히려 이 반영은 무의식적인 차원의 반영이다.
키건(Terence J. Keega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구성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가 반영하는 컨텍스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구조로서의 컨텍스트에 집중하는 구조주의적 해석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로버트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의 모든 행위나 만물의 심층 구조는 기호들을 통하여 자신을 표현한다." 특히 레비스트로스에 있어서 컨텍스트가 텍스트로 변형될 때에만 텍스트 사이의 교환과 전달은 가능하다고 이해한다. 그는 말한다. "교환과 전달(communication)은 교환되는 '사물'(things)이 기호(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때때로 상징(Symbol)이라고 명명한다)로 변형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 Ibid., p.43.
) D. Robertson, The Bible as Literature, IDBS (Nashville : Abingdon Press, 1962), p.549. 『구약성서비평학』, p.253. 재인용.
)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p.66.
셋째, 구조주의가 주목하는 것은 성서본문의 역사성 보다는 성서본문의 의미이다.
구조주의는 철저한 공시적인 방법론이다. 구조주의는 철저하게 역사성을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구조주의는 인간의 심층에는 동일한 구조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하면 성서기자의 심층과 성서를 해석하는 오늘의 독자의 심층 또한 보편적이고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성서본문은 그의 심층구조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성서본문을 이해하는 우리들은 그 성서본문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전해 내려왔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단지, 성서본문이 성서기자의 심층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오히려 역사성은 성서본문의 본질적인 의미를 오독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 독자에게 있어서 본문의 역사성 보다는 본문의 의미가 더 우선시된다는 점은 다음의 인용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어쩌면, 본문의 의미가 더 절실해지는 그 지점이 바로 본문의 역사성을 간취할 수 없는 독자의 본문에 대한 한계선포인지도 모른다. " ..... 다른 성서본문의 저자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처럼, 역대기 사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그들 진술을 입증할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학적 통찰이 얼마나 건전한가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달려있을 수밖에 없다." 홍경원, "관례적 독서로서의 역사비평과 문학비평", 『신학연구 37』, p.428.
넷째, 구조주의는 관계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다.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분석인 원자주의에 반대하여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더 시선을 집중한다. 왜냐하면 구조는 '관계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랑그:빠롤, 기의:기표, 계열체적 관계:결합체적 관계, 공시성:통시성, 은유:환유, 레비스트로스의 연사:범례, 성:속, 내용:형식, 자연:문화, 손님:근친과 같은 이원적 관계 개념은 구조주의의 특징을 잘 반영해 준다. 팟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정신성을 이원적 관계성으로 보고 있다. 특히 신화적 사고에서 자각되어지는 이 대립들은, 예를 들어 삶:죽음, 자연:문화, 하늘:땅, 신:인간이라는 근본적인 대립이다. 이 대립들은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실제적인 대립이다." 그렇다면 이원적 관계성을 밝히는 작업은 관계성의 근거로 놓여져 있는 근본적 구조를 밝히는 작업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은 성서 본문에 내재한 다양한 관계들의 배면에 있는 근원적인 관계들을 탐구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시도한다. 본문 또한 이원적 관계성이라는 정신적 산물이라면, 본문 안에 이원적 관계성의 형태는 분명히 각인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셀 끌레브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Ibid., p.103.
"다양한 구조주의적 연구방향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한다 : 기호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독립체로 파악될 수 없고, 그것들이 가능성의 영역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창출하는 관계들의 교차점으로서 정의될 수 있는 특정한 위치를 가지게 될 때, 이를 통하여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관계는 이중적인 대립이다(예를 들면 삶/죽음 ; 정결/불결 ; 일상적인/제의적인 ; 노동/자본). 이항 대립적 관계는 구조주의적 성서읽기에서는 결정적인 해석의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세워진 기본명제는 다음과 같다 : 하나의 사물은 그것과 다른 사물과 대립 가운데 놓여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어떠한 사물은 혼자로는 좁은 의미에서 결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 기본명제는 분석의 다른 면에서도 입증된다 : 대립과 충돌은 실제적 삶에서 뿐만 아니라 책과 이데올로기에서도 처음부터 존재한다."
) Michel Cl
venot, So Kennen wir die Bible nicht (Munchen : Chr. Kaiser, 1980), p.149.
다섯째, 구조주의에 있어서 "저자는 죽었다."
이것은 구조주의의 첫째 특징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누가 말하든 무슨 상관이야?"라는 구조주의의 특징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바뀐다 : "누가 해석하든 무슨 상관이야?"
구조주의는 텍스트(Text)와 작품을 명백히 분리한다. 텍스트는 저자가 쓴 것이고, 작품은 독자가 텍스트와 함께 이루어내는 것이다. 텍스트는 말이 없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서 존립할 수 없다. 텍스트가 유일하게 자신의 시간을 할당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독자와의 만남안에서 '작품'을 통하여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말하면 작품의 자리는 저자는 부재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떠난 의미에 대한 염려는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에 있어서는 폐기된다. 왜냐하면 '저자의 의도'는 저자의 본문의 심층구조의 온전한 반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의 본문은 저자가 의도하지 못한 잉여의 본문까지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형원은, 구조주의자들은 본문의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는가를 더 이상 묻지 않고, 본문이 무엇을 의도하였는가를 묻는다고 말한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구조는 실재이고 해석의 다양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 『구약성서비평학 입문』, p.254.
또한 구조주의의 기본 입장은 저자가 쓴 본문은 저자와는 상관 없이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는다고 본다. 그 본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본문 자체 속에 함축되어 있거나 아니면 본문이 읽혀지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이 읽히는 과정을 문맥(context)이라고 볼 수 있으며, 본문(text)의 의미는 그 문맥 속에서 밝혀진다고 보는 것이다.
) 장일선, 『구약성서와 설교』 (서울: 전망사, 1993), p.146.
우리는 여기에서 키건의 적당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비행기 날개는 항공역학을 이용하여 만든 인류의 발견이다. 부메랑 또한 항공역학은 알지 못한 상태였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만들었다. 만약 항공역학을 알지 못하니 비행하는 물체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원주민들은 비행하는 물체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부메랑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공기역학이라는 원리는 공기역학이라는 이론의 발견 이전에 이미 내재하였던 것이다. 공기역학은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심층구조이고 비행기 날개와 부메랑은 표층구조가 되는 것이다. 부메랑과 비행기는 공기 역학이라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메랑과 비행기는 결코 다르지 않다.
) Interpreting the Bible, pp.45-46.
저자는 부메랑을 의도하고 부매랑을 본문에 담았다. 하지만 독자는 부메랑에서 비행기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독자의 발견은 저자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며, 독자가 저자 자신의 본문에 오독을 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나? 키건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본문의 깊은 바다는 저자의 의도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동시에 아무리 독자가 자기의 고유한 해석학적 렌즈로 본문을 해석하려 한다 하더라도, 그 해석학적 증폭의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잉여분의 내용은 이미 구조에 장착되어져 있다. 왜냐하면 해석의 가능성이나 의사소통은 이러한 근본적인 구조들이 거기에 있었고 이것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텍스트의 모든 해석의 가능성이 담긴 그 공통의 영역, 그것이 구조주의가 말하려는 심층구조이다.
) Ibid., 46.
) 바둑의 원리는 간단하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바둑판 이외에 수를 두지 않으면 된다는 것, 그것 하나이다. 원리는 명약관화하다. 하지만 그 간단한 원리 안에서 빚어지는 백과 흑의 함수관계는 무한하다. 심지어 아담 이래 인류가 바둑을 둔 이래로 같은 판(matrix)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정도의 무한한 다양성이 바둑게임에서 열린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바로 바둑의 원리가 구조이고, 무한히 다양한 백과 흑의 조합이 본문이라고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는 틀림없이 지적했을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에 있어서 독자의 모든 주관적 해석은 유효하다.
구조주의에 있어서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주관적이고 다양한 해석은 진정 유효한가? 유효하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한 해석의 가능성 또한 저자의 본문의 심층 구조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해석은 본문을 넘어설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서 해석의 윤리성 문제가 등장한다. 우리는 다시 질문의 궤도를 수정한다. 그렇다면 모든 해석은 윤리적인가?
일단 우리는 모든 해석은 주관적 해석임을 위에서 알 수 있었다. 모든 해석은 철저히 주관적이다. 그렇다면 그 주관은 객관을 향한 주관적 해석인가? 바로 여기에서 해석의 윤리문제가 판가름 난다. 만약 주관적 해석이 객관을 향한 주관적 해석이라면 그 해석은 윤리적 단두대 앞에서 면죄부를 부여받게 된다. 본문 해석에 있어서 "누구의 해석이냐?"에 차원에서는 윤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은 폐기된다. 단지 "무엇을 향한 해석이냐?"의 차원에서 윤리의 저울 눈금은 작동되는 것이다.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의 사례
구조주의에 있어서 텍스트의 심층구조는 관계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심층에 있는 관계의 사실의 발견이다. 텍스트의 심층에 깔려있는 구조는 그것이 지시하려는 궁극적인 관계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팟테는 설화를 (어떠한 모델이든) 모델을 통하여 분석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이 모델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고, 둘째는 특정 설화들이 그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실현하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p.94.
그레마스의 사각형 모델
여기에서는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에 있어서 대표적인 모델을 통하여 모델은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이해하려 한다. 특별히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모델은 그레마스의 모델이다. 그레마스는 그의 『구조적 의미론』(S
mantique structurale, 1966)에서 기호학적 사각형을 제시한다. 이것은 이분법적 대립의 관계에서 출발한 모델이다. 이 모델을 착상한 그레마스는 표면구조와는 별개의 심층구조가 깔려있다고 본다. 그것은 상호 관계의 논리라는 구조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심층구조는 보편적이며 논리적인 상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 그레마스의 모델은 아래의 책에 공통으로 인용이 될 정도로 구조주의적 해석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장일선, 『히브리說話의 文學的 理解』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5), pp.244-247 ; 장일선, 『구약성서와 설교』 (서울: 전망사, 1993), pp.146-147 ; D. 팟테(이승식 역),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7), pp.80-82 ; 이형원, 『구약성서비평학 입문』 (서울: 침례신학대학 출판부, 1991), pp.266-267 ; Terence J. Keegan, Interpreting the Bible - A Popular Introduction to Biblical Hermeneutics (New York : Paulist Press, 1985), pp.57-60 ; 문덕수 , "구조주의적 비평", 『현대의 문학이론과 비평』 (서울: 시문학사, 1991), pp.170-173 ; Raman Selden(윤흥로 이유섭 이병규 역), 『현대문학이론』 (서울: 백의, 1995), pp.90-93 ; 하윤금, "그레마스의 기호학", 『구조주의』 (서울: 고려원, 1992), pp.79-100 ;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민음사, 1994), pp.280-297.
A ←――→ B
↑ ↖ ↗ ↑
↓ ↙ ↘ ↓
non B ←――→ non A
우선 A와 B, non A와 non B 사이는 대립의 관계이다. A와 non A, B와 non B의 관계는 모순관계이다. 여기에서 non A는 B와, non B는 A와 함축관계이다. 창세기 6-10장 본문에는 홍수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레마스의 모델을 홍수설화에 적용해서 살펴볼 수가 있다.
) 하윤금, "그레마스의 기호학", 『구조주의』 (서울: 고려원, 1992), p.92 ; 서인석은 『성서와 언어과학』에서 기호학적 사각형에 대해서 더욱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첫째 관계 : 대각선들로 표시되는 A와 non A, B와 non B 사이의 관계는 모순의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제3의 사항을 위치시킬 수가 없으므로 양자택일의 법칙을 전제하고 있다. 둘째 관계 : A와 B 사이는 대립의 관계이다. 또 한 편으로 이 관계는 상호내포의 연관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양립불가능의 특징을 갖고 있다. 셋째 관계 : non B와 non A 사이에는 하위대립의 관계이다. 이때 위치상에 나타나는 사항들은 배타의 위치이거나 연접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넷째 관계 : non B와 A, 그리고 non A와 B는 내포관계이다. 서인석, 『성서와 언어과학』 (서울: 성바오로 출판사, 1984), p.205.
은혜 ←――→ 심판
↑ ↖ ↗ ↑
↓ ↙ ↘ ↓
방주 ←――→ 홍수
우선 은혜와 심판 사이는 대립의 관계이다. 방주와 홍수 사이는 대립의 관계이다. 그리고 은혜와 홍수는 모순관계이다. 그리고 심판과 방주도 모순관계이다. 그런데 방주는 은혜를 함축한다. 동시에 홍수는 심판을 함축한다. 여기에서는 방주와 홍수라는 대립은 궁극적으로 은혜와 심판이라는 넓은 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알렝의 해석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본문은 열왕기상 17장 7절에서 16절까지이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땅과 이방 땅에 가뭄과 기근이 닥친다. 본문 전반부에는 엘리야와 과부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본문 후반부에는 엘리야와 과부가 음식과 물을 풍부하게 소유하게 된다.
생명 ←――→ 사망
↑ ↖ ↗ ↑
↓ ↙ ↘ ↓
풍부 ←――→ 기근
우선 생명과 사망 사이는 대립의 관계이다. 풍부와 기근 사이는 대립의 관계이다. 그리고 생명과 기근은 모순관계이다. 그리고 사망과 풍부는 모순관계이다. 또한 풍부는 생명을 함축한다. 기근은 사망을 함축한다. 여기에서는 풍부와 기근이라는 대립은 궁극적으로 생명과 사망이라는 넓은 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알렝은 풍부 / 기근의 근본구조를 넘어서서 여자(과부)와 남자(엘리야), 이스라엘(정결함)과 이방인(불결함) 사이의 관계적 구조들도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구약성서비평학 입문』, p.269.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를 밝혀내는 작업이 무슨 의미를 띠고 있나. 갈랑(Corina Galland)에 의하면 이런 모델을 통하여 "본문의 구조적 요소들(단어, 구, 문장들)이 상이성이나 대조나 암시성의 관계를 통하여 부정, 확언, 예상, 암시 등의 의미 가운데 어떤 것을 더욱 지배적으로 강조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방주와 홍수가 은혜와 심판의 근본적인 대립으로 밝혀지고, 풍부와 기근이 생명과 사망의 근본적인 대립으로 밝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Alfred M. Johnson, Jr., ed. and trans., Structuralism and Biblical Hermeneutics (Pittsburgh : The Pickwick Press, 1979), p.196. 『구약성서비평학 입문』 p.268. 재인용.
)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팟테는 명료하게 밝혀주고 있다 : "신화에서 이차적 대립을 매개하는 용어는 훨씬 더 이차적인 대립인 양극단의 한 쪽이다. 환원하면, 신화적 구조는 가장 약한 이차적인 대립에서 근본적인 대립으로 지향되고 있다."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p.110.
서인석은 기호학적 사각형을 통하여 다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의미작용의 기본적인 구조는 본문의 가치들 사이에 있는 '관계들을' 헤아릴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의 설화적 변형들도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 『성서와 언어과학』, p.206.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
다음으로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이 있다. 그레마스는 프롭의 러시아 민담연구를 재해석하여 설화 속의 행위자를 여섯 가지의 대표적인 행위체로 구분한다.
발신자 → 목적 → 수신자
↑
보조자 → 주체 ← 반대자
여기에서 발신자는 목적을 수신자에게 보내도록 하는 행동을 유발하는 존재이다. 주체는 주인공이다.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 보조자의 도움을 얻거나 또는 대립자의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축이 있다. 첫째, 발신자-목적-수신자는 전달(communication)의 축이다. 둘째, 주체-목적은 의지(volition)의 축이다. 셋째, 보조자-주체-반대자는 힘(power)의 축이다.
) 『구약성서와 설교』, p.145.
) 장일선, 『히브리說話의 文學的 理解』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5), p.245.
본문 분석에 있어서 이러한 모델이 적용된 롤랑바르트의 창세기 32장 23-33절의 본문분석을 이해하기로 하자. 당대에 이미 숨이 멎을 정도의 주옥같은 글들을 뿜어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성서에 대하여 구조주의적 비평을 가한 시도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제목은 <천사와의 씨름>(La lutte avec L'ange)이다. 바르트는 창세기 본문을 그레마스의 행위분석과, 프로프의 기능분석이라는 두 가지로 비추어본다. 여기에서는 행위분석을 통한 내용만을 언급하기로 하자.
) Roland Barthes(역자 미상), "천사와의 씨름", 『기독교사상 1980년도 6월호』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pp.171-185.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분이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그분은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그분이,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때를 썼다.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옵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밤에 나타난 그분이 야곱의 엉덩이뼈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짐승의 엉덩이뼈의 큰 힘줄을 먹지 않는다.
(표준새번역 창세기 32장 23-33절)
하나님(발신자) → 야뽁통과(목적) → 야곱(수신자)
↑
야곱(보조자) → 야곱(주체) ← 하나님(반대자)
여기에서 주체는 야곱이다. 목적은 야뽁의 통과이다. 발신자는 야곱에게 이 목적을 찾도록 내보낸 하나님이다. 수신자는 다시 야곱이다. 반대자는 야곱이 목적 달성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보조자는 자기의 전설적인 힘으로써 자기를 구원하는 야곱이다. 롤랑바르트는 주체(야곱)가 수신자와 동일하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지만, 주체가 자기의 보조자라는 사실은 아주 진귀하다고 분석한다. 또한 발신자(하나님)가 반대자라는 사실도 아주 드물다고 그는 분석한다. 이러한 이유는 유일신 사상에 기인하다고 바르트는 보고 있다. 즉 야곱을 방해하는 세력은 하나님 자신만 가능할 뿐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구조론적인 형태는 아주 대담하며, 하나님의 패배라는 형태로 표현된 스켄들에 멋지게 합치되는 것이다.
) 그레마스의 행위분석을 통한 성서 본문 주석의 사례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D. 팟테(이승식 역),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7), p.82 ; 장일선, 『구약성서와 설교』 (서울: 전망사, 1993), p.149 ; Terence J. Keegan, Interpreting the Bible (New York : Paulist Press, 1985), pp.58-60 ; 이형원, 『구약성서비평학 입문』 (서울: 침례신학대학 출판부, 1991), p.266.
구조주의적 비평에 대한 평가와 전망
구조주의자들의 텍스트나 성서에 대한 관점과 신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모델은 성서의 내용을 비평하고 분석하는데 강력한 도구로서 확신한다. 또한 구조주의적 비평은 역사성을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구조주의적 비평은 철저한 공시적 연구를 통하여 본문의 근본적인 구조를 탐구하는 방법론이다. 오히려 역사비평학은 본문의 본질적인 의미를 희석화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구조주의는 끊임없이 염려한다. 더 나아가 본문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를 끄집어 내기 위한 전략으로서의 역사적 연구방법은 이미 한계를 노정했음을 구조주의는 선포한다. 구조주의에 입장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역사적 연구방법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구조주의의 관심은 역사적 의미보다 본문의 의미요, 저자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저자보다 더 깊은 곳의 심층구조가 된다. 구조주의는 결국 역사의 끊임없는 수레바퀴로 의미가 와해될 수 없는 본문의 '근본적인 구조'를 전제하고 있다. "그 본문의 구조가 무엇을 말하는가?" 거기에 숨죽여 귀를 기울이는 작업이 바로 구조주의적 비평이다.
우리는 구조주의적 비평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자의 손에서 빼앗아버렸다고 우려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구조주의는 저자를 영원히 죽여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걱정해야 할 현실이 아니다. 구조주의적 비평은 성서기자의 의도를 산산조각 내어버렸지만, 동시에 성서기자의 의도에 갖힌 성서 본문의 깊고 영원한 의미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성서의 진리는 역사적인 과거에만 뜨겁게 빛나고 이제는 유폐되어 버린 말씀이 아니라, 구조주의적 비평을 통하여, 언제나 다시 타오를 수 있는 '성스러운 불꽃'으로 승화된다. 만약 저자를 죽였다고 한다면, 수 천년이 지난 오늘 수많은 교회의 목사나 신학자들이 설교할 수 있는 근거는 증발해 버린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하면, 성서기자를 죽이지 않은 설교는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는 영원한 메세지가 그 안에서 무한하게 숨쉬고 있음을 구조주의는 직시하였던 것이다. 구조주의적 비평을 통하여 성서를 총체로서 고찰하면 성서는 성스러운 이야기이지 역사서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성서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역사에 스며든 메세지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종교적 의미가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성서가 수 천년의 기나긴 흐름을 감내하며 여전히 인류를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 안에서 호홉하는 독자의 해독을 통하여 성서가 신비로움을 드러낼 수 있는 코드(Code) 이상의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독의 코드 이상의 잉여분의 가능성이 무한하게 흐르는 텍스트가 성서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성서의 영원성과 신비로움은 어디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까. 만약 '그 무엇'이 텍스트의 심층에 깔려 있다면, 역사적 연구방법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과들은, 구조주의적 비평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지극히 미미할 것이다. 성서가 역사적인 사건에만 잠식되었다고 하면 영원성의 근거로서의 경전(Canon)은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구조주의는 바로 그 점을 직시한다. 구조주의적 비평은 성서의 영원한 진리가 신화와 설화로 변형되어 나온 것이고 그 배면의 영원한 형식은 역사를 관통하며 끊임없이 진리를 뿜어낸다는 점을 발견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다.
구조주의적 비평은 일단 난해하다. 숨막힐 듯이 조여오는 기호와 도식의 폭죽에 웬만한 성서학도는 쉽사리 지쳐버릴 수 밖에 없다. 구조주의에 대한 각양각색의 오해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 듯 하다. 난해함은 오해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해두어야 하겠다. 구조주의를 성서비평의 한 방법으로만 가두어놓고 그 비평은 교회현실, 설교현실에 있어서는 적용가능성이 떨어지니 구조주의를 모두 날려버리려는 모습들이 있다면, 오히려 아무 말이 없이 우리를 지켜보는 성서는 자신의 설 자리를 잃어간다고 통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구조주의적 비평은 우리들에게 발상법의 획기적인 전환과 끊임없는 관심을 요청한다.
) 이형원은 "해석자들의 주관이나 그들이 적용하는 구조주의자의 이론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산출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팟테는 "구조주의는 분석자가 실재로는 본문에서 작용하고 있지 않는 구조를 본문에 투영할 지 모르는 위험성을 수반하고 있다"고 그의 구조주의에 대한 결어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형원과 팟테는, '본문화된 구조'와 '구조화된 본문'의 분명한 경계선을 구조주의에서는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한다. 하지만 구조주의자의 관점에서 저 두 비판은 넌센스이다. 왜냐하면 '해석'은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화된 구조'와 '구조화된 본문'의 모호함 때문에 구조주의적 방법론이라는 장치를 포기한다면 우리들의 교회와 우리들의 설교는 다 엉터리가 되어버린다. 성서시대의 예언자의 본문화된 구조를 정확하고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설교자가 얼마나 가능할까. 즉 예언자의 본문화된 구조를 인지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의도(?)에 의하여 불순하게 '구조화된 본문'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화된 구조'의 순수함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다. 동시에 '구조화된 본문'의 불순한 세계와 어쩔 수 없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형원의 비판과 팟테의 비판은 다음을 참조하시오. 이형원, 『구약성서비평학 입문』 (서울: 침례신학대학 출판부, 1991), p.256 ; D. 팟테(이승식 역),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7), p.148.
우리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예를 통하여 '구조'가 인간과 얼마나 끈질기게 얽혀있고 착종되어 있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이렇게 구조주의를 비판한다. "구조주의 비평은 통시적 비평이 아니라 공시적 비평이고 공시적 비평 자체는 큰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역사성을 날려버린 비평은 공허한 내용만을 무기로 삼는 비평이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잎술로 읊은 기준인 <통시적>과 <공시적>이라는 관계야말로 철저하게 구조주의적이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구조'라는 관념은 인류 문명의 기나긴 전진 가운데서 획득한 숭고한 관념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세계를 구조로 이해하려는 구조주의의 모든 시도는, 결코 이 세계는 와해될 수 없는 하나의 근원과 진리 위에 있거나, 그 위에 있어야 함을 열망하는 진지한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조주의적 비평이라는 프로그램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고 앞으로 새로운 전망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역사적 비평에 대한 한계를 직시한 새로운 방법론적 접근이다. "왜 성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고 왜 하필 이스라엘의 하나님일까?"하는 화두의 결말을 우리는 아직도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구조주의적 방법론 안에서 그 화두는 새롭게 해결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또한 우리는 한신이라는 민중신학적 풍토에서 자연스럽게 신학적 성숙을 도모하면서도 민중신학적 방법론과 구조주의적 방법론의 함수관계를 깜박 놓치고 살았던 듯 하다. 구조주의는 우리에게 낮설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의 신학에 겹겹이 쌓여있는 지울 수 없는 단층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민중신학과 구조주의적 비평에 대한 깊은 논의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 구조주의와 여타 학문간의 다양한 논의는 이미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리라고 본다. 공시적 성서해석과 통시적 성서해석의 상호 교차점에 관한 논의는 Inter - textual criticism이라는 새로운 방법론 안에서 전개된다. 이 방법론은 본문의 사건을 다른 본문의 사건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론이다. 결국 이것은 공시적 차원과 통시적 차원을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성서해석의 형식을 제시한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와 융의 원형>에 대하여서는 다음 책에 일부 언급이 되었으니 참조. D. 팟테(이승식 역),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7), p.52.
우리는 슬프다. 언제까지 신학은 여타 학문의 그림자만 밟고 다니다가 자기 시간을 마감해야 할 운명인가! 신학은 학문의 코스모스이기 때문에 모든 학문을 최종적으로 수렴해야만 하는 운명인가? 구조주의적 성서비평의 뿌리는 구조주의적 사상이다. 사실 신학적인 독특함이 다른 비평학에 비해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구조주의적 성서비평은 여타 학문과의 관련성 속에서 전개된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구조주의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궁핍한 신학적 토양을 동시에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성서의 메세지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전략과 신학적 상상력을 구축해 나가는 작업이 우리 조선의 신학에 간절하지 않은가. 이제 펜을 접어야 할 때인 듯 하다. 마지막으로, 고도로 응결된 구조주의의 정신과 결이 베어나오는 스코필드의 문장에 시선을 건네며 글을 마감할까 한다.
구약성서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계속 고쳐 쓰여지면서 유지되어온 것은 유태인이라는 소집단이.... 자신들만이 무한한 과거를 가진 영광된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계승하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대의 이야기를 다시 이용했고, 자신들의 시대의 필요성에 걸맞은 설교를 하기 위해 새롭게 각색했다..... 많은 부분이 버려지기도 했고, 분실되기도 했다. 각각의 이야기와 문구들이 새로 고쳐 씌어지면서 유지되어왔고, 여기에는 인간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성서를 연구할 때에는 연대, 기원, 역사적 근거 등을 따지기 보다는 왜 그런 이야기들이 말해지고 왜 그런 이야기들이 기록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 스코필드 (구약신약개론, 1964) -
) 『성서의 구조인류학』,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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