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나 팝아트 같은 예술 장르 분석에서 사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시뮬라크르 개념은
사실 반(反)플라톤주의적인 현대 철학 일반의 근본 성격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바탕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현대 철학의 세 가지 주제가 기원의 부재,
역사의 부재, 합목적성의 부재이다.
기원과 역사와 합목적성은 아마도 플라톤의 신화를 통해 가장 잘 설명될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원본적인 모범적 진리인 이데아와 더불어 있었다.
그런데 이 세상으로 오는 동안 망강의 강 레테를 건너면서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
그래서 이승에 있는 모든 불완전한 존재자들의 목적은 다시 저 모범적인 고향,
이데아계를 어떤 식으로든 되찾는 것이다.
모범적 기원의 상실은 역사라는 과정을 만들어내며,
역사라는 과정은 궁극 목적으로서 저 잃어버린 기원을 되찾을 때 완성될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적 모델은 이후 그대로 서구 기독교 세계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플라톤적인 잃어버린 기원이 잃어버린 낙원의 신화로 바뀌면서 말이다.
시뮬라크르를 사유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들뢰즈(Gilles Deleuze)는 [플라톤과 시뮬라크르]라는 글에서 이 점을 설명하면서,
왜 시뮬라크르가 위험스러운 것으로 경시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은 그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으나, 인간은 죄 때문에
신과의 그 유사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했으며,
우리는 시뮬라크르가 되었고 감성적 실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도덕적 실존을 상실했다…….
이러한 설교는 시뮬라크르의 악마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원과 역사와 합목적성이라는 세 악기가 연주하는 철학에서 모범적 기원으로의
회귀를 부정하는 시뮬라크르는 이렇게 악마적인 것으로 위험시되었다.
그렇다면 현대 철학은 왜 이토록 위험스러워 보이는 시뮬라크르를 높이 떠받드는 것일까?
가령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이며,
시뮬라크르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들뢰즈).
시뮬라크르에 대한 몰두의 이면에는 아마도 기원적인 것,
원본적인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경계가 담겨있을 것이다.
원형적인 것, 본질적인 것, 순수한 것을 탐구하는 구도자적인
제스처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삶과 멀리 떨어진 형이상학적 주제로만 보이는 기원의 신화는 실은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으며 우리 삶을 위협할 수 있다.
원형적인 순수한 인종은 누구인가?
그것은 백인이다.
원형적인 성, 보다 우월한 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이다 등등…….
그리고 이러한 기원이 누리는 영광의 배후엔 늘 기원보다 열등한 주변부가 영광의
그늘로 자리 잡는다.
순수한 원천에 대한 향수와 자만심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거기엔,
순수하지 못한 것이 섞여든 유색인종들, 혼혈아들, 불법이민자들이 있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긍정은 바로 순수한 원형적 모범의 기준을 벗어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환대를 담고 있는 것이다. |
첫댓글 ZERO님께서 또 금새 명확히 찾아서 올려 주셨네요.
어쩌면 시뮬라크르의 의미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물이나 대상들은 모티브일뿐이고 복제나 복제의 변주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얘기할 수 있다는것... 그리고 그것이 주체가 되는 세상.
참 신나는 세상 아닙니까.
머리 아파 죽겠심더
잘 읽었습니다~~
재밋고 신나지만,,, 쉽지는 않네요~~
공짜로 책 한권을 짧은 시간에 통째로 삼켜 버렸네요 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