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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3) - 독락당 지은 뜻은?
회재는 양동마을의 손소의 조카로 어린시절 양동마을에서 살다가 이곳 독락당으로 옮겨왔다 처음부터 이런 큰규모가 아니었고 500여년의 역사를 통해 조성되어 온 것임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다.
회재가 7살때 그의 아버지 이번이 돌아가셨는데 그 돌아가신 아버지때부터 이곳 독락당에 초가삼간을 지어놓고 이 곳의 자연을 즐겼다 지금의 세심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회재가 정치적분쟁속에서 파면당하고 귀향하면서 본가의 양동마을에 가지 않고 이곳 독락당에서 둘째부인과 생활하였다.
과연 이언적은 왜 본가인 양동마을을 놔두고 이곳에 머물렀던 것일까? 독락당에 담긴 회재의 삶과 철학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독락당 7년 은거
옥산서원에서 1km 정도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독락당이 나온다. 회재는 김안로에 저항하다 조정에서 쫓겨나 김안로가 탄핵당할 때까지 약 7년간 이곳에서 머물며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때를 기다렸다.
독락당의 독락이란 당호는 맹자 "진심장구" 상편에서 가져온 말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옛날 어진 선비들만이 어찌 홀로 그렇지 않았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회재는 이곳 독락당에서 물 흐르는 소리에 마음을 씻고(세심) 홀로 도를 즐기며 세상의 권세를 잊고 지내고자 했다. 그러나 독락당에서의 생활이 도피나 좌절에 따른 유유자적이라기 보다는 적극적인 재도약을 위한 자기 반성의 시간이었을 가능성을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서는 다시 말하고 있다.
"막히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열리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한다."
지금 당장 벼슬길로 돌아가 세상에 보탬이 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자신 스스로를 선하게 하여 두면 언젠가 되돌아갈 그 날을 위해 학문 정진에 온 힘을 쏟아야겠다는 각오를 엿볼 수 있다.
맹자의 진심장구는 학문과 교육을 상당히 강조한 경구이며 독락당에서 둘째 부인과 지내며 언젠가 바르게 쓰이게 될 때를 위해 자신을 선하게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나 보다.
다시 생각해 보면 독락이란 홀로 즐겁게 지낸다는 뜻이나 맹자의 이 홀로 즐거이 지낸다는 말에 사마광은 자연이 이미 옆에 있으니 혼자가 아니고 자연과 더불어 즐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독락당이 훌륭한 자연 풍광 속에 자리잡은 뜻을 또 생각토록 한다.
세심대 소폭포
옥산계곡 세심대
유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이곳에서 초가집을 짓고 사철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닦고 청운의 뜻을 품었을 회재 이언적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세심대가 있는 옥산계곡은 독락당에서 은거하는 이언적에게는 세상과의 인연을 단절하는 첫번째 단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독락당을 한번 돌아보도록 하자.
독락당은 바깥에서 집안까지 단번에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있다. 집안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차를 거쳐야한다. 가장앞에 냇가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해서 집안 중간 중간에 담과 문을 통하는 절차등 여러개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런식의 여러단계의 절차에서 '세상 을 멀리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일련의 절차가 되는 것이다.
회재 이언적에게는 자기를 가르친 스승이 없다고 자신할 만큼 독창적인 학문의 틀을 갖추었던 인물이다. 물론 회재라는 호가 주희(주자)의 호 회암을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역시 고집스럽게 주자의 학문을 따른 것이지만 딱히 이끌어준 현실적 스승은 없었다. 그는 격군론 등으로 제왕학을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고 대학에 대한 주석을 새로이 하고 태극사상, 사단칠정, 인간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주기주기논쟁에서 주리철학의 토대를 다진 인물로 그 이름이 높다. 그런 그가 정치적 좌절 끝에 절망하지 않고 학문 정진을 자기 스스로 다지며 이 독락당의 건물을 은거의 공간으로 지으며 철저하게 은거를 위한 공간으로 설계한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영남학파의 독립적 계파를 가졌던 남명조식도 자신의 철학 사상을 자신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칩거한 당호 건물에 반영했듯이 독락당도 회재 이언적의 여러 사화가 점철되던 시대에 자신이나 유림들이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던 시대에 학문 정진을 대안으로 찾은 회재의 철학이 담긴 곳이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남명 조식의 학문과 철학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기획을 마련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독락당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별채이다. 최근 한옥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일반인들을 위해 개방되어 있고 방이 2개에 마루가 있는 구조로 미리 예약을 하고 하룻밤 정도 한옥 체험을 하고 싶다면 체험해 볼만하겠다. 회재 당시에는 공수간으로 쓰였던 곳이라 한다.
경청재
경청재는 경청재라 이름 붙이기 전에는 숨방채라고도 불리운다.
역락재
역락재의 현판은 그 유명한 명필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역락재의 역락은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낙호아에서 따온 것이니 아마도 이 역락재는 회재 이후 회재를 기리고자 찾아드는 많은 서생과 선비들이 잠시 머무르던 그런 공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독락당 내부 문간
동편에 옥류를 끼고 등심대,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및 세심대 등의 반석이 있어서 옥산서원으로 연결되고 이들을 둘러싼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및 도덕산 등과 더불어 이른바 사산오대의 경승을 이루는 곳이다.
북쪽에 사묘를 두고 중간에 서로 어서각, 동으로는 계정이 있으며 뒤로는 양진당이 있다. 독락당은 한국 전통건축의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살이의 특이한 평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별당이다. 기단이 낮으며 팔작지붕으로 남향해서 오른쪽 3칸은 대청이 되고 앞을 모두 터놓았으며 왼쪽 1칸만은 칸을 막아 온돌방을 꾸몄다. 그러나 원래는 제일 오른쪽 칸도 막아서 온돌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다. 대청 전면에는 문짝을 달은 듯 지금도 문설주가 남아 있다. 기둥은 단주를 사용하였고 초익공 계통의 구성과 동일하며 기둥 위에 얹은 주두로서 직접 대량과 도리를 받쳤다. 그러나 기둥머리에 꽂힌 첨차의 형태에는 아직 주심포집 건축의 전통이 남아 있다. 대청 연등천장에서 볼 수 있는 대량과 그 위에 종량은 제법 형식을 갖추어 다듬어져 있으나 양자 사이에 받친 대공은 양봉형의 간결한 형상이다.
독락당에서는 외부의 시선은 차단하고 있지만, 사랑대청에서 시냇물을 볼 수 있도록 동쪽의 담에 살창을 뚫어 놓았다. 이 살창을 통해서 앞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은 특출한 공간구성(空間構成)이며, 독락당 뒤쪽의 계정(溪亭) 또한, 자연에 융합하려는 공간성을 드러내 주려는 의도가 깃든 집이다.
독락당(옥산정사)
정면에는 퇴계 선생의 친필인 '옥산정사'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독락당' 현판의 글씨는 영의정을 지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쓰셨다.
독락당을 우선 멀리서 봐라보면 일반 양반집과 달리 전체적으로 숨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까운 예로 회재가 양동마을에 있는 자신의 동생에게 지어진 집인 향단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상반된다 이는 회재의 당시 입장이 집에 묻어나는 부분중에 하나이다
회재는 정치계에서 밀려나면서 세상과 떨어져 혼자 자연과 벗삼아 지내려 했다할 수 있다 이는 이름에서도 묻어나온다 독! 락! 당!
집은 입구부터 미로와 같은 느낌이 들것이다 은둔의 회재답다 안채와 사랑채보다 이집에서 가장 절정은 사랑채 뒷쪽 계정이다 회재가 가장 좋아한 공간이다 계정을 보면 회재의 당시생각을 옅볼수있다 세상에겐 폐쇄적이지만 자연으로는 열어두고 있다 전체적인 평면으로 볼때도 유일하게 이 계정이 선을 벗어나 계곡쪽으로 튀어나간것도 그 이유일 것이라추측해본다
회재는 정치적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절망보다는 자연을 보면 자신의 학문의 폭을 넓혔다 훗날 회재가 재등용됐을때 회재는 학문의 깊이가 상당하여 모든이들이 회재를 존경했었다.
독락당을 짓고 이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은거하며 느낀 정취, 그리고 독락당이란 공간을 구현해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가시화시킨 회재 이언적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지은 시 2편을 간단히 감상해 보자.
獨樂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무리 떠난 당신 혼자 시를 읊을 때
산새와 냇고기가 얼굴을 쳐다보는도다.
모두들 찾고싶은 기묘한 곳에 밤이 되니
자규새 우지지며 달님이 산을 몰래 쳐다보는도다.
存養
山雨蕭蕭夢自醒
忽聞窓外夜鷄聲
人間萬慮都消盡
只有靈源一點明
산속에 쓸쓸히 비내리니 잠이 절로 깨었는데
어느덧 창밖에는 새벽닭이 울어대는도다.
이제는 모든 근심 다 사라지고
영묘한 바탕(心)에 한가지가 밝아오는도다.
李彦迪
[출처] [소실점]독락당 I|작성자 목눌
독락당은 외부에 대하여 철저히 폐쇄적이고 은둔을 하려던 회재의 의지가 공간적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중 삼중으로 절차를 만들어 세상과 단절하고 조용히 혼자 즐기려는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4산 5대의 자계 옆에 낮은 지대에 집터를 닦고 건물의 기단도 낮추고 마루도 지붕도 낮게 만들어서 마치 땅에 붙박히는 듯 땅속의 굴혈에 들어앉은 듯하게 잔뜩 웅크린 팔작지붕의 건물의 모습이 마치 은거 당시의 회재의 심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독락당 별채 양진채를 바깥에서 본 전경
독락당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담으로 막힌 뒤뜰이 나오고 그 담에 난 일각문을 지나쳐 들어가면 독락당의 별채에 해당하는 계정 양진채에 들어서게 된다. 이 건물은 원래 회재의 아버지 이번이 쓰던 3칸짜리 초옥을 회재가 은거하면서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옆으로 두칸을 더 달아 계정이라 이름하였다.
양진암 편액
계정은 일명 양진암이라고도 하는데 양진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로 전해진다. 퇴계 이황은 회재 이언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고 학문에 힘써 사단칠정론을 정립했고 이언적을 기꺼이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했으므로 이곳에서 회재의 문덕을 기리는 뜻에서 이 양진암 편액을 썼을 터다.
퇴계 이황은 영남학파 학통의 거두가 되었다. 그러므로 회재 이언적은 조선의 양대 학파인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중 영남 유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성현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 된다. 율곡 이이가 기호학파의 핵심으로서 주류인 서인들의 존중을 받는 반면 상대적으로 비주류였고 소수파였던 남인들은 영남학파로서 회재 이언적과 이황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퇴계 이황이 스스로 이언적에게 영향을 받은 학문으로 자신의 학문을 평했으므로 이 독락당은 영남학파와 영남 유림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공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터다.
양진암, 왜 불가의 암자의 암자를 붙인 걸까? 이런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이 독락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로 정혜사지가 있다. 이 정혜사는 회재와 인연이 깊은 사찰로 어린 시절 예닐곱살때부터 회재는 정혜사에 유하며 글을 읽었고 김안로를 탄핵하려다 벼슬에서 쫓겨나 이곳에 머물렀을 때는 정혜사의 스님들과 친하게 교류하며 지냈다 한다. 아마도 회재는 정혜사의 스님들이 와서 편하게 머물다가라는 뜻으로 양진암이라 이름붙여 마치 유학자의 공부방 양진재보다 양진암이라 이름붙였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정혜사지 13층 석탑
정혜사의 사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 향토의 사서인 동경통지에 따르면 37대 선덕여왕 원년(780)에 당의 백우경이라는 자가 당나라로부터 망명을 와서 이곳 자옥산 아래에 우거하게 되었다. 그는 경치가 뛰어난 곳을 골라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왕도 행차한 바가 있었다고 하며,후에 이곳을 고쳐 세워 절을 마련했는데 곧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나마 경주 변두리지만 신라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던 아마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와중에 불타 없어졌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경주남산의 파불이나 불교천시 행위는 아마도 경주지역 향교나 서원들의 숭유억불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려 몽고의 침입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결과로 많이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대다수 조선시대 경주의 불교 유적을 멸시하는 사대부와 유림들의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회재 이언적 같은 이들은 불가를 천시 멸시하지 않고 스님들과 교류하며 은거 생활을 했다는 것은 진정한 우리 문화는 유불선의 세가지 이념과 종교적 틀이 어우러지며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고 이렇게 배타적이지 않았던 선비들의 생각과 실천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계정 안쪽에서 계정 편액을 향해 찍은 사진
계정 편액 이 편액의 글씨 주인공도 석봉 한호의 글씨라고 한다.
계정의 가장 큰 매력은 자연과 어우러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건축에 대한 정서는 우선 건물을 어떻게 기교를 부려 지었느냐 보다는 얼마나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울리느냐에 더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것을 볼 때 계정은 아마도 자연과 어우러져 인위적 작위적인 인간의 느낌이 없어진 최고의 경지에 놓인 건물이 아닐까 평가할 수 있다.
자계천에서 올려다보면 계정 오른쪽에 인지헌이라는 편액이 붙은 누대가 있다. 이곳에 걸터앉아 관어대를 내려다보며 회재는 계속 마음이나 씻었나 보다. 어질 인 지혜로울 지 어짊의 지혜를 갖는 방이란 뜻이니 방이름 하나 정말 근사하다.
계정에서 관어대를 내려다 본 모습
가을에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질 때 계정을 보면 회재의 아버지와 회재가 왜 독락당을 짓고 이 곳을 은거지로 택했는지 절로 느껴지게 하는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의 완벽한 어우러짐, 그래서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사마광이 말한 경지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건축학자들은 독락당의 건축적 정면은 바로 동쪽의 계곡쪽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동쪽 자연을 향해서는 열려진 정면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인간사회와의 절연과 자연을 벗삼기 위한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시사철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계정에서 자계를 내려다 본 모습
독락당과 개울을 구분짓는 담장의 일부에는 이렇게 나무 창살을 단 나무 창이 놓여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런 창살을 또 건물의 창살과 겹쳐서 보면 회재가 이 곳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혼자 있으려 하면서도 자연만큼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벗으로 생각하여 소통하려 했음을 느끼게 한다.
독락당 안채
회재는 두번째 부인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자격밖에 없었던 아내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늙으신 어머니를 잘 봉양했고 비록 서자가 되었지만 아들을 얻었으니 젊은 둘째 부인이 무척 아꼈나 보다. 회재는 죽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이 둘째 부인에게도 남겨 주었는데 이는 첩으로 차대받는 것을 막고 아들 서자 이전인과 그 후손들이 계속 받을 차별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였을 것이다.
이 안채에서는 독락당과 직접 통하는 문이 따로 만들어져 있어 엄격한 내외 구분을 하는 조선의 예법의 원칙 속에서도 부부간의 정을 그렇게 또 따지지 않으려는 회재의 또다른 면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비록 원칙에 의해 첩의 자격밖에 없는 아내이지만 부부로서의 정은 드러나지 않게 애틋했을 것이다. 둘째 부인의 소박하고 정갈한 손길이 나이어리고 첩에 불과한 자신에 대한 과분한 사랑을 주는 지아비에 대한 존경심의 마음이 따뜻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이중 삼중으로 깊숙이 은거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이 기회가 찾아오면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의 깊이로 또 어지러운 세상에 옛성현과 주자의 가르침이 왜 중요한지를 원칙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회재의 마음이 담겨 있는 독락당, 비록 윤원형 일파에 미움을 사 또다시 벼슬자리에서 밀려나 강계에 유배되었다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아들 이전인이 직접 운구해와야 하는 생애를 마감했고 죄인의 신분으로 죽었으므로 그 명예가 회복되어 문원공의 시호가 내려질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독락당을 짓고 독락당에서 이룬 주리철학은 조선의 많은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탁영대의 모습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굴원의 시 구절을 따 탁영대(濯纓臺)라 이름붙였다. 이밖에 자계 옥류를 따라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싶구나'라는 논어의 구절을 따서 영귀대, 마음에 불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의 등심대 등도 자계천을 따라 한번쯤 가볼만한 곳이된다.
독락당 뒷마당에는 지금은 조각자나무로 바꿔 부르는 주엽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유일한 주엽나무라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아마도 중국에만 있는 이 나무를 가져와 회재의 지인들 중 누군가가 선물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근거는 회재는 한번도 중국 사신으로 중국에 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락당에 이 나무를 심어놓고 가끔 보면서 중국 송나라의 주자를 생각하며 직접 그 성현을 대하듯 여러가지 상념에 빠졌을 법도 하다.
독락당 깊숙한 곳 왼쪽에는 어서각이라는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인종이 세자시절에 스승 이언적에게 직접 써서 보낸 인종어찰이 보관되어 있다. 이언적이 안동부사로 떠나게 되자 멀리 떨어져서 지내게 된 아쉬움을 인종이 써서 보냈으니 이 편지를 보관하기 위해 이언적의 아들 이전인이 전각을 지어 보관하게 된 것이다. 독락당 어서각에는 1513년(중종 8)에 실시한 사마시(司馬試)의 합격자 명단인 <정덕계유사마방목 (正德癸酉司馬榜目)>,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석각(石刻)하여 탁본한 <해동명적(海東名蹟)>, 회재의 친필 저술 5종 13책을 비롯한 많은 서적과 회재의 유품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 어서각 현판 아래에는 경구가 하나 적혀 있는데 경상도 관찰사가 이 어서각이 보관한 서책들을 절대 밖으로 반출할 수 없다는 명령이 적혀 있다.
이러한 명령은 옥산파 후손들이 자신들이 보관해온 이언적의 유품들을 어떻게든 양동파 후손과의 경쟁 속에서 보호하고자 공권력인 관찰사에게 명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회재 이언적은 여강이씨 본가가 있는 양동마을보다 이곳 독락당에 더 정을 두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기를 바란다. 회재 이언적 저 북한 평안도 강계 땅에서 죽었을 때 회재의 유산은 적자인 이응인에게 대부분 돌아갔으나 이언적의 정실 부인과 아들 이응인은 회재의 재산을 이들에게 나누어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적서차별로 인한 가족간의 차별의식은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던지 정실 부인과 이응인이 서자인 이전인과 둘째 부인에게 재산이 나누어지는 것을 합의하고 수결한 기록이 박물관 등에 전해진다.
이전인은 분재받은 재산을 옥산서원을 세우고 이 독락당을 지키는 데 활용하면서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또 자신의 서자 신분과 후손들의 차별을 철폐하여 장벽을 넘어서는 데 활용한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직접 강계에서부터 아버지의 시신을 운구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옥산파 후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보관해온 이전인이 아버지 회재의 시신을 장장 6개월에 걸쳐 운구했던 당시의 상여의 일부인 대나무의 모습이다. 6개월에 걸쳐 아버지 시신을 짊어매고 직접 운구하고 경주에 와서 3년의 시묘살이까지 했던 이전인, 분명 효자로 칭송받을 일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서자였고 아버지 회재 이언적은 이전인을 친자로써 아꼈지만 제사를 지내는 계후자로서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는 아들 이전인의 효심과 그가 독락당의 어서각과 옥산서원을 세우고 이를 통해 아버지의 명예, 그와 그의 후손이 서얼차별의 엄혹한 장벽을 넘어 극복해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번 기획을 마무리 하겠다. 다음편을 훨씬 쉽게 이해하기 위해 최근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한 독락당 어서각은 왜 굳게 닫혀 있었나? 편을 봐두는 것도 좋다.
-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