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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中年(중년)남자들이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서 가끔 들을 수 있었던 이 감미로운 악기 소리가 이제 전국의 동호회를 통해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연말 송년회가 시작되면서 아마추어 티를 벗은 연주자들은 연주 요청에 응하느라 바쁜 계절을 맞고 있다. 색소폰 인구가 증가하면서 관련 산업도 확장 중이다. 악기점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구인·구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대학의 관련 학과에도 학생들이 몰린다. 색소폰의 매력은 무엇일까. 왜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색소폰 마니아가 됐을까.
수소문 끝에 독창적인 연주법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서정근 관동대 음악과 교수를 인터뷰하기로 했다. 2008년 12월 4일 韓美(한미)연합사령부 정참부(정보참모부) 송년회가 열리는 서울 대방동 공군회관을 찾아갔다. 오후 6시에 시작된 행사는 만찬에 이어 공연으로 들어갔다. 국악공연과 공군군악대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객석의 잡담이 끊이지 않아 다소 지루한 분위기였다. 9시가 되자 서 교수의 연주 차례였다.
서 교수는 무대로 등장하지 않고 출입구 밖에서 색소폰을 불며 등장했다. 순간 장내 분위기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서 교수는 색소폰을 불며 객석 테이블을 빠져 나갔다. 무대에 올라 라틴곡을 연주하는 동안 흑인 장병들이 파트너와 춤을 추며 흥을 돋우었다. 이어 그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간드러지게 연주했다.
“색소폰은 멜로디만으로 연주를 하면 감명을 주지 못합니다. 화려한 스케일보다 음을 제대로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죠. 예를 들어 ‘가슴 아프게’(남진 노래)를 연주할 때는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통해 진짜 가슴이 아프고 미어지는 듯한 생생한 감응을 객석에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연주를 할 때마다 ‘가사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노력해요. 연주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요. 색소폰은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라는 점에서 대단히 매력입니다.”
서 교수가 장사익 버전으로 연주하는 ‘동백 아가씨’를 들어본 사람들은 ‘까무러칠 정도’의 감응을 한다. 그가 윤시내의 ‘열애’를 연주할 때면 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노랫말을 만든 사람을 떠올리며 감정에 몰입한다고 한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서정근 교수의 연주를 들은 한 네티즌은 ‘절벽 끝에서 생명을 다하기 전에 부르는 음악 같습니다’는 댓글을 달았다.
서 교수는 우리의 트로트나 민요가 색소폰과 잘 어울린다고 주장한다. 그는 재즈의 본고장에서 색소폰을 배우지 않고, 국내에서 독학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주법을 과시하는 토종 연주자다. 서 교수의 설명이다.
“색소폰에 나만의 감정을 이입시키기 때문에 내가 연주하는 소리는 서양식 주법에 의한 연주가 아니라 바로 내가 만든 ‘오리지널 서정근 표’입니다. 때문에 아무도 쉽게 흉내를 못 내요. 저는 늘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들 수 있는 연주자가 진짜 연주자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도 남의 소리를 따라 하지 말고 자기만의 개성을 만들어 보라고 주문합니다.”
우리의 전통 음계와 유사한 색소폰 소리
지금까지 서정근 교수는 세종문화회관 콘서트 27회, 유럽 15개 도시 초청공연(1995~1999), 호주 및 뉴질랜드 공연 등 총 60회 이상의 콘서트를 가졌다. 색소폰 붐이 일기 시작하던 5년 전 관동대 교수로 스카우트되면서 그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제자들은 연주나 레슨으로 바빠졌고 색소폰 학원을 차려도 ‘서정근’이란 이름을 달면 수강생들이 몰렸다. 제자들이 초청공연을 나갈 때도 ‘서정근 교수 제자’라고 하면 대접이 달라진다고 한다. 색소폰을 구입하러 악기점에 가서도 “서정근 교수가 보냈는데요”라고 하면 조금이라도 할인을 해주거나 액세서리 하나라도 끼워준다는 것. 서 교수의 설명이다.
“독일 한인회장 초청으로 프랑크푸르트 공연을 갔을 때 우연히 아랍인 카페에 들렀어요. 흑인 유학생들이 재즈를 듣고 있기에 즉석에서 연주를 해줬어요. 그러자 흑인들이 몰려와 술값을 다 내고 가더군요.”
연주자와 청중을 동시에 매료시키는 색소폰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서정근 교수는 “한국인 심성에 맞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2층에서 새음악기사를 운영하는 박대식씨는 “색소폰은 처량한 소리가 매력”이라고 말한다. 박씨는 1972년부터 색소폰을 판매하는 악기점을 운영하고 있다.
“재즈나 블루스의 팬타토닉(5음계) 스케일이 우리 전통 음계의 궁상각치우와 비슷합니다. 색소폰이 재즈에 잘 맞는 소리를 타고난 거죠. 우리 조상들은 음악적 재능이 우수하다고 봐요. 박자 감각에서도 4박자는 기본이고 ‘굿거리 장단’ 같은 3박자 리듬에 익숙합니다. 색소폰이 내는 소리는 인간의 육성과 유사할 뿐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몸으로 배웠던 음계라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보편적 정서인 ‘恨(한)’의 정조를 비애미로 표현했다. 전통음악의 樂調(악조)에는 界面調(계면조), 羽調(우조), 平調(평조) 등 세 가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계면조와 우조다.
계면조는 슬프게 흐느끼는 리듬으로 서양음악의 단조에 해당되며 판소리, 시조, 남도민요 등에서 널리 쓰인다. 계면조는 감상적이고 애절하고 고독하고 처절하다. 또 부드럽고 한스럽고 여성적이다. 우조는 웅장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장조 음악이다.
국악예술학교를 설립(1960년)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朴憲鳳(박헌봉·1906~1977)씨는 저서 <창악대강>에서 계면조를 이렇게 설명했다.
“성음이 美麗淸高(미려청고)하고 애원처절하며 감상적이다. 한스럽고 고독한 애수가 얽혀질 때는 독특한 계면조의 정서 어린 창법이 더욱 효과적이다. 예컨대 우조가 花爛春盛(화란춘성)의 만물이 성장하는 봄을 상징한다면 계면조는 서리 내리는 가을 달밤에 기러기 소리 지저귀는 가을을 상징한 격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벨기에의 악기 제조상인 아돌프 색스(1814~1894)가 1840년대에 만든 색소폰이 우리의 전통음악과 정서적 맥이 닿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색소폰은 재즈나 블루스나 트로트처럼 고독한 애수를 뿜어내 상처 입은 영혼을 달래주는 악기다. 음량이 풍부하고 미세한 리드의 떨림이 확장돼 솔로 연주가 돋보여 ‘천의 얼굴’을 가진 악기로 통한다.
박씨는 “1970년대 중반 악기수입 자유화 조치 이전에는 돈이 있어도 색소폰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한다. 그 무렵 작곡가 이봉조씨가 가수 정훈희씨와 함께 프랑스 국제가요제에 참가했다가 귀국길에 값비싼 색소폰을 구해 왔다.
그가 현미와 함께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밤안개’를 들은 사람들은 흥분을 쉬 가라앉히지 못했다. 수입산 색소폰이 국내에 판매되면서 이 악기는 대중음악의 선두주자로 나서 지금은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색소폰 통해 삶의 질 달라져
서울 도봉구청 사회복지과에 근무하는 최생용(51)씨는 “색소폰을 부는 사람에게는 정신적 외로움을 달래주고, 듣는 사람들에게는 정서적 승화를 시켜 준다”라고 말한다.
“구청에서 자원봉사 지원업무를 총괄하고 있는데, 과거 자원봉사는 청소, 세탁 등 노력봉사가 많았어요. 요즘은 이것을 기계로 대체하는 대신 음악을 통해 상호 소통하는 형식의 자원봉사가 많습니다. 1990년대에 30여 명의 자원봉사자로 기악단을 만들었는데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등의 연주자가 참여했습니다. 제가 나가는 교회에서 2008년 9월에 색소폰 찬양단을 모집했더니 순식간에 20명이 몰렸습니다. 색소폰 인구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제가 색소폰 교실을 운영하며 개인레슨을 해주고 있는데 2008년 크리스마스 때 첫 공연을 가졌습니다.”
최생용씨는 색소폰을 연주하면서 일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회복지과 직원으로서 매주 서울 우이천에서 사랑음악회를 열고 고아원, 양로원 등 불우이웃돕기 자선공연도 수시로 펼친다. 지하철에서 솔로 연주로 성금을 모아 결식아동 돕기에도 나서고 있다. 직장생활 외에도 매주 3일 개인레슨을 하고, 주말에는 각종 연주에 초청을 받아 나간다. 수입도 짭짤한 편이다. 제자 중에는 외교관 출신의 청와대 직원도 있고 여성도 4명이나 된다. 학원을 차려 사업을 하는 제자도 2명이나 된다.
“색소폰을 배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악기로 봉사활동을 하고 사회참여를 할 수 있어 보람이 크죠. 나이 들면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은데 저는 갈수록 친구가 많아져요. 인간 승화가 되는 것 같아서 하루하루 삶이 희망찹니다. 삶의 질이 달라졌다고 할까요. 색소폰 특유의 저음에 몸을 떨다 보면 어딘가 내 영혼이 답을 해주는 것 같더군요.”
그는 가끔 인사동 낙원상가 부근의 7080 라이브 카페인 ‘소리마당’에서 색소폰 연주를 한다. 이곳에서 민요 소리꾼 이장학을 비롯 전영원(기타), 윤영배(타악)씨 등 4인조가 그룹 공연을 하는데, 매일 중년층 고객들이 몰려 그 열기가 뜨겁다. 최생용씨는 1990년 초반에 교회 학생수련회를 인솔할 때 피아노를 치다가 색소폰 연주하는 소리에 반해 독학으로 익혔다. 그 후 몇몇 연주자를 만나 한 수 배우면서 일취월장했다.
색소폰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조금씩 다르다. 새음악기사 박대식씨는 IMF 외환위기 직후인 10년 전부터 라고 말한다.
“공무원이나 직장인들이 은퇴를 했지만 아직 체력이 왕성할 나이였죠. 전에는 은퇴를 하면 골프나 레저, 아니면 술로 소일했는데 생활습관이 바뀌고 자기계발에 눈을 돌리면서 색소폰을 찾기 시작했어요. 특히 5~6년 전에는 웰빙 바람이 불면서 정신과 육체 건강에 좋은 색소폰이 각광을 받은 거죠.”
나이 든 사람이 색소폰 하면 치매 예방
박씨 단골 고객 중에 색소폰 마니아인 한의사가 있다. 그 한의사가 “나이 든 사람일수록 색소폰을 하면 치매 예방에 좋다”는 말을 했다. 악보를 익혀야 하므로 머리를 써야 하고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니 치매 예방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퍼지면서 60~70대에서도 색소폰 연주자가 늘어간다는 것이다.
“그 나이에 연주를 하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부인이 촬영을 해주고, 가족들이 꽃다발 안겨 주죠. 이게 가족의 행복 아닙니까. 색소폰 하는 남자들의 부인은 남편 바람 피우는 걱정을 안 해요.”
색소폰 인구 증가 요인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돈과 시간의 여유다. 6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악기를 다룰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낙원상가에서 만난 최영찬(62)씨는 중학교 때부터 브라스밴드에서 색소폰을 불기 시작해 군악대를 거쳐 직업 연주자로 활동하다 최근 은퇴했다. 1970~80년대에는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연주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제 은퇴를 하고 나니 색소폰 바람이 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남훈(서경대 2)씨는 대학에서 색소폰을 전공하고 있는데 연주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다.
색소폰 인구 증가에 대해 최생용씨는 “중국산, 체코산 등 악기 값의 저렴화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005년을 기점으로 값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요. 전문가들은 100만~150만원대 악기를 구입해야 제대로 소리 낸다고 하는데 35만원대 체코제를 불어도 연습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요. 또 색소폰 동호회들이 많이 생겨 큰 부담 없이도 배울 수 있어 색소폰 인구가 많이 늘어났을 겁니다.”
활발한 동호회 활동
그렇다면 국내의 색소폰 인구는 얼마나 될까. 색소폰 마니아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인터넷 사이트 ‘색소폰 나라’를 운영하는 박세일(40)씨를 만났다. 박씨는 경기도 하남시 자택에서 이천에 있는 직장으로 출퇴근을 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사이트에서 ‘버드’라는 닉네임으로 통한다. ‘버드’는 1995년에 작고한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다.
“색소폰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찰리 파커처럼 나도 색소폰에 한번 미쳐 보자는 뜻으로 이런 닉네임을 지었어요. 1997년에 직장 동료들과 회식을 하는데 백발에 50대 중반의 주점 사장이 색소폰 연주를 하는 겁니다. ‘나도 저 나이에 저런 멋쟁이가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색소폰 배우려고 마음 먹었는데, 그때는 아직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관련 정보를 구하기 어려웠어요. 물어 물어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에 있는 학원에 등록했죠. 그때 고생한 것 생각하며 정보공유 차원에서 이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박세일씨가 사이트를 만든 것은 1999년.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등록된 동호회가 150여 개나 되고 “등록시켜 달라”며 대기 중인 미등록 동호회를 합쳐 모두 400여 개가 된다. 회원들의 직업은 주로 전문직이나 자영업자가 많다. 이 사이트의 전국 지부 현황을 보면 서울과 경기를 각각 동서남북으로 나누고 인천, 부산·경남, 대구·경북, 광주·호남, 대전·충청, 강원·제주 지역으로 분류했다. 각 지부 산하에 동호회들이 등록된다.
동호회에 등록되려면 최소 회원이 20명이고 학원이나 레슨연습실이 아닌 순수 아마추어라야 한다. 대전 고운소리색소폰 동호회의 경우 회원이 77명이나 된다. 전남 영광군의 옥당골 음악동호회는 23명이 등록했다. 현재 ‘색소폰 나라’ 회원 수가 총 7만여 명이 되는데 이 사이트에 매일 7000명 정도가 방문한다고 한다.
사이트 하단에는 36개의 악기점 및 색소폰 학원 링크 광고가 붙어 있다. “이 사이트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에 박세일씨는 이렇게 말한다.
“회원들에게 서비스 차원으로 MP3용 음악 파일을 많이 올려 놓았는데, 이것이 종종 부하가 걸려 유지비용이 들어갑니다. 그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한정된 광고만 받고 일체의 상업성을 배제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순수성을 잃기 쉬워요.”
이 사이트에는 ‘명예의 전당’ 코너가 있어 연주 실력이 좋은 회원들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코너는 박씨가 매달 선정하는데 30명 가량 올라간다. 그 기준이 엄격하다고 한다.
“아마추어냐 프로냐는 별 문제가 안 됩니다. 클릭 수 1500회 이상이면 등재됩니다. 사실 이게 말이 좀 많아요. 회원들이 ‘우리 원장님은 정말 잘 부는데 왜 안 올려주나요’라든지 ‘우리 사부님은 고수인데 좀 올려줄 수 없느냐’는 항의를 해와요. 회원들 사이에서는 등재가 명예로 통해요. 과열경쟁이 된 거죠. 그러나 다 들어주다 보면 엉망이 될 거 아닙니까. 제가 연주실력을 평가해서 선정한다면 더 문제가 생기겠죠. 무조건 클릭 수로 따집니다.”
‘색소폰 나라’ 회원 중에는 異色(이색) 인물들이 많다. 여객선 선원으로 선상에서 연주를 하는 회원은 뱃고동 대신 색소폰 소리로 출항을 알린다. 배추 트럭 위에서 “배추가 왔어요”하는 확성기 소리를 내지 않고 색소폰을 불며 주부들을 유혹(?)하는 회원도 있다.
색소폰 인구 50대가 가장 많아
한 부동산중개업소 주인은 사무실에서 매일 고스톱으로 소일하다 색소폰을 배운 후 화투와 담을 쌓고 지낸다. 그 외에도 복싱선수, 레슬링 선수, 식당 주인, 국회의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박세일씨도 색소폰을 처음 배우던 신혼 초에 주말마다 동호회를 쫓아다니느라 바빴고, 평일에는 집안에 방음부스를 설치해 연습을 하느라 아내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박씨가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性比(성비)로 보면 남자가 82%로 압도적이며 남자의 연령별을 보면 30대 24%, 40대 25%, 50대 이상 51%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 이용자를 연령대로 보면 50대 이상은 10%에 불과하고 40대는 18%에 그친다. 색소폰 인구는 50대가 주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40대까지 포함시킨다면 이른바 ‘7080세대’가 색소폰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생존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앞만 보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제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며 자아실현에 눈을 뜬 것이다. 색소폰은 쓸쓸한 중년의 오후에 좋은 벗이 되어 ‘마누라 다음으로 아끼는 보물’이 됐다.
2008년 한 해 동안 국내 음악계에는 유명한 색소포니스트들의 내한 공연이 줄을 이었다. 색소폰의 마술사 케니 G, 미국의 케니 가렛, 데이비드 샌본, 80세의 노장 소니 콜린스, 찰스 로이드 스카이 트리오 등의 공연으로 색소폰 마니아들을 열광시켰다.
색소폰 大家의 출현을 기다리며…
색소폰 열기는 산업에도 영향을 끼친다. 야마하 공식 대리점인 새음악기사 박대식씨의 설명이다.
“국내에서는 색소폰 생산이 안 되고 있어 국내 수요는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수입되는 물량 중 日製(일제) 야마하가 600대 정도 수입돼 매월 전체 수입물량의 40%를 차지합니다. 대만제, 중국제 등을 다 합치면 월 1500대, 1년이면 1만8000대인데 5년만 잡아도 9만대가 수입됐다고 봅니다. 전국에서 색소폰을 취급하는 악기점이 아마 500개는 될 겁니다. 이만하면 한국에서도 색소폰을 만들 만하지만 인건비 부담 때문에 힘들어요. 야마하도 低價(저가) 모델은 인도네시아나 중국에서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만들어 옵니다. 요즘은 대만제도 중국제에 밀려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터넷 사이트 ‘색소폰 나라’에는 색소폰을 가르치고 배우는 구인과 구직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개인정보를 상세하게 적어 놓을수록 구직이 잘된다. 색소폰 학원에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난다고 한다. 개인레슨은 개인 인맥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집계는 어렵지만 실력이 뛰어날수록 레슨만으로도 생활이 될 정도라고 한다.
한국의 색소폰 동호회는 바야흐로 춘추전국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박세일씨는 2009년쯤에 동호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콘테스트를 실시할 계획이다. 이제 강호의 고수를 가려낼 때가 온 것이다.
조선시대 빼어난 소리꾼이 나오면 ‘龜年(구년) 같은 樂人(악인)’이 나왔다고 칭송했다. 龜年은 당나라 詩聖(시성) 두보의 시 ‘江南逢李龜年’(강남봉이구년: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에 나오는 궁정 명가수다.
두보는 그의 소리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제 색소폰 연주자 중에서도 ‘케니 G 같은 ○○○’라는 타이틀이 붙는 연주자가 나올 것이다. 서양 악기와 한국의 정서가 만나는 곳에 중년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제 색소폰의 大家(대가)가 한국에서 나올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