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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 김우굉 선생 문과 동방록
해제 외후손 인동 장달수
개암 선생과 동방급제 한 영남 분으로는 서애 유성룡 선생과 죽유(竹牖) 오운(吳澐) 선생 입니다
시험일 1566년(명종 21) 10월 20일 (윤달)
합격자발표일 1566년 10월 22일 (윤달)
시험종류 별시(別試)
시험명 병인21년별시방(丙寅二十一年別試榜)
시험관 독권관(讀卷官)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권철(權轍)
독권관(讀卷官) 병조판서(兵曹判書) 박충원(朴忠元)
독권관(讀卷官) 행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 박순(朴淳)
승지(承旨)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홍천민(洪天民)
대독관(對讀官) 공조참의(工曹參議) 목첨(睦詹)
대독관(對讀官) 형조참의(刑曹參議) 이식(李拭)
대독관(對讀官)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기대승(奇大升)
대독관(對讀官)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황정욱(黃廷彧)
시험문제 책문(策問)
문과 장원급제 : 이충원(李忠元)
급제인원 : 17명
무과 장원급제 : 송수영(宋壽永)
급제인원 : 17명
이충원(李忠元) 1537(중종 32)∼1605(선조 38). 갑과 1위 장원급제 당시 32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보(元甫) 또는 원포(圓圃), 호는 송암(松菴) 또는 여수(驢叟).
정종의 제10자 덕천군 후생(德泉君厚生)의 현손이며, 효백(孝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손(敬孫)이고, 아버지는 간(蕑)이며, 어머니는 정자견(丁自堅)의 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 걸어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 서울로 돌아와 형조참판에 특진되었다. 그뒤 중추원의 첨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에 봉해졌고,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작품으로는 경기도 고양의 「계원군이의묘비(桂原君李艤墓碑)」와 광주(廣州)의 「우찬성조공신도비명(右贊成曺公神道碑銘)」가 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홍혼(洪渾) 1541(중종 36)∼1593(선조 26). 을과(乙科) 1[亞元]위 급제연령 26세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혼원(渾元), 호는 시우당(時雨堂).
임(任)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림(景霖)이고, 아버지는 중추부도사(中樞府都事) 필세(弼世)이며, 어머니는 윤환(尹桓)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고, 1568년(선조 1) 주서와 검열을 거쳐 전적에 올랐으며, 곧 공조좌랑이 되었다. 1573년 정언과 1578년 지평을 거쳐 1579년 집의가 되고,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1583년 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뒤에 병조와 형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판결사와 강원도관찰사 및 성주·양주의 목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부제학이 되어 왕의 몽진을 호종하였으나, 과로로 인해 신병을 얻었다.
송도에서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병이 위독해지자 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예산에 돌아가서 곧 죽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그의 가족은 10년간 국가로부터 진휼(賑恤)을 받도록 특전을 받았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교유가 돈독하였다
김우굉(金宇宏) 1524(중종 19)∼1590(선조 23) 을과(乙科) 2[探花郞]위 급제연령 43세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岩). 경상북도 성주 출신.
종혁(從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도승지 치정(致精)이고, 아버지는 삼척부사 희삼(希參)이며, 어머니는 청주곽씨(淸州郭氏)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해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 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7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 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우옹(宇顒)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자,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 수를 지어 주며 이별했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상주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개암집』이 있다.
정사위(鄭士偉) 1536(중종 31)∼1592(선조 25). 을과(乙科) 3위 급제연령 31세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홍원(弘遠), 호는 병은(病隱).
옥(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덕(大德)이고, 아버지는 질(耋)이며, 어머니는 홍우필(洪佑弼)의 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이어 형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4년(선조 7) 홍문록에 입록이 되고, 헌납을 거쳐 1577년 부수찬으로 평안도경차관이 되어 전염병이 휩쓸고 있는 도내를 순방하며 구호한 뒤 1581년에 수찬·집의가 되었다.
그 뒤 사간이 되어 이이(李珥)가 삼사의 탄핵을 받자 이를 힘써 변호하였다. 1587년 강원도관찰사로 재직 중 백성의 토지를 빼앗고 또 허락 없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죄로 한때 삭직되었다. 이듬해 도승지가 되고, 전주부윤을 거쳐 1591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로서 임금을 평양에 호종, 다시 세자를 따라 강계로 가던 도중 맹산에서 죽었다. 원종(原從)의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나신국(羅藎國) 1524년(중종 19)~미상 병과(丙科) 1위 급제연령 43세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성좌(誠佐)
아버지는 나효손(羅孝孫)
명종(明宗) 10년(1555)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 좌랑을 지냈다.
노준(盧埈) 1538(중종 33)∼미상 병과(丙科) 2위 급제 연령 29세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자평(子平).
아버지는 직제학 한문(漢文)이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좌랑으로 《명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1587년(선조 20) 동래부사·파주목사를 지냈으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최황(崔滉)1529년(중종 24)∼1603년(선조 36). 병과 3위 급제연령 38세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언명(彦明), 호는 월담(月潭). 한양 출신.
아버지는 군수 여주(汝舟)이며, 어머니는 한세륜(韓世倫)의 딸이다.
이소재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1572년(선조 5) 학유를 거쳐 검열이 되었고, 사국(史局)에 뽑혀 직필로써 김성일(金誠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뒤 공조·형조의 좌랑, 정언, 해운판관을 지내고, 경상도도사가 되어서는 군적(軍籍)을 잘 다스렸다.
1576년 수안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어 고을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으며, 그 이듬해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가 그 지방의 기한(饑寒)과 국방대책 8조를 상소하였다.
그뒤 집의·사간·예조참판·대사간·이조참판·한성판윤·대사헌 등을 거쳐 159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간에 1583년에는 성절사로, 1589년에는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평난(平難)·광국(光國)공신에 각각 3등으로 녹훈되고 해성군(海城君)에 봉하여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평양까지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왕비와 세자빈을 배종(陪從), 희천에 피난하였고, 이듬해 검찰사(檢察使)가 되어 왕과 함께 환도하여 좌찬성·세자이사(世子貳師)로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응(李凝) 1499년 ~미상 병과(丙科) 4위 급제연령 68세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경(成卿)
증조부는 상산수(商山守) 이계보(李繼保). 아버지는 이유정(李惟貞)
명종(明宗) 16년(1561) 27세로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
호조좌랑(戶曹佐郞)를 역임하였다.
구관(具灌) 미상 병과(丙科) 5위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자중(滋仲).
증조부는 구치홍(具致弘). 아버지는 구팔원(具八元)
시정(寺正)을 역임하였다.
김황(金滉) 미상 병과(丙科) 6위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호연(浩然). 호는 어촌(漁村)
조부는 김수장(金壽長). 아버지는 김자양(金自陽)
명종(明宗) 4년(1549) 생원시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21년(1566) 병인(丙寅) 별시(別試)에 급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오운(吳澐)1540년(중종 35)∼1617년(광해군 9). 병과 7위 급제연령 27세
본관은 고창(高敞). 함안 출생.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
수정(守貞)의 아들이다.
퇴계 이황(李滉)· 남명 조식(曺植) 문인.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編修官)을 거쳐 성균관사성을 지낸 뒤 사재감정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백령(白嶺)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부근의 전투와 현풍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제독의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동고분전한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한준(韓準)1542년(중종 37)∼1601년(선조 34). 병과(丙科) 8위 급제연령 25세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칙(公則), 호는 남강(南岡).
아버지는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수경(守慶)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유조의(柳祖誼)의 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되었다. 예조좌랑·장령·좌승지·전라도관찰사·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588년(선조 21) 우참찬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연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을 알리는 고변서(告變書)를 조정에 비밀장계로 올렸다. 그 공으로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이 되고 좌참찬에 올라 청천군(淸川君)에 봉하여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판서로 순화군(順和君)을 호종, 강원도로 피난하였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전임되었으며, 진하 겸 주문사(進賀兼奏聞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가 되고, 1595년 사은 겸주청사(謝恩兼奏請使)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씨를 잘 써서 사자관(寫字官)을 지냈고, 광주(廣州)의 우언겸묘표(禹彦謙墓表)를 썼으며, 필적으로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 평소 교유(交遊)를 즐기지 않았으며, 근면하고 검소하여 죽은 뒤 장사를 치를 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영남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김지(金祉) 1525년~ 미상 병과(丙科) 9위 급제연령 42세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지(成之) 충청도 괴산출신
아버지는 김한웅(金漢雄)
명종(明宗) 19년(1564) 생원 진사 양시합격.
명종(明宗) 21년(1566) 급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김행(金行)1532년(중종 27)∼1588년(선조 21). 병과 10위 급제연령 35세
본관은 강릉.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長浦).
할아버지는 군수 사희(士熙)이며, 아버지는 국평(國枰)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어려서 휴암 백인걸(白仁傑)과 청송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수침은 우계 성혼(成渾)의 아버지인데 그는 성혼과 동문수학하고 평생 형제처럼 지냈다.
벼슬은 내직으로 전적·형조좌랑·호조좌랑·예조정랑·한성부서윤·사성·사도시정(司䆃寺正)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무장현감·고양군수·서천군수·양주목사·광주목사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주로 외직에 머물고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필법이 호장활동하다는 평을 들었고, 1575년(선조 8)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증도가 證道歌〉를 보완하여 간각(刊刻)했다.
또한, 무예와 지략에도 뛰어나서 1588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그를 천거하여 전라도병마절도사의 물망에 올랐으나 곧 죽었다. 이제신(李濟臣)과 친교가 두터웠다.
류성룡(柳成龍)1542년(중종 37)∼1607년(선조 40).병과(丙科) 11위 급제연령 25세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공작(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중영(仲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19년 생원. 진사 양시 합격
관직은 영의정. 시호 문충(文忠)
장문한(張文翰) 1527년~미상 병과(丙科) 12위 급제연령 40세
본관은 태원(太元). 자는 백거(伯擧) 개성 출신
아버지는 장예근(張禮瑾)
명종(明宗) 13년(1558) 생원시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21년(1566) 급제
서령(署令)을 역임하였다.
정언신(鄭彦信)1527년(중종 22)∼1591년(선조 24). 병과 13위 급제연령 40세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
예조좌랑 진(振)의 아들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그뒤 전라도도사·장령·동부승지 등을 거쳤다.
그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가 변민(邊民)을 잘 다스리고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풍족하게 비축하였다. 이어 대사헌으로 옮겼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선조 16)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막하로 이순신(李舜臣)·신립(申砬)·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 등 뛰어난 명장들을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북쪽 변방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하였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그뒤 역가문서(逆家文書)가운데에 그가 들어 있다는 것을 구실로 정철 등으로부터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투옥, 사사(賜死)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1599년에 복관되었다.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