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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도 창조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창조주라는 용어는 오직 기독교의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고유명칭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우주 만물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주라는 명칭을 다른 종교들이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불허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정립할 때에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정립한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1위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 주권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로 정립하는 것을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창조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 사역이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의 창조에 함께 하신 것이다.<창1:2,26>
“플라톤”<Platon> “필로”<Philo>“세네카”<Seneca> 등은 하나님은 자족하심으로서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여 어떤 것을 창조하실 필연적인 이유가 없으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창조의 목적을 피조의 행복, 특히 인류의 행복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결론은 많은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특히 종교개혁 시대의 인본주의<Humanism>나 18세기의 합리주의<Rationalism>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인류의 행복이라는 사상을 가장 지지한 사람은 “칸트”<Cant>와“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 “리츌”<Ritschl> 등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다음의 이유로 인하여 비판되었다.
<1>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영원불멸의 절대적 진리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과 같은 오해를 제공할 수 있다.
<2> 이 이론은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인류의 행복이 하나님의 창조 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인류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행복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론 인류의 고난을 아담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녕 인류의 행복이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까지 유념하여 조처하셨을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 이 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 찾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 안에서 찾았다. 기독교가 성경에서 발견한 하나님 창조의 궁극적 목적은 피조 세계의 찬송 <특히 도덕적 피조 세계의 찬송>을 통하여 영광 받으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의 본질은 받는 영광이 아니라 선포하는 영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피조 세계에 들어내고 나타내기 위하여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선포하시는 영광은 피조물들에 의하여 찬미되고 송축되는 과정을 통하여 그 궁극적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광은 모든 피조 세계의 아름다운 역사와 그들의 행복한 삶을 통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 <존경과 경외> <신뢰와 사랑> 등등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경 전체가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에 때로는 초월하시고 때로는 내재하시는 가운데 그들을 이끌어 가시면서 기뻐하시고 만족해하신다. 그리고 모든 피조 <특히 도덕적 피조>들은 자신들 속에 언제나 내주 하시면서 자신들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고 경외하며 존경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창조에 대한 이러한 교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증거들에 의하여 보증되어진다.
<사 43:7; 60:21; 61:3; 겔 36:21-22; 39:7; 눅 2:14; 롬 9:17; 11:36; 고전15:28; 엡1:5,6,9,12,14; 3:9,10; 골1:16>
하나님의 창조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첫째는 말씀에 의한 창조이고 둘째는 약간의 재료를 사용하신 창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은 무<無의> 상태에서 <있어라, 되어라, 비취라, 나뉘라> 등등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과 몇몇 동물들은 이미 무에서 창조된 <흙>을 재료로 사용하시어 창조하셨다. 이러한 하나님 창조의 방법은 인간에 대한 특별한 배려하심을 증거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가 6일 동안에 이루어졌다고 증거 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6일간의 창조에 의혹을 품었다. 특히 과학적인 차원에서 우주의 연대를 규명하려는 자들은 6일 창조를 전적으로 거부하였으며, 신학자들도 이에 동조하는 자들이 많았다.
6일 창조를 거부하는 학자들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가 현재의 24시간<1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이었을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갖게 된 근본 동기는 서로 다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다만 6일 동안에 그러한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호기심과 창조의 초기에는 아직 해와 달이 창조되어지지 아니한 상태였음으로 저녁과 아침의 사이가 현재와 같은 24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개념은 다르다. 현대의 <장기간> 개념은 지질학적인 연대와 하나님의 창조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19세기 이전에 창조의 날들은 6일간이었다는 것으로 이미 결론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질학자들이 우주의 연대, 특히 지구의 연대를 성경이 증거 하는 그것과 전혀 다른 연대로 발표함에 따라 학자들, 특히 기독교 학자들이 지질학자들이 발표한 지구의 연대와 성경이 증거 하는 지구의 연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해결하고자 창조의 기간을 <장기간>으로 하는 논증을 제기한 것이다. 저들이 창조의 날을 <장기간>으로 추산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주석적 차원에서.
① 히브리어 “욤”<םוֹי>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24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긴 날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② 히브리어 “욤”은 흑암과 구별된 광명을 의미하기도 하며 <창1:5,16,18,> 광명과 흑암을 함께 의미할 수도 있으며<창 1:5,8,13>,
또는 6일을 합하여 함께 의미하거나<창 2:4> 고통<시20:1>이나 진노<욥 20:28> 번영<전 7:14> 구원<고후 6:2>과 같은 것들에 대한 시간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어진다.
(2) 창조적 차원에서.
① 태양이 창조된 것은 제 4일이었다. 따라서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의 하루를 반드시 24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의 시간은 태양이 창조된 후의 시간하고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② 창조 당시에 대하여 언급된 날들은 하나님의 날들이며, 하나님의 날 들은 사람의 날과 같지 않다.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와 같은 것이다.<시 90:4; 벧후3:8>.
③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던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안식일 이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영원한 것으로서 끝이 없다. 따라서 그날은 수천 년이 될 수도 있다.
(1)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6일 창조.
하나님의 창조가 현재와 같은 6일<하루 24시간 기준>만에 완성되어 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의하여 보증되어진다. 우주만물이 제 아무리 광대무비 한 것이라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6일이 소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순간>에 모든 것을 완성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6일 창조.
6일이라는 시간이 하나님의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너무 긴 시간이라면 그럼에도 불구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긴 시간을 사용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은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규명되어진다. 하나님의 창조가 6일에 걸쳐서 완성되어진 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인간을 위하여 6일이라는 긴 시간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배려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시간의 필요성.
A. 사회의 질서와 제도유지 차원에서.
인간의 삶에는 시간이라는 영역이 절대 필요하다. 인간은 일반 피조물들과는 다른 존재이다. 인간은 지성과 인격을 갖춘 고등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일반 피조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인간에게는 가정, 사회, 국가, 등등의 조직사회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며 또한 그러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각종 제도와 질서가 절대 필요하다. 그중에 시간이라는 영역은 인류 사회의 질서와 제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다.
B. 삶의 유지 차원에서.
인간의 삶에는 <의, 식, 주,> 뿐만 아니라 <건강, 휴식, 취미, 문화> 등등의 각종 영역들이 절대 필요하다. 시간은 그러한 영역들을 인간에게 제공하고 유지시켜 주는 특별 영역이다. 인간은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의식주적 삶>을 살며 또한 <건강, 휴식, 취미, 문화적 삶>을 산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사회에 시간이라는 영역을 하사하셨고 그리하여 우주의 존재함과 운행함을 시간에 입각하여 창조하셨다.
② 시간의 구분.
A. 계절의 필요성.
a. 식생활 차원에서.
인간의 삶에는 식생활 차원에서. 4계절의 시간적 구분이 절대 필요하다. 인간 식생활의 기본적 요소인 농산물은 <파종, 성장, 결실, 수확, 휴식>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파종은 봄을 요구하며 성장은 여름을 요구하고 결실은 가을을 요구하며 겨울은 그들의 휴식에 절대 필요하다.
b. 문화생활 차원에서.
인간은 의식주를 절대 필요로 하지만 의식주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각종 문화적 삶이 절대 필요하다. 동일한 기후, 동일한 환경은 인간의 정서를 위축시키고 심령을 곤혹스럽게 한다. 때문에 인간은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각종 문화를 즐기고 누리면서 차원높은 삶을 사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사회에 4계절을 하사하셨고 그리하여 우주의 존재함과 운행함을 4계절에 입각하여 창조하셨다.
③ 일년 12개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에 1년 12개월 365일이라는 시간을 주셨다. 1년 12개월은 3개월 단위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며 1개월은 30일단 위로 구성되고 1일은 주야 24시간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시간적 단위는 인간의 삶에 필연적으로 존재하여야 할 시간적 단위였다. 인간의 수명, 역사의 기록에 대한 연대, 삶의 질서와 규칙 등에 있어서 1년 12개월이라는 주기적인 시간적 단위는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시간을 하사하실 때에 이러한 시간적 단위를 주기적, 반복적으로 주신 것은 그것이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때문이었다.
A. 식생활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주적 삶을 유지시켜 주는 것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농수산물이다. 농수산물의 <파종, 성장, 결실, 수확, 휴식> 과정은 길어도 좋지 않고 짧아도 좋지 않다. 1년이라는 시간은 농수산물의 <파종, 성장, 결실, 수확, 휴식>과정에 가장 적합하다.
B. 문화생활 차원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지루함을 싫어하는 반면에 변화를 좋아한다. 이러한 인간에게 있어서 1년 12개월이라는 시간적 단위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각각 3개월마다 바뀐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지만 그것은 길어도 좋지 않고 짧아도 좋지 않다. 따라서 현행과 같은 1년 12개월의 시간 단위는 참으로 적당하다.
④ 1개월 30일과 1일 주야 24시간.
1년을 12개월로 구분한 것에는 더욱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해와 달은 1년 365일과 4계절을 주기적으로 구분하는 차원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운행하지만 그것은 피차에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한다. 해는 낮을 주관하고 달은 밤을 주관하면서 1년 365일과 4계절의 주기적인 시간 단위를 형성하는데 그들은 홀로 존재할 수도 없고 홀로 운행할 수도 없다. 해와 달은 피차에 서로를 절대 필요로 하며 공존하고 동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낮과 밤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의 모든 생태계를 주관하는데 특히 달은 바다와 연관되어진다. 바다는 달의 주기적 운행과 연관되면서 운행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밀물과 썰물을 통하여 확인한다. 이렇듯 해와 달은 우주의 생태계와 운행을 주관하는데 그것은 30일이라는 시간적 단위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1년이 12개월로 구분되는 것은 해와 달의 주기적 운행이 30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일은 다시 주야 24시간으로 구성된다. 1개월 30일 사이와 1일 주야 24시간의 구성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깊고 크신 은혜와 배려가 담겨 있다. 인간의 1일 삶은 주야 24시간이 가장 적절하다. 1일 주야 24시간은 인간의 의식주적 삶에 있어서도 매우 적절하지만 인간의 문화적 삶에도 가장 적절하다. 1일 주야의 사간은 너무 길어도 좋지 않고 너무 짧아도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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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은 하루 24시간 <주야>와 1주간 <7일>과 1개월 <30일>과 1년 <12개월>과 사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을 통하여 때로는 일하고 때로는 휴식을 취하고 ,때로는 인생을 즐기면서 한평생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삶을 인간에게 허락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긴 시간인 6일을 통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6일 창조를 거부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에 대하여 그것이 수천 년 간이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을 쉬셔야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쉬실 때에 우주만물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님을 따라 함께 쉬었을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쉬시는 동안 수천 년을 잠자고 있었을까? 저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주장들로 인하여 어떤 신학적 문제가 발생하는지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단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 차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2회 창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상반된 견해를 제기하는바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창세기 2장의 문제.
진보적 고등 비평가들은 창세기 2장이 처음 창조에 대한 두 번째의 추가적 창조이거나 또는 독립적인 창조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땅은 식물이 창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르고 있으며, 사람은 동물들 이전에 창조되었으나 우선 남자만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동물들이 사람에게 적합한 동반자인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시험적으로 창조하셨으나 동물들이 사람의 동반자가 되지 못할 것을 아시고, 여자를 남자의 배필로 창조하사 사람을 위하여 예비하신 에덴동산에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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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증에 대한 변증>
창세기 2장은 사람의 역사에 대한 것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미 앞장에서 말해진 것들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논증에 대하여는 변증할 필요도 없으나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자들을 위하여 몇 가지로 반박하고자 한다. 이 논증은 우선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을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창조하실 때는 신적 작정에 의한 결과에 의한 창조이며, 그 신적 작정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지식에 의한 것임으로 필연적인 결과로 결론되어진다. 따라서 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에 대한 어떤 가능성을 시험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논증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인간의 동반자로 주시려고 작정하셨으면, 그것들은 당연히 인간들의 동반자로 창조되어지게 되어 있다. 동물들이 인간의 동반자가 과연 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로 등장할 수 있다는 저들의 발상은 동물들이 인간의 동반자가 못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2) 재창조에 대한 주장.
창세기 1:1-2절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2회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진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천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음으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에게 징계를 내리신 후에 다시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이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에 징계를 내리신 후에 다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 근거로서 이미 창조되어진 우주만물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곳에 있다는<창1:2>을 제시한다.
(1) 성경 해석의 오류.
① 문학적 상식의 결여에 의한 오류.
재창조 주장은 문학적 상식이 전혀 결여된 사람들이 창 1:1과 2절을 따로따로 구분하여 해석함으로서 발생되어진 것이다. <창1:1-2>은 따로 구분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이 주석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창 1:1>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전체적인 선포이며, <창 1:2>은 그 전체적인 선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의 시작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문학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 할 수 있다.
② 편견에 의한 오류.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따라서 성경을 일거나 해석할 때에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시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을 모르는 자들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전체적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해석한다. 재창조 에 대한 주장은 성경을 전체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부분적 문자적으로만 읽고 해석한 편견에서 비롯되어진 오류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전체적인 기사를 보지 않고 다만 <창1:2>의 <땅이 혼돈 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라는 것에만 치중하여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것을 파괴 하신 후 다시 창조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들이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반란에 대한 징계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파괴하시고 다시 창조 하셨다고 주장 하는 것은 <땅이 혼돈 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파괴하셨다고 가정한 후 그것을 합리화 하기위하여 천서들의 반란에 대한 징계를 그것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기사에서 사람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증거 하지만 천사들의 반란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는 전혀 증거 하지 않는다. 만일에 천사들의 반란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창조 과정에 있었다면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증거 할 것이다.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만 증거하고 천사들의 반란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침묵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의 반란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되어진 우주만물을 훼파 하시고 다시 창조하셨다는 논증은 성립 될 수 없다.
(3) 비논리적 해석.
성경은 천사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사람의 불순종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 기사를 매듭지은 후인 <창 3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창 3장> 이 후에는 창조에 대한 더 이상의 기사가 등장하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결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2회적인 것을 의미하는 어떤 증거도 하지 아니한다. 만약에 저들의 주장대로 하나님께서 1차의 창조를 훼파 하시고 2차의 창조를 결행하셨다면 <창 1:2> 이하의 문구는 잘못된 것이다.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의 2회 째 창조는 사실상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아니라 <개축>이거나 또는 <보수>이다. 훼파 되어져서 혼돈 하고 공허하며 흑암에 휩싸인 상태의 우주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이거나 개축이지 창조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저들의 주장이 옳다면 성경은 이와 같은 보수나 개축에 대하여 증거 해야지 창조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은 성경답지 못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창조에 대한 것을 증거 할 뿐 개축이나 보수 같은 것을 추론할 수 있는 여지조차 허락하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1차 창조를 훼파 하셨다는 어떤 상상조차 불허한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개축이나 보수 같은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도 전혀 어울리지 아니한다. 전능의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훼파 되어진 것들을 다시 보수하시고 개축하실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모두 없애시고 다시 창조하실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창 1:2>과 <창 1:3> 사이에는 어떤 문구가 생략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도말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셨다.>라던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훼파 되어진 것들을 다시 손질 하셨다.>는 문구가 생략되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특히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지 아니하는 부분이나 감추어야할 부분, 그리고 신학자들을 통하여 훗날 밝혀야 할 것 등은 언제나 생략되어져 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추론한다면<창 1:1>과 <창 1:3> 사이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생략되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생략된 문구들이 결코 저들의 제 2 창조론을 합리화시켜주지는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미 <창 1:2>의 문구 자체가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며, <창 1:3> 이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증거들이 그것을 또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 1:2>의 상반절은 창조되어지는 과정의 상태를 증거하고 있고, 하반절은 창조 사역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창 1:3>부터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결과들에 대한 증거들이 기록되어지고 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재창조론 따위가 발을 붙일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고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들의 재 창조론은 성경의 내용과도 일치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아니한다. 저들의 주장이 맞으려면 성경을 다시 쓰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제 2 창조론 같은 비 성경적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 주장을 통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무지함과 무식함을 들어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속성에 의한 완전무결한 창조 사역을 모독하는 대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부정하는 무례함.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전지 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저들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역으로 추론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나 사람의 배반을 몰랐다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천사 또는 사람의 배반을 아셨다면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진노하셔서 그것을 다시 만들게 되는 하나님답지 않은 일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전지 하시다. 따라서 천사들의 반란이나 사람의 불순종을 이미 알고 계셨고, 거기에 합당한 조처들을 모두 준비 하셨다. 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화가 나셔서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속 조치를 강구하신 것이다. 따라서 저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전지성을 부정하는 무례한 것이다.
(4)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무례함.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답지 못하시다. 천사나 사람의 배반에 대한 분풀이를 자신의 창조물들에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창조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포악한 성격 파탄자로 만드는 불경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 26>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사명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피조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인간 중심으로 창조되었음은 다음의 사실을 통하여 증거된다.
(1) 시간 - 시간이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1년-12개월-4계절> <1개월-30일-4주> <1일-주야-24시간>으로 창조되었으며 그 운행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2) 우주 - 해, 달, 별, 등등이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창조되었다. 해는 낮을 주관하면서 각종 생물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달은 밤을 주관하면서 바다와 각종 생물의 생성에 영향을 준다. 별들은 우주의 질서와 조화, 기상과 계절의 변화, 등등을 이룬다.
(3) 지구 - 인간의 거처인 지구가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여 창조되었다. 지구에는 산, 바다, 강, 평야, 등등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배열되어 있고 인간에게 필요한 각종 생물들이 존재한다.
(4) 인간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인간은 만물중 최고, 최상의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다른 생물에게는 없는 <영>과 <인격, 지혜, 의지, 정신, 사명> 등등이 부여되었다.
(5) 인간과 동물 - 인간과 동물은 흙을 재료로 하여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른 피조와 구별하여 흙을 재료로 다듬어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친구들인 동물들도 흙을 재료로 하여 창조하시는 은혜적 배려를 하셨다.
(1) 최고의 신체와 미모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들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되는 최고의 신체와 미모를 주셨다. 인간의 신체적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었다.
(2)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창1:26,27; 5:1,3; 9:6>
인간 창조에 적용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외적 형태나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중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 창조에 적용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속성>들은 다음과 같다.
①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영>을 부여하셨다. 인간에게 부여된 <영>은 지혜, 사상, 개념, 이념, 취향, 기호, 등등의 이데아적 기능 영역이다. 인간의 그, 영적 기능들은 지식, 지능, 적성, 재능, 등등의 능력을 발생시키고 발전시키면서 학문,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예술, 체육, 등등의 인류사회 영역을 계속하여 발전시켜 나갔다.
② 인격을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인격을 부여하셨다. 인간에게 부여된 인격은 <영>에 비롯되어진 이데아적 기능들 중 하나이지만 다른 영역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영역들은 대부분 기능적 영역인 반면에 인격은 지성, 이성, 등등의 정신적 영역들을 발생시키고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중 하나인 <영>에서 발생하는 인격은 우아하고 고매한 지성과 비범하고 세련된 이성과 집중적이고 단호한 정신들을 발생시키고 발전시킨다.
③ 자유의지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자유의지>라는 또 다른 특별한 은사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수 영역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상명 하복의 관계가 아니라 동반자로 예우하시는 관계이며 또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는 차원에서 부여받은 사명을 이행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하여 자의<自意>적인 차원에서 사명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특별한 은사를 부여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우아하고 고매한 지성과 비범하고 세련된 이성과 집중적이고 단호한 정신들을 아우르고 다스리는 인격과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독자적인 자유의지를 통하여 무엇이던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으며 취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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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간에게 부여된 인격과 자유의지는 두 가지의 법적 제한을 받는다. 첫째는 인격과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법을 초월할 수 없으며 다른 또 하나는 상대방의 인격과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법을 초월하는 인격과 자유의지는 방종이다.
(1) 피조 세계의 통치권 부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 창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셨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지 않는 것과 천사들을 통하여 통치하시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 창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①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 세계를 직접 통치하실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 때문이다. 피조 세계를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들과 일일이 만나게 되고 각종 불경과 망령된 저항들을 겪으시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들을 겪으셔서는 안 되며 겪으실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절대적 주권주이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 세계의 통치 운영권을 부여하신 것이다.
② 인간의 특성.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통치하시지 아니하신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통치하시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천사들의 반란을 이미 겪으셨기 때문이며 다른 또 하나는 인간들의 특성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하사 받았기 때문에 그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천사들의 통치에 저항하고 불순종하게 된다. 하나님께도 저항하는 인간이 천사들의 통치에 절대 순종했겠는가? 아마도 인간은 천사들의 통치에 저항하여 통치권을 탈취하려고 하거나 또는 천사들과 야합하거나 천사들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저항하는 죄를 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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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람들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지 않고 인간들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셨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궁금하기보다는 죄와 관련된 자유의지 문제 때문이다. 인간의 범죄가 자유의지 때문에 발생하였다는 신학 원리에 대하여 <그렇다면 인간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셨다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하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는 차원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매우 우매한 질문이다. 저들의 주장대로 인간에게 통치권을 부여하시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자유의지를 부여하시지 않았다면 자유의지 없는 인간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자유의지 없는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의 형상을 근거로 하는 <영혼>이나 인격이 없는 상태로서 <혼>만 있는 동물적 존재로 창조된다. 인간의 영혼, 인격, 자유의지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중에 어떤 것 하나도 제외되면 안 되는 절대 필요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③ 인간에 대한 배려.
앞에서 제기한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 통치와 천사들을 통한 통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이상 불순종과 저항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인간에게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인간에게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 목적상 필연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직접 통치하시거나 또는 천사들을 통하여 통치하시기보다는 피조들 중 어떤 존재에게 피조 세계의 통치권을 부여하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고 그리하여 그 존재를 인간으로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피조 세계의 통치자로 작정하신 것은 일단 창조된 피조물들 중에 인간을 골라 선택하여 지정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즉, 우주 만물에 대한 섭리 일체를 신적 작정하실 때에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절대적 주권에 기초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작정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은혜로 정의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하신 것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자비이며 긍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세계를 통치하기 위한 목적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법률적 관계에 두지 아니하시고 섭리 역사의 동반자로 예우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에 대한 배려를 통하여 증거된다.
(3) 피조물 중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부여하셨다. 현존하는 모든 피조 세계의 지위 중에 하나님의 자녀에 버금가는 지위는 없다.
(4) 피조물 중 최고의 삶을 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의 현장인 지구에 최상의 천혜<天惠>를 하사하시었다. 주야, 4계절, 등등의 시간적 특혜를 주셨으며 산, 바다, 강, 평야, 등등을 아름답고 질서 있고 조화되게 배열하셨으며 각종 지하자원과 다양한 농수산물을 하사하시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문명과 문화와 각종 조직사회를 하사하시어 인간의 삶이 누리고 즐기는 풍요롭고 아름답고 고등적인 차원의 삶이 되게 하셨다.
(5)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현재적 삶에만 각종 혜택을 부여하시지 않고 그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특혜까지 하사하셨다. 인간들이 현재적 삶을 마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무궁한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다. 인간의 현재적 삶이 아무리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불완전하고 불안전하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무궁하며 완전무결하다.
신학을 모르는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이 인간이 2번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저들은 아담과 하와 이외에 또 다른 계열의 인간들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창4:14-15>과 <창6:1-4>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제기되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3-15>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1-4>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창4:13-15>의 가인이 두려워한 자들과 <창6:1-4>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아담과 전혀 다른 또 다른 계열의 창조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였는데 당시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정죄되고 거부되었다. 당시의 신학자들은 <창4:13-15>의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태어난 사람들로 확인하였으며 <창6:1-4>의 하나님 아들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로 확정하였다. 한편 <창6:1-4>의 하나님 아들들을 천사라고 주장한 자들이 있었는데 천사는 영적 존재로서 결혼하지 않는 존재<마22:30>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자들에 의하여 여전히 주장되고 있다.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은 다음과 같은 신학 원리에 의하여 정죄되고 거부된다.
(1) 인간에 대한 2중 창조론은 <인류의 단일성>과 <인류의 죄에 대한 단일성>을 무너뜨린다.
성경은 인류의 시조를 아담과 하와로 선포하며 그들로부터 인류가 생육 번성하였다고 선포한다. 기독교 신학은 그와 같은 성경의 선포를 근거로 하여 <인류의 단일성>으로 정립한다. 이러한 인류의 단일성은 <인류의 죄에 대한 단일성> 신학의 근거이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 이외에 또 다른 계열의 인류가 창조되었다면 <인류의 단일성>이 무너지고 아울러 <인류의 죄에 대한 단일성>도 무너진다. 성경은 인류의 범죄가 오직 아담과 하와에 의하여 발생했다고 선포하며 모든 인류는 아담의 범죄를 전가 받아 죄인이 되었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아담 이외에 또 다른 인류가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아담과 무관한 자들이므로 인류의 원죄와도 당연히 무관하다. 따라서 인간의 2중 창조론은 <인류의 단일성>과 <인류의 죄에 대한 단일성>을 함께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아담과 하와로부터 발생한 죄만을 말할 뿐 그 이외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노아 시대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노아가 그중에 가장 의인이었다고 증거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분명히 죄가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 2중 창조론자들은 그들에게 존재하는 죄의 근원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 2중 창조론자들은 인간 2중 창조론은 주장하는 반면에 그들의 죄는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은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2) 인간에 대한 2중 창조가 실제로 있었다 할지라도 노아 이전으로 종료되었다.
만약에 아담 이외의 또 다른 계열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노아의 홍수 때 까지만 살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 때에 노아와 그의 가족만 살아남았고 그들 이외의 인류는 모두 사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2중 창조론은 현실적으로 전혀 성립될 수 없다.
(1) 인간의 구성요소
인간은 신체<body>와 영혼<soul;spirit>의 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몸<body>
A.구약에서.
a. 바사르<רꙴꔯ=basar>
동물과 사람의 살을 가리키는데 127번 등장한다. 이 말은 혈족 관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하나님과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인간 및 모든 생물을 나타내기도 한다.
b. 그셈<םꚂג=gsem>
후기 아람어로 된 <단 3:27; 4:30; 5:21>에 인간의 몸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c. 나드네 <ןꕔꔷ=nadneh>
후기 아람어로 된 <단 7:15>에 인간의 몸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B. 신약에서.
a. 샤륵스<σαρ-ξ=sarks>
샤륵스 는 히브리어의 <바사르>와 가장 가까운 말로서 헬라식 철학적 개념이 깃들여져 있어서 심원한 심리학적, 신학적 의미가 따르고 있다. 성경은 이 용어를 인간의 혈족 관계나 하나님과 관계된 자들에게 적용하였다.
b. 소마<σϖμα=soma>
이 용어는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모든 사람과 동물들에게 적용되어지고 있다. 이 말은 <샤륵스>와 동의어로도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이 용어가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어 질 때에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지게 된다<막 14:22>. 바울은 <소마>라는 용어를 종교적 차원에서 대단히 다양하면서도 독창적인 것으로 사용하였다.
(예)
* 인간의 육체 전체를 말할 때에 적용하였다.
<데살로니가 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 인간의 인격성을 말할 때에 적용하였다.<고전 6:12-20>
* 인간의 몸을 성령의 전으로 묘사할 때에 적용하였다.<고전 6:19-20>
* 부부의 의무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평등의 원칙을 말할 때에 적용 하였다.<고전 7:4>
* 인간의 성적인 문제를 말할 때에 적용하였다.<고전 7:34>
* 인간의 몸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묘사할 때에 적용하였다.
<롬 12:5; 고전 6:19; 골 1:18>.
* 성도의 몸을 그리스도의 몸 자체로 증거 할 때에 적용하였다.
<고전 6:13-20; 갈 2:20>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 인간의 몸<특히 성도의 몸>은 하나의 동물적 신체라는 개념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영적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에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몸이 인간 자체로서의 개념에 머물러 있게 될 때와 하나님과의 관계론적 차원에서 논의될 때의 차이는 매우 대단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신비스러움을 보게 된다. 아울러 몸과 영, 혼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인간의 몸을 어떤 차원에서 논의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현저한 수준의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인간의 몸을 신체적인 차원에서 다만 인간의 몸으로서만 보게 되면 동물적인 개념 쪽으로 따라가게 되는 형이하학적인 것이 되는 반면에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영적 존재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② 혼<soul>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혼<soul>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명사<네페쉬-שׁꔻ-nephesh>와 헬라어 명사<프쉬케-πψυχή-psuche>의 역어로서 인간의 정신과 인간 자체와의 관계를 설정할 때에 사용되어지고 있다. 이 때에 있어서 혼<soul>은 동물의 일반적인 정신면까지를 포함하게 된다<창 2:19>.
③ 영<spirit>-<루아하, 루아흐-ꖏוּר-ruach>
<프뉴마-πνεύμα-pneuma>
영<spirit>은 일반적으로 무형의 영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되어지거나 또는 인간성 속에 존재하는 신적인 요소를 말하고자 할 때에 사용되어지는 것이었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ch>나 헬라어의 <프뉴마=pneuma> 라틴어의 <스피리투스=spiritus>의 근본 의미들은 <공기의 움직임> <미풍> <바람> <호흡> 등으로 표현되지만 보다 더욱 넓은 의미로서는 <생명의 본질> 자체를 의미한다.
④ 영혼<soul;spirit>
성경은 때때로 영과 혼을 따로 분리하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영과 혼은 거의 같은 상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의 <네페쉬>나 신약의 <프쉬케> 또는 구약의 <루아흐>나 신약의 <프뉴마> 등은 독립상태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거의가 같은 상태,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혼을 영과 혼으로 반드시 구별하여 그것들을 하나의 독립적 실체들로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실체적 개념들을 고찰하여 신학적인 정립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A. 구약에서.
a. 히브리인들은 육체는 삶의 물질적 근거이고, 영혼<정신>은 하나님 과 관계된 존재라는 차원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둘을 완전히 분리하여 대립적 관계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동등하며 동일한 불가분리의 동거 동락적 실체로 보았던 것이다.
<레 19:28; 민 6:6>
b.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창 2:7>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동물적인 생명의 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말하고자 할 때에는 그것은 생기를 부여받은 하나의 외적 실 존재로서 곧 피와 연관되어지는 생명의 본질적 존재가 된다.
<창 9:4; 레 17:11,14; 신 12:23; 수 2:13; 왕상 19:4; 삿 5:18>
c. 히브리인들은 <네페쉬>를 사용함에 있어서 인간의 총체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에도 사용했다. 인간의 자아, 갈망, 갈등, 욕구, 감정 등의 문제들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페쉬는 인간의 갈증, 탐욕, 만족, 기쁨, 슬픔, 사랑, 증오, 희망, 절망 등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어졌다. [출 23:9; 겔 11:19;18:31;36:26].
B. 신약에서.
a. 히브리어의 네페쉬처럼 헬라어의 프쉬케도 생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 염려하다 <마 6:25> * 구원하다, 또는 잃다 <막 8:35> * 찾다<마 2:20>
* 버리다 <요 10:11> * 돌아보다 <빌 2:30>
b. 신약의 몇몇 구절, 특히 히브리서와 목회서신에서 프쉬케는 구속사적 원에서 하나님과 연관하여 사용되고 있다.
<히 6:19;10:39;13:17; 약 1:21; 벧전 1:19,22;2:11,25>
(2) 2분설<Dichotomy>과 3분설<Trichotomy>
① 2분설과 3분설에 대한 역사적 견해.
초기 기독교는 인간이 신체<body>와 혼<soul>의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신체<body>와 혼<soul>과 영<spirit>으로 구성되어졌다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계는 오랫동안 논증을 거듭 하였는바. 이 두 가지의 견해는 각각 2분설<Dichotomy>과 3분설<Trichotomy>로 명명되어졌다.
A. 2분설<Dichotomy>
2분설은 라틴계 교부들에 의하여 주장되어졌다. 저들은 인간은 신체<body>와 혼<soul>의 두 요소로 구성되어졌으며, 성경이 그것을 증거 함으로 더 이상의 다른 개념은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2분설은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데오도렐<Theodoret> 어거스틴<Augustine> 등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부분의 교회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B. 3분설<Trichotomy>
3분설의 개념은 헬라 교부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3분설은 본래 헬라 철학사상에서 유래되어진 것이다. 3분설은 초기 기독교시대에 헬라 또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교부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 오리겐<Origen>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로부터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가 3분설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간성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채택한 후 3분설은 점차 거부되어졌고 얼마 후에는 거의 폐기되었다. 중세 시대에 이르러 군소 신학자들 일부가 3분설을 변호하였으나, 2분설은 교회가 지지하는 정설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서 사정이 달라졌다. 독일이나 영국의 신학자들, 루스<Roos> 올스하우젠<Olshausen> 베크<Beck> 델리취<Delitzsch> 오벌린<Auberlen> 웰러<Oehler> 화이트<White> 허드<Heard>에 의하여 3분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부활되어진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a. 헬라의 철학사상은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 어떤 매개체가 있다고 유추한다. 절대자 하나님은 유한한 물질세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시지 아니하며 따라서 하나님과 물질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어떤 제 3의 요소가 있다고 유추하는 것이다. 저들은 이러한 개념을 인간의 신체와 영 사이에 도입하였다.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진 유한한 물질인 반면에 인간의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입되어진 영원한 것이며, 또한 비 물질임으로 그 둘 사이를 연결하여 주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체<body>와 영<spirit>은 혼<soul>을 매개체로 하여 상호적인 생생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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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혼>이라는 매개체를 도입하는 망령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매개체를 필요로 하시지 않고 언제나 직접적으로 인간과 교제하신다.
b. 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헬라의 철학사상 중에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몸이 3개의 요소 <three part>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헬라적 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다음과 같이 구성 되어진다.
* 몸은 물질적 부분이다.<body is material part>
* 혼은 동물적 생명의 원리이다.<soul is principle of animal life>
* 영은 하나님의 영의 일부가 인간의 내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에 의하면 <Human Spirit>와 <Divine Spirit>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사상은 범신론<pantheism>적인 것이다. 본래 범신론적인 개념에 의하면 인간의 <spirit>는 실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상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범신론적인 개념에 입각하여 본다면 인간의 <body> 역시 영적인 것과 결합되어지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body>나 <spirit>는 하나의 현상<상태>가 아니라 분명한 실체적 존재이다. 삼분법 주장자들은 이러한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의 영혼을 <혼-soul>과 <영-spirit>으로 구별하여 혼은 동물적 생명의 원리로 하고 영은 인간적 정신세계의 부분으로 하여 양립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는 <창 2:7>과 <창 7:21-22>의 내용에 매우 일치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진 것 <창 1:26>과 충돌한다. 인간과 동물의 혼을 동일시하여 3분법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2중적인 것으로 창조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즉 동물적인 혼<soul>으로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또 하나의 차원 높은 영<spirit>을 덧입힌 것으로 되는 것이다.
② 성경의 증거
성경은 인간의 구조적 요소를 말함에 있어서 언제나 2분적이다. 신체<body>와 혼<soul>의 두 가지로 증거 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인간의 구조적 요소를 말함에 있어서<영-spirit>이라는 또 하나의 용어를 사용한다. 성경의 이러한 용어 때문에 3분설이라는 논증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라는 용어는 <혼>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일 뿐 혼과 별도의 또 다른 정신<영>적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3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이 <혼>과 <영>을 별도로 구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은 혼과 영이라는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은 혼과 영을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역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혼과 영을 교대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에 사용되어지는 혼과 영에 대한 적용을 살펴보면 <혼>은 인간의 정신 <영>적인 요소를 인간에게 적용할 때에 사용되어지고 <창 35:18; 삼하 11:11; 왕상 17:21~22; 욥 1210; 33:18,20,22; 시 31:9; 78:50; 94:17; 아 5:6; 사 15:4; 애 2:12> <영>은 인간의 정신 <영>적인 요소를 하나님께 적용할 때에 사용되어 진다. 그리고 이 때에 있어서는 통상적으로 영과 혼을 합하여 <영혼>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중에 3분설을 옹호하는 듯한 두 구절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그러나 이 구절을 해석할 때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A. 성경을 해석할 때에 문자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성경을 해석 할 때에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통상적인 해석 방법에 일치하는 차원에서 해석해야 오류에 빠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전 5:23>과 <히 4:12>을 해석할 때에 그 두 구절의 문자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성경의 모든 내용에 일치하는 차원에서 그 구절을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B. 영과 혼이 단순히 병행적으로 언급되어졌다고 하여 성경이 그것들을 두 가지 구별된 실체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들은 말할 때에 통상 하나의 주제를 몇 가지로 반복하여 표현할 때가 있다. <마 22:37>이 그 좋은 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마 22:37>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말씀하셨을 때에 그것들을 세 개의 구별된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한 합심> 또는 <온전한 예배> <온전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강조법>인 것이다.
C. <살전 5:23>에서 사도는 단순히 설명적 보충어로서 <평강의 하나님 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진술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에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국면들이 종합되어 있으며 또한 그는 여기에서 혼과 영을 함께 나란히 언급하는데 완전히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곳에서 사람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0; 고전 5:5; 7:34; 고후 7:1; 엡 2:3; 골 2:5> 따라서 바울의 그러한 표현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차원의 표현<강조법>이었음이 분명하다. 인간의 구성을 3 가지로 구분하여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강조적 표현법인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면이 연합하여 하나의 <온전한 거룩>을 이룬다는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unity-단일체> 를 이루어야 할 존재이며 또한 인간은 육체를 비롯한 영혼 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에 의하여 <unity> 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다운 표현법인 것이다.
D. 성경이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줄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섭리적 목적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려야 한다. 물론 한 구절의 말씀 속에는 적어도 하나에서 수 천 수 만 가지의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히 4:12>은 영과 혼이 다른 독립체라는 것을 증명하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말씀은 아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선포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의도하는 바의 사이를 구별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③ 성경의 구분법
성경은 때때로 혼과 영을 구분하는 듯한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원래의 구약에는 그러한 방식이 사용되지 않았다. 신약적 의미에 있어서의 대조법인 <영혼과 신체>와 같은 표현 방식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히브리어는 유기체로서의 신체에 해당되는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간성의 두 가지 요소에 대한 구약적인 구별은 서로 차이가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자 말자 <몸과 혼> <육과 영>과 같은 대조적인 표현들을 대하게 된다. 이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헬라의 철학적 사상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70인 역<LXX>을 거쳐서 신약에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④ 인간적 구조의 통일성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성의 구조는 분명히 2분 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구조적 성질을 평행선과 같은 두 개의 이중적 요소로 간주하지 아니하고 둘이 합하여 하나의 실체<전인全人>가 된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죄를 짓는 것은 혼이 아닌 인간이며, 죽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인간<전인全人>이라는,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은 혼뿐만 아니라, 신체와 혼<전인>이라는 성경의 증거는 인간은 신체와 혼을 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인간<전인>이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의 구조적 요소를 말함에 있어서 2분설의 입장에서지만 <인성-Human nature>의 <단일-unity>이라는 것을 파괴하는 개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즉, 신체<body>와 무관한 영<Spirit> 또는 영<Spirit>과 무관한 신체<body>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체와 혼 사이에 있는 평행선적인 개념은 헬라 철학에서 유입된 사상이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 구조의 복합적인 성질을 인정하지만, 그 복합성이 인간의 구조를 평행적인 이중적 구조 <그리하여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체와 영 사이에 혼과 같은 매개체가 필요한 것>으로 증거 하지 아니한다. 인간 구조의 이러한 통일성은 이미 구약을 통하여 증거 된다. 즉 인간의 복합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최초의 구절인 <창 2:7>에서 증거 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신체와 생령을 구분하여 사람은 두 개의 별도적 존재로 합성되어 창조되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체와 생령이 연합하여 하나의 인간이 되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⑤ 결 론
인간은 <one person> 안에 <body와 spirit>를 갖춤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구성된 전인적<whole man> 인간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인간과 죄의 관계를 통해서도 여실히 증거 된다. 죄는 몸 따로 영혼 따로 범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범죄 함으로 <one person> 안에 존재하는 <body>와 <spirit>가 함께 범죄 하여 <whole man>의 범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도 <body>와 <spirit>가 따로 따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연합하여 전인적 구원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은 개념에 의하여 그리고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여 우리는 2분법을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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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체<body> 와 영혼 <spirit>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Body -< (Soul) (Spirit) >- GOD
인간의 영적 부분을 한데 묶어서 <soul> 또는 <spirit>라고 한다. 즉 하나의 양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적 부분이 몸과의 관계를 가지고 표현될 때에는 soul <혼> 이라고 한다. 반면에 인간의 영적 부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표현될 때에는 spirit <영>이라고 한다.
⑥ 3분법 주장자들 에 대한 질문
우리는 3분법 주장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로 한다.
<인간이 신체, 혼, 영, 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생명은 과연 어느 부분에 존재하는가? 혼에 존재하는가? 영에 존재하는가? 만약에 혼에 존재한다면 영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반면에 영에 존재한다면 혼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마도 저들은 대답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생명이 혼이나 영, 둘 중에 어느 한쪽에 존재 한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다른 한쪽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혼이나 영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생명이 혼과 영에 다함께 존재 한다고 대답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생명을 두개로 나누거나 아니면 영과 혼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 이 되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의 최초 상태는 질서 정연하였고 매우 아름다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영역은 불순한 요소들이 전혀 없었고 대자연은 해충이나 병균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건강한 아름다움을 자랑하였으며 동물들은 인간의 친구로서 인간과 더불어 즐거운 나날을 보내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우주 만물의 최초 상태를 완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고 스스로 기뻐하셨다는 것을 통하여 선포하였다.
사. 8. 진화론<進化論-The theory of evolution>.
하나님의 우주 만물 창조를 거부하는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우주 만물 창조를 부인하기 위하여 우주 만물의 생성<生成>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제기하였는데 그중에 가장 인정받은 것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기원전 5세기 경부터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더, 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어 왔으나 A.D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철학자, 모뻬르뛰, 뷔퐁, 독일의 이성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생물학자 라마르끄 등등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진화론을 본격적, 논리적으로 집대성한 것은 영국의 박물학자에 라스무스 다윈과 그의손자인 생물학자 챨스 다윈이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은 새로운 종의 형성에 대한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지 <종> 이전의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을 배제한 <이미 생명의 기원을 전제로 한> 진화론이다. 다윈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원칙을 <생존경쟁>으로 확립하였다. 다윈은 목적론적 이론의 도움을 배제한 채 순수한 기계적 과정을 통하여 생물들이 발전하여 간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의 진화론을 <기계적 생물 진화론>이라고 부른다. 그는 <종의 기원>에서 각 <종>이 독립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견해로는 모든 생물의 분류에서 볼 수 있는 생물의 변천을 설명할 수가 없으며, 생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도태> <적자생존>의 원칙에 의해서 발전하여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기계론적 진화 이론은 적자생존 또는 자연도태<Survival of the Fittest or Natutal Selection>라고도 불려졌다. 다윈이 주장하는 진화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물질의 기원.
현존하는 생물은 원초로부터 발생하여 수많은 세월동안 생존 경쟁, 적자생존, 자연 도태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와 같은 상태로 발전 성장하였다.
① 생존경쟁.
생물은 살아남기 위하여 여타의 다른 생물과 경쟁하게 되는데, 그 경쟁은 일반적으로 습성, 체질, 구조에 따라 가장 가까운 것 사이에서 가장 격렬하게 일어난다. 생물은 이러한 경쟁 속에서 얻어지는 유익을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또한 자신의 후손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서 종의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② 자연도태.
자연도태설은 다윈보다 “윌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먼저 제기한 이론이었다. 자연의 운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오랜 활동으로 인하여 언덕, 계곡, 돌, 지층, 평야, 강, 같은 것들이 발생하는 동안 필요 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며 이러한 자연도태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종>이 발생되어져 간다는 것이 자연도태설이다.
③ 적자생존.
생물은 생존경쟁의 원칙 하에서 기계적 진화를 할 수밖에 없고, 생존경쟁, 기계적 진화의 제 2부 산물인 자연도태를 거쳐서 모든 것에 적응하게 되는 <적자 생존자>들이 있게 되는바 그것들이 살아남으면서 또 다른 <종>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3) 로마 카토릭의 입장.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여 영역을 넓혀가자 로마 카토릭이 진화론을 지원하였다. 진화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섭리적 창조론을 주장할 수 있는 신학적 경륜이 없었던 로마 카토릭은 과학과 타협하여 <기독교 진화론> 또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제기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물질계의 동작의 원인이시며, 진화의 뒤에서 작용하시는 영적 및 이지적 힘이라는 것이 기독교 진화론의 요지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화가 일어나게 되며 진화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 또는 창조 활동의 양식<Modus Operandi>이라는 과학과의 타협안을 내놓은 것이다. 기독교 진화론은 초자연과 어떤 가상적 형태의 자연현상을 결합시킨 혼성 이론으로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상호 협력관계에 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과거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을 인용한 것으로서 진화론을 유신론의 틀에 두드려 맞추어 하나로 합성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하나님의 신적 작정과 섭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능력까지 거부하는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과 점진적 창조론은 모두 하나님과 진화론을 융합해보고자 하는 발상에서 나왔다. 이러한 기독교 진화론은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미발트<G. Mivart 1827-1900>베르그송<H. Bergson 1854-1941> 데. 샤르뎅<T. de Chardin 1881-1955> 등등에 의하여 제기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으로 갈라진다.
(1) 하나님은 첫 물질계를 창조한 후 모든 것에게 대진화 또는 거진화를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입장.
(2) 하나님은 사람이 동물조상에게서 진화할 때에 한해서만 사람에게 영혼을 심어주시는 일에 관여하셨다는 입장.
(3) 하나님은 생물계와 생활조건에 중요한 변화가 요청될 때에 한하여 자연환경에 개입하시어 진화를 도우셨다는 입장.
4) 기독교의 입장.
개혁주의 정통 보수 기독교는 당연히 진화론을 거부한다. 두노위<Du Nouy> 쇼트<A. Short> 굴드.<S. Gould> 등등의 기독교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그것의 허구성을 다양한 방면에서 지적하였는바 그것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근원적인 반대이론.<일반적인 반대이론>
① 진화론은 물질의 기원에 대하여 지금까지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하였다.
② 진화론이 내세우는 근원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물질이었다. 그것을 다만 <원초>라고 표현한다 하여 그것이 물질에서 제외 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진화론은 그, 원초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모두가 추측이거나 가정일 뿐이다.
③ 자연은 자신을 창조할 수 없으며 다만 반복되는 생산 원리만 있을 뿐이다
④ 클락<Clark>의 “엔트로피.<Entropy> 이론은 미분자의 속도에 의한 충돌로 점진적 균등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에너지 수준의 물리적 상태의 발전이나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와 퇴화를 말함으로 진화론과 반대된다.
⑤ 자연계의 에너지 과정은 통합이 아니라 분해이다. 현대 천문학적 견 해에서 볼 때에 물질은 고도의 원자 복합성에서 출발하여 원자 단순성을 향하여 전개해가고 있고 물질은 방사성을 가지고 핵 분열화 되어가고 있다.
⑥ 진화론은 그 자체로서 모순에 빠져있다. 생명은 오직 생명에서 비롯 되어진다는 논리와 생명은 본래 무기물에서 비롯되어진다는 논리를 함께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⑦ 진화론은 지구 안에 존재하는 각종 생명체에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을 뿐 지구 이외 행성의 생물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뿐만 아니라 지구를 비롯한 행성의 존재에 대해서도 해답을 주지 않는다.
(2) 사라진 고리<Missing Link.-가상적인 각 (종)들 사이의 중간 생물>에 대한 문제.
진화론자들과 지질학자들은 년차 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생물의 연계 고리를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다윈을 비롯한 진화론자들은 이점으로 인하여 매우 고심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후예들이 사라진 고리를 찾아내어 자신들의 논리를 증명하여 줄 것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고생대를 비롯한 원시시대의 동물의 화석은 있으나, 중간적인 생물이나 동물이 없음으로 점진적 진화론이 증명되지 않고 있다. 지질학자들은 진화론을 증명하기 위하여 암석의 화석에서 중간의 고리를 찾으려 하였으나, 포유류로 알려진 32 종의 고생물은 갑자기 출현하여 살다가 그 지층기가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실만을 확인하였을 뿐 아무런 것과의 연관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3) 진화적 인간론에 대한반대.
초기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침팬지, 원숭이, 등등의 포유동물로부터 진화하여 현재와 같은 고등 동물인 인간으로 발전하였다고 하였다.
동물의 세계에서 고등 척추동물의 두뇌는 물질적 형태와 모양과 구성, 성분이 인간의 두뇌와 대체로 비슷하다. 고래, 돌고래, 코끼리는 사람보다 더 큰 뇌수를 소유하고 있으며, 침팬지, 원숭이는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두뇌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두뇌의 활동 출력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뛰어나다. 인간은 생각하고 추리하며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다. 인간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동물들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인간 정신세계의 근원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발생하였고 또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을 전혀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영>이 두뇌에 지능적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고등교육 실험실에서 인간을 생리학, 심리학, 해부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여 보았으나 <영>적인 면과. <지성>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신비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영적, 지적, 신비는 진화되고 발전되어왔다고 가정하기에는 너무도 신비스럽고 모순된 것이었다.
다윈 이후의 진화론은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점점 체계화되었고 세계 각국의 교육과정에 포함되었다. 진화론은 과학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시대에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과학이 본연의 자리를 찾게 되자 진화론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현대 과학은 철저한 실험을 거친 검증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검증 없는 가설에 불과한 진화론은 이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진화론에 대한 검증이 실시되면서 진화론은 전혀 검증되지 아니한 것이며 오직 추측과 가정에 의한 가설<假說>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진화론은 점점 거부되어졌고 20세기부터는 거의 퇴출되어졌으며 대부분의 국가들은 학교교육에서 진화론을 제외하였다. 반면에 최근에 이르러 일본에서 다시 진화론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화론은 N.H.K 방송국이 제작한 것으로서 기존의 진화론에 약간의 추측과 가설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지구의 년대를 대략<6000-7000년>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현대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지구의 년대는 대략 <40억 년-수천억 년>이다. 때문에 기독교의 주장과 현대 과학의 주장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로 인하여 타협이나 절충의 여지가 전혀 없다. 기독교는 성경이 증거 하는 아담 이래의 인류계보를 통하여 지구의 년대를 추정하였고 현대 과학자들은 지층, 화석, 등등을 비롯한 지질학적 차원에서 지구의 년대를 추정하였다. 객관적인 입장에 의하면 기독교가 추정하는 년대나 현대 과학자들이 추정하는 지구의 년대는 모두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양측 다 검증받지 못한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현대 과학자들은 오히려 기독교의 주장에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던 지질학에 의한 지구 년대 측정이 오류였음이 밝혀져 전혀 믿을 수 없게 된 반면에 기독교의 주장 중에 아브라함까지의 역사는 인류학자들의 고증에 의하여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 특히, 지질학자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지질학적 연대와 성경의 역사를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창조의 날들이 수천 년이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들은 시 90:4과 벧후 3:8의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와 같다>를 근거로 내세워 자신들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보증 받으려 한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1) 현대 지질학은 사실상 미숙한 실정이며 사색적인 사상에서 완전 히 벋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 지질학은 귀납적인 연구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언제나 연역적인 추리의 결과만을 내어놓는다. “스펜서”<Spencer>가 지질학을 <비논리적 지질학>이라고 몰아세운 것이나 “헉슬리”<Huxley>가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조소한 것은 지질학의 현 주소를 정확히 말해주는 것이다.
(2) 현재까지 지질학은 지구 표면에 대한 연구에 겨우 손을 대었을 뿐이며 더구나 그것도 다양한 지역 광범위한 영역에서 행해지지 아니하고 지극히 제한된 장소에서 행해졌을 뿐이다. 때문에 저들의 연구 결과는 언제나 충분한 자료를 주지 못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같은 연구 결과가 장소에 따라 상이한 결론으로 나타남으로서 자체적인 모순에 빠지고 있다. 비록 지질학이 지구의 모든 부분에서 많은 영역을 탐구하여 어떤 일치된 결과들을 내어놓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지구의 현재 상태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도움을 줄뿐이지 지구의 과거 역사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여 주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어느 민족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그들의 현재적 조직과 생활 등에서 관찰된 사실들만을 가지고 그 민족의 실체가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듯이 어떤 지역들의 현재적 상태와 변천적인 흐름들이 일치되어진다고 하여 그것만을 가지고 그 지역의 과거를 이것이다 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지질학자들은 언제인가 추측하기를 암석의 지층들은 전, 지구를 통해 동일한 순서로 되어져 있음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각 지층의 형성에 사용된 시간의 길이를 측정함으로서 지구의 연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은 저들의 연구 과정에서 스스로 부정되어졌다. 저들의 실험결과
① 바위들의 순서가 지방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으며,
② 상이한 지층의 형성에 요구된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행해진 실험 들은 크게 상이한 결과들에 도달하였고,
③ 오늘의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작용은 이전의 모든 시대의 그것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안전한 안내자들이라는 “라이엘<Lyell>의” “균일설”<均一說>은 신뢰할 수 없음이 발견되었다.
(4) 다양한 지층과 암석들의 연대를 그것들의 광물적이고 기계적인 구성에 의해 결정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였을 때 지질학자들은 화석<化石>들을 결정 요소로 삼기 시작하였다. 화석학은 실재로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또한 라이엘의 <균일>의 원리의 영향 하에 진화론의 중요한 증거들 중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단순히 어떤 화석들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추상되며 또한 만일 그러한 추측이 어떤 것에 근거되느냐가 질문이 된다면 그 대답은 그것들이 보다 오래된 바위들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순환논증”<循環論證>이다. 바위들의 연대가 그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화석들에 의해 결정되고 또한 화석들의 연대는 그것들이 발견되는 바위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화석들은 언제나 동일한 순서로 발견되지 않으며 종종 그, 순서가 바꾸어지기도 한다.
(5)지질학자들이 지구의 년대를 추정하는 방법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았다.
① 화석이 발견된 장소의 지질학적 역사.
② 화석의 모양이나 상태.
③ 화석에 화학 약품을 발라서 일어나는 화학반응.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화석이 발견된 지역의 지질학적 역사와 암화석의 모양이나 상태가 서로 일치하지 않아 오히려 수천만 년 전의 것이어야 하는 화석이 반대로 수십만 년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화석에 화학 약품을 발라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도 수천만 년 전의 것이어야 하는 화석이 반대로 수십만 년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기 때문에 전혀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1> 하나님의 하루가 인간의 천년과 같다는 <시 90:4>과 <벧후 3:8>은 하나님과 사람의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 등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인 것이다. 예를 들면 <앉아서 천리, 서서 구만리를 본다.> 라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그것이 반드시 시간에 대한 것이라면 천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 영원에서 영원 속에 사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것이다. 따라서 그, 성경 구절은 결코 저들의 주장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2>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시간은 6일도 너무 길다. 하 나님께서 6일이라는 시간을 창조에 사용하신 것은 인간의 삶을 위한 지극한 배려였다. 천년은 고사하고 6일도 사실상 너무 긴 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년 이상, 아니 엄격히 말하면 6일 이상의 시간을 창조에 사용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적 차원에서 전혀 명분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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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과 비행접시.
지구 이외의 행성에 고도로 발달한 생명체가 있다는 추측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과 그들이 타고 온 우주선을 보았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는 외계인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는 자들도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외계인을 주제로 한 영화와 TV 드라마가 대량 제작되었다.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에는 거의 대부분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 외계인들은 인간에 비하여 지능이 매우 높다.
* 외계인들은 인간에 비하여 문명과 과학이 월등하게 발전하였다.
* 외계인들은 거의 대부분 파충류이다.
* 외계인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형할 수 있다.
* 외계인들이 타고 온 비행체는 거의 대부분 원반 형태이다.
그러나 외계인에 대한 주장들은 사실상 전혀 검증되지 않은 추측과 가설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확인된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이다.
한편 많은 기독교인들은 외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부한다. 기독교인들이 외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경에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우주 전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와 같은 주장에 반대한다.
* 성경에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성경에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이유로 외계인의 실존을 거부하는 것은 오류다. 성경은 지구에 사는 인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지 지구 이외의 행성에 존재하는 생명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 우주전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창조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주전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창조되었다는 주장도 오류이다. 현대 과학이 발견한 바에 의하면 모든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배열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은하 군단 중에 어떤 것들은 지구와 무관하게 배열되어 있으며 지구와 무관하게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 저편 어딘가에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와 같은 또 다른 우주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외계인 문제에 대하여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