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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13)
제목 : 성령의 열매
본문 : 갈라디아서5:22~23, 요한복음 16:5~15절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세례와 충만이 무엇을 뜻하며,
또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복습하면,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단회적인 사역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속사람의 차원으로부터 거듭나게 하는 사역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는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처럼 성령세례를 받은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성령체험들은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들로서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에게는 성령의 충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의 속사람 깊은 곳에 계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겉사람의 차원에 나타나서 우리의 겉사람의 차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하고 지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를 받은 모든 자에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하고 날마다 간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이 임합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성도들은
자기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의 생활전반에 충만하고 넉넉하게 나타나도록 간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를 우리 안에 두고도 그 보배를 활용하지 않고 그 보배의 빛을 비추이게 하지 않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게으르고 악한 종이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안에 영원히 솟아 나는 생수의 근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생활이 바짝 마르도록 방치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께서 충만한 생명력으로,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찾아 오시도록 간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겉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어떤 열매들이 나타날까요?
성령충만의 열매를 생각할 때 우리가 읽어야 할 중요하고 고전적인 본문들은
갈라디아서 5:22~23절, 에베소서 5:18~21절, 요한복음 16:5~15절 등입니다.
이 본문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면서 성령의 열매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성령의 열매 (1).(갈5:22~23절)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본문은 갈라디아서 5:22~23절입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본문은 우리가 성령에 충만할 때 나타나는 아홉가지 열매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마음속에 미움을 제어 할만한 사랑이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성령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슬퍼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마음속에서 희락이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성령이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음습한 돌감옥에 갇힌 우울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했던 사도 바울에게서 이와같은 희락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싸움과 불화가 있는 곳에 화평을 이룩하는 것을 보고,
성령이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같이 급하고 쉽게 화를 내며,
다름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부지불식간에 내뱉고 거칠게 행동하던 관습이 바뀌어서 온유한 마음과 절제하는 마음과 선한 행동을 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증거입니다.
이 덕목들은 모두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 덕목들입니다.
곧 성령이 충만한 증거는 어떤 신비스러운 체험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도덕적인 마음가짐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덕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할 때는 아가페를 말하는데,
아가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상대방이 사랑할 만한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곧,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선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서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상대방이 우리의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서 그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거 13장에서는 사랑을 정의할 때
사랑은 인내라는 점을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모든 것은 참으로…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랑의 정의는 참는 것으로 시작해서,
견디는 것으로 완결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운데 등장하는 목록들도 도대체 참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되는 것을 보고 솟아 오르는 질투심을,
참아내지 않고 어떻게 투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지 않고 어떻게 성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과 같이 사회전체가 인간의 이기심 위에 서 있는 문화속에서는,
더욱더 참고 견딤으로써만이 가능한 사랑의 실천이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이와같은 자기중심적인 문화를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윤리사상 가운데 이른바 정서론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정서론에서는 선이 무엇인가?
선한 행동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바로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정서나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선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어떤 객관적인 선의 표준이라는 것은 없고 각 사람마다 그 사람의 감정이나 정서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행동을 하면 그것이 바로 선이 됩니다.
정서론으로 대표되는 현대문화는 따라서 근본적으로 자기 유익을 구하는 문화입니다.
사회나 다른 사람이 자기의 개성에 수정을 가하고 건드리면 분노하고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오래 참는 가운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성령충만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다른 어떤 신비스러운 성도들의 체험 보다도 우월하고 중요한 은사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사랑의 헌장이 들어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이 12장과 14장과의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잘 살펴 보면 분명해집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고린도교회에서 문제된 신령한 은사들 곧, 방언과 예언활동입니다.
특히 방언과 예언과 병고치는 신령한 은사들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면서 그와 같은 은사들을 받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은사들보다 더 중요한 은가사 무엇인가를 12장 마지막에 부분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래 놓고 그 제일 좋은 길에 대하여 13장 앞부분(1~3절)과 끝 부분(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렇게 말한 후에 바울은 14장 앞부분에서 모든 은사들을 구할 때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모든 은사들은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요,
사랑을 실천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2. 성령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성도의 헌신적인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5장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말하고 난 후에 이 열매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는 과정에 관하여 6장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6장7~9절 말씀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본문에 보면 심고 거두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육체를 위하여 심고 거두고,
다른 한 사람은 성령을 위하여 심고 거둡니다.
심는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관습과 행동을 어떤 것에 투자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육체라는 말은 우리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악하고 비도덕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결국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말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한 욕망에다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투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열매를 거두느냐?
썩어 냄새나는 고약한 열매를 거둡니다.
반면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 복종시켜서 성령님의 지시와 지배를 받고 그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하면
영생을 열매로 거둡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생이라는 말은 요한복음17장3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곧 여기서 영생을 열매로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누는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과정을 심고 거두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씨앗을 심자마자 금방 거두는 법이 있습니까? 그러는 법은 없습니다.
씨앗을 심고 나서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물론 씨앗을 심으면 씨앗은 자연적으로 자라나게 되어 있지만 자연적으로 자라난다고 해서 씨앗을 심은 농부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씨앗이 자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농부가 끊임없이 할 일이 있습니다.
날마다 한 번씩은 들여다 보아야 하고,
잡초가 나면 계속 뽑아주고, 가뭄이 들면 물을 주어야 되고,
때를 따라서 거름을 주어야 되고,
추수 때가 되면 새들이 쪼아먹지 못하게 지켜 주어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열매는 농부에게 있어서는 열 달 동안 잉태와 산고의 고통을 통해 나은 아들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아홉가지 열매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자라지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투자해야 하고,
헌신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성령세례는 단번에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성령의 열매는 자동적으로 단번에 열리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역은
성령의 활동과 인간의 헌신과 노력을 통하여 열립니다.
그리고 이 열매는 이같은 헌신과 노력의 계속되면서 점차 자라가고 성숙해갑니다. 성도의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3. 성령의 열매 2.(에베소서5:18~21절)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 볼 본문은 에베소서 5장18~21절입니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 본문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성령충만의 결과는 어떤 은밀하고 신비스러운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와 하나님, 그리고 성도들 서로가 조화롭고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합니다.
이 본문에 보면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은
화답하면서 찬송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화답하면서 찬송한다는 것은 함께 모여서 마음을 맞추고 목소리를 맞추고 화음을 맞추어서 같이 주고받으면서 찬송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제안에서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성도들과 함께 어울려서 교제하며 찬양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특히 “마음으로” 찬양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 가운데 노래부르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음으로 찬양하는데 멜로디가 틀리면 어떻고 박자가 틀리면 어떻고 강약이 틀리면 어떻습니까?
노래를 잘 할 줄 알고 음악이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이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대에 서서 찬양을 하지는 않아도,
얼마든지 찬양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습니다.
2) 범사에 감사하고 주를 경외합니다.
또한 20절을 보면 성령충만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고 주를 경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고 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동서에 성도들 사이에서도 피차 복종하기를 즐거워합니다.
3) 성도들 상호간에 피차 복종합니다.
성도들 상호간에 피차 복종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방을 신뢰하니까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대하여 복종하는 것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한,
다른 성도들의 의견과 말을 존중하고 거기에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로서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주관과 주장을 너무 강하게 내세워서 고집이 너무 세다는 평을 들으면 우리의 생활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증거가 될 수도 있음을 염려해야 합니다.
4. 성령의 열매 (3) (요한복음14:17, 16:13)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에 보면 성령의 사역에 관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1)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합니다.
요14:17이나 16:13절에 보면 성령을 가리켜서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의 성령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은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점은 16장13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성령이 “자의로 말하지 않으신다”는 표현입니다.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을 말하시는데, 계속되는 14절, 15절에 보면 이 듣는 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라 하엿노라”
이처럼 성령이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지만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신다고 해서 나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직접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이 적은 영이시며 대부분의 경우에 침묵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무리 깊어지고 기도를 많이 해도 좀처럼 성령이 직접 우리에게 의견을 말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체험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므로 간증을 하거나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에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말은 매우 조심 해야 합니다.
물론 그 가능성을 전혀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 “진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통해서 말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말씀과 성경은 같이 갑니다.
이것은 성령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성령도 말씀하실 수 있는 영이지만,
성자 하나님의 뜻을 존중해서 오직 진리 곧 기록된 성결 말씀을 통해서만 대신 말씀하시는 입장을 굳게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학자가 분명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자기 말로 그것을 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같은 견해를 표현한 다른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마치 성자 하나님이 자기자신이 오시는 재림의 때를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만이 아시는 지식으로 넘겨 드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건실한 성령충만의 사역은 언제나 말씀과 동반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공부할 때 항상 성령이 도우심을 간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역사를 의지하지 않고 말씀을 읽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는 냉랭한 지식인은 될 수 있어도 훈훈하고 따뜻한 인격을 갖춘 교회지도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씀을 읽지 않고 성령충만을 간구하게 되면 자기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현상을 성령의 말씀이나 뜻으로 오해하기 쉽고 따라서 그릇된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신비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한 요소를 신적인 것으로 승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직접 들으려고 시도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심리적인 음성을 성령의 음성으로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전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장8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일입니디.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고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도하고 죄와 부도덕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극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역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거나 공부하거나 읽을 때 두 가지를 같이 들어야 합니다.
때로는 준엄한 죄에 대한 책망도 들어야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한 없는 용서와 은혜의 복음을 듣기도 해야 합니다.
위로도 들어야 하지만 책망도 들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들어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균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령충만의 열매는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인간관계에서 실천에 옮기려고 하면
많은 인내와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충만의 열매는 혼자 기도하고 찬양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과 어울려 즐겁게 찬양하고, 교제하며,
성도들의 말에 순종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또한 성령충만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인 줄 알고 말씀에 주의를 기우리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이때 우리는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위로뿐만 아니라,
책망과 경고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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