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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대전에서 : 대전→마곡사 I.C.→예산방면→신풍삼거리→부여/청양방면→대룡초등학교→칼텍스 주유소→수리치골 성지 ◈ 서울, 천안에서 : 천안 I.C.→천안 남부대로→온양/아산방면→유구→신풍삼거리→칼텍스 주유소→수리치골 성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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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 수리취 자생지 뒷면이 흰 취나물로서 나물로 보다는 떡을 해먹었다는 취나물의 일종으로 당시 근처 골짜기에 많이 자생하였다. |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성모신심의 발상지 |
수리치골은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될 때 서울을 중심으로 충청도에도 일찍부터 선교사들의 활동무대로 서울은 머리요 충청도는 심장에 해당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 1945년 8월 17일에 서품을 받으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3대 교구장 고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안또니오 신부님 (후에 5대 교구장이 되시는) 세 분이 함께 그 이듬해 1846년 10월에 조선에 입국하셔서 이곳에 은거하여 전교하시던 중 김대건 신부님께서 1년도 채 전교를 못하고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하시고 김 신부님의 체포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안또니오 신부님은 활동을 중지하고 이곳에 숨어 계시다가 김 신부님의 순교소식을 듣고 1846년 11월 2일에 페레올 주교님께서 암울한 한국교회를 성모성심께 봉헌하시고 작은 오두막집에서 몇 명의 신자들을 모아 성모성심회를 조직하고 4일 뒤 그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신부(성모성심회의 창설자)에게 보고하셨던 것이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하였다.”고 이 장소를 공식적으로 상기시켰다. 그리하여 수리치골은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마리아의 단체들에게 하나의 성지가 되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여기서 생겨났으며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기존의 성모신심 단체들은 체계화된 조직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각 지역별로 독립해서 존재해 있었고 그나마 박해를 거치면서 와해되는 상황이었다. 성모성심회는 성모공경을 주로 하는 신심 단체이지만 죄인의 회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선교 단체의 성격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단체가 설립된 시기가 박해 시기이고, 또 선교사들이 교회의 재건을 위해 조직했다는 사실은 성모성심회가 단지 순수한 신심단체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를 집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
조선교구 제 3대 교구장 고 페레올 요한 주교님의 은거지 |
이로써 한국 교회에 성모성심의 신심이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 후 페레올 요한 주교님께서는 8년 동안 활동하시다가 과중한 업무로 병을 얻어 45세로 선종하시면서 김대건 신부님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으로 미리내에 안장되어 계신다. 그래서 수리치골 성지 입구 왼쪽 골짜기는 페레올 고 요한 주교님께서 은거하셨다 하여 오늘날까지 마을의 외인들이 페레장 골이라고 부른다. 광장 내의 야외제대는 미리내에 안장되어 계시는 페레올 주교님의 봉분 덮개이다. 미리내에서 봉분을 다시 만들 때 페레올 주교님의 봉분 덮개를 가져와 제대로 쓰고 있다. 이 수리치골 성지는 페레올 주교님의 성지이기도 하다. |
박해시대 교우들의 은신처 |
이 곳은 또한 박해시대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곳이며, 국사봉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등 여러 골짜기 중에서도 수리치골이 가장 깊고 넓어 그 당시 100여호가 골짜기마다 숨어서 살았던 곳이다. 골짜기로 들어가 보면 예전에 교우들이 숨어살던 집터의 흔적과 감나무들이 있는데, 산속에 감나무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이다. 산중턱에 갑자기 평평하고 넓은 마당 같은 곳이 있는데 이곳을 마당재라고 일컬으며, 거기서 교우들이 곡식을 공동으로 타작해서 나누었다고 한다.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 숨어살다가 포졸들이 쫒아오면 국사봉을 넘어 면소재지가 다른 그 너머로 도망을 갔고, 그러면 포졸들은 자신의 구역이 아니라 더 이상 쫒아갈 수 없었다. 가족, 재산 모두를 버리고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살았던 것이며, 목숨과 바꾼 우리 선조들의 신앙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 한국인들의 신앙은 순교자들의 피로써 뿌리내린 신앙으로써, 처음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신앙을 선택한 이와 신앙을 목숨과 바꾼 그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하느님께서 더욱 사랑하시리라 생각된다.
광장 위로는 천주성삼상이, 옆으로는 승리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아래에는 우리 신앙 선조들이 마시던 샘물이 있어 역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광장 옆 진입로에서부터 성모님의 고통을 요약한 성모칠고 기도의 길이 만들어져 있어 성모성심을 잘 묵상할 수 있다. 성모칠고 길이 끝나는 부분부터 산 위로 십자가의 길이 이어져 있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상이 있고, 그 밑에는 잠자고 있는 세 제자들의 상도 있다. 그리고 광장 진입로 우측에는 티없으신 성모성심을 주보로 창립된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가 ‘성모성심을 통하여 천주성삼께 영광을!'이라는 모토 아래 성지를 가꾸며 기도하며 나자렛에서의 성모님 생활을 하고 있다. 성지 입구에 위치해 있는 수리치골 피정의 집에서는 피정과 순례 신청을 받아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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