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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신일수
신일수의 수필세계는 사물을 통찰하는 작가의 혜안을 엿보게 한다. 무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만년의 삶의 태도가 주로 자연인 산과 여행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로부터 사물의 시원(始原)과 종말(終末)에의 천착, 사물이 현재의 시공(時空)에 어찌 매여 있는지를 궁구하는 창작적 태도를 간파하게 한다. 여러 시각에서 사물을 투시함으로써 그 표리를 동시에 투사하는 작법은 그의 수필의 경지를 보여 주는 대목일 것이다.
1985년 『한국수필』 가을호에 「겨울 연지에서」로 등단 진주문인협회장, 경남수필문학회장, 한국수필작가회장 역임. 교육연구사, 송계중, 덕산중학교 교장 역임 한국수필문학상, 수필문학상, 한국예총예술문화상 수상. 대한민국 황조근정훈장 수훈 저서 『내 작은 뜰에는』, 『단 한번의 인생』, 『내 삶의 새로운 지평』, 『사랑 그 영원한 테마』, 『자연과 더불어 살아 온 세월』 등
│대표 작품│
나무달마살래 외 4편
신 일 수
지리산 청학동 초입에 ‘다오실’이란 조그마한 찻집이 하나 있다. 찻집이라고는 하나 입구에 손바닥만한 나무 간판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언뜻 보아선 여느 시골집과 별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지붕은 너새를 얹었고 일자형의 황토 집인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흔한 대문이나 울타리도 쳐져 있지 않고, 현관 입구에 반송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을 뿐이다.
모두 삼 칸인데 서재가 있고, 그 바로 옆에 공방으로 사용하는 작업실과 맨 끝에 다실(茶室)이 있다. 방바닥은 한지를 깔아 안온함이 감돌고 천장과 벽은 황토로 꾸며, 주인의 세심한 배려가 운치를 한결 더해 주고 있다. 방 안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탁자는 원목을 사용해서인지 나뭇결의 섬세한 무늬가 한층 돋보이며 친근감마저 들게 한다.
서쪽으로 나 있는 창을 제외한 나머지 벽면엔 다기(茶器)와 다구(茶具), 그리고 족자와 그림들이 걸려 있고 여기저기 옛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 한눈에 여느 찻집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주전자와 찻잔을 한쪽 벽 가득히 진열해 놓았는데 칸막이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데다, 빈 곳 하나 없이 칸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어림잡아도 500개도 넘을 성싶었다. 모양이나 빛깔도 각양각색이고 중국을 비롯하여 인도,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라오스, 미얀마, 대만, 홍콩, 베트남, 네팔 등 여러 곳에서 수집해 온 것이란다.
또 한쪽 벽엔 찻숟가락과 조롱박 모양의 바가지들이 수도 없이 걸려 있는데, 그가 집에 머무르는 날이면 혼자 공방에서 깎고, 다듬으며, 문질러 갖가지의 새와 동물들의 형상을 만들었는데 닮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니 아무래도 그는 천부적으로 장인 기질을 타고난 듯하다. 눈을 돌리니 그림과 글씨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기록물과 갖가지 골동품들이 또 다른 벽면 위아래를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산사람이라 자처할 정도로 산을 미치도록 아끼며 사랑하는 사람이다. 인근에 있는 지리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름 있는 웬만한 산이란 산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데가 거의 없고,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심지어 네팔을 거쳐 에베레스트와 히말라야 트레킹을 서른 번도 넘게 안방처럼 들락거렸다고 하니 그는 진정으로 산을 사랑하는 산악인이요, 사람과 사람끼리 부대끼기를 즐겨 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인(奇人)이라 해도 틀림없을 것 같다.
오래 전, 그가 펴낸 몇 권의 시집에서도 그를 소개하는 신문이나 잡지, TV나 방송매체에서 이름 석 자보다 그를 두고 ‘산에 미친 사람’으로 곧잘 호칭이 되는 것은, 인자요산(仁者樂山)이란 말처럼 그가 지닌 성품이나 행동이 올곧고 산을 아끼며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확실히 그는 산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랜 날들을 산속 여기저기를 헤매는 긴 여정인데도 행장은 간편하기 이를 데 없다. 그 흔한 라면 한 봉지, 물 한 컵, 담요 한 장 챙겨 가질 않는다. 그의 말대로 산행 길 어디에서든, 각종 열매와 낙엽, 솔잎과 시원한 물, 이름 모를 바위틈이 그 어느 곳과도 비유할 수 없는 아늑한 보금자리이며, 언제 어느 때 찾아가더라도 따뜻이 맞아 주기 때문이란다.
궂은 날을 제외한 평상시 산행은 언제나 맨발이다. 걷다 보면 지기(地氣)가 서서히 몸속으로 스며들어, 심신의 피로가 쉬이 풀리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가 내게 “형님! 저는 산짐승으로 태어나야 할 몸인데, 인간으로 잘못 태어난 것 같아요!”라고 들려준 말이 새삼 떠오른다.
지난해 그와 함께 중국 배낭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저녁 산보 겸 상해 뒷골목 골동품 가게를 기웃거리는데 만나는 상인들마다 지기(知己)를 얼마나 다져 놨는지, 하나같이 그를 끌어안고 손을 잡아당기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데, 반기며 환대하는 모습이 마치 우리네 시골 장터에서 오랜 시간 서로 잊고 지내 왔던 지인이나 인척을 만난 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자그마한 체구, 길게 자란 턱수염, 황갈색의 개량 한복, 끈으로 동여맨 머리, 빛바랜 운동화, 허리에 찬 낡은 전대 등이 외모로 풍기는 그의 모습이며 행장의 전부다.
지난봄 그를 찾았을 땐, 그가 내민 명함에 또 다른 이름 하나가 더 새겨져 있었다.
‘나무달마살래’
아무렴 산 찾아 길 떠나는 것보다 숲과 그늘이 있는 산을 탐닉하다 아예 산에서 안주하기를 작정했나 보다.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에서, 나무 닮아 산에서 살고파 하는 그의 강한 욕구가 또 다른 이름을 잉태한 것일 게다.
지금 창밖엔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이 비 그치면, 삼신봉에 올랐다가 고개 떨군 억새풀과 얘기도 좀 나누고, 지난번 산행 길에 눈여겨봐 둔 질경이, 처녀이끼, 돌양지, 바위솔 다독이다 구절초 그윽한 향내 맡으며 내려오는 길목 어귀에 있는 그를 만나 따끈한 작설차 한잔 나누고 싶다.
석류나무 한 그루
년이면 나도 칠순 고개를 넘는다.
젊은 날엔 가끔 정지된 듯한 시간 앞에서 앙달을 부릴 때도 있었다. 엊그제 회갑이라고 부산을 떨며 흘러간 시간들을 무척 원망했던 것 같은데 마치 홍두깨 놀음에 홀려 세월을 꼭 도둑맞은 기분이다.
서른을 1년 앞두고 결혼하여 딸 셋에다 막내로 아들을 두었으니 두고두고 내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느낌으로 후회 없이 살아왔다.
딸들은 용케도 스스로 짝을 지어 2년 간격으로 무사히 혼사를 치를 수 있었으니 중매 때문에 신경 쓸 일도 양가 집안끼리 저울질할 일도 없었다. 부모 마음 안 썩이고 그런대로 단란한 가정을 꾸려 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거기에다 멀리 떠나 살지 않고 내가 사는 근처에 도란도란 모여 있으니 보고플 땐 쉬이 볼 수 있으니 좋고, 수시로 친정이랍시고 들락거리니 더더욱 좋기만 하다.
명절 때가 되면, 외손까지 합세하고 서울 있는 아들 내외까지 가해지는 날에는 적요했던 집 안이 온통 북새통을 이룰 땐 새삼 사람 사는 맛이 무엇인가를 느끼기도 한다. 큰애가 딸 둘에 아들 하나, 둘째가 딸 하나에 아들 둘, 셋째가 딸 하나를 두었으니 자손이 귀한 집안은 분명 아닌 것임엔 틀림이 없다. 어찌 보면 저출산 때문에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크게 일조를 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장가를 보낸 지 꽤 오래인 듯한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통 소식이 없었다. 서로가 직장에 매여 있어 한숨 돌리고 난 뒤 천천히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막연한 예감만이 전부였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한의사인 그의 매형이 약을 여러 첩 지어 보내기도 하고, 이름 있는 병원 문을 수없이 두드렸지만 두 사람 모두가 신체상 이상이 없다는 진단만 거듭 나올 뿐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끔 안부를 물어 오는 사돈댁에서도 미안해 하는 눈치고, 특히 내자의 부질없는 걱정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 도를 점점 더해 갔고, 나 또한 마음속 깊이에서 비롯된 욕망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잡초들과 한참 씨름을 하고 있는데 내자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며느리가 소화도 잘 안 되고 속이 매스꺼워 다니던 병원엘 갔더니 뜻밖에도 임신 2개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놀란 내자가 얼떨결에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더니 묵은 김치가 제일 먹고 싶다는데 그곳 시골 동네에 수소문하여 어떻게든 꼭 좀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그의 고향은 강원도. 그곳엔 가을에 담근 김장김치를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이듬해 김장철까지 두고두고 먹지만 구정을 전후해서 모두 바닥이 나는 이곳의 사정과는 영 딴판인 것이다. 어떻게든 구해서 집으로 들어가야 될 텐데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채우는데 주저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지리산 중산리 쪽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천왕봉이 바라뵈는 지리산 계곡 언덕배기에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는 친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살고 있는 집 뒤에 자연동굴이 있어 야채나 과일은 말할 것도 없고, 김치도 저장하여 오래도록 먹는다는 얘길 수없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안주인이 경사스러운 일이라며 양껏 가져가라는 정겨운 말을 빼놓지 않는다.
스티로폼 박스에 넣고 보니 안이 절반도 차지 않는다. 시장에 급히 달려가 호두 1되를 사서 넣었는데도 빈자리가 유난히도 커 보여 큼지막한 복숭아 5개를 넣고 나니 그제야 제대로 모양새를 갖추고 속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달이 멀다 하고 인터넷으로 태아 사진을 동영상에 담아 본격적으로 보내 오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그 모습이 그 모습이고 별반 다른 것 같지도 않은데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들 내외의 질문 공세에 부대끼는 숱한 날들도 함께했었다. 예정일을 일주일 앞당겨 무사히 순산을 했다. 고통이야 말할 수 없었겠지만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했다.
결혼 7년 만에 고추 달린 손자를 본 것이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지인에게 작명을 의뢰했다. 을유(乙酉) 무인(戊寅) 무자(戊子) 술시(戌時)라 후세에 이름을 크게 떨치며 많은 사람들을 거느릴 보기 드문 좋은 사주(四柱)라는 극찬과 함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암시해 주는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매사에 조심하면서 살아가는 게 좋을 거라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싫지 않은 좋은 충고로 여기며 깊이 새겨들었다. 이름은 끝 항렬자 식(植)자에 태(太)자나 원(元)자를 붙이면 좋겠는데 내게 의향을 물어 왔다. 부르기에 약간의 강한 느낌이 드는 태식(太植)이라 부르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같은 생각이라며 동조를 보내 온다.
아들로부터 또 다른 연락이 왔다. 며느리가 잘 다니는 사찰의 스님이 아이를 낳으면 꼭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좋을 것이란 얘길 들어 왔다는 말을 전제로 내게 의향을 물어 왔다. 뜻밖의 제의에 순간 당혹스럽기도 했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많은 의미를 남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내자에게 의논을 했더니 역시 선뜻 동조를 해 왔다.
나무들과 함께하는 일상이지만 쉬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숱한 나무들이 마치 패션쇼를 하듯 제각기 그 특유의 모습을 뽐내며 내 앞을 스치며 하나 둘 지나가고 있었다. 상록수보다는 낙엽수, 그 중에서도 열매를 풍성히 달 수 있는 나무, 그리고 토양을 가리지 않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가 제격이라 생각하는 순간, 초여름에 짙은 주홍색 꽃을 달아내고 가을엔 홍보석의 빨간 열매를 달아내는 석류나무, 그 석류나무가 자꾸만 진한 영상을 그리며 선연한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서는 게 아닌가.
어제 선산 가장자리 널따란 곳에, 구덩이를 파고 부드러운 흙을 다져 가며 1년생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봄가뭄이 예사롭질 않아 물을 떠다 흠뻑 주고 나니 만감이 교차되고 또 다른 부푼 기대에 젖어드는 자신을 비로소 찾아낼 수 있었다. 뜻을 같이했음인지 간밤에 하늘에선 애타게 기다리던 봄비를 흡족히 내려 줬다.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린 것이다.
조금 전 아들 녀석으로부터 들어온 문자 메시지. 열어 보니 인터넷 첨부메일로 사진을 9장이나 보내 왔다. 며칠 전 산후조리원에서 본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그렇게 앙증맞고 귀엽다고들 한다는데……. 오랜 시간 기다렸던 보상심리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 역시 같은 기류를 타고 있는지 넉넉함으로 자리 잡는다.
옛말에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했는데 지금 그 말이 새삼 머릿속에 자꾸 맴돌고만 있다.
질경이
지리산은 예부터 삼신산의 하나로 불려 왔다. 삼신산인 그 지리산에 삼신봉이 있다. 청학동 입구에서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오른쪽이 외삼신봉, 가운데가 내삼신봉, 왼쪽이 쇠통바위이다.
더위가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 8월 초, 외삼신봉을 거쳐 내삼신봉에 올랐다. 외삼신봉은 해발 1,284m고, 70m 높은 곳에 내삼신봉이 자릴 하고 있었다.
그 정상 바위 틈새로 노란 꽃망울을 무수히 토해 내던 돌양지꽃, 파란 이끼 틈새로 산일엽초가 청순한 몸매를 가다듬어 까닭 없이 손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바위 아래엔 물기 머금은 떡풀이 넓은 잎사귀로 수줍은 듯 얼굴을 가리는데 벼랑 끝 여기저기 무수히 핀 바위채송화가 오수에 졸고 있는 한낮이었다.
흐르는 땀을 연방 훔쳐내며 정신없이 올랐던 8부 능선, 그쯤에서 만난 옹달샘에서도 해발 1,200m도 넘는 외삼신봉으로 가는 길목과 언덕배기에도 빠트릴 수 없는 특유의 몸짓으로 비상하는 자세를 취하며 사위(四圍)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렇게 숱한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고 짓눌림을 당하면서도 몸매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모습으로 의연함을 잃지 않는 그 억센 생명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래서 옛 성현들이 마차가 지나간 차바퀴 자국에도 잘 자란다 하여 차전초(車前草)라 일렀던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이 개구리나 뱀을 때려 기절시킨 후, 이 잎을 따서 덮어 놓으면 곧 깨어나 도망을 간다고 해서 길장구, 뱀조개라 부르기도 한다. 부드러운 잎은 나물로 먹으며 밀가루와 메밀가루 등을 섞어 병(餠)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씨앗은 이뇨제 전문 약으로 잎은 소염, 해열, 안질 등의 특효약으로 민간요법에 널리 쓰이기도 했다. 특히 질경이를 달여 매일 차 대용으로 상식을 하면 관절이 붓고 아플 때 눈의 충혈, 천식, 산후복통에 효과가 있다고 전한다.
질경이를 비이(瓢苡), 비거(瓢困)라고도 하는데 이는 잎을 상추 대신 쌈으로 먹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길 가운데 즐겨 자라는 채소라 하여 차륜채(車輪菜)라 부르기도 한다.
몸에 지닌 것 하나 없이 그대로 알몸을 드러내면서 한꺼번에 다 주고도 언제나 풍요롭고 넉넉함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할 줄 알고 때론 남의 아픈 마음을 달래 주기도 하며, 생명 바쳐 남을 구제할 줄 아는 숭고한 사랑과 미덕을 그는 분명 지니고 있다.
한여름에 이삭 모양의 꽃차례에 흰색의 꽃이 깨알처럼 총총히 달리고, 가을 초입에 삭과가 여무는데 씨앗은 검은색을 띠고 산복 도로, 들판, 뜰, 밭 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뿌리를 잘 내리며, 척박하고 건조한 곳을 가리지 않는 끈질기고도 강인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잎의 모양이 조개껍질 같다고 하여 배하조개, 우리 지방에서는 달리 빼뿌쟁이라 부르며 번식력 또한 왕성해 조건만 갖추어지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열매를 맺는 다년생 초본이다.
한꺼번에 타원형의 잎이 뿌리에서 나와 비스듬히 퍼져 총생하며 가장자리가 물결 모양을 하고, 잎자루는 고독함을 달래려 함인지 밑 부분이 넓어져 서로 얼싸안고 반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밟아도 밟아도 그 본성을 잃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는 질경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한탕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거기에다 극단으로 치닫는 시국, 걸핏하면 어린 자녀와 동반 자살을 꾀하고, 괴로움에 견디다 못해 재계의 총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하면 한창 자기 암시를 해야 할 어린애들이 부모들의 강압에 못 이겨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 허다한 지금, 과보호와 인간성 상실로 인해 타고난 본성과 잠재력을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갈수록 각박해지기만 하는 인심, 패륜이 판을 치고 퇴락되어 가는 도덕성이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겸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를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영악하고 편협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텅 빈 공간에서 온갖 것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숭고한 자세로 밝은 내일을 예감할 줄 아는 그의 지혜 앞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터득하며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아는 여유, 그 속에서 삶을 윤택하게 가꿀 줄도 알고, 때론 남의 불행을 감싸 주고 나를 희생할 줄 아는 그를 다시 떠올려 본다.
질경이 같은 삶을 구가할 줄 아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 인간상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꾸만 해 보게 된다.
세 차례의 백두산 등정
처음부터 의도적인 여정은 아니었지만 2005년 5월과 8월 그리고 10월, 세 차례에 걸쳐 백두산 등정 길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있었다. 인천에서 뱃길로 반나절, 그리고 철길 반나절을 보내고도 전용 버스로 하루를 더 달려 겨우 도착한 곳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는 이도백하(二道白河)라는 곳이었다. 우리로 치면 읍 단위 규모의 소도시로 백두산 아래 첫 동네라 일컫는 곳이 바로 여기다.
첫 등정은 5월 하순이었는데 북벽을 타고 천지(2,194m)로 올라가는 비교적 수월한 등반이었다. 이곳을 떠나올 땐 계절은 분명 늦봄을 알리고 있었는데 매표소 입구에 도착하니 봄은커녕 아직도 겨울은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산 아래선 그렇게 맑아 보이던 하늘이 올라갈수록 바람 따라 분분히 날리는 눈발이 앞을 자꾸만 가로막는데 하늘은 점점 짙은 구름으로 어둔 그림자만 드리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르막길 곳곳에 꽂아 놓은 깃발이 방향을 알려 주고, 비탈길엔 산사태와 폭설에 대비하기 위해 콘크리트로 터널을 만들고 바닥은 계단으로 되어 있어 오르는 데는 별 불편함은 없었다.
1시간 40여분 만에 올라 바라본 천지는 눈보라 속에 파묻혀 길게 누워 있었고, 그 주위를 에워싼 크고 작은 연봉들이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구름이 걷히고 긴 햇살이 끝없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하산을 서두른다. 그런데 발아래 이상한 감촉이 느껴져 눈 속을 비집어 보니 파란 새싹들이 꿈틀대며 찾아온 봄을 반기는 듯 조용한 웃음을 보내 오고 있었다.
두 번째 찾았을 땐 8월인데도 이곳은 가을빛이 완연했다. 타고난 몸맵시를 자랑하는 미인송들이 곳곳에 늘어서서 반기는가 했는데 붉게 물든 단풍 사이로 침엽수림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위엄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이번엔 지프차로 천문봉(2,670m)까지 오르기로 계획했던 터라 천지문 입구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가파른 비탈길을 수없이 돌아 한참을 오르다 보니 그림으로만 보아 왔던 갖가지 야생화들의 꽃잔치가 여기저기서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청아하게 맑은 보라색 하늘매발톱, 수줍은 미소로 다소곳이 고개 숙인 핑크빛 좀참꽃, 새아씨처럼 불그스레한 모습으로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구절초, 촘촘히 다듬은 자태로 고고한 모습을 잃지 않는 바위돌꽃 등 실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산정에 오르니,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숱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가까이 멀리 나타났다 사라지는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제각기 타고난 품성대로 그 모습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발아래 멀리 보이는 천지가 짙푸른 가슴을 열어젖히고 반가이 맞아들이고 있었다. 좀체 이런 장관을 구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며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탄성을 지르는데 환호의 열기가 대단했다. 어디가 중국 땅이며 어디가 북한 땅인가를 구태여 구분 짓고 싶질 않았다. 눈앞에 전개된 모두가 하나같이 정겨운 모습으로 환대하며 반겨 주는데 구태여 이것저것 가려서 본들 무엇 하랴!
이토록 두 차례에 걸친 배낭여행은 형님 따라 나선 길이었기에 별반 부담 같은 건 느끼지 않고 가벼운 맘으로 갔다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의 여행은 이와는 사정이 영 달랐다. 그것은 가이드를 맡았던 형님이 두 달간 여정으로 해외여행을 떠난 뒤였고, 그동안 함께 여행길에 올랐던 사람들로부터 입소문으로 전해 들은 주위 사람들의 끈질긴 권유로 인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로 하여금 백두산 등정 여행 가이드로 변신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뜻과는 무관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긴 했지만 내심으론 두 번의 경험으로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나를 더 부추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7박 8일 간의 세 번째 백두산 배낭여행의 출발은 가을의 중간쯤에 머물고 있던 10월 중순이었다. 일행은 18명으로 거의가 부부동반이었는데 50대 초반과 60대 중반으로 대부분이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큰 부담 같은 건 별반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모두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건강한 데다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어 떠나오기 전의 걱정과는 달리 계획대로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 나갔다.
사흘째 되던 날, 천지로 향하는 차장 밖 풍광도 알싸한 바람과 함께 가을의 정취와 겨울로 들어서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어 쾌적함을 더해 주는 더없이 좋은 날씨를 선뵈고 있었다.
그러나 산 아래 가까이 갈수록 사정은 달랐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가 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선 눈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실랑이 끝에 무리를 해서라도 올라가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하기야 수륙만리를 돌고 돌아 찾아왔는데, 천지를 눈앞에 두고 그냥 돌아설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첫 등정 때와 마찬가지로 천지를 향해 오르는 산길은 우리의 발길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눈비가 한데 뒤섞여 합세를 하는 가운데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가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때마침 내리는 비와 눈보라 그리고 구름에 가려 천지의 모습은 대할 순 없었어도 그런대로 올라온 보람만은 찾을 수 있었다. 오래 지체할 시간이 없어 급히 하산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일행 중 여자 한 사람이 그만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급히 달려들어 일으켜 세웠으나 혼자 힘으론 보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인 듯했다.
어둠은 점점 잦아드는데 그 자리에서 마냥 머뭇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행들의 도움으로 전에 봐 둔 이도백하에 있는 인민병원까지 옮겨 올 수 있었다. X-ray 촬영 결과, 아니나 다를까 발목에 10cm 정도 뼈에 금이 간 중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의사의 지시대로 발목에서 무릎까지 깁스를 하고 병원 문을 나서니 어느새 변방의 밤은 어둠을 드리운 채 차가운 별 무리들만이 사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여행이란 먼 길을 걸으며 눈으로 보고 생각하는 게 전부인데 앞으로 남은 여정을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하기만 했다. 버스와 열차 그리고 배를 번갈아 타야 하고 식사와 용변이며 활동하는 모든 일들이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은 일인 데다 환자 스스로가 느끼는 고통과 불편함도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일행들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불편한 심기는 또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난생처음 자처하고 나섰던 해외여행 가이드. 절반 이상이나 남은 여정을 순전히 나의 몫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새삼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는 지금,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여행 가이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만 같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데
진주문화원 소속 원로회원들 그리고 노인회 회원, 인터넷 원로 방에서 활동 중인 몇 분들과 함께 중국 자치구 내몽고와 고구려 유적지가 있는 동북지방, 심양에 있는 한인 거주지 서탑 등을 두루 섭렵하고 돌아왔다.
여정은 6박 7일이었지만 출발 당일에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한 치의 여유나 잠시의 짬도 허락하지 않은, 말 그대로 빡빡하게 짜여진 강행군의 여정이었다.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던 날도 기내에서 주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고, 당일로 압록강 연안까지 도착 6·25 때 미군 폭격기에 의해 끊어진 단교를 바라보며, 전쟁이 남긴 깊은 상흔을 어루만지기도 했고, 유람선을 타고 버려진 북녘 땅을 보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내 대절 버스에 몸을 기댄 채, 정돈되지 않은 길을 4시간 가까이 달려, 고구려 유적지가 있는 집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게만 보였던 긴긴 여름 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사방은 어둠이 짙게 깔린 한밤중이 넘은 시간이었다.
일행들 대부분이 현직에서 물러난 지 오래인, 대부분 칠순이 넘은 연로하신 분들이라고 지레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행 날짜가 가까워 오자 은근히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난생 두 번째 가이드란 자격으로 중국 땅을 밟게 되는 셈인데, 여행에 관계되는 실무의 대부분은 이곳 문화원 쪽에 위임을 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비자 발급에서부터 제반 업무 처리는 인천에 있는 여행 본사와의 연락을 직접 취했기 때문에 참가자들의 신상에 대해선 미리 익혀 둔 내용이나 다른 사항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출발 당일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일행들 명단을 접하고는, 혼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계산기를 꺼내 출생년도 평균치를 계산해 보니 자그마치 1930년생이 아닌가. 나이를 환산해 보니 평균 나이가 77세였다.
집 나서면 모두가 낯선 타향이고 그날부터 고생이라는데 과연 정해진 일정대로 무사히 여행을 마치게 될 것인지를 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지난해 난생처음으로 중국 동북지방 가이드를 자칭하여 7박 8일간의 여행길에 나섰던 일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다. 이곳에선 가을걷이가 한창이고 스산한 바람이 이는 10월 중순, 60대를 바라보는 부부 20여 명과 함께, 백두산 등반을 갔었는데 하산 길에서 큰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여자 한 사람이 발을 헛디뎌 살얼음판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발목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어 산 아래 첫 동네라 일컫는 이도백하까지 후송하여 응급처치를 한 적이 있었다. 발목에 깁스를 한 환자, 일행들의 갈 길은 아득하기만 한데, 여행 초반에 일어난 일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은 여정 내내 환자 자신이 겪는 고통, 그리고 일행들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쓴 「곡강(曲江)」에 보면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하여 “인생살이 칠십 년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네”로 적고 있다. 그래서 70세를 일컬어 ‘옛 고자’와 ‘드물 희자’를 사용하여 고희(古稀)라 이름 짓지 않았던가. 또한 공자도 『논어』에서 말하기를 70세가 되면 뜻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 여행에 함께했던 일행들 평균 나이가 77세, 흔히 희수(喜壽)라 하여 ‘뜻을 이루어 즐거울 때에는, 여러모로 삼가야 한다[得志有喜, 不可不戒]’라고 옛사람들은 그렇게 말들을 남겼는데, 내겐 참으로 많은 의미를 지닌 여행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 같다.
내 나이 70고개에 다다른 지금, 어지간한 모임에선 나를 노인 측에 끼워 주기도 하고, 지하철 매표소에서도 경로라고 말하면 얼굴 한 번 쳐다보질 않고, 표 한 장을 던져 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석 달에 한 번씩 교통비랍시고 거금 3만 몇 천 원인가를 지방자치단체에서 보조해 주니 고맙기도 하지만 어쩐지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을 때도 가끔은 있다. 그런데 이번 여행길에서 영계 취급을 받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으니 이런 영광을 어디에서 또다시 누릴 수 있단 말인가.
고구려 유적지 답사에서 먼 길 종일토록 걸으면서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현지 가이드에게 집요하리 만치 질문 공세를 펴는가 하면,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 황량하기만 했던 초원과 모래뿐인 내몽고 사막지대, 아고라까지 반나절을 가야 하는 강행군이건만 누더기처럼 정돈되지 않은 포장 길, 모래먼지 날아드는 덜컹대는 차 안에서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모두가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몽고에서의 첫날 밤, 하늘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마치 은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하늘에 수없이 깔린 별들은 금시라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순간 기억조차 아스라한 한여름 밤의 내 어린 시절, 강둑에 누워 질펀히 깔린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던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식어 가는 사막의 열기 따라 밤이슬이 하나 둘 내리는 시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질없는 걱정이 앞서 새벽 2, 3시경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숙소를 점검했을 때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나같이 편안한 가운데 모두 숙면을 취한 채 고요하기만 했다. 사막에서 유목민 생활을 해야 하는 그들의 전통가옥인 파오에서의 잠자리가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인기척에 놀라 깨어 보니 가까이 또는 멀리 아침 산보에 나선 모습들이 활기에 넘쳐 보인다. 모두가 환한 얼굴로 수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하다. 아침 식단도 단조로워 쌀미음과 오이지, 무말랭이 같은 마른찬뿐인데도 누구 하나 불평 한마디 없이 그릇조차 말끔히 닦아내니 그저 고맙기도 하거니와 오히려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떠나오기 전, 무겁게 짓눌리고 있던 온갖 생각들이 한낱 기우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신일수 작품론│
신일수 수필의 경향
― 무위(無爲)의 삶
한 상 렬
1. 무위의 삶, 형상화
작가가 글을 쓰고자 할 때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객관화시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단순한 자기 존재에 그치지 않고 확대하고자 하는 안목을 갖게 된다. 즉 인간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 뿌리를 내리고 좀 더 견고하게 자신을 구축하는 작업을 통해 삶에 대한 나름의 가치를 발견하고 진정 어린 자기와의 만남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과 무관했던 대상에서 그 본질과 대상과의 상관적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서 자신의 객관화가 구체화하게 된다. 수필문학은 이 경우 특히 화자인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필은 다른 문학의 양식과 달리 글쓴이의 체험과 사유, 성품이 노출되기 마련이어서이다.
수필작가 신일수의 수필은 어느 한 편만을 보아도 작가의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평생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친 교사였고, 수필작가이다. 1985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이래 교직과 문학을 병행하며 여러 문학단체의 일을 도맡아 하며, 『내 작은 뜰에는』, 『단 한 번의 인생』, 『내 삶의 새로운 지평』, 『사랑 그 영원한 테마』,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세월』 등의 수필집을 상재하였다. 지금은 교단을 떠나 창작과 산행으로 정신과 육체를 살찌우는 작가. 그렇기에 그의 수필은 여행과 산행, 자연에 대한 예찬과 탐미, 노년의 삶의 반추 등을 주 소재로 삼고 있는가 싶다. 이런 언술의 단서는 그의 저서의 제목만 훑어보아도 이내 짐작이 가능하다. 삶의 연륜인가. 누구나 나이 들면 그러려니 싶지만, 다행인 것은 그의 인생 역정과 달리 그가 누구보다도 대단히 건강한 수필을 창작해 내고 있다는 데에서, 그의 수필의 한 지평을 음미하게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위(無爲)의 삶에서 오는 게 아닐지 싶다.
지리산 청학동 초입에 ‘다오실’이란 조그마한 찻집이 하나 있다. 찻집이라고는 하나 입구에 손바닥만한 나무 간판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언뜻 보아선 여느 시골집과 별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지붕은 너새를 얹었고 일자형의 황토 집인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흔한 대문이나 울타리도 쳐져 있지 않고, 현관 입구에 반송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을 뿐이다.
모두 삼 칸인데 서재가 있고, 그 바로 옆에 공방으로 사용하는 작업실과 맨 끝에 다실(茶室)이 있다. 방바닥은 한지를 깔아 안온함이 감돌고 천장과 벽은 황토로 꾸며, 주인의 세심한 배려가 운치를 한결 더해 주고 있다. 방 안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탁자는 원목을 사용해서인지, 나뭇결의 섬세한 무늬가 한층 돋보이며 친근감마저 들게 한다.
―「나무달마살래」에서
청학동 찻집 ‘다오실’ 주인. 그는 산에 미친 사람이다. 스스로 산사람이라 자처할 만치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 그래서 산이란 산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 한다. 산만 좋아하는 게 아니고, 사람의 품성 또한 산을 닮았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궂은 날을 제외한 평상시 산행은 언제나 맨발이다. 걷다 보면 지기(地氣)가 서서히 몸속으로 스며들어, 심신의 피로가 쉬이 풀리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가 내게 ‘형님! 저는 산짐승으로 태어나야 할 몸인데, 인간으로 잘못 태어난 것 같아요!’라고 들려준 말이 새삼 떠오른다.”고 화자는 술회한다. 화자는 그를 닮아 있다. 화자에게 있어 그 산사람은 바로 화자 자신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화자는 ‘나무달마살래’이다. 이른바 나무를 닮아 살고 싶은 사람이란 뜻이겠다.
화자의 이런 삶의 태도. 그는 어쩌면 『바보 이반의 산』에서 보듯 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최성현은 이 책에서 “지구는 인간이 남긴 흔적으로 가득하다. 산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이 꺾고, 버린 것을 어느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산은 흙덩어리에 불과하고, 그것에 사는 나무나 풀, 벌레, 야생동물들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까? 그러나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땅은 어머니고, 나무와 새, 벌레, 물고기, 야생동물들은 형제이자 자매이다.”라고 했다. 여기 산은 곧 인간이 아닌가.
그렇기에 탓닛한 또한, “단 한 장의 종이에서도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볼 수 있다. 여기 이 종이가 있는 것은 구름이 있었기 때문이고, 숲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단 한 장의 종이에서 구름과 숲, 나무를 벤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인간을 포함하여 이 세상 만물은 모두 이처럼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니 탓닛한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전생에 우리는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현세에서도 우리들은 계속해서 나무라고 하는 것이다. 나무가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요컨대 나무와 인간은 서로 의지하여 하나의 큰 전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나무다. 우리들은 나무이기도 하고, 공기이기도 하고, 수풀이기도 하고, 구름이기도 한 것이다. 나무들이 모두 죽어 버리면 우리 인간도 죽어 없어진다.”라고.
지난봄 그를 찾았을 땐, 그가 내민 명함에 또 다른 이름 하나가 더 새겨져 있었다.
‘나무달마살래’
아무렴 산 찾아 길 떠나는 것보다, 숲과 그늘이 있는 산을 탐닉하다 아예 산에서 안주하기를 작정했나 보다.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에서, 나무 닮아 산에서 살고파 하는, 그의 강한 욕구가 또 다른 이름을 잉태한 것일 게다.
지금 창밖엔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이 비 그치면, 삼신봉에 올랐다가 고개 떨군 억새풀과 얘기도 좀 나누고, 지난번 산행 길에 눈여겨봐 둔 질경이, 처녀이끼, 돌양지, 바위솔 다독이다 구절초 그윽한 향내 맡으며, 내려오는 길목 어귀에 있는 그를 만나 따끈한 작설차 한 잔 나누고 싶다.
―「나무달마살래」에서
동음을 차용한 언어의 유희가 다소 생소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나무를 닮고 싶은 ‘다오실’ 주인이나 화자는 한결같이 산을 좋아한다. 산을 좋아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탐닉이요, 나무를 닮고 싶은 욕망이다. 그 대비가 돋보인다. 이런 해석의 탁월성이 이 수필을 수필답게 한다. 그런데 이 수필의 시선이 지나치게 ‘다오실’ 주인에게만 초점이 모아져 있다는 점은 아쉬움일 것이다. 대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천착해 가는 과정이 종당에 자신으로 귀환하면 어떠했을까. 즉 수필에서의 의미화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정을 추적해 내고 삶의 의미를 탐구해야 할 일이다. 수필이 사실의 기록과 관찰로만 끝난다면 그 의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때문에 수필은 사실의 나열이 아닌 다시 말하면, 표피적인 삶의 천착이 아닌, 그 안의 세계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이 수필이 자아의 관조가 아닌 대리인의 시선을 통한 삶의 모습이라면, 그 내밀한 삶의 진정성에 이르게 한다면, 독자는 훨씬 더 삶에 대한 의미를 심안으로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2. 대상에의 통찰, 그 의미화의 실제
삶과 죽음은 차례가 정해져 있지 아니하다. 하여 나이와 상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오기도 한다. 그러니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데」는 고희를 훨씬 넘긴 이들의 여행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통상적인 사고에 대한 뒤집기이다.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직설적으로 표출하지 아니하고 내면에 담긴 의미를 추적하려 하는 화자의 창작적 태도일 것이다.
일행들 대부분이 현직에서 물러난 지 오래인, 대부분 칠순이 넘은 연로하신 분들이라고 지레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행 날짜가 가까워 오자 은근히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난생 두 번째 가이드란 자격으로 중국 땅을 밟게 되는 셈인데, 여행에 관계되는 실무의 대부분은 이곳 문화원 쪽에 위임을 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비자 발급에서부터 제반 업무 처리는 인천에 있는 여행 본사와의 연락을 직접 취했기 때문에, 참가자들의 신상에 대해선 미리 익혀 둔 내용이나 다른 사항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데」에서
중국 자치구 내몽고와 고구려 유적지가 있는 동북지방, 심양에 있는 한인 거주지 서탑을 돌아보는 6박 7일의 여정을 떠난다. 고희를 넘긴 화자는 자신의 나이를 헤아리건만 막상 일행의 평균 나이가 77세였다고 한다. 일행의 가이드 역할을 맡은 화자로서는 적이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출발 당일에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한 치의 여유나 잠시의 짬도 허락하지 않은, 말 그대로 빡빡하게 짜여진 강행군의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여정의 가이드를 맡은 화자로서야 응당 부담스런 일일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이런 나이가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부질없는 걱정이 앞서 새벽 2, 3시경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숙소를 점검했을 때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나같이 편안한 가운데 모두 숙면을 취한 채 고요하기만 했다. 사막에서 유목민 생활을 해야 하는 그들의 전통가옥인 파오에서의 잠자리가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인기척에 놀라 깨어 보니, 가까이 또는 멀리 아침 산보에 나선 모습들이 활기에 넘쳐 보인다. 모두가 환한 얼굴로 수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하다. 아침 식단도 단조로워 쌀미음과 오이지, 무말랭이 같은 마른찬뿐인데도 누구 하나 불평 한마디 없이, 그릇조차 말끔히 닦아내니 그저 고맙기도 하거니와 오히려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데」에서
이런 자각은 오늘 이 시대가 겪고 있는 노령화 시대의 단면일 것이다. 인구의 노령화가 어느 나라보다 심각한 시대의 변화를 읽게 하는 이 수필은 인생의 해석과 생명의 이해라는 정서와 사상의 융해를 보여 준다. 흔히 이런 경우 인생 표현과 생명 해석이라는 생경하고 추상적인 언사로 이념이 노출되거나 관념화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런데 이 수필은 구체적인 사실의 정서화를 통해 미적 과정을 밟고 있어 정서적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소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요, 작가의 참[誠]을 통한 참[眞]을 찾는 삶을 보여 준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주제어의 제시와 이를 형상화하기 위한 해석과 일반화가 미적 감수성을 동반하면서 논리적으로 직핍되어 있다.
고희라는 작가의 연륜은 통상 노회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는 그런 노회함이 엿보이지 아니한다. 물론 작품 속에서 이를 배제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그의 수필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자연스레 화자의 연령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젊게 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한다. 그래 그의 발길은 자연 산을 찾고 여행길에 오른다. 수필 「나무달마살래」가 그 과정에서 만난 산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수필 「세 차례의 백두산 등정」은 그 정점에 있으며, 「질경이」는 산에서 만난 식물에의 천착이라 하겠다.
「질경이」는 실상 통속화된 소재이다. 그러나 이 수필이 지닌 마력 같은 힘은 바로 해석과 형상화에 있다. 소재를 보는 ‘눈’ 이를 윤오영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이는 네모난 작은 ‘파인더’를 통해 피사체(被寫體)의 구도를 설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장 중심적인 부분(하이라이트)과 긴하지 않은 부분을 판단하는 ‘눈’입니다. 같은 카메라로 같은 조건 아래 찍은 사진도 이 ‘눈’에 따라 효과가 좌우된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것은 인생이란 피사체를 다루는 수필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조건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수필은 질경이에 대한 해석, “몸에 지닌 것 하나 없이 그대로 알몸을 드러내면서 한꺼번에 다 주고도 언제나 풍요롭고 넉넉함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할 줄 알고, 때론 남의 아픈 마음을 달래 주기도 하며, 생명 바쳐 남을 구제할 줄 아는 숭고한 사랑과 미덕을 그는 분명 지니고 있다.”를 통해 현실에 대한 비정의 칼을 갈고 있다.
밟아도 밟아도 그 본성을 잃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는 질경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한탕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거기에다 극단으로 치닫는 시국, 걸핏하면 어린 자녀와 동반 자살을 꾀하고, 괴로움에 견디다 못해 재계의 총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하면, 한창 자기 암시를 해야 할 어린애들이 부모들의 강압에 못 이겨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이 허다한 지금, 과보호와 인간성 상실로 인해 타고난 본성과 잠재력을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갈수록 각박해지기만 하는 인심, 패륜이 판을 치고 퇴락되어 가는 도덕성이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겸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를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영악하고 편협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텅 빈 공간에서 온갖 것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숭고한 자세로 밝은 내일을 예감할 줄 아는 그의 지혜 앞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을 터득하며 깨닫는 것이다.
― 「질경이」에서
수필의 세계는 이렇게 삶과 유리될 수 없다. 그래 수필적 삶이라 했다. 바로 수필은 인간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어서 끈끈한 인간적 삶이 묻어 나와야 한다. 그렇기에 “질경이 같은 삶을 구가할 줄 아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 인간상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꾸만 해 보게 된다.”라는 결미가 호소력을 얻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의 수필 「석류나무 한 그루」는 주제 제시 면에서 다소의 무리가 보인다. 중심 화소는 장가를 보낸 아들아이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 며느리에게 임신 2개월이라는 의사의 진단은 집안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놀라고 기쁜 나머지,’묵은 김치’가 먹고 싶다는 말에 이를 구하려 하는 화자 부부의 황황망조(遑遑罔措)한 화제가 이어진다. 결혼 7년 만에 손자를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좋을 것이란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심은 것이 ‘석류나무 한 그루’이다. 이 수필의 진행은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게 된 사연을 중심으로 손자를 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조금 전 아들 녀석으로부터 들어온 문자 메시지. 열어 보니 인터넷 첨부멜로 사진을 9장이나 보내 왔다. 며칠 전 산후조리원에서 본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그렇게 앙증맞고 귀엽다고들 한다는데……. 오랜 시간 기다렸던 보상심리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 역시 같은 기류를 타고 있는지 넉넉함으로 자리 잡는다.
옛말에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했는데, 지금 그 말이 새삼 머릿속에 자꾸 맴돌고만 있다.
― 「석류나무 한 그루」에서
문제는 이 수필이 화자의 시선을 중심으로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느냐에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과연 이 수필이 지닌 대상에 대한 통찰과 해석은 무엇일까? 앞의 결미를 보아도 애매모호하다. 수필은 자기 현시나 변호가 아니다. 독자의 편에서 무용한 화소라면 의미를 찾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기행수필 「세 차례의 백두산 등정」과 같이 서사적 담론에 치중한 나머지 글의 중심을 잃고 있음도 그저 간과할 일이 아니겠다. 이 점은 우리가 흔히 비켜 나가기 어려운 취약점이 아닌가 싶다.
3. 나가는 말을 대신하여
수필작가 신일수는 평생 교단에 열정을 다 바치고 만년 무위의 삶을 문학화하고 있는 작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이래 그가 30여 년 동안 수필을 창작해 왔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작품을 발표했을까. 그런 그의 작품세계를 몇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애초 무리가 따르는 일이겠다.
따라서 이 논의에서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의 벽은 어쩌면 진실을 포장할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최근에 발표한 몇몇 텍스트를 중심으로 그의 수필세계를 추적해 보고자 했다.
앞의 작품에서 보았듯, 신일수의 수필 세계는 사물을 통찰하는 작가의 혜안을 엿보게 한다. 무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만년의 삶의 태도가 주로 자연인 산과 여행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로부터 사물의 시원(始原)과 종말(終末)에의 천착, 사물이 현재의 시공(時空)에 어찌 매여 있는지를 궁구하는 창작적 태도를 간파하게 한다. 여러 시각에서 사물을 투시함으로써 그 표리를 동시에 투사하는 작법은 그의 수필의 경지를 보여 주는 대목일 것이다. 다만, 한 작가의 작품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기에 작품 한 편에 쏟는 해석과 미적 형상화의 취약함을 그 역시 완전히 비켜나지 못하고 있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문학적 자전│
내 의식을 투영시키는 작업
신 일 수
나는 평소 글을 쓰면서 내 자신의 어휘력 부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글감에서부터 서술 내용의 전개나 서두는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무리 지어 나가느냐의 문제에 상당히 고심을 하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고, 글을 다 써 놓고도 제목을 정하지 못해 몇 날을 두고 생각에 잠길 때도 있다.
평소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면 하나같이 좋아만 보인다. 이것은 결코 남의 밥에 든 콩이 더 커 보이는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데도 내 의식을 투영시키는 이 작업이야말로 이렇듯 나 혼자만이 감내해야 할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짧은 글이기 때문에 시처럼 간결해야 하고, 소설처럼 독자를 끌어당기는 재미도 있어야 하며, 현실성이 결여된 허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말을 얼마나 들어 왔는지 모른다.
나는 늘 주머니 속에 메모지를 넣고 다닌다. 그것은 길을 걸을 때나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을 때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아 두기 위함이다.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서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으면 스크랩해 두었다가 그것으로 글감을 삼기도 한다. 제목을 정할 때는 작품 내용 가운데서 인용하기도 하고, 때론 암시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닐 땐 몇 날을 두고 고심할 때도 있다.
이렇게 하여 한 편의 글이 완성되면 서너 차례의 교정과 퇴고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탈고하게 된다.
누구든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실체에 대해 무지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보다 진실된 나를 발견하고 고백적 용기로 가식 없이 내 마음을 표출하며 동료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