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이화(無爲而化) / 임보
숨어사는 자들은 그를 보고 물이 든 사람이라는 비난이고
드러나 사는 자들은 그를 보고 우유부단(優柔不斷)이라는 불평이다
부르면 세상에 나가 일을 하고 놓아두면 돌아와 밭에 선다
그가 터를 잡아 사는 곳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산도 들도 아닌 어정쩡한 곳에서 집도 절도 아닌 그런 지붕 하나
덮고 지낸다
더러 옛날의 친구들이 찾아와 왜 이런 곳에 사느냐 물으면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얼보면 싱거운 것 같은데 보통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
우선 그의 곁에 있으면 편하다
근엄으로 위압을 부리지도 않고
어려운 말들을 풀어 마음을 무겁게 하지도 않는다
즐겨 웃으나 말수가 적다
그러나 상하귀천 없이 편히 어울려 술이 있으면 술을 따라 하고
노래가 있으면 노래를 따라 한다
그런데 그의 곁에 잠시 머물다 간 자들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달라진다
자주 웃고 말이 줄어들며 사이에 끼면 부드러워진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기에 세상을 그렇게 돌려놓는단 말인가
어느 선인(先人)은 일찍이 이를 일러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했다.

편지 / 임보
겨울 매운 바람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른 잎들을 찢어
허공에 흩고 있는 광경을 보았는가
어느 날 우리의 육신도
그렇게 헤어져 돌아가리니
이 육신 섬광처럼 짧고 빛나는 머묾이여
이 손바닥에 뜨거운 편지를 새기리라
영혼의 불꽃으로 깊이 새겨
허공에 띄우리라
한 억 년쯤 산하를 떠돌고 떠돌다
드디어 어느 골짝에서 다시 만나게 될
그대 수신자 나의 발이여
--------------가슴이여
--------------등뼈여
우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한때의 형제였었다고
영혼의 불꽃에 몸을 비비며
서로 붙들고 울먹일 수 있을까.

회향(回鄕) / 임보
눈을 감고 가도
어둠에 그냥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어가
눈에 담아 두지도 않았던
그의 고향 길을
몸으로 거슬러 오르듯
우리도 그렇게
고향에 되돌아간다.

어때? / 임보
옥이 묻히면 어때?
햇볕에 드러나
세상의 손에 쥐어지지 않고
그냥 묻히면 어때?
옥은 옥인데
산사태로 천 길 땅 속에
더 묻히면 어때?
홀로 사는 자의 즐거움을
아는 이 없음을
쓸쓸해해서 무엇해?
천지 땅 속에 묻힌 옥들
억수로 많은데
그들과 함께
등대고 누우면 어때?

홀로 가는 사람아 / 임보
꽃보다 더 고운 꽃으로
꽃을 피워
그대를 녹이고저
불보다 더 매운 불로
불을 질러
그대를 태우고저
동짓달 그믐밤 바람 속에
홀로 가는 사람아!

임보 시인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 http://cafe.daum.net/rimpoet
블로그 <시인의 별장> http://blog.daum.net/rimpo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