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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4호 - 공식명칭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한자명칭 : 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 지정일 1962.12.20 - 시대 조선시대
- 주소 경북 영천시 청통면 거조길 400-67, 은해사 거조암 (신원리) 문화재청 설명 은해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하며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
은해사(銀海寺)와 거조암(居祖庵)
경상북도 달구벌 북방의 거산(巨山) 팔공산(八公山)
대구, 칠곡, 군위, 영천, 경산등을 아우르는 큰산이지만 덩치만 큰것이 아니라 그 산이 품고있는 신성(神聖) 숭배가 지대함은 물론 줄기줄기 구비구비 마루마다 부처님을 모신 영산(靈山)인데, 그중 동쪽방향 영천쪽에 있는 은해사는 일제강점기 조선팔도 31본산중 하나이자 경상북도 5대 본산이었으며, 지금은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산하에 말사 39개소와 부속암자 8개소가 있는데 국보 14호 '영산전'이 있는 거조암도 은해사의 산내암자이다.
거조암은 은해사와는 약 10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는데 본래 거조사로 불리던 큰 사찰이었으며,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이곳에 머물면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은 역사깊은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거조사로 실려있는데 아마도 은해사가 사세를 크게 키우고 주변 암자들을 산하 암자로 품게되자 거조사도 은해사의 산내암자가 된듯 하다.
그러나 요즘들어 거조암은 오백나한상을 모신 영험함을 앞세워 나름대로 사세(寺勢)를 확장하는듯 보이며, 절앞에는 거조암이 아니라 거조사(居祖寺)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있다.
<거조암 입구, 최근에 세운듯 보이는 일주문에는 '팔공산거조사' 현판이 걸려있고, 단청불사를 기원중이다.>
<거조암은 평지사찰이지만 축대를 높다랗게 쌓아올리고 담을 둘러친 형태라 안으로 들어설때까지는 잘 안보인다.>
<사천왕이나 다른 문 없이 대문역할을 하는 영산루(靈山樓)로 바로 들어서게 되어 있는데 이마저도 최근 지은듯 하다.>
<여늬 절처럼 누각 아래를 통해 계단을 올라서면 절집 마당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영산전 지붕이 보인다.>
<영산루는 1층은 공양구등을 파는곳이며, 올라서서보면 단층처럼 보이는 2층은 종, 북, 운판, 목어의 사물(四物)이 걸린 종루이다.>
영산전(靈山殿)
영산루 아래 계단을 통해 거조암 마당에 올라서니 국보 14호 영산전이 정면에 길게 보이고 좌, 우로는 종무소와 요사채 건물 2동이 있을뿐, 단촐한 구조였다. 그러나 수십 수백의 당우(堂
국보 제14호 거조암 영산전을 처음 본 순간, 전혀 낯설지 않다. 익숙하다.
사진을 익히 보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해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등이 줄줄이 떠오른다.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긴 건물인데 흙벽 그대로인채 단청을 하지 않고있어 검소하고 소박한 느낌이며, 영산전 아래를 받치는 높지않게 쌓은 기단은 적당한 크기의 자연석을 오밀조밀하게 모아 붙여 직선으로 쌓은 인조석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단정한 맞배지붕이 좌우로 건물보다 충분히 나와있어 넉넉하고 안정되어 보이며 정면중앙에만 출입문을 냈을뿐, 정면 4칸과 측면 중앙에 아래위로 2개씩의 살창이 지극히 단순하게 자리잡아 더욱 편해보이는 건물이다.
해체 수리때 나온 묵서(墨書)에 의해 고려 우왕 원년(1375)에 건립된 고려말기 건물임이 확인되었고 국보로서 인정받은셈이다.
<영산전 모습... 방풍을 위해 살창에 비닐을 막아 아쉽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소박하면서도 의젓하다.>
<측면과 후면 모습... 이것 저것 쌓아놓거나 방치하지 않아 깔끔하다. 인위적인 가꿈보다 훨- 편안하다.>
<측면은 앞서 살펴본 무위전 극락보전에서처럼 기둥과 들보등을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면분할 모양이 나타나니 역시 간결하다.>
<영산전 앞 마당에는 삼층석탑 하나가 주목받지 못한채 서 있으며, 현판글씨는 설현신(薛玄愼)이 썼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나 명칭, 특히 절집 한옥 건물의 경우 용어나 역할등이 어려워 다 알수는 없지만 영산전은 기둥을 따라 건물을 가로지르는 도리가 7개인데, 보통은 9~11개임에 비추어 간단하게, 그만큼 대담하게 지은 건물이다. 앞 뒤 처마밑을 보면 밖으로 나온 출목도리(외목도리)가 다른건물보다 확연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산전 앞, 뒤 처마 아래를 보면 기둥위에만 포를 얹은 주심포 건물이며 출목도리가 기둥위 주심도리와 함께 길게 이어진다.>
<내부 역시 천장없이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구조이며 건물을 지탱하는 주기둥(고주)을 가로지르는 대들보가 보인다.>
주존 석가삼존불과 후불탱화
출입문 정면에는 주존의 자리에 석가삼존불을 모셨고 그 뒤에는 붉은빛 위주로 채색된 후불탱화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후불탱화인 영산탱(靈山幀)인데 유난히 붉은채색 위주인 점이 그렇다.
석가여래 주위로 모두 좌우 5명씩 10명이 보이는데 이들은 사대제자와 사대보살, 그리고 양천왕(天王)이며, 화기(畵記)에 건륭 50년, 즉 정조9년이라고 씌어 있는 홍탱화(紅幀畵)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며 특히나 붉은 색조위주로 그린 비범한 기품이 깃든 것이라면서 문화재에 등재되어야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고 있다 한다.
<석가삼존불과 후불탱화 영산탱(靈山幀), 실내 조명의 반사를 막을 길이 없어 사진에 반사광이 생겼다.>
오백나한상
거조암은 영산전이 국보라 유명한것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이나 신도들에게는 오백나한상으로 더 유명한 절이다.
모두 526개라는 나한들은 돌을 깎아서 만든후 색을 칠하고 옷이나 표정등을 입혔는데 하나같이 다른표정과 다른자세, 다른 의복등을 표현하여 둘러보는 동안 웃음이 절로나며 친숙하게 느껴진다.
영산전 넓은 내부를 좌우로 나누어 ㄷ자형태의 단을 겹으로 둘러놓은후에 5백개가 넘은 나한들을 작은 보료위에 정성껏 모신후에 각 나한마다 그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놓았다. 바닥에 화살표를 그려놓아 그 방향으로 따라가면 중복없이 모두를 배알할수 있다.
도대체 이 오백나한은 누가 구상하여 누가 만들고 누가 칠했으며 누가 이렇게 조밀조밀 배열하였는지?
한단 낮은곳에는 나한마다 접시 하나씩을 놓아 돈과 사탕이나 음식등을 공양하며 기도하도록 하였는데 100원 동전 하나씩만 놓아도 5만원이 넘고, 사탕 하나씩만 놓아도 큰 봉지 몇개를 뜯어야 한다.
거조암은 이 오백나한상에게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소문, 즉 기도빨이 세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영산전 실내에 겹으로 둘러놓은 오백나한... 저마다 이름이 붙어있는데 흥미롭다.>
거조암의 본절인 은해사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과 주련이 많아 유명하며, 절집보다 추사글씨를 보러오는 사람이 많은 곳인데 마침 서울 조계사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서 12. 14일까지 전시중이라니 한번쯤 가볼 만 하다.
또한 은해사의 또다른 산내암자인 백흥암도 거조암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유명세를 타는 곳이며, 특히나 백흥암의 극락전 불단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절집중 가장 아름다운 불단으로 극락전이 보물 제790호인데 비하여 내부 불단은 별도로 보물 제486호라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흥암은 아무때나 가볼 수가 없다. 일년에 단 한번 초파일에만 개방한다니 내년을 기약해본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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