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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신앙이 저 신앙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종교는 절대 반대한다. 영적으로 인종 차별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우리가 너희보다 하나님과 더 가깝다는 뜻으로, 바로 거기서 증오가 싹튼다 -랍비 슈물리 보티치 (Schmulev Boteach)
모세는 율법을 전달할 수 있고 마호메트는 검을 휘두를 수 있다. 부처는 개인적 조언을 들려줄 수 있고 공자는 지혜의 말을 들려줄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세상의 죄를 대속할 자격은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무한한 헌신과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다. -- 신학자 R. C. 스프라물 (Sproul)
월터 채플린스키(Walte「 Chaplinstky)는 종교에 대한 주관이 강한 사람으로 그것을 거리낌없이 표출했다. 1940년 뉴햄프셔 로체스터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그가 기성 종교를 '사기극'이라고 욕하면서 몇몇 기독교교단을 이름까지 대가며 비난했던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뉴햄프셔 주 법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거리나 공공 장소에서 사람에게 모욕이나 조롱, 불쾌한 말을 하는 행위' 는 범죄에 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채플린스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미국 대법원에까지 상소했다. 1942년 대법원 판사들은 만장일치로 그의 유죄를 확정했다. 그가 큰소리로 내뱉은 '도전적인 말 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수정 제1안을 벗어난다는 판결이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고등법원은 '도전적인 말' 의 정의를 '일신상 모멸감 을 줄 수 있는 말로, 본질상 폭력 행위를 유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 이라 명시했다.
도전적인 말 은 사람들 속에 노골적 반감을 유발하여 속이 뒤집히게 하고 주먹을 불끈 쥐게 한다. 이 불쾌한 발언은 상대의 가장 소중한 신념을 공격하여 듣는 이의 심중 깊이 비수처럼 곶힌다. 사실상 상대를 조롱하여 맹렬한 복수극을 유발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 말이 그렇게 불쾌하게 들릴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은 반드시 나사렛 예수를 통하는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주장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만과 독선과 고집으로 여겨진다. 종교 다원주의와 상호 존중의 시대에 그런 배타적 주장은 정치적 오류요, 다른 신앙 체계의 뺨에 언어 폭력을 가하는 일이다. 다원론자 로즈메리 래드포드 루더(Rosemary Radford Ruethor)는 그것을 '허무맹랑한 종교적 쇼비니즘'이라 못박았고, 한 유대교 랍비는 그것을 거만한 우월적 태도를 부추기는 '영적 독재'로 표현하면서 바로 그런 신앙이 다른 이들을 향한 증오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분명 오늘날에는 인도의 철학자 스와미 비베케난다(Swamivivekenan)가 표현한 것 같은 접근이 훨씬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는 1893년 세계 종교 회의에서 "우리 '힌두교도'는 모든 종교를 진리로 받아들인다'며,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진짜 죄라고 말했다
시간과 장소, 문화와 사람을 초월하여 만국 공통의 진리가 되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의 상대주의 문화에는 그런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태도가 어울린다. 사실 현재 미국인 중에는 그런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 2/3에 달한다. 무신론자 시절에 나 역시, 종교에 다가가는 유일한 바른 길을 자기네가 독점하고 있다는 기독교의 주장에 격분하곤 했다. "도대체 자기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기들이 뭐라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거야? 예수의 사랑은 다 어디 갔어?" 그런 불만이 새어나왔다.
찰스 템플턴은 예수 외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성경의 주장을 '참을 수 없는 오만 '으로 보았다. 템플턴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스도인은 작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대략 5명 중 4명 꼴로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신을 믿는다. 이 땅에 살고 있는 50억 이상의 사람들이 300가지가 넘는 신을 받들고 심기고 있다. 정령 숭배자나 부족 종교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3천 가지를 넘어설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만이 옳다고 믿어야 하는가?"'
전 세계 인구가 숭배하는 신들의 숫자를 턱없이 적게 말하기는 했지만 템플턴의 요지는 분명하다. 예수의 배타성은 오늘날 신앙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큰 장애물 중 하나이다. 이처럼 민감한 주제라면 반드시 전문가와 얘기할 필요가 있다. 명석한 지성, 건전한 철학적 배경, 세계의 다양한 종교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 인도에서 나고 자란 래바이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 야 말로 그런 기준에 꼭 맞는 사람이었다. 나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 교외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인도의 옛 속담에, 코를 만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 래바이 재커라이어스는 까만 양복저고리를 벗고 자기 사무실의 둥근 목재 탁자 앞에 앉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이런 방법도 있고." 그는 앞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코를 만지며 말했다. 그리고는 머리 뒤로 손을 돌려 반대쪽으로 코를 만지면서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하고 웃었다.다시 말해 인도인들은 너무 빨리 요점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먼 우회로를 거쳐 해답에 이르는 쪽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재커 라이어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빈틈없고 조리 있는 기독교 옹호자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다. 마음은 유하지만 지성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재커라이어스 에 대해 빌리 그레이엄은 "놀라운 영적 감식력과 지적 순전함을 갖춘 사람"3이라 평한 바 있다. 재커라이어스는 기독교, 철학, 세계 종교, 이단 등에 관해 전 세계 50여개 국에 걸친 수많은 대학에서 강연해 왔다. 그의 저서로는 하버드 대학에서의 통찰력 있는 연속 강의를 중심으로 꾸민 Can Man Live Without God(인간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가)? Shattered Visage: The Real Face of Atheism(부서진 얼굴 :무신론의 진면모), Deliver Us From Evil(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Cries of the Heart(마음의 절규), Jesus Among Other Gods(다른 신들 속의 예수) 등이 있다. 1999년에는 그의 첫 아동 도서 The Merchant and the Thief(상인과 도둑)가 간행되기도 했다.
재커라이어스는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를 받았고, 케임 브리지 대학교 객원 학자를 지낸 바 있다. 하우턴 대학교, 틴데일 신학대학원에서 각각 명예 신학 박사(D.D.)를, 애즈베리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얼라이언스 신학대학원에서 전도와 현대 사상 학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재커라이어스는 미국, 캐나다, 인도, 영국에 서무실을 두고 있는 '래바이 재커라이어스 국제 사역' 대표를 맡고 있다. 아내 마가렛과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다. 재커라이어스는 당당한 체구에 소년 같은 미소를 지닌 사람이다. 적당히 보기 좋은 구릿빛 피부는 눈부실 정도로 하얀 머리칼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부드럽고 걸쭉한 목소리에는 인도인 특유와 말투와 억양이 배어 있다. 그는 내게 더할 나위없이 정중한 예우를 해 주었다. 곧 외국 방문 길에 오를 참인 그의 뒤에서 직원들이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도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온전히 집중 해준 것이다.
내가 그를 찾은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예수의 주장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그 말은 예수가 제자 도마에게 한 말이다. 전승에 따르면 한때 의심 많던 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 믿음이 굳건해져 위험을 무릅 쓰고 인도 땅 깊숙이 들어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하다 결국 마드라스 근처에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재커라이어스는 도마의 순교를 기려 세워진 기념관에서 불과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어떤 의미에서 재커라이어스의 신앙 여정은 도마의 삶을 닳았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재커라이어스는 17세 때 미국인 전도자가 인도한 전도집회에서 말씀을 듣고 일단 믿음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허무를 이기지 못해 자살을 시도, 병원에 실려가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완전히 헌신된 예수의 제자가 되었고 전 세계 곳곳 돌아다니는 인도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시크도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이런 다 문화, 다중 종교의 환경이 그리스도 배타성이라는 난제에 있어 그의 시각을 한층 풍부하게 해 주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차를 조금씩 마시는 사이 나는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즉시 그 주제로 들어갔다.
기독교의 오만
"죄송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나는 질문의 서두를 꺼냈다. "예수가 하나님께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극히 오만 한것 아닙니까? 그들은 왜 자기들만 맞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말을 정당한 주장인 양 내세웁니까?"
억양과 보수적인 정장 차림 -빳빳한 흰색 셔츠와 연한 색조의 넥타이 -에서 격조 있는 인상이 풍겨나기는 했지만 재커라이어스의 대답에는 시종 상대의 마음을 잡아끄는 열정과 온기가 배어 있었다.
"리 , 내가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특히 동양에서 많이 듣지요." 그는 기운찬 소리로 말했다. 눈빛에서 깊은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맨 먼저 하는 일은, 그 말에 담긴 잘못된 정보부터 해결하는 것입니다. "
"잘못된 정보요?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물었다
"첫째, 배타성을 주장하는 종교는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슬람교도 철저히 배타성을 주장합니다. 신학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까지 그렇습니다. 회교도들은 코란이야말로 이슬람의 독점적이고 완전무결한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코란은 아랍어로 읽어야만 뜻이 통합니다.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코란을 속되게 하는 일입니다. 아랍어에 대한 기본적 이해 정도가 아니라 정교한 수준까지 다다라야 코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힌두교의 두 가지 근본 주장, 즉 힌두교 경전인 베다의 궁극적 권위와 카스트 제도를 거부하면서 생겨난 것이 불교입니다. 따라서 힌두교에 배타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힌두교 자체도 두세 가지 문제에는 절대 타협이 없습니다. 첫째는 업보의 법칙입니다. 모든 출생을 전생에 대한 상벌의 환생으로 해석하는 도덕적 인과응보의 법칙이지요. 둘째는 베다의 권위이고 셋째는 윤회입니다 "
나는 여기서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앞에 소개했던 스와미 비베케난다의 말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힌두교도들이 힌두교야말로 아주개방적인 종교라고 꽤 점잖게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의 속뜻은 이런 것입니다. 힌두교가 당신의 종교를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힌두교가 말하는 진리의 개념에 부합할 때 한해서 입니다. 힌두교의 진리 개념은 혼합주의입니다. " 혼합주의란 상이한 신앙은 물론 심지어 상반된 신앙까지 한데 융합하려는 시도이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시크교는 힌두교와 불교 둘 다에 반대하여 생긴 종교 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거부합니다 심지어 모든 종교를 다 끌어들였다고 주장하는 바하이교도 배타주의자는 배제합니다! 따라서 오만한 그리스도인의 배타성 주장은 다른 주요 종교들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만하다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논리적 공격이 될 수 없습니다. "
내가 다음 질문을 막 시작하자 재커라이어스는 내용을 미리 알아차리고 중간에 끼어들어 대신 말을 이어갔다.
'박사님이 믿기에 모든 진리는... " 내가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원칙적으로 배타적이냐고요? 물론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진리가 뭔가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 주장이 아닙니다. 그저 의견 진술일 뿐이지요. 진리주장은 거기에 어긋나는 것은 잘못됐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진리는 그 반대를 배제합니다. "
"거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나는 말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의 배타성을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진리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역시 오만한 것 아닙니까? 이것은 비판자들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부메랑 효과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의 주장에 담겨 있는 의미는 첫째, 진리란 절대적인 것이요, 둘째, 진리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배타성 주장은 그분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원칙적으로 틀렸다는 의미입니다. "
"그렇게 믿는 것과 그것을 교만이나 우월감이 내비치지 않게 남에게 전하는 것 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좀 거만하게 말할 때가 많지요.", 나는 말했다.
재커라이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자주 접하는 도전이었던 것이다 '맞 습니다.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진리는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진리의 소유자는 비위를 상하게 합니다. 인도에서 힌두교도 친구 회교도친구, 불교도 친구, 시크교도 친구들과 두루 함께 자라다 보니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들의 비난에 적잖이 공감이 갑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방법론을 어느 정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폭력과 적대와 적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인도에는, 상대의 코를 벤 뒤에는 아무리 장미향을 맡으라고 꽃을 줘도 소용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의 오만한 태도로 누군가의 마음 문이 닫혀 버린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인은 싫다'고 말했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리스도인 이 좀 더 구원받은 자답게 보인다면 나도 그들의 구원과를 믿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의 요지를 우리는 심각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배타적인 진리를 사랑으로 주장하는 것 은 가능한 일입니다. 과학자가 '이것이 열역학 제2의 법칙입니다'라고 아주 부드럽게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자는 굳이 이 말은 덧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우리 중에 이 법칙에 따를 수 있는 자를 투표로 결정할까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에 대한 비난은 정당할 때가 많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무조건 맞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동양 종교들도 이 부분에 있어서 자기 성찰의 소지가 많습니다. 나는 기독교 국가에서 인종 갈등이나 정치 싸움을 제외하고 단순히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순간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
나도 최근 읽은 신문 기사들을 통해 그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재커라이어스의 고국인 인도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그리스도인들이 무장 힌두교도에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신앙 전파 방법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단순히 기독교 메시지 자체에 대한 반응일 때도 있는 것이다.
"가장 완벽한 삶을 사신 분도 결국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 재커라이어스는 말했다. '진리에 대한 저항은 너무 강렬해서 상대가 아무 잘못이 없을 때에도 여전히 폭력과 미움을 품을 수 있습니다. "
네 가지 근본문제
누구나 자기가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사실 역사상 그런 주장을 편 이상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진짜 관건은 예수의 이 주장이 사실이라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박사님은 어떤 근거로 예수의 주장을 사실로 믿습니까?" 나는 재커라이어스 에게 물었다.
"그렇지요. 그것이 질문의 핵심입니다. "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선은 예수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의 신성에 반대되는 주장을 펴고 있는 다른 모든 종교 체계는 진리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설득력이 강합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모든 종교가 답을 구하는 네 가지 근본 문제를 통해 예수의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기원, 의미 , 도덕, 운명의 네 가지입니다. 나는 이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현실적인 답을 준다고 믿습니다. 그분의 답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
퍽 과감한 진술이었다. "그 네 가지에 있어서 다른 종교들이 어떻게 자격 미달
인지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불교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원과 도덕 면에서 부처의 답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불교는 무신론은 아닐지 몰라도 엄격히 말해 비(側)신론 종교입니다 창조주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법은 어디서 왔다는 말입니까? 힌두교의 윤회는 어떻습니까? 모든 출생이 환생이며 모든 생애가 전생의 상벌이라면 최초의 생애는 무엇에 대한 상벌입니까? 논리적으로 함정이 있습니다. "
그는 다른 종교들을 헐뜯으려는 것이 아님을 재빨리 덧붙인 뒤 말을 이었다. '위대한 학자들도 논리가 맞지 않음을 지적할 것입니다. 심지어 간디도 만일 자기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힌두교 경전에서 일부를 삭제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모순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예수의 답은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현실에 부합하고 내적 연관성도 있습니다. "
자세한 설명이 요구되는 말이었다. "하나씩 차례로 그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좋습니다. 먼저 기원에 관해, 성경은 힌두교의 주장과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과 같지 않고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저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인간의 도덕적 준거입니다. 유일신 종교가 아니고는 어떤 종교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준거를 설명하지 못하기는 자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도덕적 준거를 인간은 현실 속에서 경험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동산의 유혹자는 인간이 열매를 먹는 순간 하나님과 같아져 선악을 알게 된다고 말했는데 곧 인간이 선악의 규정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거기서 인본주의가 태동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의지적 반역과 거부는 인간의 현실에서 확인됩니다. 말콤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의 말대로 인간의 타락은 경험적으로 가장 분명한 실체인 동시에 철학적으로 가장 거부되는 실체입니다.
둘째, 의미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도 기독교 신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것을 가장 간단히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착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우리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로 부르시지도 않습니다. 의미는 오직 예배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즐거움 이상의 그 무엇이 의미를 제공하는데, 곧 예배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전제될 때에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 역시 경험으로 확인됩니다.
셋째, 기독교는 도덕의 기반을 문화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 자체에 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도덕법은 인간 위에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부속된 것인가?' 라는 케케묵은 철학적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도덕법이 인간 위에 있다면 그 뿌리는 어디란 말입니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뿌리를 영원하고 도덕적이며 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 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렇듯 기독교의 도덕에 대한 설명은 앞뒤 조리가 맞습니다.
넷째, 인간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반으로 합니다. 부활은 그분의 신성을 확증한 사건이자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준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장에 근접하기라도 한 것을 달리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습니까?
빌리 그레이엄은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를 만났던 일을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괼른 시장으로 있을 당시 나치 정권에 반대하여 투옥되었다가 후에 존경받는 서독 수상으로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재임한 사람이지요. 그분이 그레이엄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레이엄이 물론이라고 대답하자 아데나치는 그레이엄 목사님,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는 다른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기에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 수 있으며,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내 친구 중에 이슬람교에서 개종하고 후에 순교한 사람이 있습니다. 두 다리가 잘린 그를 병원으로 찾아갔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설득을 듣게 될수록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 나는 그 말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정말 옳은 말이라고 믿습니다
예수처럼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처럼 답한 사람도 없습니다 물음에 답한 것만 아니라 그 인격 자체가 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실존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단지 신비주의나 영감의 책이 아니라 지리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까지 담고 있는 책입니다. 한 인간이 정직한 회의론자라면 성경은 그를 감정이 아닌 살아 계신 한 인격에게로 부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다시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실체이다.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 이 진리는 거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
장님들이 만지는 코끼리
기독교에 대한 재커라이어스의 말이 맞는다 해도 반드시 다른 모든 종교가 틀린 것일까? 핵심으로 들어가면 종교는 모두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용되는 언어와 이미지, 전통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 동일한 신념을 전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말했다 "어떤 주장을 보니까, 세계의 모든 종교는 본질상 하나님이 만인의 아버지고 인류가 만인의 형제라고 가르친다던데요. 세계의 모든신앙 체계가 동등하게 의미 있다면서요."
재커라이어스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얼굴에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모든 종교가 똑같은 것을 가르친다는 주장은 종교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불교는 하나님의 존재를 주장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인의 아버지라니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힌두교의 영항력있는 철학자 샨카라 (Shankara)는 유신론이란 인간이 궁극적으로 정상, 즉 하나님과 구분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데 있어 유치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버지라니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믿음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형제 됨은 무슨 뜻일까요? 맞습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형제 자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형제 자매인 이유는 단지 하나님께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가 없다면 형제 됨이란 허울좋은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요컨대 이슬람교와 불교와 힌두교와 기독교는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종교는 저마다 구별될 뿐 아니라 상호 배타적인 종교적 교리입니다 모든 종교가 동시에 다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
그래도 나는 종교적 융화의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각 종교마다 진리가 한 조각씩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신학자 존 히크(John Hick)는 각 종교는 결국 궁극적 실체' , 즉 하나님에 대한 문화적으로 상이한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장님 세 명이 코끼리를 만졌다는 얘기를 아시지요? 각 종교가 진실하기 하되 자체 힘만으로는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각 종교는 그 나름대로 유효하고요."
재커라이어스는 약간 철학적인 반격으로 대답했다. '그 말을 하는 히크 역시자신이 속한 문화의 산물이거나 문화를 초월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만일 그 자신의 문화를 초월했다면 과거 다른 사람은 왜 문화를 초월하지 못했을까요? 그의 말은 학적으로는 정교해 보여도 배후에는 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
"이를테면 어떤 것입니까?" 나는 물었다.
"예를 들어, 무신론도 진리 한 조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신론은 여기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신론의 근본 교리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인데 무신론에도 한 조각의 진리가 있다면 그 한 조각은 무엇입니까?"
그는 질문의 답이 자명해지도록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요. 사실상 모든 주요 종교에는 진리의 단면들이 있습니다. 각 종교에는 위대한 사상과 신념이 녹아 있습니다. 동양의 유명한 철학서 들을 읽어 보면 깨닫는 바는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이야기에서 한 사람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나무라 생각하고 한 사람은 코를 만지면서 밧줄이라 생각하고 또 한사람은 귀를 만지면서 부채라 생각하지요.
그는 강조하느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 비유에는 대상의 참 정체가 코끼리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져 있습니다! 장님이 나무라고 하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나무도 아니고 밧줄도 아니고 부채도 아닙니다. 눈뜬 사람은 코끼리인 줄 훤히 압니다. 그는 진리를 압니다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모든 진리는 그분 안에 한데 모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 진리의 단면들이 있다 해도 진리의 총합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히크의 설명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다는 것과, 따라서 그분의 참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한 것입니다. 대신 히크는 문화와 직관을 더 우위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실제로 자신을 계시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원, 의, 예배
코미디언 켄틴 크리스프(Quentin Crisp)의 유머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북아일랜드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신론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청중 한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믿지 않는 신은 가톨릭 하나님인가, 개신교 하나님인가?"
뿌리 깊은 종교 분쟁을 꼬집은 가슴 아픈 말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 땅에는 신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에 싸움과 폭력이 끊이지 않았다. 종교 분쟁에 염증을 느끼고 두 손 든 사람들은, 교리적 차이로 싸우는 일을 멈추고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데 중점을 둔다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몰몬교, 힌두교를 막론하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재커라이어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이웃을 대하는 방식이 신학적으로 무엇을 믿는가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는 대답했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이웃을 대하는 방식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는가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믿는 내용이 그대로 삶의 방식으로 반영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교리 문서에 서명을 했든 안 했든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덕이 곧 삶의 전부인 양 말하면 안 되지요."
"도덕이 삶의 핵심이 아니라면, 그럼 삶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나쁜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려고 세상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죽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세상에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죽어 있는 자들을 산 자가 되게 하려고 온 것입니다. 삶이 도덕만의 문제라면 어떻게 사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겠지요. 삶의 방식이 여전히 믿음의 내용과 연관돼 있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개념을 오해한 것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잘산다해도 하나님의 기준과 성품에 부합할 수 없습니다.
'죄'라는 단어는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그 정의가 맞다면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분이 없다면 올바른 삶은 고사하고 옳은 것을 믿을 수조차 없습니다.
순전히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비롭고 도덕적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임마누엘 칸트 같은 계몽주의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지금껏 도덕이 무엇인지조차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말해 준 것은 도덕이 사회에 미친 영향정도입니다.
나 역시 사람이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조셉 플레처 Joseph Fletcher)의 상황 윤리, 아인 랜드(Ayn Rand)의 자기중심적 휴머니즘, 칸트의 의무 개념 등의 예닐곱 가지로 좁혔습니다. 하지만 각 이론은 피차 상충하는 것이었습니다 초월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도덕적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단순한 생존으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나는 선악의 문제는 잘못된 출발점이라 믿습니다. 영적인 생사의 문제야말로 바른 출발점입니다. "
나는 반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사님도 인정하셨듯이 삶의 방식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간디가 대다수 그리스도인들보다 덕망 있는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간디가 지옥에 가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많은 청중 앞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쉬는 시간을 갖자고 할 것입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분명 성경에는 그 답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이 인간을 천국이나 지옥에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천국이나 지옥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 자신의 반응에 달린 문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조차 그분의 은혜로 가능하지만 말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소등과 고모라 사건에서 하나님께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실 셈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 스스로의 답은 정말 놀랍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간디나 혹은 기타 다른 누구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결국 의를 행하실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은혜를 믿고 받아들였을 때의 일이지요. 만일 은혜를 거부하면 그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재미있는 질문이지요. 성경은 구원받기 전에는 누구도 선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출애굽기에는 세 가지 사건이 하나의 패턴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그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다음에 도덕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성막을 주셨습니다. 구원, 의 , 예배의 순서입니다 이 순서는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구원받지 않는 한 의로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고 의롭게 되지 않는 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자‥‥ 누군고? 곧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의롭게 되는 가장 중요한 발걸음입니다. 만일 스스로 선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은 본질상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구원자인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자는 선하든 악하든, 하나님의 근본 원리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이 인생의 첫 단계입니다. "
그렇다면 간디는?
내 마음은 여전히 간디에게 있었다. "예수를 따르지 않았으니 박사님 말대로라면 간디도 구원받지 못했겠군요."
"하나님이 판정하실 일입니다. " 재커라이어스는 담담히 답했다.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이고 진리는 하나님이다. ' 그말이 무슨 뜻일까요?
지금 우리는 방 안에 앉아 있지요. 맞는 진술입니다. 그렇다고 이 방이 선한지 악한지 여부와 상관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방 안에 있다는 사실만을 말할따름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맞는 진술입니까? 맞다면 그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나는 박사의 말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간디입니다. 대다수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선한 삶을 살았습니다. 연쇄 살인범 데이비드 버코위츠(David Berkowit)는 무죄한 사람을 여러 명 죽이고도 예수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다 고 하더군요. 그리스도인들은 버코위츠는 천국에 가고 간디는 못 간다고 말할 테지요. 이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공평함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공평함은 주어진 시간 동안 누가 어떻게 행동했는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공평의 개념을 놓치고 맙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공평을 판단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말 마땅한 대우를 하신다면 우리는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던 두 형제 중 하나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남은 형제는 목사를 찾아가 장례식 설교를 의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죽은 형제를 성인(聖人)이라 불러 주십시오.' 목사는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장례식 날이 되어 목사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요 협잡꾼이요 절도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그 형제에 비하면 성인이었습니다!'
뼈있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어떻게든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선을 주장하려 합니다. 데이비드 버코위츠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잠깐! 나는 히틀러가 아니오. 수백만 명을 죽이지는 않았소. 그저 몇 명 죽였을 뿐이오.' 혹은 '나는 제프리다머 (Jeffrey Dahmer)가 아니오. 난 적어도 시체를 먹지는 않았소.' 이런 식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남보다 나아 보이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 기준 앞에서 우리 모두는 실격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필요합니다.
분명 데이비드 버코위츠가 저지른 일은 폭력이며 악입니다. 거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체적 구원 계획 속에서 보면 살인보다 나쁜 것이 있습니다. "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물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최악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통해 생명을 되찾을 수 있고, 사별한 사람은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고, 능욕 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힘과 보호를 얻고, 또 하나님이 어두운 악의 세력을 다스리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잔학한 행위와 비극에도 돌이킬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돌이킬 길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자신이 데이비드 버코위츠, 마하트마 간디, 아돌프히틀러, 테레사 수녀 중 어떤 사람인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분과 함께 천국에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지극히 선한 삶을 살았다며 교만과 자만심에 눈이 멀었다면 버코위츠가 발견한 궁극적 진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지옥이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부재 속에 인생을 사는 것이야말로 이미 지옥에 들어선 것입니다. "
"하지만 버코위츠 같은 살인범이 무사히 풀려나는 것이 공평한 일입니까?" 나는 항변했다.
'그가 무사히 풀려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깨달았다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아픔이 깊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 중에 잠시 딴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어린아이가 차 앞으로 뛰어들어 그만 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이 비극은 그 사람이 평생 지고 갈 짐이 될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을 것입니다
버코위츠가 교수대에 서지 않았으니 그가 풀려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에게는 마음의 교수대가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자초한 지옥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이라면 감방에 앉아 '흠, 이제 그리스도인이 됐으니 궁지를 모면했군' 하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천만에요. 때로 내면의 지옥이 더 깊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나는 구원이 지연되는 것이 지옥이라고 믿습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은 하나님을 알기 전 나 때문에 사라져 간 것들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용서해 주십니까?물론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가 과거를 잊지 못합니다. "
재커라이어스는 거기에서 잠시 멈추고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그의 이야기는 곧 다시 이어졌다. "은혜를 오해하면 비교와 질투, 불만과 억울한 하소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도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합니다
예수가 든 한 비유에서, 주인은 온종일 일한 일꾼과 말미에 나타난 일꾼 모두에게 같은 품삯을 줍니다. 그 계산 방식에 온종일 일한 일꾼들은 불만을 품지요? 성경의 파격적인 진리 중 하나가 행위로 천국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가 평판 나쁜 여자를 받아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공로로 얻어낸 높은 콧잔등 너머로 하나님의 자비를 내려다보며 비 웃습니다. 행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위는 용서를 얻어 낸 공로의 훈장이 아니라 값없이 용서받았다는 표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
그럼 듣지 못한 자들은?
연쇄 살인범 데이비드 버코위츠는 운이 좋았다 그는 기독교가 자유로운 나라에 살았던 것이다. 누군가 그리스도의 용서를 말해 주었고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믿었다. 하치만 복음이 일상적으로 거론되지 않거나 복음 전파가 사실상 불법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하고 그저 부모의 종교적 전통을 따른 사람들을 정죄한다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나는 물었다.
재커라이어스는 손을 뻗어 성경을 집어들었다. 사도행전 부분에는 노란색으로 밑줄 친 요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할 죄 값을 대신하여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 그것이 곧 지불된 대가입니다. 저마다 다른 문화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이 이 사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 보지요.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한 것입니다. "
재커라이어스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코 위에 살짝 걸치고는 바울이 몇 명의 그리스 철학자들과 쟁론하는 부분을 읽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 "
재커라이어스는 안경을 벗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중요한 말입니다. 피조된 세계 안에 주권적 계획이 있어 각 사람의 출생지를 정해 주신다는 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 자랄 곳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을 찾을 만한 곳에 우리를 두십니다. 우리가 어떤 나라, 어떤 문화에 속해 어느 곳에 살든 그분은 우리 각사람의 손닿는 반경 내에 계십니다. 모든 인간은 언제라도 무릎꿇고 '하나님 도와 주세요 하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그 사람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어떻게 말입니까?"
'복음 전할 사람을 보내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한 이슬람 여인이 내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의 유명 기관에서 일하는 여인이었는데 어느 날 퇴근하면서 몹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길을 걷는데 '왜 이렇게 공허한지 모르겠어' 라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러다 여인은 난데없이 '예수여, 날 도와줄 수 있나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길거리에 멈춰 서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왜 내 입에서 그이름이 나왔지?' 결국 여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 나는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찾아 갈급해 하면서도 자기 존재의 폐쇄된 세계 안에서 그분께 다가갈 길을 찾지 못하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경의 장벽을 뛰어넘으셨습니다. 여인이 이미 자기 내면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을 진정 알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문화적 상황도 헤치고 들어가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로마서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신성이 그 지으신 만물을 통해 만인에게 드러나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양심에 그분을 찾을 만한 법을 심어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또 인간이 그분을 알게 되는 데 필요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언급했는데 나는 그것이 다양한 문화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겠지요? 나는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강연한 바 있습니다 예수에 대해 말하기 힘든 곳이지요. 이들 중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한 그리스도인을 통해 표현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또 환상이나 꿈, 기타 초자연적 개입을 통해 그런 결단을 내렸습니다. 천사와 환상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회교보다 복잡한 종교는 없습니다. 나는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회교의 민감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환상과 꿈으로 말씀하고 계시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인도의 가장 위대한 회심자는 시크교도였던 선다 싱입니다. 그는 꿈속에서 자기 방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 일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여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주어지기에, 어느곳에 있든 피조된 세계의 일반 계시와 우리의 양심을 통해 그분의 말씀이 들리기에,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핑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반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진리를 알고 있으며, 일단 반응하면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계시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다른 문화 사람보다 방대한 진리를 알아야 할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
나는 그의 요지를 요약해 보았다. '그러니까 어느 지역 어떤 문화 속에 살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그분께 반응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씀이군요."
재커라이어스는 내 말을 조심스레 저울질한 뒤 답했다. "그렇다고 믿습니다 아주 조심해야 할 대목인데 한 인간이 진심으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구한다면 그분이 반드시 길을 열어 그 사람에게 당신에 관한 얘기를 들려 주신다고 믿습니다. 지금껏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은 사람은 그분에 대한 얘기를 들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반응하지 않을 경우 정죄 당할 만큼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듣지 못했어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와 양심과 기타 다른 방법들을 통해 들려주신 말씀을 이미 거부했다면 우리는 다 그분 앞에 서서 책임지게 됩니다. "
"그러니까 진실해야겠군요?"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진실함이 구원은 아닙니다만 진실함이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실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해 보이는 사람도 막상 누군가 그리스도를 전하면 거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시험에 떨어지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박사님은 그리스도에 관해 알아야 할 정보의 양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믿으시나요?" 나는 말했다
"예,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서구적 시각의 위험 요소는, 무엇이든 깨끗하게 포장돼 있지 않으면 불량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일부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는 대로 신조를 고백하지 않으면 무조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압니까? 엄마가 자기를 먹여 주고 입혀주고 안아 주고 뽀뽀해 준다는 것, 이를테면 친구 정도로나 알겠지요. 열여덟 살 자녀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엄마를 사랑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압니다 하나님의 계시에는 다양한 이해의 수준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
예수를 택한사람
예수가 진리라면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거부하는 것일까? 기독교가 진실이라면 궁극적으로 우세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통계가 보여 주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다른 유수의 종교들처럼 개종자를 내는 데 별반 이렇다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부모의 종교를 물려받는 경향이 있다.
나는 재커라이어스에게 이 점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것이 기독교 옹호자로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꽤 그럴듯한 설명이 있다고 했다.
"문제를 약간 다른 시각에서 봅시다. 오늘날 미국에서 불교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소량의 멋진 영성을 맛본 뒤 다시 삶을 양분하여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 종교라면 사람들은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또 이슬람교가 환영받는 이유는 지정학적 요인들 때문입니다 힌두교의 매력은 그 안에 있는 풍부한 철학 때문입니다. 지구를 경외해야 한다는 교의도 있지요."
"왜 기독교는 그렇지 않을까요?" 나는 물었다.
"예수는 우리 자아에게 죽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전폭적으로 헌신해야 할 때, 즉 철저히 낮아져 자신의 의지를 드려야 할 때, 언제나 저항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힘과 자율을 깨뜨립니다.. 순결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율법을 주자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은혜의 메시지를 주어도 사람들은 차라리 우리에게 확고부동한 율법을 주시했습니다. 예수가 문화 속에 무엇을 가져오든 문화는 그것을 거부하는데 그 핵심은 예수에 대한 저항입니다.
불교와 기타 종교들은 사람이 자력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을 보여 줍니다. 내 경우 대부분의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하는 일은 문제가 된 적이 없습니다. 내게 없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려는 의지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 그리스도가 들어와, 우리가 전적으로 자신을 드리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이 생에서 하고 싶은 일까지도 바꿔 주십니다. "
기독교가 요구하는 헌신의 높은 차원을 들으며 어떻게 해서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졌다. '박사님 자신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인도에서는 어느 집에서 태어나느냐가 곧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 그는 그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단지 불교도나 회교도, 힌두교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아주 자유주의적인 교회였지요.
나보다 먼저 누이들이 복음을 듣고 헌신했습니다. 나는 두 단계를 거쳐 예수를 믿게 됐는데 첫 단계는 열일곱 살 때 강당에서 복음을 듣던 날입니다. 나는 뭔가 진실이 있다. 그것을 얻고 싶다'는 생각으로 앞으로 나가 상담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막히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당시 나는 학교 성적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반에서 1등을 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사회였지요.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엄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체벌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생을 끝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평소에 우울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은 내가 자살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내게 아무 의미나 목적을 주지 못했습니다. 열쇠로 학교 과학 실험실을 열고 들어가 독약을 찾았습니다. 물 잔에 독약을 타고 들이킨 뒤 털썩 쓰러져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
나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날 널리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박학다식한 명석함의 귀재 재커라이어스가 십대 시절 절망과 혼란에 빠져 독약을 마시고, 그 독이 혈관에 퍼져 무릎 꿇고 숨을 헐떡였다니 도저히 상상이가지 않았다.
그는 말을이었다. "우리 집 하인이 급히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입니다. 병원 사람들은 내 몸에서 독을 다 뽑아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친구 하나가 신약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요한복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몸에 탈수 증상이 심해 책을 들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대신 읽어 주셨지요.
어머니가 읽은 부분은 예수가 도마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곧 19절이 나왔지요. 예수는 제자들에게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구절이 내 영혼에 와 닿았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잘 모르지만 예수님이 참된 생명의 주인인 것을 알겠습니다' 나는 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문화에서는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분이 친히 내게 생명을 주겠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병실에서 나가면 모든 수단을 다하여 진리를 추구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5일 후 병실에서 걸어나을 때 나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내 삶은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 내 형제들도 예수를 따르게 됐고 부모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믿었습니다.
다른 누구의 설명도 없는 병실에서의 짧은 말씀을 통해 나는 본연의 참 삶을 얻었습니다. 그 뒤로 나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해를 거듭하며 공부하면 할수록 그를 따르기로 한 결심이 굳어질 뿐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에 다닐 때 유명한 무신론자 교수가 가르치는 철학 과목을 여러 개 들었는데, 그때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납니다. '무신론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논증이 고작 이거란 말인가?' 성경이 진리임을 더 확증하게 되었지요."
'평소에 박사님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많이 대하시지요? 그들에게 뭐라고 말해 주십니까?"
'성경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놀라운 약속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수용적인 자세로 지성을 아끼지 말고 성경의 진리를 시험해 보라고 권합니다. 편견 없는 시각으로 진실하게 찾는다면 다른 것은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여기저기 찾아 다녔습니다. 내 생각과 마음이 가장 깊은 갈망을 예수처럼 만족시킨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그분이 내게 스스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길이요 나의 진리요 나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그렇게 하십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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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글은 아주 전도용으로는 좋은데 좀 길기때문에 나중에 시간이 있으실 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