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 장 북유럽 르네상스 판화
3-1. 독일 초기 판화가들
a) 마스터 ES
초기의 유럽의 목판 조각가들은 다른 사람의 도안을 그대로 복사하기 때문에 공방의 지역적 성격은 나타나나 판화가의 개인적 양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5세기 중반이후 점차 동판의 인그래빙 판화가들은 자신이 직접 도안은 창안하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로 인정을 받게되어 자신의 작품에 싸인을 하고 독창성을 찾아나선다. 이 때 북유럽 독일에 있어서 최초의 인그래빙 조각사로 마스터(Master) ES라고 전하는 판화가이다. 그의 공방에서 제작된 판화들은 e나 E, 또는 ES로 표기됬으며 현재 18판만이 남아있으며, 불행히 그의 생애는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최초의 판화가로 판화사에 기록될 만한 인물이다. 마스터 ES 작품으로 전해진 판화 중 1461년부터 1467년까지 되어 있어 1460년대가 그가 활동한 연대로 추측한다. 후기 1467년에 제작된 다수의 판화가 가장 잘 된 작품으로 그가 남긴 작품은 300점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마스터 ES가 조각한 양은 없어진 것까지 모두 합치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판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ES는 보조자가 필요했을 것이며 그의 공방의 RZMRL를 짐작하게 된다.
마스터 ES는 다른 판화가들처럼 금은 세공자로 출발한다. 초기에 그가 만든 세공품은 은판에 그림을 새겨 넣은 은접시였다. 팬(guill)과 같은 은판 조각도를 사용하여 마스터 ES는 동판에 인그레빙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점묘화처럼 보이는 그의 작은 선들은 금속 세공사들이 즐겨 사용한 구멍(punch)에서 나온다. 실제 그는 성당의 성찬용 접시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전문 인그레빙 판화를 만들면서 점과 선을 그리는 도구(뷰랭)를 만든다. 그가 만든 도구는 곡선, 직선, 점, 교차선 등 복잡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며 독지적 양식의 판화를 만들었다. 그의 기술적 혁신은 바로 숀가우어에 의해 세련되어지고, 뒤러에 의해 많은 후대 북유럽 인그레빙 조각사들이 배워야 하는 기본 법식으로 다듬어졌다.
그 가운데 마스터 ES의 가장 독특한 혁신인 검은 종이 위에 흰 물감으로 찍어내는 방법이나, 그림자 효과로 대상의 어둔 부분과 밝은 부분에 음영을 새겨 넣는 방법은 대단히 독창적인 표현이였다. 또한 그는 1370년 경 양피지에 그림을 그리는 필사본 화가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현재에는 <마돈나가 있는 필사본>이 남아 있으며, 이를 인그레빙으로 다시 만들었다고 전한다. 독일 지역에서 그의 판화는 대단히 유명하였으며 그의 판화는 놀이용 카드나 금속접시, 상자, 거울 뒷면 등에 찍혀지고 새겨져 있다.
마스터 ES는 가장 대중적인 주제로 성서에 나오는 <수태고지> 장면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판화로 만들었다. 그는 종교적 주제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주제를 다 조각하였다. 독일의 아인쉴덴 수도원의 주문에 의해 마스터 ES는 가격에 따라 3가지 크기로 인그레빙 동판화를 만든다. 이는 면죄부와 같은 성화이나 순례자들을 위한 기념물로 예술적,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는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변형되어 예술적 가치를 높힌다. 이같은 마스터 ES의 판화는 다른 기념품과 섞여 1466년 축제 2주일 동안 전부 팔려 오늘날의 베스트셀러와 같았다고 한다.
마스터 ES는 또한 귀족과 부유한 구매자를 위해 야외를 배경으로 한 연인들의 모습을 제작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남녀의 다정한 분위기를 잘 나타낸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다. 기사의 구애를 받는 여인의 밝은 표정과 소담스런 모습이 사랑스럽다. 그것은 성안에 조그맣게 만들어진 일종의 중세적 정원에서 기사가 그의 연인에게 다가가는 모습으로 소품으로 만들어진 판화의 특성을 유감없이 잘 보여주고 있다. 마스터 ES의 인그레빙 판화는 최초로 유럽 전역에 타피스리와 수공예 자수, 금속공예 등에 응용되었다. 그의 가장 풍부한 장식적 도안들은 복제되어 쉽게 전 지역에 파고들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최초의 북유럽 판화가이다.
그의 작품 중 현재 남아 있는 <식물무늬와 인물> 판화는 마스터 ES와 그의 수제자인 마르틴 숀가우어 합작이다. 습작 형태를 띈 이 작품은 마스터 ES와 숀가우어의 조형적 특성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쉽게 이들의 성격이 들어난다. 아래 부분의 원시인같은 인물은 마스터 ES의 특징인 짧고, 작은 점묘수법으로 표현된 반면, 상단부의 잎사귀 부분은 장식성이 강한 긴 선묘로 숀가우어의 특성이 보여진다. 이제 사람들은 숀가우어의 힘있고 강한 표현을 선호하면서 마스터 ES 이후의 독일 판화를 이끌어 나간다. 숀가우어가 그의 도제로 있는 동안 작가가 만든 작품이더라도 자기 표식을 하지는 안았지만, 후에 독립된 공방을 운영하면서 ES를 본뜬 MS라는 싸인을 넣고 예술가로서 판화가의 지위를 한단계 더 높인다.
b) 숀가우어(1450-1491)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는 비교적 생애가 자세히 알려진 최초의 독일 판화가이며 화가이교 성공한 인쇄업자였다. 그의 싸인이 있는 인그레빙 판화는 매우 비싼 가격에 판매가 되었으며 작품성도 뛰어난 것이였다. 그는 인그레빙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던 1450년에 태어났으며, 30세 때에는 마스터 ES 밑에서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MS라는 자신의 싸인은(moogram) 마스터 ES를 흉내낸 것이다.
숀가우어는 여러 장식적 형태와 세속적 생활을 주제로 판화 작품을 만드는데, 독립된 후에는 종교적 주제인 성자(saints)들의 모습과 신약성서를 설명하는 판화(107의 인그레빙)를 남긴다. 그의 부친은 독일 아우구스부르그의 은세공업자였으며, 숀가우어는 라인지방의 콜마르로 이주하여 판화공방을 세우고 그곳에서 생애를 마친다. 그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그는 금속분야의 장인(mastery of metal)으로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후 판화가를 희망하면서 그는 다른 작품들을 모사하고 마스터 ES와 같이 공동으로 작업한다. 그의 선묘는 대단히 길고 힘있게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방법은 오른손으로 조각도를 잡고, 왼손으로는 동판을 올려는 딱딱한 가죽받침을 잡고 돌렸을 것이다.
숀가우어는 불규칙한 선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방법으로 질서정연하고 명확한 인그레빙 동판화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선들은 마치 일정한 규경을 가지며 원을 그려나가듯 정확한 느낌이다. 숀가우어는 고딕적 표현을 판화로 나타내면서 단순함 속에 고상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화면 가득히 규칙적인 선이나 기하학적 무늬로 채워나간다. 그의 이런 합리적인 형태묘사는 단순한 판화의 인그레빙의 기술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나 뒤러에게 영향을 주어 르네상스 미술을 활기차게 한다.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독일 판화의 대가였던 숀가우어는 북유럽 예술의 중심지인 플랑드르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반 데르 바이덴(Roger van der Weyden) 우아한 제단화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바지리는 15세기 판화를 소개하는데 있어서 그를 플랑드르인으로 소개하였다. 플랑드르에서의 그의 작품은 복잡하게 배체된 가구나 감정이 담긴 표현적 인물 묘사가 나타난다.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성모의 죽음>은 단축법으로 대담하게 묘사된 침대와 촛대를 비롯한 장신구들 묘사는 금세공자가 묘사한 것과 같은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감정 표현과 복잡하게 구성된 장식적 기물들이 잘 조화되어 완성도가 뛰어난 대표적 인그레빙 판화로 평가받고 있다.
또하나 숀가우어의 대표적 판화로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는 중세 후기에 나타난 우의적이며 상징적 세계를 그린 것이다. 마치 히로니므스 보슈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초현실적 경향의 판화이다. 성자 안토니우스가 화면 가득차게 그려져 있고 그 주변에는 괴상한 모습의 괴물들과 도구들로 가득찬다. 초연한 성자의 모습과 우수꽝스럽기까지한 괴물들의 모습이 대조가 되면서 대중들의 마음을 끌어들인다. 이같은 숀가우어의 작품세계는 동시대의 보슈나 반세기 후의 네덜란드 풍속화가 브뤼겔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며 현대에 와서는 벨기에의 앙소르나 노르웨이의 뭉크 작품에서도 그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마스터 ES와 숀가우어가 활동하던 15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많은 인쇄업자가 있으며 이들이 운영하는 인쇄공방의 우두머리를 마스터라고 불리운다. 그 가운데 하우스북 마스터(Housebook Master)는 신원 미상의 인쇄업자중 가장 유명한 마스터이다. 그의 유명한 판화는 당시 대단히 비싼 가격으로 거래가 되었다. 독일에서 활동한 그는 음영이 뛰어난 모델링과 인물의 신비한 느낌을 강조하며 네델란드풍의 사실묘사가 특징이다.
하우스북 마스터라고 전하는 그는 최초로 동판에 드라이 포인트 기법을 사용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의 드라이 포인트 기법은 동판에 거친 선으로 그리는 방법이나 이러한 기법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에서 탈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화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 그의 판화는 간편하면서도 인그레빙 못지 않는 깨끗한 효과를 얻었다. 기록에 의하면 하우스북 마스터는 뒤러에게 드라이 포인트 기법으로 만든 작품을 요구하여 뒤러가 3개의 유일한 드라이 포인트 동판화를 제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 기법은 자유로운 화가들에 의해 더 관심을 기울였으며, 뒤러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드라이 포인트는 간편하고 개성적 표현이 가능하나 섬세하지 못하고 17세기 이후 발면된 에칭기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야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드라이 포인트 기법이 더욱 활성화 되는 것은 19세기로 동판의 거친 며이 도금되어 인그레빙과 같은 효과를 얻게 되면서부터이다. 19세기 휘슬러가 철도금을 이용한 드라이 포인트 연작들은 영국에서 에칭과 맞먹을 만큼 위치가 올라갔다. 그러나 하우스북 마스터가 시도하였을 때는 성공하지 못한 기법이였다.
3-2. 뒤러(1471-1528)의 판화세계
a) 뒤러의 생애
알브레이크 뒤러(Albrecht DUrer)는 헝가리에서 이주하여 번영하는 독일 중남부 도시 뉴렘베르그에 정착한 뛰어난 금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주었던 뒤러는 제단화와 목판화를 제작하는 공방의 도제로 들어가게 된다. 이 제작소는 미헬 볼게뮤트가 운영하는 공방으로 당시 뉴렘베르그에서 가장 큰 판화제작소였다.
도제 수업시 뒤러는 성서의 목판화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당시 중남부 독일의 분위기는 요한계시록의 위기론이 강하게 등장하였다. 중세의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반이 줄어들자, 생존자들과 그 후대는 [계시록]에 예견된 ‘종말’을 두려워하였다. ‘죽음의 소용돌이’는 질병과 가난, 전쟁 등 수맣은 재난에 의해 자주 일어나며 죽음은 화가에게 있어서 가장 어필되는 주제였다. 세계의 종말에 관한 주제가 공감되면서 [요한 계시록]의 그림이 목판인쇄로 도처에서 출판되었다. 신약성서는 독일어로 번역되고 123개의 목판화가 삽입된 <평범한 삶을 사는 형제들>을 위해 성격책이 퀼른에서 인쇄되었다.
이런 목판화는 소년 뒤러에게 자극이 되었으며 독일 판화의 전통이 된다. 이 목판이 퀼른에 최초로 나타났을 때 뒤러는 7살 쯤이였고, 12세 때는 그가 살고 있었던 뉴렘베르그에서 복사판이 많이 만들어진다. 성경은 이런 형태로 그에게 있어서 상상력의 중심을 이루게 하였고 동시에 조잡한 표현들은 그것을 향상시키도록 자극했다. 19세기까지 뒤러는 소묘와 그림공부를 마치고 이후 3년간 본격적인 인쇄공방의 도제가 되어 삽화 및 판화를 제작하게 된다. 22-23세때, 그는 만테냐의 인그레빙을 모사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훌륭한 회화적 양식과 명확한 형태를 표현하게 된다. 이같은 노력으로 뒤러는 북유럽의 거칠고 표현적인 고딕 성격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새로운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도제 수업을 마친 뒤러는 뛰어난 공방의 장인들처럼 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여행을 떠난다. 23세 때, 뒤러는 콜마를에 있는 당대 최고의 동판화가 숀가우어의 제작소를 방문하나 거장은 이미 죽고 콜마르 공방은 그 제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뒤러는 상당 기간 이곳에 머물면서 숀가우어 작품을 연구하기도 하며, 그 후 스위스와 이탈리아 베니스로 여행을 계속하게 된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서한과 여행일지 등의 자료를 통해 작품 제작의 동기, 기법, 구성 이유 등을 비교적 상세히 남긴다. 전술한 것과 같이 그는 20대 중반에 숀가우어의 콜마르 방문과 스위스를 커쳐 이탈리아 베니스를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만테냐의 그림과 판화를 익히고 베니스 화파를 세운 지오반니 벨리니(G. Bellini)를 만나 이탈리아 화풍을 익힌다. 두차례의 베니스 방문으로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특성인 원근법적 공간 구성과 철저한 인체 해부학적 표현, 정확한 관찰을 바탕으로 한 자연묘사를 배우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만드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마돈나와 원숭이>(1498)는 두가지 양식이 절충된 초기 대표적 인그레빙 동판화이다. 여기서 뒤러는 베니스 화풍 묘사방법으로 인물과 동물을 그려나가면 뒷 배경은 북유럽의 풍경을 삽입하여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딱딱한 인물 묘사와 세밀한 표현의 이 작품은 아직 뒤러의 d술성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나 그 출발점을 읽을 수 있다. 연못 가운데에 나무를 그리고 그 위에 지을 지은 모습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있어서는 매우 낯선 것이다. 베니스의 수상 풍경과 달리 뒤러의 이 작품에 나타난 풍경은 북유럽의 호수와 초원을 배경으로 한 사실적 풍경이다. 이탈리아인들은 뒤러의 판화를 모사하지는 않았으나, 벨리니의 경우 뒤러의 표현을 극찬하고 후배들에게 배우길 요구한다.
뒤러가 이탈리아에서 배운 것은 무엇보다 인체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인물 묘사이다. 뒤러가 베니스를 방문하여 벨리니와 친해지면서 동시에 화가이자 판화가인 바르바리(Jacopo de'Barbari)가 만든 인체의 표준비례(canon of propotion)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바르바리가 만든 여자와 남자의 표준비례는 그다지 예술적인 가치나,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나 뒤러가 독일로 돌아와서 인체의 해부학적인 비례를 철저하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다빈치나 만테냐의 그림들은 그에게 몸체와 손발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인체의 기능과 아름다운 이태리적 누드 표현을 배우게 해준다. 만테냐의 인그레빙 판화는 세부를 생략한 고대 조각들의 몸의 구조를 그에게 보여주었고, 다빈치의 드로잉에서 이상적 동작의 움직임을 발견한다. 뒤러는 더 나아가 인체의 기능과 구조적 기능을 연구하거나 원근과 단축적 표현을 위한 기계틀을 만들기도 한다. 그는 인체의 합리적인 표현을 얻는 동시에 스스로의 연구에 의해 남자, 여자 어린이 등을 실제 비례로 한 정확한 선을 만드는 등 자기자신의 방법으로 작업하였다. 이때, 그는 인체를 조각적 볼륨이나 면으로 나타내기 보다 간략한 선으로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린 누드는 분명 폴라이우로로가 그린 해부학적 유형본과 달리 현실감과 생동감을 더해주며 개성적 인체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b) 뒤러의 대표적 판화
뒤러의 판화 중 대표적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1504)는 이상적 누드에 대한 연구이며, 신(神)이 만든 최고의 미(美)를 제창조한 것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인그레빙 기법으로 여기에서 그는 이탈리아인들과 다른 독창적 인간 형태를 찾아낸다. 이 작품에서 아담은 정확한 인체비례를 바탕으로 당당한 몸짓과 표정이 로마에서 발견된 아폴로 상처럼 당당하며 남성미의 표본처럼 보인다. 아탐을 통한 아폴로를 연상시키는 남성의 이상적 아름다움과 그리스 미의 여신인 비너스처럼 연출한 이브의 극사실적 묘사는 뒤러만이 창조해낸 이상과 현실의 미를 결합한 최고의 판화작품이다.
한편 그는 아담과 이브의 인물 표현과 함께 뛰어난 배경묘사를 생각한다. 인물 주변에는 토끼나 염소, 새 등을 비롯하여 작은 식물과 나무들이 가득 찬다. 한곳의 여백이나 빈틈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달리 북유럽 화가나 판화가들은 배경을 가득 채워 담답함을 느끼게 하나 세밀한 공간까지 채우는 완벽함을 생각하게 한다. 뒤러는 인물보다 배경부터 그려 나갔던 것을 이 판의 미완성 단계의 작품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인물 주위의 배경묘사를 끝내고 인물을 나중에 그린 그의 방법은 전체적 구성보다 대상의 세부묘사를 더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뒤러의 닌그레빙 기법은 점과 짧은 선을 계속 반복해 나가면서 대상의 세부를 철저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이런 기법은 <아담과 이브>제작 이후 복잡한 대상의 등장과 화면구성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인그레빙 기법은 너무 많은 점과 선 때문에 대담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도 한다. 아마 북유럽과 이탈리아인들의 기질적인 차이를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 이후 뒤러는 해부학을 바탕으로한 인체표현에서 완숙함을 더해주고 점차뒤러는 거대한 계획 아래 뉘렘베르그의 공방에서 <요한 묵시록> 연작을 제작하게 된다. 그 가운데 대표적 작품이 <요한 묵시록> 연작의 목판화들과 <기사, 죽음, 악마>(1513)라는 인그래빙 동판화이다. 이때 만들어진 그의 판화를 보면 최고의 판각 기술을 갖춘 판화가로 인정하게 되며, 나아가 중세의 죽음을 주제로 문학적으로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기사, 죽음, 악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된 작품이였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이 작품에 나타난 갑옷을 입은 기사를 그렸으며 말은 베로키오가 만든 청동 기마상(뒤러가 첫 번째 베니스에 갔을 때 완성된 기마상)의 예에서 인용했다. 베로키오의 기마상은 고대 로마의 말조각을 보고 만든 것으로 뒤러 역시 고대 작품을 원형으로 생각하면서 작품들을 만들어 나간다.
초기 작품인 <마돈나와 원숭이>부터 <요한 묵시록> 연작에 이르기까지 뒤러는 판화의 기술을 풍부하게 하나 여전히 숀가우어를 비롯한 북유럽의 고딕적 성격과 세부 묘사에 충실히 하는 전통을 따르고 있다. 뒤러의 70전째 동판화로 알려진 <기사, 죽음, 악마>에서 그는 갑옷의 금속 표현과 인체의 근유그 동물의 털 등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함으로 최고의 인그레비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같은 놀라운 솜씨는 후대 화가들이 판화를 하려고 할 때, 기를 꺾기에 충분했고 이제 판화는 전문가만이 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준 것이다. 비록 뒤러의 완벽한 인그레빙 판화는 화가들에게 매우 어려운 짐을 지워 주었으나 배우고자 하는 판화가들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1514년 제작된 <멜랑코리아 1>는 인그레빙의 복잡한 기교와 회색 농담 등 다양한 묘사를 보여준다. 특히 ‘멜랑코리아’라고 하는 신비롭고 상징적인 주제의 이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겉으로 드러난 형상들만 보더라도 앉아서 심각한 표적을 짓고 있는 천사와 그 주변의 잡다한 과학 기재들, 문자판, 태양, 사각뿔, 원구, 개, 사다리 등이 우리의 시각과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역시 이 작품의 주제는 예술과 신앙의 상상적 세계와 과학적 지식의 실제 사이에서 고민과 갈등르 겪는 인간을 풍자적으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술, 과학, 지식, 그리고 종교의 상징들이 천사 주위에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종교를 부정하는 듯 하나 두주와 생명의 신비를 설명하지 못하는 지식에 좌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이러한 주제의 인그레빙 동판화 <멜랑코리아 Ⅰ)는 해석하기 힘든 신비로운 작품으로 생각되며 회화에서 볼 수 없는 여러질감의 농담과 선묘들로 가득판 세부 표현기법에 감탄하게된다.
c) 뒤러의 판화형식
뒤러는 오늘날 같은 수채화 물감을 발명하였으며, 유화와 크레용과 같은 색깔있는 석필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특히 판화에 있어서는 목판(woodcut)에서 시작하여 인그레빙 동판 기법을 완성시킨 동시에 드라이포인트와 에칭 등 다양한 기법을 실험한 판화가이다. 그는 다양한 판화기법개발과 함께 수공적인 인쇄기술을 개량하여 동식물 도감이나 별자리를 나타내는 달력 그림 등 인쇄물 제작에도 힘을 쏟는다. 뒤러 이후의 판화가들은 과거처럼 처음부터 나무나 금속판을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드로잉부터 시작하여 화가들과 같은 수업을 받는다. 즉 이제 판화가들은 유명 그림을 단순 복사하는 기능공이 아니라 독창적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인그레빙 기법은 점차 숀가우어의 어두운 바탕과 밝은 명암이 대조되는 단순표현에서 탈피하여 그림자나 빛의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는 세련된 표현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뒤러는 사실 인그레빙보다 목판 기법에 더욱 열의를 가졌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는 목판에서 나오는 견고한 느낌의 선묘와 대중적이고 싼 가격으로 제작되는 부가치로 경제성과 명성을 얻었지 때문이다. 인그레빙 동판화를 만들기 훨씬 이전에 이미 그는 많은 목판 연작들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1511년에 목판 연작인 <작은 열정>은 귀족들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고 하며 그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왕가의 초상판화제작을 위탁받는 영예를 얻어 많은 목판 초상화를 만든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언 초상 판화이다. 초상 판화의 제작시 판화가는 참을성 없는 모델의 윤관을 재빨리 그려내야만한다. 뒤러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인물의 윤곽을 잡고 고정된 눈구멍을 통해 재빨리 그렸다. 초상 판화는 스케치만큼 생산도 빨라야한다. 교황이나 황제의 죽음시 그들의 초상판화는 신속한 뉴스처럼 만들어져 보급되기 때문이다.
한편 40대에 그는 목판화와 인그레빙,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비롯하여 에칭(etching)을 실험하기도 하였다. 아마 뒤러는 완성된 에칭작품을 남기지는 않었으나 최초로 에칭기법을 생각해낸 위대한 예술가로 이야기 되고있다.철에 대해 부식을 가져오는 화학 약품의 미비로 오늘날 같은 에칭 기법을 만드는데 실패하였다. 여기서 중요시 되는ㄴ 것은 펜 드로잉과 같은 빠른 필치와 격렬함, 충동적인 표현력 등을 살리고자 하는 실험이였다. 에칭에 관한 그의 실험에서 뒤러는 선들의 속도감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이것에 대하여 “한 판각사가 1년동안 뷰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하루에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쓰고 있다.
3-3. 기타 북유럽 판화가들
a) 크라나하 (1472-1553)
루카스 크라나하(Lucas Cranach)는 뒤러보다 한해 뒤인 1472년 뉘렘베르그에서 약 50마일 북쪽의 지금은 크로나흐*Kronach_)라 불리우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상화가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궁정에서 활동하여 귀족의 작위까지 받는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하는 화가였다. 그는 귀족의 초상화와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기다할게 변형시켜 그리는 화가로 유명하였으나 16세기 초 독일의 종교개혁과 전쟁의 혼란중에서 죽음을 소재로 중세적 어두운 분위기의 목판화에 관심을 갖는다. 실제로 그는 비엔나에 자신의 공방을 만들어 종교적 내용을 주제로 목판화를 만들고 두 아들과 함께 운영한다.
1500년 종교개혁의 첫 반세기 동안 크라나하는 그림과 목판화, 스테인글라스, 벽화 등을 다양한 표현의 제작에 몰두한다. 어느 한가지만 고집하기보다 주문과 또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방법으로 주제에 맞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은 40대 중반 두 아들과 10인의 조수에게 그의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계속했다. 그 이후 그는 약국을 세우기도 했으며, 전도사나 귀족의 정치 자문관 역할을 비롯하여 시장까지 지내는 예술과 다른 생활을 한다.
크라나하가 판화를 제작한 것은 10여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1000여 작품 이상의 판화와 밑그림들이 그의 공방에서 제작되었다. 그는 아들과 함게 대량 생산 방법을 연구하고 성공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제작속도는 다른 사람이 붓과 물감을 준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기도 전에 여러 작품이 동시에 끝날 정도였다고 한다. 크라나하와 그의 아들 형제는 신교(Protestant)의 상징물을 만들어 내어 종교개혁의 창시자들은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공방은 뒤러와 함께 공동제작도 하여 돈을 모으기도 하였으며, 판화를 통해 북유럽에서 놀라운 명성을 획득하였다. 뒤러와 크라나하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하나의 예로 뒤러 공방에서 즐겨 사용하였던 소용덜이 문양은 크라나하공방에서 만든 것이다.
크라나하는 대단히 종교개혁에 심취해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설교와 대화, 또는 음악과 글, 그림 등 다양한 표현매제로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성공한 표현수단이 목판 삽화가 들어있는 인쇄물이었다. 그에게 그림이 있는 인쇄물을 만들도록 충고를 하던 사람은 유명한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로 크라나하는 그의 생생한 초상화를 남기기도 한다. 안내문이나 선전용같은 인쇄물을 포켓형으로 팜플렛처럼 만들어 대중에게 쉽게 파고들어갔다. 무엇보다 이같은 인쇄물이 교황권에 대한 가장 무서운 무기가 되었다. 행상인들은 독일과 주변의 도시, 농촌의 마을, 즉 과거 카톨릭 영향권에 이런 팜플렛을 퍼뜨렸다. 크라나하에 의한 판화는 대부분 종교적인 주제들로 설명도 없이 그림만 그려진 것도 많은 데 문쟁자를 위한 이러한 그림들은 해적판이 수없이 만들어져 독일과 네덜란드 등지에 유행하게 된다. 루터와 크라나하는 출판에 의한 소득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적판 때문에 손해볼 것도 없다하여, 모조 인쇄공의 생계수단인 복사제작을 반대하지 않았다.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서 볼 때, 크라나하는 나름대로의 인쇄방법과 종이의 재질에 연구와 관심을 쏟는다. 그는 판화지의 바탕을 검은색으로하여 힌색 글씨와 그림이 찍혀지게 만든 목판과 실험적 채색 목판화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다채색의 목판화는 많이 제작하지 못하였으나 손으로 색칠된 15세기 <성 크리스토퍼>목판화와 비교해볼 때, 크라나하 공방에서 만든 것은 커다란 발전이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판화 명암법이나 단순한 톤을 나타내는 것과 다르게 선명하게 부분 부분이 채색되어 나타나 다채색 판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예고하였던 예술가로 주목받는 것이다.
b) 홀바인 (1497-1543)
홀바인(Holbein)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부친과 형제들이 모두 화가였다. 당시 아우그스부르그는 고딕적 독일예술과 이태리적인 것을 조화시켜 나가는 분위기였다. 홀바인은 18세때 스위스 바젤로 가서 시초 회화와 판화에 관하여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요절한 형 암브로즈 홀바인(Ambrose Holbein)과 함께 베니스로 가서 출판업자들을 위한 목판화 밑그림과 유화제작에 몰두한다. 베니스에서 발명된 책표지 가장자리 장식은 1500년 이후의 많은 독일 팜플렛에 나타나며, 홀마인은 이같은 장서의 화려하고, 유우머러스하며 드라마틱한 형태의 판화를 만든다.
그가 만든 책표지 그림은 대단히 화려하였다. 알파벳글자 모양에 따라 그 주변에는 큐피트가 장난하는 모습이나 일하고 춤추는 농부들, 선남선녀의 사랑하는 장면들이 어우러져 그려진 것이다. 이같은 장서의 표지화는 판화의 기술을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한 것으로 화려한 필사본과 같은 홀바인의 책표지 밑 그림은 대단한 인기를 누린다. 또한 그는 글자 모양을 변형시켜 알아맞추기 게임과 같이 독자들의 지식에 도전하는 상징적 글자를 만들어내었다. 이같은 글자모양은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홀바인의 재치와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미술사에 있어서 홀바인은 귀족들의 초상을 잘 그린 대표적 화가이다. 그러나 판화사에서 그는 뒤러와 달리 초상목판화보다 사회적, 종교적 주제를 나타내는 사실주의 경향의 목판화를 제작한 거장이다.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장면과 인물들을 즐겨 묘사하였으며,, 유화와 달리 여기에 나타난 인물들은 비례도 안맞게 땅딸하게 그려진다. 단지 그는 판화에서 인물의 외형보다 표정과 뚜렷한 성격을 만들어 내려고 하였다. 이같은 홀바인의 판화는 고딕적 성격을 이어받아 거칠지만 명혹하게 인물을 그리고 밝고 어두운 형태가 분명하여 직접적인 감정의 노출이 나타난다.
이것은 뒤러가 독일서 최초로 도해된 성경을 거칠고, 강한 선으로 조각시켜 변화를 주는 경우와 같다.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 뒤러는 신약으로부터 주제를 끌어낸 반면, 홀바인은 구약의 내용과 역사적인 면에 촉점을 맞추었다. 그는 커다란 벽면에 프레스코를 그리듯 판화를 대범하게 만든다. 사실 그는 판화를 만들기 전에 예비적인 드로잉도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믿기 힘들지만 그는 직접 나무에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홀바인 역시 피터 브뤼젤과 같이 전문 판각사나 인쇄 공방에서 밑그림을 제공하는 마스터는 아니었다. 그는 주문에 의해 밑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직접 조각하는 것이아니라 대부분은 동료이며 전문 판각사인 한스 루켈부르거(Hans Lutzelburger)에 의해 조각되었다. 한스는 아우그스부르그사람으로 어떠한 밑그림이든 정확히 판으로 옮기는 뛰어난 장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1526년에 그의 죽으으로 홀바인과 관계가 끊어지면서 목판화제작이 드물어진다. 이후 홀바인은 생의 마지막 15년 동안을 런던에서 보내며, 헨리 8세의 초상과 많은 귀족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더욱 유명하게된다.
c) 브위젤 (1525/30?-1569)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은 16세기 네덜란드의 최대 풍속화가로 알려져있으며 또한 출판업자를 위해 판화의 밑그림을 그린 판화가이다. 농촌의 풍경이나 농민들의 모습을 잘 그린 그는 판화의 조각사로서 보다 전문적인 인그레빙의 밑그림 제작사로 많은 판화집을 남긴다. 그의 생애중 마지막 10년에서 15년동안은 회화와 병행하여 판화의 밑그림을 그리는데 대부분 종교적 주제와 네덜란드 농민의 풍속화, 도덕적 교훈이 남긴 내용들이다.
청년기에 브뤼겔은 네덜란드 안트워프에서 가장 큰 코크(M.Cock)인쇄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는데, 그의 역할은 처음부터 동판을 새기는 조각사가 아니라 밑그림을 그리는 소묘가로 출발한다. 도제수업을 마친후 그 역시 로마로 갔으나,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중요시 하였던 투시원근법이나 인체해부학적 표현보다 신화의 상징적인 표현이나 항구의 배들과 자연 풍경에 더욱 관심을 갖고 그림을 그렸다. 즉 1550년경 험준한 알프스를 통과하여 이탈리아에 온 그는 고대 미술의 부흥보다는 현실적 풍경과 인간사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 이유로는 쿠크 판화공방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은 유명화가의 모사가 아니라 멋있는 자연 풍경과 평범한 인간사의 내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부뤼겔은 시민들을 위하여서도 알프스와 로마 주면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데 판이나 켄바스에 유화로 그리는 것이 아닌 잉그레빙 동판화를 위한 밑그림들이다. 그는 산을 멀리있는 장식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숲과 동물들이 있는 그리고 광대한 대기속에 인간과 함께 평화를 누리는 자연으로 묘사한 최초의 풍경화가였다. 브뤼겔이 이탈리아에 갔을 때, 로마보다 나폴리에 머물렀던 것은 아름다운 항구와 뛰어난 설계로 만들어진 선박들을 그리기 위해서이다. 그가 그린 바다위의 선박들은 마치 설계도와 갗은 사실적 표현으로 해상 무역을 중시하였던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커다란 호평을 받았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그린 대부분의 자연 풍경은 북유럽 특유의 지역적 특성이 잘 나타나 개성적 풍경으로 주목받게 된다. 점차 브뤼겔이 그린 풍경화에는 거대한 알프스 풍경이나 나폴리의 항구들이 네덜란드의 풍경으로 변형되면서 토속적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브뤼겔이 직접 제작한 판화는 <토끼사냥꾼> 한점이 남아있다. 이것은 인그레빙과 에칭이 혼합된 기법의 동판화로 작은 점묘와 같은 텃치와 부드럽고 짧은 선들로 가득찬 풍경위주의 판화이다. 조각사로는 미숙한 솜씨이나 사냥꾼과 평범한 네덜란드 풍경을 솔직하게 담고있는 작품이다. 브뤼겔은 자신 직접 조각하기보다 밑그림 전문 화가로 채용되었으며 그가 그린 밑그림은 네덜란드 속담들과 우화, 농민들의 결혼식 등 축제 장면과 풍속화들이 대부분이며, 후에는 종교적 주제로 인그레빙 동판화를 위한 많은 밑그림을 그린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르네상스의 해부학적 표현과 달리 변형된 모습으로 히로니므스 보슈나루카스 라이덴과 같은 북유럽 전통으로 회귀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한 하늘에서 내려다 본 조감도 구성은 지도 제작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농민들 뿐만 아니라 당시 수도승이나 철학자, 물리학자, 지도작성자 등 진보적인 사람들과 교우관계를 맺기도 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동시에 그의 시골 마을의 결혼식이나 종교적 축제, 계절에 따라 변하는 월력화등을 그리면서 전형적인 네덜란드 농민을 그려내면서 비례와 균형, 조각적 볼륨감을 중요시한 이탈리아 르네상스화풍에서 벗어난 판화를 제작하게된다.
16세기 초 네덜란드 상인들은 세계각국과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는데 정치 사회적으로는 스페인의 식민통치로 불안과 고통속에 지내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가난한 생활속에서 비관적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고 브뤼겔은 농민들의 생활과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그려나간다. 백과사전처럼 네덜란드 속담을 모아그린 그의 풍속화는 대단히 교훈적이다. 이것이 인그레빙 판화로 대량 제작되어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이제 그의 그림은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뛰어넘어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도덕적 무장을 하게한다. 브뤼겔을 그페인 압제와 종교재판 등 박해받는 농민들의 모습을 간접화법을 통하여 그려나간다. 만약 그가 현실적 사건을 직접적으로 그렸다면, 이것들은 결코 수용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유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의 판화제작은 도덕적인 고상함을 지니는 동시에 서민들의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킨다. 브뤼겔의 판화는 민중을 올바르게 인도하며 한편 독득한 인물묘사와 위에서 내려다 본 조감도 구도의 화면구성 등으로 자신의 개성적 조형성 모색에 성공한 작가이다. 개성적 표현과 주제의 선명함을 17세기 네덜란드 거장인 렘브란트를 탄생시키는 준비였으며, 분명 브뤼겔은 서양 판화사에 나름대로 독자적 업적을 남긴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