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과 수도 아사달
《환단고기》 신사본기에 따르면 신묘년(BC 2370) 5월 2일 인시 박달나무[檀樹] 밑에서 왕검(王儉)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달국 18대 거불단 환웅(단웅이라고 부름)이고, 어머니는 웅씨(熊氏)의 왕녀였다. 사람이 신령스럽고 덕이 있어 멀고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복종하였다. 무진년(BC 2333년) 10월 3일 오가(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의 우두머리로 무리 800명을 거느리고 단목(檀木) 있는 곳에 와서 삼신에게 제사 드리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단군(檀君)은 박달나무 군장이란 뜻으로 왕을 지칭한다.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성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
아사달은 지금의 송화강 유역으로 왕검의 옛집이 있어 왕검성이라 하였다.(계연수저․고동영역, 2005, 39, 40, 165) 아사달에 대해서 초․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평양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사편수위원회’가 고조선의 강역을 축소하기 위해서 왜곡시킨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왕검성의 위치는 지금의 송화강가의 만주 하얼빈지역이라고 하였다.(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사 1995, p.52) 이후 고조선의 도읍지는 몇 차례 천도하는데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만주지역 내에서 이동했다. 한사군의 유물이 한반도에서 전혀 출토되지 않고 만주지역에서만 출토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우리민족의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의 도읍지는 시작과 끝이 모두 만주지역에 존재했다.(이덕일․김병기,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006, p.76)
<그림출처 : © encyber.com -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첫 수도 아사달의 위치를 지금의 만주 하얼빈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조선은 여러 차례 천도를 하였으며 요동성도 왕검성의 하나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지배자들의 유물인 북방식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 이 지역에 같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을 고조선(古朝鮮)이라 하는 까닭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위만조선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처음 사용했고, 그 뒤에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고조선은 초대단군 왕검(BC 2333년)부터 47대 단군 고열가(BC 238년)까지 2096년 동안을 단군조선이라 부른다. 고열가왕이 왕위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자 임금이 없는 6년 동안은 오가들이 나라를 함께 다스렸다.(계연수저․고동영역, 환단고기, 2005, p.81~p.82) 이후 38년 동안은 기자의 후손으로 알려진 부왕과 준왕이 통치하였다. BC 194년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된 후 BC 108년 한무제의 침략으로 고조선이 망할 때까지 76년 동안을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청동기를 기반으로 한 고조선은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의 여러 성읍을 통합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성읍의 지도자를 제후로 삼으면서 거대한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고조선의 세력범위는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분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중국 중원 지역에선 거의 나타나지 않고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살피면 고조선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대릉하 유역에서 연나라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진나라와 이웃하며 동북쪽으로는 예맥과 부여와 접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날로 사회가 복잡해지자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법률이 생겨났다. 8조 법금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3조항을 보면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둘째,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 배상한다. 셋째,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도둑맞은 자의 노비로 삼는다. 단 죄를 벗으려면 1인당 50만전을 내야 한다.” 이 같은 법 조항은 당시 사회가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화폐를 사용했으며, 노비가 존재하는 계급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사회의 특징은 구성원 대부분이 매우 도덕적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여성들은 정조를 중히 여겼으며,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둑질하는 자가 거의 없어 대문을 닫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고조선 사회가 명예를 생명만큼이나 소중히 하는 사회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 사람들은 베, 비단, 가죽 등과 같은 다양한 재료로 옷을 해 입었다. 권력을 쥔 자들은 비단옷과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며 점차 신분적 차이를 만들었다. 농경이 발달하여 벼농사를 지어 쌀을 먹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불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여 높은 온도에서 구운 민무늬토기가 등장하였다.(김용만․김준수, 2005, p.37)
고조선은 중국과 영토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수많은 교류와 전쟁을 치렀다. 같은 시기 중국은 우(?~BC 1988년), 하나라(BC 1988~1579년), 상나라(BC 1579~1066년), 주나라(BC 1066~771년), 춘추시대(BC 770~403년), 전국시대(BC 403~221년), 진나라(BC 221~206년), 한나라(BC 202~AD 220년)등 많은 왕조의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조선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상나라가 주나라의 무왕에게 망하자 기자(箕子)가 망명을 해왔다. 그는 상나라의 폭군 주왕에게 불만을 품어 투옥되었다가 무왕이 주왕을 타도하자 석방되었다. 그러나 기자는 자신이 모셨던 주왕을 몰아낸 무왕을 섬길 수 없다며 동쪽 조선으로 망명을 하였다. 전국칠웅 즉 진(秦)․초(楚)․연(燕)․제(齋)․한(韓)․위(魏)․조(趙)의 7개 나라가 치열하게 싸우던 시대에 고조선은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대치했다. BC 238년 단군 고열가가 왕위를 버리고 입산하자 기자의 후손인 준왕(準王)이 고조선을 이끌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곧이어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자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이중 위만(衛滿)도 무리 1천 명을 이끌고 들어와 관리가 되었다. BC 194년 위만은 왕검성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 시대를 위만조선이라고 한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한편 진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동방진출을 본격화 하면서 BC 108년 한무제가 육군 6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고조선은 총력으로 이에 저항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삼한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중국은 춘추전국 시대에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 철기로 된 무기를 개발하였다. 고조선도 연과 한나라에 대항하면서 철기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조선의 영역도>
고조선 영토 대분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와 발해시대)에는 발해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발해가 거란에게 망한 후에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흐지부지 되면서 지금까지 우리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