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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입문
내러티브(narrative)란 사실이나 경험에 입각한 일신상의 독특한 이야기이다. 정보만을 담는 이야기가 아닌 내면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자기 서술식 이야기라고도 한다.
정보만 이야기 한다면 주로 단답형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네 나이는 몇 살이니? -10살이에요. -사는 곳은 어디니? -광주입니다.
내면의 이야기는 확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진다. -왜 철수와 친하게 되었니? -철수는 항상 저의 편이 되어줍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전학 오던 날, 친구들이 나에게 막말을 할 때 철수가 가로 막아 주었어요. -친하게 된 다른 이유도 있겠지? -네, 있어요.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왔는데, 앓아 누어계신 할머니를 친 할머니처럼 시중을 들어 주었어요.
내러티브는 대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제한되어 있어요. 우리 삶은 무한대의 사건으로 이루어지는데, 거기서 필요한 것만 기억한다는 의미죠. 그리고 재미있는 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뽑아내는 기억들이 다 틀리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군대시절을 주제로 이야기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A라는 사람을 만나면 힘들었던 이야기만 하고, B를 만나면 여자 이야기를, C와는 싸운 이야기만 한다는 거죠. 즉, 내가 기억하는 내가 나인 거예요. 즉 자신에게 필요한 기억만 한다는 것이고 기억해내는 내용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죠.”
과묵한 남성에 대하여 경고하는 명지대 김정운 교수에 관한 기사(경향신문,2012.3.28.15면)를 보면 남성의 우울증도 다 이유가 있다.
“남자들은 우리 사회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해 참 많이 애를 썼어요. 짧은 시간에 상당한 수준을 이뤄냈죠.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경제적 풍요로움과 정치적 민주화라는 건 인간의 ‘수단적 가치’인데, 남자들은 이 수단적 가치에만 목을 맨 거예요. 그럼 ‘궁극적 가치’는 뭘까요. 바로 행복하고 재미있게 사는 겁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행복하면 죄의식을 느낄 정도로 궁극적 가치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면서 남자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가 되어버렸어요.”
김 교수는 한국 남자들이 불안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불안함은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이 없는 한국 남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가 본 한국 남자들은 행복하면 그냥 행복하면 되는데 불안한 상황이 올까봐, 불안에 대비하느라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바로 ‘적’을 만드는 길을 택한다.
“자신의 존재가 잘 확인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적을 만드는 전략을 취합니다. 적에 대항하는 자신을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는 거죠. 한국 남자들의 근본적인 태도도 적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해지니까요. 한국 사회, 한국 남자들의 근본적 실체는 불안입니다.”
김 교수는 남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확인하는 평화로운 방식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적 행위는 이야기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면에서 수다라는 것은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고 보면 가장 불쌍한 인간이 과묵한 인간 같아요. 존재 확인이 안 되죠. 그러다보니 우울증도 잘 걸려요. 말 많은 사람은 우울증에 잘 안 걸리거든요.”
이야깃거리 출발은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결국 자기가 찾게 돼 있습니다. 너무 힘들면 살길을 찾게 되거든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재미를 추구하게 돼 있습니다. 재미를 추구하지 못하는 건 일종의 정신질환이죠. 우울한 것만 찾아내려 하는 걸 우리가 우울증이라고 하잖아요. 주변에서 과도하게 염려하지 마세요. 오히려 내 자신을 찾아갈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르잖아요. 제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즐거워할 수 있는 일들을 자꾸 만들어보는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식 빼고 부부가 옷을 차려입고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음악회도 좋고 폼 나게 옷 입고 어딘가에 갈 수 있는 이벤트를 자꾸 만드세요. 부부가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인 활동, 공통의 화제를 만드세요. 나이가 들수록 이야깃거리가 쌓일 겁니다.”
자기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부터 내면의 이야기를 털어 놓아보자. 그리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어떤 정보만을 표현하지 않고 어떤 경험을 통하여 확실한 해법이 담긴 내러티브를 만들어 보자.
내러티브의 유용성을 상정해 보면 첫째, 내러티브를 통해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시켜 주므로 우리의 자아를 드러내어준다. 즉 감정의 구속이나 억압된 사건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둘째, 내러티브는 우리 주변 사람들과 관련된 우리의 경험을 확인하여 인정해주고 지지해준다.
셋째, 내러티브는 우리가 궁극적인 신비와 대면할 수 있게 해준다.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신비로운 존재를 인식하면서 경외감, 놀라움, 겸손함, 존경과 감사를 일깨워준다. 이야기를 통하여 영원성과 접촉해 볼 수 있게 된다.
넷째, 내러티브는 우리에게 우리의 한 부분으로의 자연을 이해시켜 주며, 어떻게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가 적응할 수 있는지, 세상에서의 우리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보다 선명한 그림을 그려 준다.
우리가 행복을 이야기할 때 경제적 풍요와 지위의 획득에 가치를 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나 자신 속에 감추어진 불안을 떨쳐내고 자신의 독특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구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의 일상이 각박하고 모질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나만의 독특한 이야기(내러티브)를 만들어내고 재구성해 본다면 현대를 사는 데 하나하나의 행복이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20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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