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류공권의 자(子) 차서 문제를 류공권의 묘지명, 류언침의 묘지명, 학계의 연구결과물(박용운교수님)등에 근거하여 2008년 무자보에서 최초로 언급하였고 후일에 널리 상고하여 바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글을 맺으면서 무자보에서는 가정보이래 문화류씨 족보를 존중하여 차서문제를 종전대로 그대로 두었습니다.
2. 최근에 문화류씨 정신공종친회장이시고 문화류씨 대종회 고문이신 류 영렬 회장님이 도산포럼(인터넷싸이트)에 쓰신 문간공 공권 양자서차고찰이라는 글을 읽고 외람되게 몇 자 글을 올려봅니다.
(1) 내직랑이라는 관직은 1116년에 폐지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2010년판)에서는 내직랑이라는 관직이 1116년(예종 11년에)의 폐지되었다고 기술하고는 있으나 고려시대 금석문중 임경화(1103-1159), 원부(1220-1287), 이존비(1233-1287)등의 묘갈명을 보면 내직랑이 관직이 나오고 있고 임경화의 묘갈명에는 1157년 이부낭중 태자내직랑을 역임했다고 나오고 있으므로 내직랑이라는 관직은 1116년이후에도 계속 쓰여진 관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2) 류공권의 묘갈명에는 사위가 천수자(天水子)로 되어 있고 문화류씨 가정보에는 윤위로 되어 있어 사위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에 대하여 ......
천수자(天水子)는 누구일까? 천수자가 바로 남원윤씨 시조이자 문화류씨 가정보에 있는 류공권의 사위 윤 위를 말합니다.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전집 제37권 애사,제문편 국자사업(國子司業) 윤공(尹公)의 애사 내용중에 “ 여기에 기위 박대(奇偉博大)한 진인(眞人)이 있으니, 그가 바로 천수 윤공(天水尹公)이다. 공의 이름은 위(威)요, 자는 모(某)이고, 고(故) 원수(元帥)와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언이(彦頤)의 후예인데, 대대로 이름난 가문이다. 처음에 산중에 숨어 살면서 스스로 호(號)를 벽송거사(碧松居士)라 하였다” 라고 기술하고 있고 또한 동국이상국집에는 윤위를 가르키는 천수공(天水公)에 대한 언급이 몇 차례 더 있습니다. 그리고 이규보와 윤위는 비슷한 시대의 인물로 서로 친한 사이였고 이규보는 류공권 문하에서 진사에 뽑힌 인물로 이규보의 시에도 이러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리고 서거정(1420-1488)이 찬한 동문선에도 위와 똑 같은 기록이 들어가 있습니다. 즉 류 공권의 묘지명에 나오는 천수자(天水子)중 천수는 윤위의 별칭으로 보아야 하고 자(子)는 남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묘갈명에 있는 류공권의 사위 천수(자)라는 이름이 류공권 묘갈명이 그 당시에 쓰여졌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류공권 묘지명이 후대에 쓰여졌다면 사위를 윤위로 쓰면 간단하게 끝날 것을 사위를 그 당시 상황과 사람이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천수(자)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천수(天水)가 무슨 의미인지 곰곰히 생각해보면 고려시대의 지명으로 보여지고 지금의 경기도 파주(파평)지역으로 추측되어지고 파평윤씨와 연관된 것입니다. 고려시대 1117년에 작성된 윤언영의 처 하원군군 류씨 묘지명에서 보면 "윤언영을 천수공(天水公)의 아들이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천수공은 윤관(?-1111)을 말하는 것이고 조선시대 장유(1587-1638)의 계곡집에 장유가 쓴 수원부사 이시백의 처 (남원)윤씨(1627년사망) 묘갈명에도 “부인의 선조는 그 계통이 천수(天水)에서 나왔다. 그런데 고려 시중 관(瓘)의 후손으로 위(威)라는 분이 호남 안렴사(湖南按廉使)가 되어 남원(南原)의 극악한 도적들을 토벌하자 고려의 왕이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남원을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천수(天水)는 파평윤씨를 말하는 것이고 윤관의 증손 윤위가 분적하여 남원윤씨가 됩니다. 즉 천수(天水)는 지명 이름 동시에 파평윤씨 중 현달한 분을 칭할때 쓰여진 말 같습니다.
(3) 왕명은 하나로 동일사안에 대하여 두 말씀으로 내리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고려사 열전을 보면 류공권은 1195년 병이 들어 (직접) 명종에게 사직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거절되었고 (병이 더 악화되자 명종을 직접 알현하지 못하고) 글로 세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고려사 열전에 있는 曰 이라는 표현은 제일 처음 사직을 고하였을 때 명종이 직접 한 말이고, 묘지명에 나오는 詔(書)라는 표현은 류공권이 문서로 사직서를 3번이나 제출하자 명종이 이에 대하여 조서를 내린 내용입니다.
참고로 한광연(1155-1237)의 묘지명에도 "章三上詔可之懸車頤養十四年于玆矣忽寢疾削喪事煩夥者七八條曰無奪吾志以" 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한광연이 갑신년(고종 11, 1224)에 물러나기를 원하는 글[章]을 세 번이나 올리니 임금이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는 내용입니다.
(4) 류공권의 묘갈명에 결락자가 없다는 것에 대한 의심에 대하여........
한국금석문종합영상사이트에 가시면 수백개의 고려시대 금석문이 있고 결락자가 없는 것도 있고 결락자도 있는 것은 있습니다. 지석이 어떤 재질이 만들어 졌고 또는 어떤 토질에 매장되었는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 것이고 또 한편에서는 결락자가 많은 것은 후대에 지석등이 발견된 시점에서 그 지석의 내용과 후대에 만들어진 족보와 어긋난 것이 많아 고의로 결락시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5) 장지가 군(郡)으로 표시되어 있고 자손기록이 선남후녀순 기록에 대한 의심에 대하여.......
한국금석문종합영상사이트에 가시면 고려중기후 장지기록으로 주,현이 아닌 군(郡)으로 나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선남후녀순 기록도 많이 나옵니다. 류언침의 묘지명에도 有一男二女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류공권의 증손자인 류승(1248-1298)의 지석에도 자녀를 四男三女 선남후녀순으로 기록하고 있고 牛峰郡(지금의 장단) 서산에 안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따라서 위와 같은 주장만으로 류공권 묘갈명이 조선중기(?)에 만들어 졌다거나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류공권의 묘지명은 류공권이 1196년 7월 19일 사망하고 동년 8월 13일(경신일---> 고려사를 보면 1196년 8월 1일이 무신일이고 1196년 8월 15일이 임술일이니 이를 바탕으로 8월 13일 간지일은 경신일이 맞습니다. 만약 후대에 쓰여졌다면 장사일의 구체적인 날짜까지 밝히지 않았을 것입니다)에 장사를 지냈을 때 바로 작성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작성자는 류공권의 문하생이었던 이규보일 가능성( 그 근거로는 이규보는 류공권의 사위 윤위와 친한 친구사이였고 윤위를 묘지명에서 천수자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묘지명 작성자는 이규보로 추정됩니다)이 있고 이때 아들들은 30대초중반의 나이였고 5급정도의 관리였다고 보여집니다.
4. 차서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하여야 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닙니다. 설령 갑파와 을파가 바뀌다고 해서 가정보의 권위가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잡는 것이 정도입니다.
첫댓글 천수는 지나(china)의 옛지명으로서, 윤씨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윤씨들이 이 지명을 흔히 썼습니다.
十六国时,尹氏在天水(今属甘肃)和西州...
이것을 포함해서 “대호하루”의 7-9장에서 차서문제를 상세하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사실 가정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개 차서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가정보에는 어떤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경우들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계고-계조가 가정보에는 계조-계고의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철저함과 객관성의 가치가 전혀 훼손되는 것이 아닙니다.
1. 천수(天水)는 중국의 감숙성에 있는 지명으로 중국 윤씨의 발원지라고 합니다만 중국 윤씨와 파평윤씨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 같고 고려사등을 보면 강감찬에게 봉작을 주면서 천수현(天水縣)지역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강감찬을 천수공(天水公)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개성지역 근방의 지명으로 보여집니다. 즉 중국의 감숙성 천수와는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2. 그리고 고려 말기 부터 조선초까지 천수라는 지명이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개성지역과 서울지역의 중간에 있는 지금으로 말하면 파주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지나 윤씨와 우리나라 윤씨는 관계가 없어도 윤씨를 지나 윤씨의 발원지를 가지고 호칭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아예 지나 기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http://cafe.daum.net/nwyoon/CMDM/4?docid=1ECP1CMDM420090910211451
왕명이 내리고 신하가 바로 따르지 않는 경우 왕은 여러 번 왕명을 내려 재촉하는 등의 일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다른 부분도 류병수님의 지적이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천수자, 내직량, 묘지명 낙자, 장지의 군 표기 등은 지엽적인 작은 문제입니다. 공권할아버지와 영락보를 편찬한 영할아버지 사이가 7대라면 당시 언침과 택 후손이 함께 가례를 행사하였을 것인데 영할아버지가 그것을 모르고 영락보를 만들었겠느냐는 것과 이후 만든 족보와 공권묘지명이 발견된 이후에 족보를 편찬한 할아버지들이 내직량 천수자 등 문제를 모르고 언침을 장자로 족보를 만들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족보 편찬하신 할아버지 분 등이 돌아가셨다고해도 그 후손인 우리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이 문제이며 묘지명 발견된 이후 병인보, 병진보, 세계보, 보감까지 말없던 차서문제를 무자보에서 거론한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1.천수자,내직랑,묘지명 낙자,장지의 군 표기등을 가지고 류공권묘지명이 조선중기이후에 만들어졌거나 조작(?)되었다는 의구심이 있는 분들이 있어 이에 대하여 제나름대로 고증을 한 것입니다.
2. 고려시대 묘지명등을 보면 조선시대처럼 족보의 개념이 강하지 않은 사회로 본인의 4대이상 조상을 알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영락보를 만드신 류 영, 가정보를 만드신 류 희잠은 여러가지 고증을 통하여 류공권의 장자 언침, 차자 택으로 하였을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등이 발견되어 그 내용이 고증이 된다면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후손의 도리이지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은 것은 조상에 대한 불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운것 없는 종친으로 초면에 실례되는 말씀을 드리는것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차서문제를 바로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되는가요, 또 어떻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는 것인가요.
물론 학문적인 성취감은 맛보시겠지요. 이러한 현미경적인 과거 관찰에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우리나라 최고, 또는 세계적인 모범이라는 우리의 영락보와 가정보와 문화류씨의 위상에 대하여는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