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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 전략의 최근 동향
장 중 열 교수
(서울신대)
Ⅰ. 서 론
훌러에서 1972년부터 1976년까지 공부할 때 맥가브란 교수의 속을 무척 상하게 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저입니다. 그에게 자꾸 짓궂은 질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와그너 교수에게는 많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맥가브란 교수의 강의 시간에 했던 질문 중에 제일 짓궂은 것은 동료 미국학생들과 같이 “당신이 제3세계의 교회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왜 이 교회 성장 이론을 미국에다가 정립하지 않고 미국 교회는 죽어가는데 모른 척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제가 이 질문을 하자 그 다음에는 미국 학생이 또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미국의 동료들이 질문을 하니까 그때 하는 말이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 당신들이 할 일이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터 와그너 교수와 다른 학생들이 미국에 교회 성장 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 1972년, 바로 역사적인 해였습니다.
저는 맥가브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몇 가지 느낀 것이 있었는데 그분은 신학적인 이야기보다 사회학적인 이야기, 문화인류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무척 당황을 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신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할 때도 크게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잘 못알아들어도 신학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데 문화인류학 강의 시간에는 오랑캐 말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밤새워 가면서 기필코 이 문화인류학을 해야겠다고 해서 문화인류학 시간만 해도 100학점 가운데서 50학점을 수강했고, 다 해서 125학점을 수강하여 훌러 신학교에서 제공하는 거의 모든 강의를 들었습니다. 대학원장인 닥터 그라스 교수가 제 은사인데 그분이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가 졸업을 안 하고 버티고 있으니가 하루는 저를 불러가지고 졸업논문을 쓰라고 재촉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조금 더 공부해서 쓸랍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됐어, 써”라고 하시며 이런 은혜로운 공부를 해서 학위를 주겠다는데 왜 안 하느냐는 식으로 자꾸 못살게 하셨습니다.
Ⅱ. 본 론
1. 맥가브란의 생애와 교회 성장 운동의 출현
이 맥가브란 교수가 작년 7월 10일, 제가 미국에 도착한 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1897년에 탄생하셔서 1990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우리 나이로 말하면 94세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2년 전인 92세 때 그분이 쓴 책이「효과적인 전도」입니다. “효과적인 전도가 곧 교회 성장이다”라는 것은 그분이 평생 주장해왔던 교회 성장 개념입니다.
교회 성장은 단순히 숫자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 속에 들어있는 ‘모든 백성을 제자로 삼는 운동’입니다. 그 제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교회 성장이지, 덮어놓고 이사람 저사람 모여드는 것이 교회 성장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회심의 경험, 즉 죤 스토트의 말대로 하면 회심(conversion)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으로 사도행전 20장 2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제아무리 많이 모였다고 해도 교회 성장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맥가브란 교수의 견해로 본다면 그것은 교회 성장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은 ‘중생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느냐’, ‘하나님 나라 운동을 얼마나 힘차게 전개하느냐’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음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국에서는 교회 성장 운동이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닥터 슈워 같은 사람은 교회 성장 운동으로 감성의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분은 심리학자로서 자기 교회의 주변에 있는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합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찾아가보니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설교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무한한 가능성만을 이야기합니다.
교회 성장은 감성의 철학이 아닙니다. 교회 성장은 거듭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자기 생명을 바쳐가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며 피눈물나는 기도를 통해서 일하는 기독자의 운동을 교회 성장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맥가브란 교수는 50억 인류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알지 못하는 35억에 관심이 없다면 어찌 그를 성서적인 기독자라고 말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맥가브란 교수의 무서운 비판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2. 전도와 세계에서 본 교회 성장 운동
그러면 교회 성장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강의를 통해서 ‘교회에 나오는 새 신자들을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한국 교단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 성장학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연구한 그 결과를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맥가브란 교수에게 있어서 교회 성장은 전도와 세계 선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맥가브란 교수의 교회 성장은 전도와 세계 선교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전도라든지 선교의 개념이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기의 사상을 이와 같은 변질된 용어로 표현하면 혼탁을 일으키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세계 선교’라는 말을 일부러 피하고 ‘교회성장’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말이 세계 선교와 동일한가 하는 것을 저는 여러분에게 간단하게 서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계 선교의 명령을 목사님들이 부흥집회에서 말씀하실 때 사도행전 1장 8절이나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을 주로 인용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므로 선교와 교회 성장에 대한 개념에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성장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교회 성장이라는 개념이 세계 선교 명령 속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 선교 명령이 ‘뉴 인터내셔널 버전(new international version)’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명령 동사가 하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로 삼으라.” 이 제자를 삼기 위해 나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서 덮어놓고 세례를 주면 누가 세례를 받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계 선교 명령의 종합적인 분석입니다.
예수께서 나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가서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겠습니까? 누가복음 24장 47절 이하에 보면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의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있는 말씀 ‘성령이 임하시면’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리고 ‘나를 보내주소서’ 찬송을 부릅니다. 이 의미에서 찬송가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가도록 되어 있는데 성령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덮어놓고 시대의 조류에 따라 신바람이 나서 ‘보내주소서’ 합니다. 성령을 안 받고 복음을 전파하러 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성령을 받는 데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보내주소서’ 해봤자 실패작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능력으로 바꾸어질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내 심령속에 성령님께서 들어가시어 마귀의 세력을 축출할 때 거기에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 바르트는 올바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론을 이야기하게 될 때 칼빈이나 루터가 “교회라는 것은 케리그마가 선포되고 성찬 예식이 집행되는 곳이다”라고 했지만 바르트는 “아니다, 교회라는 것은 교회 건물이나 어떤 행사가 아니라 사건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케리그마가 선포되고 이 선포된 케리그마에 대해서 전인격적으로 응답하는 사건, 이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아주 과격하고 파격적인 말입니다만 이 말에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 성장은 우선 무엇보다 먼저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이 선포되고 이 선포된 말씀으로 사탄의 영역이 깨어지고 거기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신앙고백을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그리고 나의 생의 주로 영접해서 그분을 뒤따라가고 그분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위해서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하는 것이 기독자의 생활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주신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를 지칭합니다.
1979년 해방신학자요, 또 정치신학자였던 몰트만이 한국에 왔습니다. 그래서 한국신학대학과 서울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한국신학대학에 있는 제 친구 교수가 몰트만의 강연 내용을 프린트해 가지고 미국에 있는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읽어보니까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있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희랍어로는 ‘순교자’라고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증인, 곧 순교자가 되려고 노력했다면 기독교 역사 2천 년이 달라졌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누가가 쓴 사도행전을 읽을 때 가슴을 조이면서 “하나님! 제가 어떻게 순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나의 위에 임재하시사 나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고 순교자의 반열에 설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가슴을 졸이면서 주 앞에 필사적으로 기도하면서 순교자의 반열에 서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이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증언하다가 순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희랍에서는 이 ‘증인’이라는 말과 ‘순교자’라는 말이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313년 콘스탄틴 대제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공인되고 기도교가 국교로 되는 과정에 있어서 Greco-Roman 문화를 대신해서 라틴 문화가 들어오고 라틴어가 사용될 때 성서를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일 ‘증인’을 ‘순교자’라고 번역했으면 그후에 계속 라틴어를 잇는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번역에서도 모두 ‘순교자’라고 썼을 것인데 그때 ‘순교자’라는 말이 쏙 빠졌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에 온 성경도 ‘증인’이라는 말을 쓰고 ‘순교자’라는 말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순교자라는 말을 오늘 우리의 상황 속에서 적용시킬 수 있습니까? 제가 서울신학대학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학생 하나가 제 강의를 듣고 자기 아버지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여, 이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어떻게 순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친구한테 전도하다 한 대 얻어맞으면 순교자입니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주일학교 학생들이 와서 이 신학생 전도사를 붙들고 “전도사님, 나는 순교자의 반열에 섰습니다”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너 무슨 말이야”라고 묻자 “나 친구들한테 예수 믿으라고 그랬다가 한 대 뺨을 맞고 형들한테 얻어터지고 뒷발길질로 차이고요, 보세요. 엉덩이에 멍이 들었어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래, 너는 정말로 순교자 정신으로 살았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4천 3백만 인구 가운데서 재작년 12월 기독교 연감에 따르면 1천6백만이 기독교인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만일 천주교까지 합하면 더 많겠지요. 개신교만 1천6백만이 되었는데 개신교 신자들이 목사님들의 좋은 교육을 받아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의 정신으로만 산다면 한국의 모습은 무척 달라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정신으로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세례를 주고 교육을 시키고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가서 정치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의 정신으로 회개의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하고 세례를 주며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생명을 거는 사업입니다. 고급 승용차나 타고 다니면서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제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교회 성장이기 때문에 내팽개쳐 둘 수가 없습니다. 그들을 교회 안에 수용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순교자적인 성도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하면 오늘날 한국의 학생들이 구라파에서는 이미 마르크스 레닌의 후예들조차 헌신짝같이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을 붙들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목사님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3. 교회 성장 운동의 최근 동향
저는 이 시간에 교회 성장을 이야기하는 맥가브란 교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 성장 운동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 간단하게 훑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맥가브란 교수는 1897년에 태어나서 199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1920년에 루터 유니버시티에서 학위를 받고 1922년에 예일 유니버시티에서 그 당시 최고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신대원, 지금의 M.Div라고 하는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2년 만에, 그리고 1923년에는 College Of Mission에서 M.A 학위를 받고 1936년에는 콜럼비아 유니버시티에서 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 교육을 예일과 콜럼비아에서 받아 놓고 왜 복음주의로 돌아섰습니까? 그는 자기 아버지를 본받아서 23년 후에 인도에 선교사로 가서 37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합니다. 1959년까지 선교 활동을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막대한 선교비를 투자하는데 어떤 지역은 교회가 죽어가고 어떤 지역은 선교사를 더 보내달라, 교육자를 보내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어떤 지방은 교회가 그저 희미하여 쇠퇴하고 어떤 교회는 성장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부흥하는 것만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런지 교회는 만들기만 하면 성장하는 것인 줄 알았고 쇠퇴하는 교회도 있음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훌러 신학교에 가서 어떻게 하면 교회가 쇠퇴하고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성장하느냐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참 동안 의아해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하시기 때문에 항상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쇠퇴하고 텅텅 비어있는 미국의 교회를 볼 때 저는 아연실색을 했습니다.
여러분, 1970년대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시카고의 대형 교회가 텔레비전에 매일 매일 나오며 “시타고에 있는 이 미국 교회를 팝니다. 싸게 팝니다”라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밤낮으로 교회를 판다고 할 때 저는 아주 아연실색 했습니다. 맥가브란이 그것을 보더니 73년도에 하는 말이 “왜 텔레비전에다가 교회를 팔겠다고 하느냐, 너희 백인들이 교회를 못 쓰면 흑인에게 빌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황인종들에게라도 빌려줄 것이지 왜 팔겠다고 말을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 바람에 백인들이 모이는 교회들이 부끄러워서 팔겠다는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그거 하나만 해도 맥가브란 교수는 미국 교회 성장에 엄청나게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10년, 20년 아니라 100년 후에라도 점점 더 부흥해서 결단코 교회를 팔겠다는 광고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맥가브란 교수는 인도에 가서 교회라는 것은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성장하고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쇠퇴하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게 됩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시간 문제의식을 가지기를 부탁드립니다. 목회를 하는 데 있어서 문제의식이 없는 분은 태평세월입니다. ‘될 대로 되라, 까짓것 이 교회가 망하면 저 교회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목사님들이 깡도 없이 개척하기 싫으니까 큰 교회 친구들, 선배들을 찾아가서 부탁합니다. “나 키워 주십시오.” 자꾸 큰 교회만 가고 큰 교회 가서는 몇 년 있다가 교회가 반으로 줄어들면 다른 교회로 가면서 큰 교회로, 큰 교회로만 좇아다니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제발 그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을 해서 세계 선교를 하고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를 돌아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가브란 교수는 이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가장 큰 문제는 ‘새 신자들을 어떻게 교회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00명 모이는 교회가 있다고 합시다. 일주일에 4사람씩, 어떤 때는 10명도 들어오고 4명도 들어오고 1명도 들어와 일주일에 평균 4명의 새 신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4명에 52주를 곱하면 1년에 208명입니다. 208명이 들어오는데 그 교회는 재작년도 출석 200명, 작년도 출석 200명, 금년도 출석 2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의식이 없으니까 문제와 씨름하고 눈물 흘려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껴안고 그 안에 눈물을 섞고 한숨을 섞어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았는데 교회 성장이 될 게 무엇입니까? 4명이 들어오지만 다시 쑥 빠져나갑니다. 밤낮으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이고, 교회라는 것은 200명 있을 때가 제일 오붓하고 아기자기하고 좋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장로님들은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그 교회는 성장이 안됩니다. 목사의 태도에서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생각하면 교회 성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성장에 대한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가 성장해야 합니까?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기 위해서 성장합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작은 숫자 가지고는 힘드니까 보다 많은 숫자가 모여서 세계 선교를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할 때만이 교회 성장의 당위성이 있고 타당성이 있으며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의식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35억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은 성서적인 교육자, 지도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계 선교를 해보지 못한 사람, 최소한 선교사를 파견해보지 못한 사람(선교비로 적어도 교회수입의 25%나 10% 이상 내보내지 못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기독교성결교회의 성결교회는 될 수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이 시간에 분명히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의 명령을 착실하게 지키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하나님! 우리가 섬기는 이 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최소한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교회의 수입의 10% 이상 20%, 50%까지 바치겠습니다” 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세계 선교를 위해 크게 쓰십니다. 뜻이 분명하고 목적이 분명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교회를 분명히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의식에 위대한 혁명이 일어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독교장로회 자랑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전주 역전에 안디옥교회가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 선교회를 세워 활동하고 있는데 지난번 제가 초대를 받아서 문화인류학과 선교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 교인이 저한테 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의 6/10을 선교비에 씁니다. 4/10를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선교비로 7/10을 사용하겠다는 결의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결정을 하고 시작할 때 놀라운 성장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놀라운 에피소드는 그 교회에 다른 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권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오셔서 수백만 원씩 때로는 천만 원씩 헌금을 하고 간다고 합니다. 그 헌금은 십일조가 아니고 선교비입니다. 그분들은 자기 교회엔 교회 운영을 위해서 십일조만 바치면 된다고 믿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네 교회가 세계 선교를 안 하니까 세계 선교를 위해서 이 안디옥교회에다 헌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선교헌금을 안디옥교회에 바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거짓말인 줄 아십니까? 목사님들은 이런 이야기를 잘 모를 것입니다. 평신도들 사이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신자들은 세계 선교를 원합니다. 신자들은 세계 선교를 못 하고 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스트라창이라는 유명한 남미 선교학자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의 서두에서 “우리는 세계 선교에 동참 못 하고 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평신도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을 시켜야만 할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신자들이 말은 없지만 속으로 끙끙거립니다. “우리 목사님은 세계 선교 안 하십니까?” 그러면, 목사님들이 하는 말이 “선교하려고 그래도 장로들이 말을 안 듣지.” 또 장로회에 가서 강연하면서 “왜 세계 선교 안 하시오?” 그러면 “우리 목사님이 하려 하시지 않아요”라고 합니다. 어느 쪽이 잘못입니까? 양쪽 다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라고 한다면 세계 선교에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동참을 해야만 합니다. 이때 여러분의 교회는 교회 성장의 문턱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교회에 축복의 소나기를 내리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기독교가 언제부터 기복종교가 되었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분명히 물질적인 축복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물질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에 따라 여러분에게 쏟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한 주일에 4사람씩 52주면 208명이라는 사람이 들어오는데 왜 밤낮으로 200명밖에 안 되는 것일까요? 새 신자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 남전도회, 여전도회, 무슨 청년회 있는데 쏙 들어와서 자기가 어떤 층에 해당되는가만 보고 쓱 빠져 나갑니다. 새 신자를 붙잡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 신자에게 친구가 일곱 명만 있어도 교회를 떠나가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들은 40명부터 60명까지밖에 모이지 않는데 도무지 이 기록을 못 깨고 자라나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전도사님들이 지금 40명 내지 60명의 교인을 갖고 분투하고 계신 줄 압니다. 이 신자들에게 세계 선교가 지상명령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키면 그 교회의 신자들은 마음문을 열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개척을 네 군데 했고, 미국에 가서 공부한 다음에 다시 개척을 두 군데 했습니다. 그런데 개척하면서 느낀 것은 이 40명에서 60명이 참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부흥회를 하고 성서공부를 하며 제자훈련을 하고 막 야단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의식의 벽이 깨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계 선교를 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지 세계 선교를 하지 않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에게 “우리 교회가 마음문을 열어놓고 나오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힘을 합해서 세계 선교를 해보자. 신자 수가 많아지면 교회 초기에 창립의 수고를 하신 여러분은 앞으로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를 한다면 교인들은 마음문을 활짝 열고 환영하며 열심히 일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회 안에 친한 친구가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친구 7명을 어떻게 모을 수 있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 직장이나 직업이 같은 사람끼리 묶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5명 이상만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새 신자는 교회에 정착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케리그마를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이는 문화인류학적, 사화학적인 접근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어서 그들의 심령 골수를 쪼개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지도록 하면 그 사람들은 여러분의 설교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건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이야기를 할 때 친구가 7명 있으면 안 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습니다. 미국의 훌러 신학교 옆에 3천5백 내지 4천 명 모이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 3천3백 명 가운데서 65%부터 80%까지가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 이웃 사람들, 직장 동료들과 같은 부류로 묶어져 교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놀랐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친구를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나옵니다. 우선 첫째로, 새 신자가 교회에 나오게 될 때 새 신자를 당회장이 만나시거나 교육목사가 만나거나 새 신자 관리목사가 만납니다. 만나서 여러 가지로 교육을 시키고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한 2,3주 나오다가 안 나오고 맙니다.
그러니까 교회 성장이 안 됩니다. 그게 당연한 줄 알기 때문에 안 된단 말입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되느냐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것의 해결 방법을 찾아야만 됩니다.
저는 칼 바르트를 무척 좋아합니다. 학생시절에는 칼 바르트에 미쳐서 돌아다녔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에 저 시골 교회에 가서 목회할 때 자기가 공부한 자유주의 신학으로 설교를 열심히 하는데 신자가 반으로 줄었답니다. 신자가 반으로 줄어들자 바르트는 답답하고 창피스러워 하루는 히스기야 왕과 같이 벽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주어지는 영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여라”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새로운 거장으로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게 됩니다.
여러분, 히스기야와 같이, 칼 바르트와 같이 벽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왜 우리 교회는 밤낮으로 60명입니까? 왜, 우리 교회는 밤낮으로 100명입니까? 왜 세계 선교사도 제대로 못보내는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교회로 하여금 세계 선교에 동참하는 멋진 교회로 만들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문제의식이 있는 곳에 질문이 있고,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새 신자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이 새 신자 주변은 20~30명의 인간 관계망이 있다고 합니다. 이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게 될 때 ‘콩나물 대가리 하나’ 하는 식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하시는 분은 주의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안내를 한국같이 번갈아 바꾸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것인데 어떻게 일어납니까? 미국에서 인구 5천 명, 1만 명 되는 소도시에 가보면 교회에 미리 나와서 안내하고 헌금 걷는 사람들이 그 교회의 대표요 그 다음에는 이 지역사회 지방의회의 의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동네 사람한테 얼굴 알리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교회입니다. 교회앞에 서서 주보를 나누어 주는 사람의 얼굴을 동네 사람들이 제일 잘 압니다. 그리고 헌금 걷는 사람을 제일 잘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지자제 의원이 되기 위해서 교회에서 헌금위원 하겠다는 사람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지자제를 하니까 아마 10년쯤 후엔 반드시 변화가 알어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새 신자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콩나물 대가리가 하나 나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배후에 있는 20~30명의 그룹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 나오는 새 신자 한 사람을 소중하게 보게 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미국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개척을 하는데 성결교회를 하면 교회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되는지 안 되는지는 해봐야 될 것 아니오”라고 큰 소리를 치고 헝가리 사람의 교회를 빌려 목회를 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교인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데 저희 집사람하고 저하고 앉아있습니다. 집사람이 설교를 그만두라고 합니다. 제가 200명 모이는 교회의 입구만 쳐다보고 있는데 하루는 젊은 청년이 하나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막 눈물이 쏟아지면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 이 새로운 신자 한 사람을 데리고 한번 활동을 해보자’고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은 한국에서 온 장모님을 모시고 나오고 그 다음에 동생, 형제를 막 데리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맥가브란 교수는「하나님의 다리」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달되는 통로는 인간관계인데 제일 먼저 부모, 형제, 친척, 그 다음에는 친구들, 그 다음에는 이웃 사람들, 그 다음에는 직장 동료라고 했습니다. 거기다 인생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 바로 이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교육시키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소속하고 있는 그룹에 복음의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신은 복음의 선교사로서 당신의 그룹에 가서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오. 누구누구는 당신이 이야기하면 교회에 잘 나오겠소”라고 하고 7, 8명 이름을 적어놓고 목사와 전도사가 같이 기도해주고 가족의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할 때 이 사람은 감격스러워합니다. “야, 교회라는 데가 우리 부모님, 우리 형제들 그리고 내 친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는구나” 하고 같이 기도할 때 눈물마저 쏟아집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야, 그거 정말로 예수 믿어보니까 좋더라”고 전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이천석 목사가 이성봉 목사님이 한강변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때려부수러 갔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 생각하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성봉 목사님의 말씀이 너무 흥미로워 감동을 받고 그냥 예수 믿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 양반이 예수를 믿기로 결정해놓고 그 다음에는 자기 친구들을 안 만나고 깡패들도 만나지 않고 교회에 다니니까, 깡패 친구들이 술좌석을 마련해 놓고 “형님, 참 놀랐어요. 20세기 후반기에 그래도 고등학교라도 교육을 받았다는 분이 어떻게 예수를 믿습니까? 아니, 맹물로 포도주 만들 수 있는 것을 믿으세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천석 목사가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야 이놈아, 물로 포도주 만드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야. 나는 인생의 시궁창 물인데 내가 예수를 믿어보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어. 너희들도 이 다음에 교회에 같이 나가자. 안 나가면 이 새끼들 죽여버린다”라고 소리칩니다. “아이구 형님, 놀랬습니다. 그래요, 좋아요. 형님이 나가라고 그러니까 나가죠.” 그러면서 슬슬 따라나왔습니다. 그 가운데서 목사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한 사람을 통해서 그의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 이웃 사람들, 직장 동료들까지 복음의 통로가 열려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사람을 활용하면 교회 안에 머물러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아이,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들어오기도 하고 쑥 빠져나가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먹으면 똥싸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려 합니다. 목사님들의 의식 구조가 그런 곳에서부터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세계 선교는 평생토록 못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 성장을 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새 신자나, 따라들어온 신자에게 회심의 경험을 시켜야만 합니다. 중생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지 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합시다. 우리는 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독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독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결단코 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제일 큰 한인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임동선 목사의 교회가 두동강이 났습니다. 그런데 임동선 목사님이 늘 저한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이혼하려 할 때 절대 간섭하지 말고 ‘당신들 기도하시오. 기도하시오’ 하고 기도만 하지 절대 깊숙이 간섭하지 말아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물었더니 간섭을 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면 꼭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서 떠나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안 떠날 것 아닙니까?”하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젊은 집사 한 분이 있는데 부인은 남미로 해서 2년 전에 오고 남편은 조금 늦게 2년 후에 와서 결혼을 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 가면 여자들은 자유의 물결을 쉽게 타는 반면 남자들은 외고집이어서 보수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집안에서 밤낮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몇 개월 도안 티격태격 하다가 안 되니까 마지막에 저한테 “아, 이제는 영영 안 되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간이식당에서 새벽 5시에 만났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하면 이 일이 해결될 것입니다” 했더니 하는 이야기가 “에이, 소용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도 한번 들어보겠습니까?”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건너편에 앉아있는 그의 이마에다 손을 탁 갖다대면서 “너 죽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밤알같이 동그래지면서 노기띤 얼굴로 저를 노려봅니다. 목사님을 때려 죽이겠다는 심산 같았습니다. “당신 죽어, 당신이 안 죽어서 문제가 일어나.” 그랬더니 가만히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 십자가와 더블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경험이 있으면 왜 이와 같은 문제를 참지 못합니까? 문제는 당신 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습니다. 죽어요, 죽어.” 그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나서 나가버렸습니다.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제가 2년 후에 미국에 갔을 때 보먼트 7가에 있는 게스테이션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기름을 넣다가 만났는데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합니다. 행여 이혼이라도 했을까봐 가슴이 졸였습니다. 한 가정이라도 깨지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주여, 저 가정이 안 깨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집사님, 부인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저 안에 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무척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십자가를 만나 죽는 중생의 경험을 신자들에게 시키면 신자들은 여러분과 더불어 어깨동무 하며 이 땅에서 죽도록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4. 교회 성장 이론의 교회론
왜 교회 성장학파에 대한 비난이 많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교회 성장학파에 대한 비난이 많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교회 성장학파에 대한 비난의 첫 번째 이유는 1960년대까지 30년 동안 신학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학파가 세상에 없습니다. 아주 놀랍게 1960년대에는 전도와 선교에 대한 논란, 1970년대에는 교회 성장 문제에 대한 방법론의 논란, 1980년대에는 최근에 시작된 성령 운동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일어나는 이유는 첫째로, 교회 성장학파 교수들의 대부분이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고 거의가 문화인류학, 사회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하는데 교회 성장학파 학자들의 대답은 사회학적이고 문화인류학적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오늘날에 와서 신학자들이 인접 과학에 대해서도 눈을 좀 떠야 합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고 성장을 하며 발전하고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학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인접 과학인 사회학과 문화인류학 그리고 심리학과 행동과학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교회 성장학파의 학자들도 신학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객관적이 되어보려고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교회 성장학파에 있어서 교회 성장 이론의 교회론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있을 때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문제입니다. 몇 년 전에 학생들이 와그너 박사에게 “당신은 교회 성장 이론의 전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교회 이론에 대해서는 왜 이야기를 안 합니까?”라는 질문이 계속되자 그의 밑에서 1972년에 M.Div과정에 있던 한 학생이 네덜란드의 후리 유니버시티에 가서「교회 성장 이론의 교회론 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암스테르담 신학 시리즈의 제 3권을 차지하는 500페이지의 유명한 책을 써냈습니다. 그러자 훌러 신학교에서 그를 불러 교회 성장학과에서 교회 성장 신학과 교회 성장 이론의 교회론을 가르치게 하여 교회 성장 이론의 약점을 보완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칼세돈 회의 때까지 교회론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우주적이고 사도적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할 때 사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 때문에 선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학자들은 “이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이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하는 것은 지당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20세기에 와서 W.C.C운동이 일어나면서 W.C.C가 제가한 교회론이 이 맥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으며 이 교회는 선교적인 기능을 하는 교회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한때는 ‘Church is mission’이라고 했지만 ‘Church for mission’, 다시 말하자면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데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보수주의나 자유주의가 선교라는 말에 개념의 차이는 있지만 동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교회 성장학파의 베넨겐은 “이 하나의 거룩하고 우주적이고 사도적인 직분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서 있는 교회는 세계의 선교를 위해서 활동을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교회 성장을 간절히 열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간절한 소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부합된 것입니다.
우리는 전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성도들은 한국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같이 사랑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기 때문에 교회 성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성도들이 늘어나고 회심한 신자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것입니다.
5. 한국 교회의 교회 성장 운동에 대한 비판과 조언
오늘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교회 갱신입니다. 교회 갱신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저는 교회 갱신은 다음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가 사는 세계엔 많은 모순이 있습니다. 가장 불행한 사회는 부자가 많고 중산층이 적고 가난한 자가 많은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는 폭발 직전입니다. 가장 축복받은 사회는 부자가 적고 가난한 사람도 적은 사회가 축복받은 사회입니다. 중산층이 폭넓은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한국 사회가 가난한 사람이 많을 때 천주교는 상류사회에 복음을 전하고 개신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삼키며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무를 팔아서 도박을 하던 그런 시절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알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열심으로 돈을 벌어가지고 자식을 공부시킵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 2세들은 일제시대에 적어도 고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사회적으로 중견이 됩니다.
우리 한국이 지금은 기독교 5세가 되는데 2~3세가 되었을 때 재미있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3세가 되면 “대학원을 다니게 되고 회사 요직에 앉게 됩니다. 4세가 될 때에 상층부로 올라가게 됩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4세, 5세가 되면 ‘사’자를 좋아하는 사회가 됩니다. 교회안에서 처녀들이 목사한테 시집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목사, 변호사, 판사, 검사 등 ‘사’자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교인은 전문기술자가 됩니다. 문제는 증조할아버지 때의 가난한 시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새 사람들을 붙들고 ”당신 할아버지는 어떻게 사셨소?“ 하면 다 부자로 살았다고 대답합니다. 일제 시대에 부자로 산 사람은 몇 명 없었습니다. 다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자 족보를 다 뜯어 고쳐 조상 대대로 아주 부자로 산 것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말들이 들립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교회 건물도 지을텐데…….” 하면 “아이고 목사님,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까? 가난한 사람들 백 명 나와보았자 소용 없어요. 아, 내 친구 중에 중소기업체 사장급들이 있는데요, 어떻게든 교회에 나오도록 해야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오면 교회 짓는 것은 문제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보 같은 목사들은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우리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회는 인생의 밑바닥에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4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시고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가난한 자를 기억하셨습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부자를 억누르고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시겠다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향상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맥가브란 교수는 “우리에게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준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누가 뭐라고 말해도 예수를 믿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2대 3대 올라가면서 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계층으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교회 역사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회학적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잘 믿고 자식들 교육을 잘 시킬 때 사회적으로 지위 향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 사임하신 연동교회 김형태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 속에 예수 믿는 사람의 자녀와 예수 안 믿는 사람의 자녀를 비교한 것이 나옵니다. 논문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사회적 성취도가 평균적으로 높다고 합니다.
우리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질 때 우리 할아버지가 예수 믿은 것을 감사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겸손한 증언을 해야 합니다. 우리 증조할아버지도 도박이나 하고 우리 할머니를 두 번이나 팔아 먹었지만 예수 믿은 후에 삶이 변해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기쁘니까 육신의 병도 낫고, 육신의 병이 나으니까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일을 하고 저금해서 할아버지를 공부시켜 주시고 아버지도 공부시켜 주셔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올라왔습니다. “예수 믿으면 당신도 우리와 같이 축복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한마디만 해주면 좋겠는데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조상 대대로 부자인 것같이 말합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가난했던 시절을 잊어버리면 교회가 엉망진창이 됩니다. 가난한 민초 사회에서 유리된 부초와 같은 존재로서 격리된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에게 관심을 호소합니다. 찾아와서 “도와주십시오.” 소리는 안 해도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합니다. 부자에게 대하는 것과 똑같이 대해주기를 바랍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어야 합니다. 부자 장로가 나올 때 악수를 하면서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하면서 그저 가난한 사람이 지나가면 “네, 네, 안녕하세요?” 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의식구조가 그런 데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세계 선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A문화권의 교회가 K문화권의 선교지에서 선교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교회를 지으면 미국에 있는 A교회와 K문화권에 있는 교회가 동등한 형제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회는 어떻게든지 이 교회의 선교부를 도와서 선교회를 만들어가지고 다른 나라에 선교를 하도록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이 교회가 신개척 교회입니다. 이 신개척 교회는 성경 공부와 예배, 기도회, 수련회를 통해서 성장을 합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60명 선을 넘으면서 놀라운 성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이 교회는 나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이고 확장 성장입니다.
이때에 이론적으로 본다면 생물학적인 성장이 있고(자녀들이 그 예수를 믿는) 두 번째는 전입 성장(다른 곳에서 이사 온 사람들이 그 교회에 오는)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회심 성장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다. A라는 교회가 있고 B라는 교회가 있고 C라는 교회가 있는데 모두 다 500명씩 모입니다. 그런데 두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나서 100씩 마이너스가 되었습니다. 한 교회는 200명이 보태져서 700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전입 성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 백성의 숫자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교회 성장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리만 바꾼 것뿐입니다. 하나님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잃은 양을 교회에 끌어들이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회 성장입니다. 즉, 회심 성장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 성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전도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신자들을 데리고 나가서 노방 전도, 축호 전도, 아파트 전도 등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전도하는 훈련을 신자들에게 여러분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실시하고 계신 목사님들은 얼마나 계십니까?
오늘날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춘 이유가 많이 있지만 가장 큰 것은 목사님들이 전도 교육을 안 시킨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전도하라고 강의만 하지 절대로 몸소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들을 데리고 나가서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실패하는 모습을 교인들에게 보이시기 바랍니다. 성공한다는 것을 보이기는 어렵지만 여러분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젊은 집사를 데리고 아파트 집집마다 전도하러 다녀야 합니다. 열 집, 스무 집, 서른 집을 가야 겨우 한 사람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겠다는 말을 듣고 돌아옵니다. 집사가 생각하기를 “목사님이 저렇게 애써서 전도를 하시겠는데 참 어렵구나.” 그러나 한 사람, 두 사람 교회에 나오는 것을 지켜보면 이 집사는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전도하는 것을 훈련받는 것입니다. 실패할 때 집사가 “아이고, 목사님 너무도 고생하시네여. 아이고 보기 민망하니 그만둡시다”라고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여보시오 장집사, 얼마나 예수 믿게 하기가 어려운 줄 알아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야, 감사해야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감격을 이 사람들한테 주어야 될 것 아니야! 그렇지?” 이렇게 타이를 때 이 사람은 전도인의 확신을 가지고 그 다음에는 자기 혼자 나갑니다.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전도 훈련을 여러분이 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부흥강사가 와서 말합니다. “양이 양을 낳지 목자가 양 낳는 것 보았어?” 그런 사람은 미련한 부흥강사입니다. 성경은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서 계곡의 험한 산줄기를 타면서 찾아오는 모습을 하고 있지, 양이 양을 낳는 것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눈물겨운 노력을 신자들에게 보일 때, 실패하는 모습이나 눈물을 닦으면서 때로는 한숨을 쉬면서 수고하는 모습을 보일 때 교인들은 위대한 전도인의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이때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합니다.
신자가 200명이 모이는 교회라면 이와 같이 20명만 훈련시키면 교회가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전도하는 신자 10%만 넘어서면 그 교회는 성장합니다. 그 목사가 바보같지 않고 그 목사가 설교를 아주 못하지만 않는다면 신자들은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은혜롭게 설교준비도 하시고 기도하시며 전도의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Ⅲ. 결 론
교회 성장은 단순한 숫적 증가가 아닙니다. 교회 성장은 회심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의 확장으로서 하나님 나라 확장의 표증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속성을 가지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헌신적 삶을 살아가는 신앙고백적 공동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교회는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삶을 살게 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