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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첸리췬(錢理群) 선생을 만난 것은 1993년 가을 ‘한국 중국현대문학학회’가 주최한 ‘루쉰(魯迅) 국제학술대회’에서였다. 대륙 학자들은 나름 좌파를 자처하던 한국의 소장 학자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당시 학술대회가 끝난 후 첸 선생을 모시고 광주로 순천으로 목포로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첸 선생이 돌아가면서 했던 말씀은 “마오쩌둥을 다시 읽어야겠다!”였다. 그리고 20년이 되는 해 그는 마오쩌둥과 함께 한국에 돌아왔다.
2012년은 중국분야 출판계에서 ‘첸리췬의 해’로 기록될 만하다. 3월에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 기록』이, 4월에 『내 정신의 자서전』이, 9월에는 『毛澤東 시대와 포스트 毛澤東 시대 1949-2009 (상하)』가 각각 출간되었다. 1939년생인 그는 42세에 석사학위를 받은 늦깎이 학자로, 문화대혁명 시기를 포함한 18년간의 하방과 유랑의 경험을 통해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을 형성했다. 그는 20세기 중국 지식인의 정신사라는 맥락에서 루쉰, 저우쭤런(周作人), 차오위(曹禺) 등의 작가를 연구했다. 베이징대학 중문학부에서 퇴직한 이후 중고등학교 문학교육에 열성을 쏟는 한편 국가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던 1950년대 우파와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복원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민간의 이단사상 발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루쉰 전문가에서 마오쩌둥 전문가로 변신한 그에게서 우리는 사상을 중시하는 중국 인문학자들의 전통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작가 루쉰을 연구할 때도 ‘선구자의 정신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루쉰의 산문시집 『들풀』을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혁명가/정치가 마오쩌둥을 연구할 때도 20세기 중국 대륙에 커다란 영향을 준 마오쩌둥 사상과 마오쩌둥 문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따르면 마오쩌둥 사상은 근본적으로 대륙 중국인의 사유 방식과 정감 방식, 행위 방식과 언어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었으며, 나아가 민족정신과 성격 그리고 기질에도 깊은 각인을 남김으로써, 유․도․묵․법 등 외에 중국 대륙은 마오쩌둥 문화를 하나 더 가지게 되었다. 마오쩌둥 문화는 중국 전통문화 밖의 새로운 문화로, 그것은 오랫동안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지도적인 주입을 통해 중국 대륙에서 이미 민족 집단의 무의식, 곧 새로운 국민성을 형성했다.
첸리췬은 자신을 마오쩌둥 시대가 만들어냈고 마오쩌둥 문화가 혈육과 영혼 속에 스며들어, 아무리 발버둥치고 자성하고 비판해도 여전히 구제불능인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 유토피아주의자인 동시에 마오쩌둥 시대의 목적의식적인 모반자라고 자평한다. 그러므로 그는 마오쩌둥 문화를 저주하면서도 축복하고, 결별하면서도 그리워하며, 복수하면서도 사랑하는 그런 양가적인 문화심리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마오로부터 빠져나올 것인가?’이다. 이는 첸리췬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오쩌둥 사상은 이미 한 개인의 것이 아니고 마오쩌둥 문화는 전통 중국 밖에 존재하는, 그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문화로, 중국 대륙의 새로운 국민성을 형성케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지식계는 그 과제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첸리췬의 이런 평가를 현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첸리췬의 연구에서 또 하나 중요한 성과는 마오쩌둥 체제의 문제다. 그가 볼 때 공화국의 역사에서 1957년의 반우파운동이 하나의 관건이며, 그것이 건립한 ‘57체제’는 그 후의 대약진, 인민공사, 4청,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부국강병과 개인 독재라는 맥락에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연속체로 본다. 덩샤오핑 체제를 지칭하는 ‘6․4체제’는 1989년의 ‘6․4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전환점’ 이후 형성되었는데, ‘6․4’ 이후 강화되고 발전한 일당전제체제가 마오쩌둥 시대의 ‘57체제’의 연속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특징을 가지며, 이러한 ‘6․4체제’는 ‘6․4’ 이후 중국 사회구조의 거대한 변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6․4대학살’이 중국 정치에 가져온 직접적 영향은 정치체제 개혁의 전면적 후퇴, 민간저항 역량에 대한 전면적 타격, 그리고 당 권력의 전면적 확장 등이다.
마오쩌둥 사상문화는 공산당의 집단적 지혜의 산물인 동시에 지식인이 동참했으며 대중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첸리췬은 특히 ‘마오쩌둥 사상과 민간 이단사상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시간에 걸친 연구를 통해 그는 민간 이단은 기본적으로 마오쩌둥에 의해 각성되었지만 최후에 이 민간사상가는 모두 그의 반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진정 ‘마오쩌둥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할 시점이다. 첸리췬이 관심을 가져온 민간 이단사상은 크게 학원운동과 민간사상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1956-1958년 중국 학원에서의 사회주의 민주운동, 1960년대 초반 중국 학원의 지하 신사조, 1998년 전후의 베이징대학 개교 100주년 민간 기념 등이 있고, 후자로는 문혁 후기의 민간 사조, 1989년 천안문 민주운동, 1998년 ‘베이징의 봄’, 21세기의 권리방어운동과 온라인 감독 그리고 비정부조직 등 3대 민간운동의 흥기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불연속적인 민간 이단사상의 흐름은 그 존재 확인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이것이 포스트천안문 이후 어떻게 연속적인 흐름이 될지 눈여겨 볼 일이다.
첸리췬은 민간 이단사상에 초점을 맞춰 기존의 공산당 일변도의 역사 해석에 균열을 내고, 마오쩌둥 체제와는 다른 것으로 인식되었던 덩샤오핑 체제를 그 축소된 연속체로 파악함으로써 공화국 60여년 역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었다.
첫댓글 체험담이 들어가 있는 재미있는 글이네요.
근데, 짧아서 아쉽군요...쩝
좀 더 길게 써서, 여기에 올리세요.
네, 조만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