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 관아가 모두 불탄 뒤 세종 17년(1435)에 최해산(崔海山) 안무사가 홍화각 등 여러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홍화각기』는 바로 그 간의 경위를 밝히기 위해 고득종이 지은 글이다. 글 전체의 내용은 제주도의 지형과 역사를 간략히 서술한 뒤에 최해산의 인품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것을 찬양하고, 다음으로 홍화각의 건립 내력과 홍화각이라 명명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또 ‘홍화각(弘化閣)’이라는 제액 세 글자도 고득종 자신이 직접 써서 게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 기문(記文)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공(公)(최해산(崔海山))이 정사(政事)가 성취되고 인심이 화하여지자, 관우(館宇)의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려고 폐허가 되어버린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먼저 거처하는 집을 일으키니, 거문고 타는 당(堂)과 욕실·부엌·랑사(廊舍)의 위치가 갖추어졌다. 조금 서편으로 집 한 칸을 세워서 당(堂)을 만들고, 또 그 서쪽에 집 세 칸을 세우고 겹처마로 보충하니, 그 규모가 굉걸하고도 정밀하고 그 제도가 웅장하고도 화려하였다. 그 남쪽에 반랄(半剌)(판관(判官))의 당(堂)을 세우고 그 북쪽에는 나라에 바치는 말의 마구간을 두고 동쪽에는 창고를 두고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또 그 남쪽에 문루(門樓)를 지어 아래로는 드나들게 하고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았고, 약(藥)창고와 기(旗) 두는 곳이 동서에 서로 대하여 모두 서 있다. 모두 담으로 둘렀으며, 집이 도합 2백 여섯 칸인데, 집들이 서로 연접(連接)하지 않은 것은 화재를 예방한 것이다. 그 경영과 위치와 제작이 정당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公)의 지시와 규획(規劃)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홍화각(弘化閣)'이라 한 현액(縣額)은 "무릇 임금의 근심을 나눈 자가 날마다 이집에 올라서 편안히 놀지도 말고 방종히 하지도 말아서 맡은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항상 왕화(王化)를 넓히고(홍(弘)), 백성의 사정을 상달(上達)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제주 백성들이 무궁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홍화(弘化)라고 이 집을 이름하지 않으랴"고 하여, 성군(聖君)의 덕을 온누리에 널리 알리고 덕화(德化)로써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현재『홍화각기』와 홍화각 액자는 모두 고양부 삼성사재단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