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강해(15)
제목 : 거룩한 공회(교회)를 믿는다
본문 : 에베소서2:11~22절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령에 관한 마지막 항목으로서 성령의 은사를 살펴보았는데, 성령의 은사에 이어서 교회에 관하여 살펴보게 되는 것은 매우 잘 짜여 진 순서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가 지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교회공동체를 운영하고 세우기 위한 것이요,
성령의 은사가 논의되는 지평은 바로 교회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순서는 성령에 관한 고백에 이어서 바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순서와도 잘 조화됩니다.
1. 교회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
우리는 성령 하나님에 관하여 살펴보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두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살펴 본 바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만물과 인간의 일반적인 역사 속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사역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 곧 속사람 속에 내주하셔서 인간을 그 속사람의 차원으로부터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세우고
하나님의 양자가 되게 하는 구원의 사역, 곧 특별 사역입니다.
성령의 이와 같은 특별한 사역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양자로 거듭나게 될 때,
이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사역을 통하여 교회를 형성하신 뒤에는
교회 안에 계속해서 충만함으로 역사하셔서,
이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교회공동체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 시작된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사역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2. 교회 공동체의 두가지 특징 : 거룩성과 보편성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거룩한 공회”라는 우리 말 고백은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이 번역으로는 사도신경이 말하려는 교회의 본질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 고백이 신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어고백은 “Holy Catholic church”라고 되어 있는데, 이 어귀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거룩하고 보편적인 또는 우주적인 교회”가 됩니다.
이 표현은 교회 공동체가 지니는 두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첫째로,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며,
둘째로, 교회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공동체입니다.
영어에 카톨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카톨릭이라는 단어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또는 “우주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형용사입니다.
3. 교회는 서술적인 의미와 규범적인 의미에서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사도신경이 고백하고 있는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라는 말은 흠이 없고 깨끗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회가 흠이 없고 깨끗한 공동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이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서술적인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규범적인 묘사입니다.
서술적인 묘사라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파바로티는 노래를 잘 부른다”라고 말하게 되면 파바로티가 현재 노래를 잘 부르는 상태를 묘사한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을 가리켜서 서술적인 묘사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규범적인 묘사라는 것은 현재 갖추고 있든지 갖추고 잊지 못하든지를 상관하지 않고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바람직한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을 가리킴니다.
보통 규범적인 표현은 “해야 한다”라는 조동사가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성도들은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말하게 되면 규범적인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해야 한다”라는 당위의 동사가 반드시 들어가지 않아도 규범적인 표현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악가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다”라는 표현은 성악가의 일반적인 상태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미 암암리에 규범적인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곧 이 말 안에는 “성악가라는 호칭을 받고 싶으면 마땅히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는 일종의 훈계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악가로 자처하면서 노래를 못 부르면 “저런 사람이 어떻게 성악가냐?”라는 비판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를 거룩한 교회라고 고백할 때도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로, 이 고백은 서술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거룩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둘째로, 이 고백은 규범적인 의미에서 교회라면 마땅히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가 마땅히 거룩해야 한다라고 할 때는
현재의 교회의 모습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의 고백은 교회의 현재의 상태가 거룩하다고 고백해 놓고는
교회의 현재의 상태가 거룩하지 못한데, 이것은 교회의 바른 모습이 아니니까 거룩해야 한다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듯이 보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현재상태가 거룩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또 이미 거룩한 교회를 향하여 현재의 상태가 거룩하지 못하니까 거룩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4.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출 때 교회는 서술적인 의미에서 이미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먼저, 왜 사도신경은 교회의 현재의 상태를 거룩하다고 고백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교회공동체가 문자 그대로 흠이 없고 깨끗한 공동체라는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흠이 없고 깨끗한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이 모임인 교회는 마치 순결을 곱게 간직하고 있는 처녀와도 같이 흠이 없고 깨끗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순결한 처녀을 보면 이 처녀를 좋은 신랑감에게 중매를 서고 싶어지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순결을 곱게 간직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신부감으로 중매한다고 말합니다.
고후 11:2 “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때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합당한 신부가 될 수 있을 만큼 흠이 없고 깨끗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바람둥이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의 생각으로 얼마나 빈번하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집착했으며, 그것들과 몰래 놀아났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영적인 창녀촌에 빈번히 들락거렸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흠이 없고 거룩한 신부로서 그리스도의 상대역이 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는 그 답변을 듣게 되는데,
19절은 우리들을 성도들 곧, 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어떻게 성도들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18절에는 “성령 안에서”라고 대답하고 있고,
13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고
16절에선 “십자가로” 그렇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왜 흠이 없고 거룩합니까?
성도들의 인격 그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묻어 있기 때문에 교회공동체는 흠이 없고 거룩한 공동체로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흠없고 거룩한 의의 옷을
우리가 입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 묘사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의 근거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있고 또한 성령에게 있습니다.
실제로는 거룩하지 못한데, 그리스도 때문에 거룩한 공동체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고 자신있게
우리의 교회는 흠없고 거룩한 공동체리고 선언하고 전해야 합니다.
현실의 교회가 아무리 결함이 많아도 우리가 이렇게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의 거룩함의 근거가 우리의 인격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5. 교회의 구성인원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출 때 교회는 여전히 거룩하지 못한 공동체이므로 거룩하라는 규범적인 명령을 받는다.
그런데 이제 이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말미암아 거룩하다고 선언된 교회와
성도들은 계속해서 거룩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흠 없고 깨끗한 교회로 선언되었으니, 거기에 합당하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령을 이미 그 안에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해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깨끗한 교회로 간주되었으니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의 겉사람은 여전히 부패와 죄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고 쉽게 죄악에 동요 됩니다.
이제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진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항상 생각하면서 이러 세력들과 싸워야 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이것이 항상 생각하면서 이런 세력들과 싸워야 할 의무가 주어집니다.
이것이 지역 교회이 형편입니다.
따라서 신학에서는 지역교회를 가리켜서 전투적 교회라고 부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떠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날까지 이 지역교회에서 세력에 대항하여 항상 싸우는 전투를 하게 됩니다.
이 점은 에베소서의 구도를 보면 잘 드러납니다.
에베소서는 1장에서 3장까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이미 거룩해진 교회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서술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천상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서술합니다.
그리고 나서 4장에서 6장까지는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신분을 지닌 교회가 이 세상 안에서 해야 할 일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염두에 둔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위치한 지역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로 묘사되는 동시에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전투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6:10~17절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6. 교회는 서술적인 의미에서와 규범적인 의미에서 하나된 (보편적인)공동체다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공동체라는 말은
교회의 통일성 곧, 하나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보편적으로 하나다라고 고백했을 때도 교회를 거룩한 교회라고 고백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의미,
곧 서술적인 의미와 규범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곧,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는 또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7. 교회는 말씀 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하여 형성된 교회이기 때문에 서술적인 의미에서 하나 된 공동체다
교회가 하나라는 말의 서술적 의미는 교회를 거룩하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근거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특히 에베소서2:20~22절에 등장하는 건물의 비유는
교회의 하나됨, 통일성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옛날에 건물을 지을 때는 항상 모퉁이 돌을 놓고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팔방으로 기둥을 세우고 방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모퉁이 돌을 축으로 해서 한 건물의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건물로 통합되고 통일을 이룹니다.
이같은 거물의 비유를 예로 들면서
에베소서 2: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이 본문을 약간 자세히 살펴보면,
“터”라는 단어와 “모퉁이 돌”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터는 모퉁이 돌보다는 넓은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집터 안에 모퉁이 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교회라는 건물을 하나의 구조물로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근거가 두 가지 등장합니다.
하나는 넓은 근거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구체적이고 좁은 근거입니다.
넓은 근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고,
보다 구체적이고 좁은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표현에서 “사도들”은 신약성경을 상징하고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신구약 성경 전부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교회의 모퉁이 돌이 그리스도 예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교회의 하나 됨의 근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의 두 가지 근거를 본문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근거는 중요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도, 그리스도 예수도
모두 인간세계에서 기원한 것들이 아니요,
인간의 밖에서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와 문화를 통로로 해서 기록되었으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주신 계시의 말씀이 그 내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인간들의 사회 안에서 생활하신 분이시지만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교회의 하나 됨의 근거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사상이나 특징에 있지 않고 인간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통일성 또는 하나 됨을 추구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를 묵상하고 바라보아야지,
인간 안에 어떤 것을 바라보거나 거기에 근거해서는 안됩니다.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교회의 하나 됨의 근거를 찾기 시작하면 반드시 분파가 생깁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라는
두 가지 하나 됨의 근거들은 어떤 상호관련성을 지니고 있는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넓은 근거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라는 좁은 근거가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말은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좁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의 보다 바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찾을 때 비로소 교회의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 역할을 하며,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신앙선열들의 신앙생활 이야기가 들어있고,
다양하고 복잡한 윤리적인 교훈들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치, 사회, 문화 이야기들이 복잡하게 얽혀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수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실타래를 일목요연하게 풀어주고,
여기저기 어지럽고 복잡하게 널려 있는 구슬들을 꿰어서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핵심주제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된 그리스도 예수에게 관심을 집중할 때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8. 지상교회는 분열되어 있는 바,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분열되어 있는 교회들은 하나되라는 규범적인 명령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서술적 의미에서 이미 하나가 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교회에게는 다시 “하나가 되라”는 규범적 명령이 주어집니다.
하나가 되라는 말은 현재 교회가 하나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 합니다.
교회가 서술적인 의미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고 말할 때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의 인격이나 생활 또는 각 교회들의 실제적인 상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방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의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라는 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교회는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이처럼 분열되는 데에는 물론 정당한 이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성경해석상의 중대한 차이가 있어서 같이 예배의식을 접전하기가 어렵다거나 같이 활동할 경우에 불필요한 부담을 서로 안고 가야 할 경우에 교단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카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은 예배의 의미와 절차 자체에 서로 합의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고, 기타 중대한 신학적 차이가 있어서 이루어진 분열인데, 은 정도는 불가피합니다.
개신교의 두 큰 교파인 루터파와 개혁파도 로마 카톨릭교만큼 입장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개신교 안에서 유아세례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때문에
다시 침례교가 형성되었는데 이같은 신학적 입장의 차이에 따른 분열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합니다.
또 서로 다른 지역으로 전도활동을 해서 전도지역의 특성에 맞게 신앙유형을 발전시키다 보니까 서로 다른 교파를 형성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루터교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지역 쪽으로 퍼져나가 자리잡았고, 스위스의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개신교의 일부가 스코틀랜드, 미국, 그리고 한국 쪽으로 주로 퍼져나가면서 장로교를 형성했고, 다른 일부는 네델란드, 미국의 미시간주, 그리고 카나다 일부로 퍼져나가 개혁교단을 형성했습니다.
이 같은 경우는 전도지역의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른 교단을 형성하게 된 경우인데, 이것도 불가피합니다.
또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 각성을 촉구하는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가 따른 신도들이 많아지자 자연스럽게 교파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를 중심으로 시작된 감리교나 오순절께통의 순복음교단이 대표적인 예로서, 이같은 교단의 형성은 역사적인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열이 이처럼 정당한 이유 때문에 이루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신학적인 이유를 내세우지만 잘 들여다 보면 정치경제적인 이권 때문에 서로 갈라지거나 지역연고와 지방색 때문에 갈라지는 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 개신교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가 수십갈래로 분열된 것은 철저한 이권과 지방색 때문이었습니다.
이와같은 분열은 교회의 통일성에 중대한 손상을 가하는 것이요,
이같은 분열을 행한 자들과 교회들에 대해서는 “하나가 되라”는 규범적 명령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각 지역교회들은 교회가 지니고 있는 다양성을 건실하게 드러내는 분열이 아닌, 이권과 욕심과 용남하지 못함과 미움과 지방색과 끼리끼리 모이는 파벌의식 때문에 갈라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