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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센터(주) 관장 이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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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자연이 가져다주는 혜택의 활용과 재난의 방어에서 문명을 일구어 왔습니다.
그중 더위를 물리치는 생활도구로 활용한 부채는 인류사에서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이 가장 잘 나타나는 대표적인 도구입니다.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는 자연에서 터득한 지혜를 바탕으로 인류는 손짓을 따라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나뭇잎 또는 조류의 깃털등과 같은 가장 자연적이고 손쉬운 재료로 만들어 사용한 부채는 오랜 세월동안 다양한 재료에 섬유와 종이를 발라 만든 한층 발전된 부채로 만들어 졌으며 마침내 전기문명의 시대를 맞아 선풍기, 에어컨과 같은 기계바람으로 발전하게 된 내용에서 부채의 역사는 곧 인류문명의 전개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채에 대한 실증적인 기록들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부채는 인류문명의 시작과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됩니다.
옛 인도에서 승려들이 동물의 꼬리털을 활용하여 만든 날 벌레를 쫓아내던 파리채와 같은 형태의 불자(佛子: 拂子의 오기로 보임. 월계자.)라는 도구가 기원전 2500년대에 인더스江 유역에서 태동한 인더스 문명 유물에서 다수 발견되어 이를 부채의 원형으로 파악하게 하는 근거는 그 형태와 기능에 담긴 동질성은 물론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부채를 선자(扇子)라고 표기하여 온 점에서 볼 때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기원전 2000년대에 아시아에서 서쪽으로 가는 통로에 해당되는 오늘날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 지역은 예로부터 많은 국가가 흥망을 거듭하다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는 히타이트(Hittites)왕국의 부조(浮彫)들에서 부채가 담겨있는 점들과, 기원전 1500년대에 고대이집트 신왕국시대 벽화에서 긴 자루로 된 종려나무잎 부채를 들고 왕을 수행하는 장면이 그려진 내용입니다. 한편 기원전 500년대 헬레니즘 시대에 고대그리스에서 만들어진(도판-1)의 타나그라인형(Tanagra figurines)은 테라코타(terracotta)로 제작된 다양한 형상을 담은 채색 인형으로 당시 유행하던 실내 장식품 또는 개인의 기호품이었습니다.
이러한 인형들은 신전에 봉납하거나 주인의 사후에 묘지에 함께 부장하던 풍습에 따라 오늘날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타나그라인형(Tanagra figurines)에서 작은 하트모양의 둥근 부채를 쥐고 있는 여인상과, 인형에 담긴 항아리의 그림 속에서 둥근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부채들을 그리스어로 리피스(rhipis)라 부르며 이는 당시 고대마시대로 이어져 활처럼 굽은 얇은 판에 산뜻한 색채를 넣거나 금색을 칠한 보다 화려한 부채를 사용한 여인들의 모습이 여러 유물과 문헌에서 (도판-1)의 내용과 같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동양에서의 옛 기록들을 간추려보면 중국에서는 최초의 기록이 기원전 1000년경에 주(周)나라 시대에 2개의 깃털로 만든 깃털부채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고 우리나라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견훤전(甄喧傳)에 918년 고려 태조가 즉위하자 견훤(甄喧)이 하례품으로 공작선(孔雀扇)을 올렸다는 기록과 원삼국시대 전기의 경남 창원에 있는 다호리 고분에서 출토된 부채자루 유물(도판-2)과 서기 357년에 고구려시대에 조성된 황해도 안악의 안악3호 고분벽화(도판-3)에서 나타나는 벽화속의 깃털부채가 최초의 유물과 기록이며 (도판-4)는 (도판-2) 다호리 고분 출토품 부채자루를 복원한 부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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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다호리. 1호, 15호, 24호, 36호 고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실증적 부채유물이 출토된 내용은 흑칠(黑漆)이 된 깃털 부채의 자루들로 이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까지 부채사용을 의미하는 명확한 실증자료이며 함께 출토된 목기와 칠기로 된 각종 제기(祭器)와 다수의 검이나 현악기 등을 헤아려볼 때 당시 부채의 사용이 의식을 행할 때에 주요한 용도로 사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내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그림으로 기록된 부채인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에서 볼 때 벽화의 주인공이 착용한 검은 내관 위에 하얀 덧 관은 왕만이 쓸 수 있었던 백라관이라는 점에서 주인공의 신분을 확인하게 되고 주인공의 오른손에 들고 있는 깃털 부채는 자루에 귀면을 새긴 ‘주미’라고 불리는 부채로 신분을 상징하는 의미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자료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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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도판-5)의 둥글부채(단선(團扇)-rigid fan, screen fan)과 (도판-6)의 쥘부채(摺扇-folding fan)의 의미와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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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부채는 나뭇잎과 조류의 깃털에서 발전하여 적당한 크기의 종이 또는 섬유를 발라 바람을 일으키는 세계적으로 그 조형이 비슷한 일반적으로 둥근 형태의 부채를 말하며 접부채는 방구 부채에서 휴대와 사용의 편리함을 추구하여 발전된 부채입니다.
부채에 대한 어원을 살펴보면 우리말의 부채는 중국 송(宋)나라의 사신 손목(孫穆)이 고려시대 1103년 (숙종8)에 서장관(書狀官)으로 개성에 왔을 때 우리말 사전인 계림유사(鷄林類事)를 편찬하면서 “扇을 부채라 한다”고 하였던 기록과 1691년 (숙종17)에 편찬된 한석봉 천자문에 수록된 ‘부채 선’ 이라는 기록에서 부채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온 오랜 역사를 확인 하게 됩니다. 부채는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인 ‘부치다’의 동사인 ‘부’와 말채, 파리채, 뜰채 등과 같은 손잡이막대를 뜻하는 ‘채’라는 명사와의 합성어이며 채란 가늘게 정련된 살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부채를 뜻하는 한자 선(扇)은 삽짝문을 뜻하는 호(戶)와 새의 날개깃을 뜻하는 우(羽)가 조합된 문자로 이는, 삽짝문과 같이 새의 깃을 엮어 만든 부채라는 의미와 이는 곧 집안의 바람이라는 뜻으로 연결됩니다. 영어에서 부채라는 뜻인 팬(fan)은 손으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라는 뜻으로 (fan)은 곡물에서 겉겨와 티끌을 제거하는 농기구인 풍구와 풍선기(風扇機)를 뜻하는 라틴어 반누스(vannus)에 그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중세 전기에는 여성들이 장식용으로 부채를 사용한 점은 확인되지 않지만 교회에서는 의식용으로 긴 자루가 달린 원형 부채를 사용하였던 기록이 분명하며 이를 라틴어로 플라벨룸(flabelum)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9~13세기 무렵까지 사용된 점과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 1294?~1303)가 양피지에 도금한 부채 및 비단 · 참향나무 및 타조의 깃털 등으로 만든 크고 작은 10여 종류의 부채를 사용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중세시대에 여성이 부채를 이용한 것은 십자군원정 이후의 일입니다. 13 · 14세기 (기사(騎士)이야기)등이나 16세기 전반(前半)에 에스파냐에서 성행한 소설의 한 장르인 (기사(騎士)이야기)등에서 파리채(mouchoirs)로 부채가 불리우며 등장하는데 이는 프랑스왕 샤를 5세(1337~80)에 대한 기록에서 ‘왕이 테이블에 앉으면 깃발이 파리를 쫓아버린다’ 라는 내용을 헤아려 볼 때 깃발이란 가죽으로 만든 작은 깃발모양의 부채(flag fan)로 이탈리아어로 벤타롤라(ventarola)로 불리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이는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서양문화에서 16세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접고 펼 수 있는 쥘부채의 등장이었습니다. 쥘부채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전해졌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부챗살의 수가 적은 쥘부채는 빨랫방망이부채(battoir fan)또는 에스파냐부채(Spanish fan)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유럽에서 부채에 대한 주요기록들을 살펴보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앙리2세에게 시집 온 카트린드메디시스(1519~89)는 혼인식에 깃털이 달린 둥근부채를 지참하였다는 기록에서부터 오스트리아 티롤의 대공비(大公妃)가 남긴 1569년의 재산목록에 남아있는 2개의 에스파냐 부채, 1593년 프랑스왕 앙리 4세 왕비가 남긴 12개의 에스파냐 부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빗자루모양의 부채를 선호하였다는 기록을 거쳐 17세기 후반에서 이르러 여성의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이러한 여성들의 부채에 대한 깊은 선호는 부채가 사랑을 표시하는 징표로 활용되어 사랑하는 남자에게 짐짓 부채를 떨어뜨려 줍게 함으로써 사랑을 확인하는 풍습이 유행하였는데 말라르메의 시 ‘플라셀 퓌틸’에 ‘사랑은 부채의 날개를 타고’라는 시구는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채로 사랑을 드러낸 점은 동양과 서양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중국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후궁이었던 반첩여는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자신에 처지를 가을이 되어 쓸모없게 된 부채에 비유하여 원가행(怨歌行)이라는 시를 남기었는데 이 시는 중국 육조문화(六朝文化)를 대표하는 詩문선집인 문선(文選)에 전해지고 있으며 이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중 만복사 저포기에서 “비단 부채가 맑은 가을 하늘을 원망하는 일은 하지 마셔요.”라는 구절과 동일한 의미로 가을 부채를 소박당한 여인으로 상징하며 가을의 부채처럼 자신을 홀대 하지 말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 중 우리나라 고시조에 부채에 담은 대표적인 사랑이야기를 살펴보면 /부채 보낸 뜻을 나도 잠깐 생각하니/ 가슴에 붙는 불을 끄라고 보냈도다./눈물로 못 끄는 불을 부채라서 어이끄리/ 에 잘 나타 있으며 조선 중기의 유명한 문인이자 시인인 백호 임제(林悌1549-1587)가 평안 부사로 부임 하는 길에 개성에 들려 명기 황진이를 찾았을 때 그의 죽음을 전해 듣고 무덤을 찾아가 들고 있던 접부채위에 써내려간 詩 /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감명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부채가 가지는 정신성은 뚜렷하였습니다. 통치라는 면에서 부채의 상징성을 살펴보면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제왕으로, 5제(五帝)의 한 사람인 순(橓)왕은 왕권을 물려받자 널리 눈과 귀를 열어 어진 사람을 등용한다는 뜻에서 오명선(五明扇)부채를 만들었고 이와같은 상징의 오명선 부채는 훗날 주나라 무왕을 비롯하여 양, 위, 진, 한나라의 모든 임금들이 사용한 사실에서 부채는 통치권의 상징이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이는 우리나라에 고려 태조 왕건이 즉위하자, 견훤이 사신을 보내어 축하하고 공작선을 바쳤다는 내용에서 확인 되는 점으로 이는 견훤이 고려 태조의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점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신분의 상징과 지휘라는 측면의 의미를 담아 옛날 무관 등은 부채를 지휘용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중국의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백우선을 들고 삼군을 지휘했다는 대목에서 부채가 지휘봉을 상징하는 오랜 역사를 알 수 있으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략으로 동래부가 함락되게 되자 동래 부사 송상현 (宋象賢 1551∼1592)은 고군분투하다 자결하여 충절의 표상을 드높였습니다. 이 때 송상현은 가지고 있던 지휘용 하얀 접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 졌는데, 진을 치고 베개를 높이었습니다./ 군신의 의가 무거워/ 부자의 인연을 가볍게 합니다.)라는 아버님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담은 부채에서 우리는 부채의 다양한 활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일심선(一心扇)이라고 불리우는 접부채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신미양요 때에 전투 전에 우리의 병사들이 합죽선 부채를 펴 그 여백의 부채살 면에 자기의 이름을 적어 한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는 결의를 다진 부채가 바로 일심선(一心扇)입니다. 당시의 이 부채는 미국 해군의 노획물이 되어 오늘날 미국 아나폴리스의 해군 사관학교에 이와 같은 내용과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부채는 동과 서를 막론하고 드높은 정신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중세의 교회에서 의식용으로 사용한 부채나 동양에서 제(祭)를 올릴 때에 사용한 부채의 정신성은 신성이라는 동질성의 펼침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스님이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스님에게 도의 전수를 의미하며 주었던 부채가 바로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에 비치한 부채는 악마를 쫓는 바람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오랜 생활문화에서 부채는 맑은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날리듯 재앙이나 병마를 쫓아낸다는 믿음과 상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단오에 부채를 선물하는 보편화된 풍속 속에서 선물 받은 부채를 전염병을 쫓는 부채라는 뜻인 벽온선 이라고 이름 하여 내걸었던 점은 바로 부채가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정신성을 담고 있으며 이는 악마를 쫓고 신명을 부르는 굿에서 필수적인 무구로 등장하게 되고, 이처럼 무당들이 사용한 부채는 재앙을 떨쳐내는 벽사와, 신을 부르는 초신의 용구로 발전되어 굿을 하면서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이 옛 풍속도에 분명하며, 이러한 부채는 그 조형성과 색채의 조화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오면서 우리의 민속적인 무속문화를 가꾸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정신성을 중시한 부채들이 모두 접고 펴는 부채를 사용한 사실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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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접부채는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종이를 사용한 접고 펼 수 있는 부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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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전기문명이 발견되어 생활수단으로 활용되기 이전에 인류는 다양한 부채를 만들어 더위를 다스려 왔지만 우리나라 쥘부채인 합죽선과 같이 종이를 발라 접었다 펼 수 있는 부채로 만들어 사용한 기록은 성경에서부터 서양의 그 어떠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지만 이와 같은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접었다 펼 수 있는 부채가 우리나라 부채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록은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에서 명확하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이는 곽약허(廓若虛)가 편찬한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1076年)라는 화론서(畵論書)에 이와 같은 최초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화견문지(圖畵見聞誌)는 중국의 당나라시대(唐時代)에 장언원(張彦遠)이 펴낸 (역대 명화기(名畵記)라는 화론서에 이어 곽약허(廓若虛)가 편찬한 책으로 841년 당나라시대부터 1074년 북송(北宋)시대에 이르는 주요한 그림에 대하여 화론(畵論)과 미술사는 물론 333명의 화가들에 대한 전기가 6권에 걸쳐 정리 되어 있는 중요한 책입니다.
본 책에 수록된 우리 쥘부채에 대한 내용 중 그 일부를 살펴보면 “고려에서 중국에 오는 사신들은 접었다 폈다 하는 접부채를 사용하였는데 산수, 화조, 인물 등을 그려 매우 아름답고 신기한 부채로 이를 선물로 받게 되면 가장 귀히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고려 사신이 중국에 올 때마다 접고 펼 수 있는 부채를 선물하는데 푸른빛을 조용히 머금은 아청지(鴉靑紙)에 ‘부인안마(婦人鞍馬)’가 그려져 있는 매우 진귀한 부채이었다.”라고 기술하는 등 이외에도 여러 기록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중국 송나라의 문신이었던 서긍(徐兢)이 1123년(인종1)에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사실들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낸《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은 오늘날 그림은 소실되어 글만 전해오지만 “고려인들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며 그 부채는 접고 펼 수 있는 신기한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편 1076년 사신 최사훈(고려 문종30년)이 사은품으로 전한 우리나라 접부채의 이야기에서부터 장동해집(長東海集)에서는 중국에는 접는 부채가 없었으나 東夷의 접부채 전파를 수록한 일화와 훗날 청나라의 고사기(高士奇)의 천록식여(天祿識餘)에 청대에 와서 조선의 접부채가 크게 유행하여 중국의 단선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우리 접부채의 우수함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으나 일본 접부채에 대하여서는 이와 같은 내용은 없습니다.
우리의 기록으론 통문관지(通文館志)에 의하면 이조 때 우리사신 세 사람이 일본에 갔을 때 국교품으로 부채를 가져간 접부채의 수량들이 상세히 기록되어있으며 일본 德川時代에는 조선의 접부채를 모방한 조선골선(朝鮮骨扇)이 대유행하였던 사실과 조선왕조실록에서 세종8년(1426년)에 일본국 하까다 의 상인 종금(宗金)으로부터 접부채 100자루와 세종16년(1434)에는 갑선(匣扇)100자루가 足利義敎로부터 세종왕에게 전해진 이야기등 동양3국의 부채를 통한 교류의 사실들이 무수하지만 일본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할 때 박쥐의 날개를 보고 백지를 발라 만들었다는 부채 제작설은 일본에 종이의 제작 시기가 훨씬 이후의 시기인 점과 문화의 대체적인 전파가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진 점 등을 깊게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동양문화의 종주국 이라고 자랑하는 중국에서 신기한 부채라고 평가한 단순성이 아니라 우리 접부채에 대한 세계 최초의 사용을 확인하는 기록과 함께 우리나라 부채그림에 대한 오랜 역사와 문화를 증명하는 소중한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도 이부분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는 오랜 세월동안 일본이 다양한 홍보프로그램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자기네 것으로 인정하게 하는 접고 펴는 부채의 최초 개발과 사용국이라는 묵시적인 주장을 펴왔지만 위에 언급한 기록들은 이와 같은 주장이 어불성설임을 확인시켜주는 분명한 내용으로 접고 펴는 부채가 일본이 먼저 만들어 사용하였다면 당시에 중국과 일본간의 다양한 교역이 이루어졌던 사실에서 고려국의 “접고 펴는 신기하고 진기한 부채”라고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일본이 접고 펴는 부채의 최초 사용과 개발이 자기나라에서 이루어졌다고 묵시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의 중심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이 주장하는 논지의 중심에는 1715년에 펴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1715년)는 일본부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여왕인 신공황후(神功皇后,AD247사망)가 삼한을 정벌할 당시 박쥐의 날개에서 착안하여 부채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회나무 껍질로 만든 부채인 회선(檜扇)에 대하여 회나무 껍질 25매를 엮어 만든 부채로서 백지로 바르고 실로 등꽃 모양의 띠를 연결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회나무 껍질을 엮어 만든 접부채인 회선(檜扇)을 상당수 국보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명확한 제작연도나 기록이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점입니다. 본 기획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부채에 대하여 명확한 지식이 없이 단순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일본인 민속학자 今村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부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하여 위의 내용이 가설임을 실토하였고 회선(檜扇)은 원래 나무 자체로 만들어져 훗날 종이를 바르게 되었다고 학자의 양심으로 정정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180도의 반원형 조형을 지닌 우리나라 접부채는 우리민족의 미학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최초로 질 좋은 한지를 발라 접고 펴는 부채를 만들어 사용한 지혜로운 민족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이 가지는 환경과 문화의 토양으로 독창적인 180도의 반원형으로 펼쳐낸 독창적인 부채조형과 그 여백위에 글과 그림을 담아 안부를 묻고 마음을 전하였던 역사적인 풍속이 부채그림이라는 회화예술의 선구적인 영역을 열어온 점을 우리는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손에 쏘옥 들어오는 형태를 일러 쥘부채로 불리어온 합죽선은 초가지붕과 무덤의 곡선 그리고 해돋이와 일몰에 이르는 우리문화의 지형적인 환경에서부터 고유한 정신성에 이르는 형태와 의미를 담아 세계에서 유일한 180도 반원형 형태의 독창적인 조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노년기 지질구조에 의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인 우리나라지형에서 자연부락으로 형성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부채꼴은 우리민족의 독특한 환경조형으로 이러한 반달형태의 조형은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일출과 월출이 빚어내는 조형과 맥락을 함께 하며, 이는 왕도 경주의 반월성과 우리의 조상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아왔던 초가지붕의 곡선에 잘 나타나 있으며, 활(弓)과 태극에서 연상되는 조형은 물론, 무덤의 봉분형태 및 가장 아름다운 곡선으로 평가받는 사찰 및 궁전등의 홍교와 같은 돌다리들의 곡선 등에 이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우리의 조형이 바로 합죽선 부채의 조형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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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내용은 특히 우리민족의 고유한 건축양식에 잘 담겨있습니다 . 서까래를 부채살 모양으로 댄 것을 선자(扇子)또는 선자추녀라고 불러온 점과 서까래를 덮은 천장 널판을 선자개판(扇子蓋板)으로 불러온 점, 서까래를 부챗살 모양으로 댄 것을 선자서까래 즉 선자연(扇子椽)이라고 이름 하여온 사실에서 이는 모두 기와지붕을 완성할 때 가장 아름다운 조형미를 구성하기 위하여 부챗살 모양으로 배치한 서까래라는 점에서 우리 건축물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美) 로 대표되는 처마의 미학이 바로 부채의 조형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좌우로 날아오를 듯 들린 처마의 곡선은 그 모습을 전면과 후면으로 이동하며 살펴보면 조형 자체가 하늘을 향해 비상하고 있는 조상들의 뛰어난 지혜와 미감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는 바로 부채의 접고 펴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는 우리민족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궁궐의 건축물은 물론 주거용 한옥에서도 뚜렷한 사실에서 우리나라 부채가 가지는 조형미가 단순한 도구의 미학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아름다운 건축미에서 처마 네 귀퉁이 추녀 좌우로 부챗살 펴듯 하는 선자서까래와 같은 조형의 미가 없다면 처마는 곡선의 미가 아닌 수평이 되어 바로 (도판-7)와 같은 근정전과 같은 아름다운 처마를 갖지 못하는 점에서 동일한 기와 건축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 중국과 비교해보면 접고 펴는 부채의 종주국이 어디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합죽선이 부채를 오직 평면의 도구로 사용해온 인류사의 오랜 고정관념을 일깨운 문명의 전환적인 의미와 함께 부채의 펼침과 접음에서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삶의 시작과 마감이라는 정신세계를 담아낸 점에서 우리 부채에 대한 올바른 헤아림은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채그림은 세계 최초의 움직이는 미술관입니다.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 사용한 종이로 만들어진 펴고 접는 부채는 우리 민족 고유의 조형공간입니다. 부채에 시와 그림을 그려 안부를 전하고 마음을 담아 전한 풍속이 부채그림의 예술성을 형성하게 되었고 선비들의 정신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회화예술로 발전하여 왔습니다. 입체적이고 기하학적인 선면도형 속에서 빚어낸 부채 그림의 회화예술은 서구적 현대회화의 입체, 설치미술과 같은 다양한 실체에 견주어도 당당함은 해외전시에서 확인한 현지의 평가들입니다. 도판-8 의 작품은 진경산수의 지평을 열어간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 그린 부채그림으로 이 작품은 현재 기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180도 반원형 부채조형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아래의 내용과 같이 세계적인 대 화가들이 우리의 부채조형에 그려낸 수많은 그림들을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부채조형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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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부채조형에 그린 외국화가들의 작품들...
아래의 부채그림들은 우리나라부채만이 가지고 있는 180도 반원형 부채조형에 도판-9(드가,Edgar De Gas), 도판-10(고갱,P.Gauguin), 도판-11피사로,C.Pissarro)와 같은 외국의 대 화가들이 그린 부채그림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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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12 작품들은 프랑스 화가이며 미술이론가로『고갱P.Gauguin』에 영향을 받아 상징주의이론을 전개하였으며 나비파(派)의 중심인물중 한 사람인『드니.Maurice Denis,1870 ~ 1943』가 일본의 부채조형에 그린 작품 도판입니다. 앞서 제시한 우리나라 부채조형에 그려진 작품들과 비교하여 보면 조형의 차이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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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부채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합죽선 부채의 조형은 40數에서 50數에 이르는 촘촘한 부채살에 영향으로 부채를 펼쳤을 때 180도의 분명한 반원형 조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의 부채는 작은 숫자의 부채살에 따라 모두 130도 또는 150도의 조형을 갖습니다. 이러한 우리나라 접부채가 가지는 부채살의 40수에서 50수에 이르는 빼곡함으로 풀질 자욱에서 먹물이 묻지 않아 대체로 유명 서화가 들이 글씨와 그림을 그리는 부채로는 부챗살의 수가 15-20개로 적어 글과 그림을 그리기 손쉬운 중국부채나 일본부채를 선호하게 되었고 이와 같은 용도의 부채제작을 요구하여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조형의 부채가 오랫동안 제작되게 된 사실이 훗날 많은 혼란을 야기한 주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부채의 제작에 대하여 합죽선 부채의 제작은 공예예술이 빚는 극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합죽선이란 부채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양면의 겉대가 대나무 껍질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대나무 뿌리 부분으로 이루어져있고 그 촘촘한 마디가 자연스러운 형태미를 이루면서 모든 부채살의 양면에 대나무 껍질을 합하여 붙임으로서 합죽선이라 명칭 되었습니다. 전라도 담양에서부터 섬진강을 따라 흐르는 적정한 기후여건의 남해안에 자생하는 대나무는 그 내구성이 뛰어나지만 다른 나라의 대나무들은 이와 달라 껍질은 사용하지 못하고 대나무 자체로 부채를 제작합니다. 대나무의 껍질을 합죽(合竹)하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공예기법에서부터 50여회에 이르는 분리된 기법으로 완성되는 합죽선 부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천연 닥나무를 재료로 한 부채용 전용 한지(韓紙)로 만들어집니다. 이와 같은 우리나라 합죽선부채에 대하여 일제시대에 조선 민예연구가로 “조선의 美는 비애의 美라는” 왜곡된 평가로 너무나 유명한 일본인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 등이 펴낸 『조선공예대관』에는 이를 일러 “조선이 영원히 전해야할 물품이 합죽선 부채라고” 단언하고 있으며 “일본에는 이러한 부채가 없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부채 제작은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관에서 관장하는 선자청(扇子廳)이라는 관아와 민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선자청(扇子廳)은 전주와 나주, 경북 안동에 존재하였으며 안동과 전주에선 합죽선을 나주에선 태극선등의 단선부채를 제작하였습니다. 합죽선 제작의 선자청이 전주와 안동에 존재하였던 사실은 합죽선 부채의 주요 수요가 선비중심이었음을 감안할 때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며 현재에도 전주의 합죽선과 나주의 태극선 제작의 명맥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선자청에선 매년 일정수량의 부채를 제작하여 단오절에 맞추어 진상하였으며 이를 단오진선(端午進扇)이라 하고 이 부채들을 임금이 단오날에 각 신하와 관청에 하사하는 것을 단오사선(端午賜扇)이라 합니다. 이는 오늘날과 달리 교통수단이 어려웠던 시대상황에서 한 여름을 대비한 사전배포로 여겨지며 이렇게 받은 부채들은 여러 친지와 지인들에게 나뉘어 지게 되었고 여기에 글과 그림을 담아 서로에게 전달한 소중한 의미들이 우리나라 고유의 단오부채 풍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맺는말
합죽선 부채는 우리나라의 정신문화의 상징이며 실체입니다. 이와 같은 부채조형에 담긴 부채그림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예술 혼입니다. 합죽선 부채의 여백에 안부를 묻고 마음을 전한 글과 그림들은 그 시대의 문화의 광장이자 요람이었으며 산수의 경관을 그림에 담아 부채를 펴고 접는 움직임에 따라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입체적인 예술을 감상한 선인들의 지혜로운 심미안을 되새기며 고갱과 피사로등 과 같은 세계적인 화가들이 우리만의 독창적인 반원형 부채 조형에 그렸던 부채그림들을 통하여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부채 조형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생각하게하며 이는 180도의 반원형 조형에 담긴 우리나라 최초의 부채그림이 진경산수의 국풍적인 화풍을 열었던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에서 찾을 수 있음이 우연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세계 최초로 종이를 발라 만든 접고 펴는 부채를 만들어 사용한 우리민족의 선구적인 지혜와 미감(美感)에 담긴 이와 같은 내용들은 유구한 역사 속에 깃든 우리 문화의 높고 깊은 위상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우리의 것을 되찾아 보존하고 발전시켜가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가꾸어온 빛나는 유산을 지키고 발전시켜가는 일은 예술인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멀고 힘들지만 이렇게 조금씩 일구어가면 우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우리의 것을 매만지게 될 것이며 온 세계에 명확히 확인 시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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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외국화가가 부채에 그림을 그린것을 정말 처음 보았네요 부채의 역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저도 덕분에 많이 배우니 저 또한 감사합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