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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유적인 것 (contigens) |
필연적인 것(necessarium) |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 |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즉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다른 것에 의해 충족한 것(heterosufficiens) |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 충족) |
분유적 유(ens per participationem) |
본질에 의한 유(ens per essentiam) |
다른 것에서 유래되는 존재 혹은 타자의존유 (ens ab alio) |
자체유(ens per se) |
존재와 비존재가 전혀 무관한(indifferens) 것 |
비존재에 단적으로 반대된다. |
피조물의 속성 |
신만의 속성 |
생성소멸하는 유, 그 작용에 있어서 작용할 수도 안할 수도 있는 불확정적인 것 이런 작용은 외적 원인에 의해 장애를 받을 수 있는 것. |
지금 있는 것과 달리는 있을 수 없는 것. 존재양식에 있어서 불변이며 확정적인 것 그 본성상 어떠한 외적 힘으로도 소멸될 수 없으며 그 작용에 있어서도 어떠한 외적 힘으로도 장애를 받을 수 없도록 확정적인 것. |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자들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1) 즉 우리는 사물세계에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를 비롯하여 무기물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변화, 즉 생성 소멸함을 수없이 경험한다.
즉 우리는 이 세계에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有를 만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에서 만나는 有는 우연유(ens contingens)이다.}
<대전제/소전제>는 이 가능적이고 생성, 소멸하는 것을 또 다시 가능적이지 않고 필연적인 원인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 [가능적인 것이] 또 다시 가능적인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모든 유가 가능한 것 뿐일 수는 없고"로 끝나고, 귀납적으로 모든 경험가능한 가능한 것이 포함되는 가능성으로부터 끌어내는 논증에서 배제하고 있다.
1. 한번 존재하지 않거나 않았던 것은, 지금 있는 어떤 것의 원인 일수 없다.
2. 가능한 것은 한번 존재하지 않거나 않았던 것이다.1)
3. 가능한 것은 지금 있는 어떤 것의 원인일 수 없다.
이제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단순히 가능적인 것만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2) <소전제/대전제>는 다시 조건적으로 필요한 원인들과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원인들 사이의 상충을 보여주고 조건적으로 가능한 한 원인으로 무한 소급해 가는 것을 (첫번째와 두번째 증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배제한다.
(3) 따라서 우리는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지 않고 다른 것들에게 必然性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 즉 그 자체로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넷째 길: 완전성의 제 단계에서의 논증 (단계론적(climacologicum) 논증, 또는 통일성(henologicum)의 논증)
{많은 철학자들이 이 논증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중 고대 철인으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시 플라톤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향연, 210c~211d)과 플라톤 학파 사람들은 이 방법에 의해 최고의 善, 최고의 美에로 상승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설을 즐겨 인용한다. (De civitate Dei, I,8,c.6; C. Boyer, Cursus Philosophiae II,1954, 325) <안셀무스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중대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논증을 사용하고 있다.
{관념론자들은 이 논증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인식론적 결함 때문에 다만 내재적 절대자에만 도달한다.}
{넷째 증명은 사물들에게 다양한 정도로 존재하고 있는 특정한 속성들, 즉 선함, 참됨, 고상함등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이 속성들을 양이나 질의 범주에 속하면서 단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속성들, 예를 들면 더 길거나 짧음, 더 진하거나 흐린 빨강 등과 같은 것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 증명에서는 존재자의 모든 범주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그래서 그것을 "넘어서는"), 그러나 다양한 정도로 발견되는 그러한 초월적인 속성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1) <대전제>는 선함과 착함과 같은 (초월적)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이 최고도로 있는 어떤 것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확정하고 있다. 이것과의 멀거나 가까운 것에 따라서 그 속성들이 지니는 단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최고의 것은 바로 그 속성들이 최고로 높은 단계로 그것에 속하는 존재자이고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존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함, 착함 그리고 존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형이상학 II,1; 니코마코스 윤리학 I,4)에서 서로 치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소전제>는 그 최고도의 것이 자기에게 연관을 맺고 있는 속성들, 그러므로 그 존재의 측면에서 그 사물의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선성 혹은 완전성은 그 자체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자체로서 순수가지적이며 절대로 최고인 어떤 첫째의 것과 관련시킴으로써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계적인 것은 그 본질상 최고적인 것(maximum)과 관련된다.
즉 단계적인 것은 주관적 필연성에서가 아니라 본성상의 필연성 때문에 최고의 것과 관련시키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계적인 것은 최고적인 것을 내포적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주장될 수 없는 것이다.} <정의채81,134>
(3) 결론은 소전제에서 언급된 그 최고도의 것이 세상 사물들의 최고의 존재 원인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 증명은 이제까지의 다른 증명들과 마찬가지로 귀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약간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증은 이제까지처럼 매개 가능한 원인들 쉽게 보충할 수도 있을텐데 을 통해서 첫째 원인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대전제에서는 즉시 사물들이 최고의 존재자와 맺고 있는 관련을 밝히고 있고, 그 다음 단계 소전제에서는 이 최고의 존재자가 첫 번째 존재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이 네 번째 길은 우리로 하여금 앞의 세 가지 길을 넘어 한 걸음 더 진일보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 속에서 관찰하는 피조된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가 지성(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른 또 한 가지는 인간 인격이다. 그런데 만일 최고의 존재자가 먼저 그것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속에 전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무한적) 방식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최고의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 안에서 발견되는 이 완전성들의 원인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인격적이고, 지성적이며, 최초이고, 필연적이며, 어떠한 원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원인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존재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오도넬 51-2>
다섯째 길: 우주의 질서에서의 논증.
다섯째 길은 사물들의 통치에서(ex gubernatione rerum) 취해진다.
(1)사실 우리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사물들, 자연적 물체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自然物들이 가장 좋은 것(optimum)을 얻기 위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1')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意圖에서부터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명백하다.
(2)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다.
(3)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어떤 이성적 존재가 있다.
(3')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이 증명은 스토아학파에 의해서, 특히 키케로와 세네카에 의해서 알려졌다.} <힐쉬83,583>
{이 논증은 이성에 부합하지만 (즉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그 자체에는 이성이 결여된 사물들이 목적에 알맞게 행동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1) <대전제>는 사물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기 때문에 그 사물들의 목적에 부합한 활동들을 내재하고 있는 목적인과 연관을 시키고 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목적인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그 사물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법칙을 따라 항구하게 규정된 어떤 것을 산출하기 위해 작용한다는 것은 그런 사물 자체가 그런 결과를 내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을 명백히 해주기 때문이다. 즉 그런 사물은 본성상 그런 결과, 목적에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주안에서 우리는 개체의 善과 우주 전체의 善을 위해 사물이 작용하고 있는 사례를 얼마든지 알고 있다.
사실 세계는 놀라운 조화의 작품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고 아주 다양스러운 有가 그 자체의 선과 전체의 선을 이루기 위해 잘 조화있게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는 무식물계의 미소세계인 원자세계에서 광대한 천체계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유기물의 세계인 식물계에서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의 신체구조계에서 이런 사례는 더 잘 나타난다. 각 기관은 전 생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하며 그 목적을 위해 전체가 질서를 지키며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2)
(2) <소전제>는 목적인들이 이성에 부합한 행동들을 그 사물들을 초월하는 이성적인 원리와 연관 시킨다. 그것이 내재할 수도 있으리라는 또 다른 가능성은 그 사물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배제된다.<SdGB 부록 IV, 157이하 참조>
{그런 지성자가 궁극적으로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지휘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조차도 의도적으로 다 지배하지 못한다.
예컨대 우리의 신체적, 생리적 작용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용하며 우리가 무의식 상태일 때도 계속 작용한다.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의 사물은 인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작용하며 자기의 목적을 추구한다.
(3) 그러므로 결론은 초월적인 이성의 원리, 초월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목적원리의 존재를 주장한다.
{결국 이런 질서자는 가능태를 일체 배제하는 순수현실유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능태는 그 자체 현실태에 질서지어진 것이며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더 고차적인 질서자의 영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성적 질서자는 그 본성상 지성 자체이며, 신적 지성, 즉 신 자신인 것이다.}
{이 다섯 번째 길은 네 번째 길과 마찬가지로 어떤 지성적인 최고의 존재자의 실존에 관한 증명이기도 하다. 자신의 화살을 표적으로 향하고 있는 궁수의 예는 동물 세계에서 발견되는 본능의 현상에 견주어 본다면 오히려 허약한 예인 것으로 보인다. -
어떤 특정 종류의 새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자기 새끼들의 생존과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서 똑같은 재료를 사용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보금자리를 짓는다. 어떤 동물들은 겨울의 혹독함을 견디기 위해서 동면을 하는 데 반해, 다른 동물들은 따뜻한 곳으로 이동을 한다.
이 본능적 행동 유형들 역시 피조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관장하기도 하는 지성을 갖춘 최고의 존재자가 의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도넬 52>
{이 논거는 다음과 같은 중세의 공리에 아주 잘 요약되어 있다. -
즉 “자연의 작품은 지성의 작품이다.”(Opus naturae est opus intelligentiae) 그 뿌리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이슬람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두고 있는 이 말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말은 플라톤의 추종자에게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와 히브리 인들,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게도 타당하다.3)} <와이355, n.60>
토마스의 "다섯 가지 길"의 공통적인 논증 구조
{각각의 증명이 형식상으로 다른 것과 구별되지만, 각 결과(=우주)의 특수한 측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유사한다. 모든 결과는, 그것이 총체적으로 해명될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궁극적 해명, 즉 신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와이 353>
(SdGB 119-125)
{기본 구조는 귀납적인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전제들>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정한 본성을 지니 사물들 R1,R2,R3 운동, 우연성(생성, 소멸), 완전성의 많고 적음, 자연적인 목적성 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근접원인들 CA1, CA2, CA3 등과 연결시킨다.
<소전제>들은 이러한 원인들이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고 "제1"의 본래적인 원인에 대해서 選言적인 대당관계에 놓여있는 "제2"원인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이 제2원인들이 무한히 <계속되는 계열>로 연장 될 수 없다는 논증이 삽입된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에는 결국 제1원인이 제거되게 되고 이에 따라서 다른 모든 것들도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외는 넷째 길의 증명으로서 제2 원인을 통한 중간 단계가 생략되어 있다.)
이 제2원인들은 제1원인의 힘에 의해서 작용하고 있고, 자신은 제1원인의 결과로서 드러내며, 귀납적인 논증의 틀에서 매개사로 나타나다.
결론은 세상사물들과 제1원인의 필연적인 관련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러한 제1원인의 존재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세상사물 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물들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물들이 종속되어 있는 제1원인도 또한 존재해야만 한다.
II R --- ca
[ca1,2,3 무한으로의 소급]
I ca ---
CA
III R --- CA
연결선(---)은 원인적인 종속성을 의미하고 있고 꺾기 괄호 [ ] 는 그 가능성이 배제되는 선언적인 대당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즉 제2원인들로 無限소급이 불가능하다는 논증을 통한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의해야한다.
신존재 증명의 소전제에 도입된 원인 개념 다양한 관점에서 운동인, 능동인, 존재인 그리고 목적인 등 은 설령 그것이 제1원인을 내포적으로는 함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제1원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명시적으로는 이것이 귀납적인 논증의 구조 안에서만, 즉 종속적인, 제2원인의 선언적인 대당의 관계에서만 드러난다.
그래서 항상 <소전제들>은 제2원인들과 제1원인 사이에 선언적인 관계를 도입하고 있다: 움직여지고 움직이는 원인과 제1의, 무조건적인 원인 사이에, 자연속에 내재하고 있는 목적인과 형이상학적인 제1원인사이에. (부분적으로는 논증과정안에서 다른, 특수한 선언관계가 도입되었다.)
제1원인은 제2원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고 그것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대당관계에 서있다.
다섯가지 길에 대한 평가
{토마스는 이 다섯 증명들 중에서 제일 첫째 것을 보다 더 명백한 방도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런 단정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기본적인 증명은 실제적으로 셋째 증명 즉 셋째 방도인 우연성으로부터 한 증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럴 것이 첫째 증명에 있어서는 우연성으로부터의 논증이 운동과 변화라는 특수한 사실에 적용된 것이고,
▷ 둘째 증명에서는 인과성의 질서 즉 인과적 산출에 적용된 것이고,
▷ 넷째 증명에서는 완전성의 정도에 적용된 것이고,
▷ 그리고 다섯째 증명에서는 궁극적 목적성에, 즉 우주적 질서를 달성하는 마당의 무기적 대상들의 협동에 적용된 것이다.
{이 세 번째 길이야말로 실제로 신의 실존에 관한 근본적 증명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움직여진 존재자들’ 또는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들’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당연히 우연적 존재자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길 과 다섯 번째 길에서 성 토마스는 ‘완전성의 등급’과 ‘지성을 갖추고 있지 않은 자연 물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분명 이것들도 역시 우연적 존재자들이다.} <오도넬 50>
그런데 우연성 자체로부터의 논증은 모든 사물이 그것의 충족이유 즉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이유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변화나 운동은 그 충족이유를 부동의 원동자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 그리고 제2차적인 원인들과 결과들의 계열은 그 충족이유를 아무런 원인도 안가진 원인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고,
▷ 제한된 완전성은 그 충족이유를 절대적인 완전성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 끝으로 자연 속의 궁극목적과 질서는 그 충족이유를 한 예지, 즉 설계자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Coplestone 1962, 345~6)
여기에 다섯 가지 충족이유에 해당하는 '부동의 원동자' '무원인의 원인' 즉 '제1원인', '절대적 완전성'을 지닌 '최고완전자', '예지적 설계자'인 '최고지성'은 우연유의 충족이유인 '필연유' 즉 '필연적 존재'와 동일한 것이니 이런 것은 바로 유일한 신을 여러모로 밝히는 '다섯 가지 길' 즉 다섯 가지 방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