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 方 新 報
명리인상학 박사과정 안성재
이미 동방대학원은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하여 자랑스러운 학교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이미 다른 대학원(大學院)에서 석사학위(碩士學位)를 받으신 분들이 곧 문을 두드릴것으로 예측(豫測)해본다. 저 역시 입소문을 통하여 동방대학원의 소식을 접했고 명리인상학(命理人相學)이라는 국내 유일(唯一)의 박사과정(博士課程)이 생겨 너무나 반가왔고 꼭 전공(專攻)을 해 보고 싶은 분야이기도 하였다. 모든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될수가 없지만 오리엔테이션을 통하여 교수(敎授)님들의 말씀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 그중에 한 말씀이 대학원의 별은 결국 나 자신이 받는 학위가 나의 가치(價値)를 인정(認定)할수 밖에 없다는 말씀에 매우 동감(動感)을 갖게 되였다. 지금 동방대학원을 비롯하여 공주대, 원광대, 대전대, 경기대, 국제대학원에서 많은 석사(碩士)학위자들이 명리분야(命理分野)에서 배출되고 있다는 것에 관심(觀心)을 기울여야 할것이라 보며 동방대학원에서 이들 학교와의 경쟁(競爭)에서 결코 뒤지지 않기 위하여 나 자신이 더욱 노력을 해야할 것이며 그 뒤에는 학교의 명예를 빛내줄 든든한 후원자이신 교수님들이 열정(熱情)과 노하우를 가지고 지도를 해 주신다는것에 감사(感謝)함을 드리며 자부심(自負心)을 갖게 되었다.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면 논문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를 경험(經驗)을 해보아서 그런지 이제 1학기 과정인데도 논문(論文)에 대한 걱정으로 다반사이다.
지나간 시절 석사논문을 쓰면서 지도(指導)교수님의 말씀에 잠시 나를 돌아본다. 명리학(命理學)의 논문은 역사(歷史)를 바꾸어 나가는데 일조를 해야 할 사명감과 긍지를 갖고 논문에 임해야 하며 훗날 나의 논문이 상대(相對)의 비판대상이나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다시 한번 각인(刻印)되며 동방대학원의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할것이며 전공하려는 인상학에 대한 이론적(理論的) 배경(背景)에 대해 기록하고자 하였다.
관상학(觀相學)은 인간 신체의 여러 모양새를 관찰하여 분석하고 생긴 모양뿐만 아니라 목소리나 움직임까지 연구하는 동양철학적 관점으로 인성(人性)과 운명(運命)까지도 추론하는 학문이며 더 나아가 인상과 마음의 상호작용(相互作用)을 강조(强調)하고 있다. 관상학은 달마상법(達磨相法)과 마의상법(麻衣相法)으로 크게 나누어 볼수 있고 남북조시대에 남인도에서 달마가 중국으로 들어와 선종(禪宗)을 일으켜 달마상법이 후세에 전해져 내려왔고 마의상법은 송나라를 기준하여 마의도사로부터 내려와 오늘날 관상학의 틀을 잡았다 할수 있다. 관상학의 최초 인물로서는 동주(東周)시대 숙복(叔服)이란 분이 제일 먼저 상학(相學)을 터득하였다고 전해진다. 좌전(左傳)에 보면 그는 문공(文公)원년(元年)에 내사직(內史職)을 맡은 학자로서 노국(魯國) 재상 공손오(公孫敖)의 아들 형제의 상을 보았던 바 후일(後日) 상이 그대로 적중하였음으로 이때부터 관상학의 연구가 사방으로 전파되어 상학(相學)의 대가들이 배출되게 되었다. 명나라때 상학(相學)의 대가(大家)인 원유장(遠柳莊)선생도 자신이 저술한 인상부(人象賦)에서 “긴요하다. 사람을 관상(觀相)하는 학술이 있음이여! 동주(東周)의 숙복(叔服)에서 비롯함이라...)[ 綮相人之有術兮 , 綮東周之叔服 ]라고 숙복을 존경하는 뜻을 표명했다고 한다. 숙복의 뒤를 이어 계승한 분이 주실(周室)의 고관이었던 고포자경(古布子卿)이란 분이며 그는 공자(孔子)의 상(相)을 보고 적중한데서 더욱 유명해졌다고 전해져온다. 고포자경이 공자의 상을 보고 말하길 ⌜둥근 코와 넓은 이마와 맑은 눈동자와 양각(兩角)이 향상(向上)한 넓은 큰입 모습은 가히 성인(聖人)이 나심을 알겠도다...⌟[日準月角河目海口可知聖人之誕]라고 하였다. 초나라때 당거(唐擧)가 기색(氣色)까지도 보는 법을 연혁(演繹)한 학설로 발전시켰으며 골상(骨相)법과 기색(氣色)법을 사용하며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운명을 상황에 따라 세밀하게 파악하여 학설로 성립되었다고 한다.
진(秦)이 망하고 한(漢)나라 한고조(漢高祖)때 유방(劉邦) 황제(皇帝)는 관상가의 도움으로 천자(天子)가 되었다. 유방은 일찍이 한낱 사상정장(泗上亭長)의 노릇을 하며 술과 풍류(風流)로 세월을 보내온 탕아(蕩兒)였으나 관상가 여공(呂公)이 그의 관상을 보고 ⌜左般七十二痣而貴有天下 隆準龍眼日月之表 可謂帝王之相⌟, 그대의 相이 왼쪽 다리에 흑지가 72개가 있으니 귀(貴)를 천하(天下)에 둘것이요, 높고 풍만한 코와 빛나는 눈 모습이 일월의 표상인지라 가히 제왕의 상(相)이라 하며 자기의 딸을 시켜 성실하게 내조하라 권하며 결혼을 시켰던바 여공의 말과 행동에 느낀바 있어 그 후부터 큰 뜻을 품고 나라의 어지러움을 한탄하고 군인에 우두머리로 항우(項羽)를 정복(征服)하고 마침내 황제가 되었으니 한(漢)나라 400년의 터전을 닦은 분이다. 다음으로 허부(許負), 겸도(鉗徒), 동방삭(東方朔), 관로(管輅) 등이 유명하며 수경(水鏡) 선생께서는 유현덕 (劉玄德)을 보고 천하의 평정을 위하여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찾게 한데서 더욱 유명하다. 남북조시대 인도(印度)에서는 달마조사(達麻祖師)가 중국에 와 상법(相法)을 이용하여 불교를 전파시키는 방편으로 삼았다. 그 후 이것을 자세하게 전한것이 오늘날의 달마상법(達麻相法)이라 한다. 이때부터 선가(仙家)와 불가(佛家)의 술어 명칭이 좀 다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여동빈(呂洞賓), 장일행선사(張一行禪師) 등이 큰 활약을 하였고 그 뒤를 이어 마의선인(麻衣仙人)이 相法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고 한다. 마의선인(麻衣仙人)은 화산석실(華山石室)속에 살면서 한 겨울에도 늘 삼베(麻衣)옷을 입었다고 하여 사람들이 마의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의선인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 진도남(陳圖南)이 당시에 촉망받는 인물로 부각이 되었고 이를 알게된 송(宋)나라 태종황제가 진도남을 불렀는데 진도남은 남루한 야복(野服)차림으로 황제를 뵙게 되었고 황제는 진도남의 꾸밈없는 인품과 높은 학문을 존경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라는 벼슬을 하사하였으나 진도남(陳圖南)은 이를 사양하게 되니 태종은 그의 뜻이 너무도 초연하여 호(號)를 ⌜희이(希夷)⌟라고 사(賜)하였다고 한다. 희이란 뜻은 원래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있는 말로써 ⌜보아도 보이지 않음을 말하여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음을 말하여 희(希)라 한다⌟. 진도남을 가리켜 희이선생(希夷先生)이라 칭한 것은 그의 인격이 고달(高達)하고 학문이 심원(深遠)하여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상(象)을 보고 귀에 들리지 않는 무성(無聲)의 음(音)을 듣는다는 의미로써 절세에 드문 현사(賢士)라는 칭호(稱號)가 그의 인품에 전해졌다 한다. 특히 희이선생이 상법에 대해 세상에 발표하니 이 책이 바로 마의상법(麻衣相法)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관상학의 중시조(中始祖)라 할수 있다. 다음으로 원(元)나라 때에는 태조황제(太祖皇帝)의 국사(國師)인 벽안도사(碧眼道士)가 유명하였고 명(明)나라 때에 유장(柳庄)[본명:원충철]이 이 시대에 명성을 떨쳤으며 오늘날까지 유장 관상법이 전래되고 있다.
청(淸)나라에 와서 많은 관상학서(觀相學書)가 저술되어 일반대중에게 보급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관상학 인물로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왕사(王師)였던 도선국사는 풍수지리뿐만 아니라 관상학에도 정통하셔서 수많은 인재를 예언(豫言)하였고 궁예의 책사 “종간”이란 승려도 관상학의 대가였던 사실이 야사(野史)를 통해 전해 내려온다. 조선조 태조 대왕의 왕사(王師)로 있던 무학대사는 이성계(李成桂)가 아직 임금이 되기전 그의 상(相)을 보고 장래에 군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명종(明宗)때 관상감 벼슬을 지낸 남사고(南師古) 호: 격암(格庵)는 선조가 왕위에 오를 것을 미리 예언하셨고 임진왜란이 닥칠것을 예언하신 분이다. 세조때 명신 한명희(韓明會)의 상을 영통사(靈通寺)의 도승(道僧)이 보고 장래에 재상에 오를 것이라 예언한 것이 적중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사고(南師古)를 위시하여 이천년(李千年), 이토정(李土亭),정북창(鄭北昌) 등이 뛰어난 명상가였다.
근세에 와서는 故 지창용(池昌龍)을 위시하여 배상철(裵相哲), 강남월(姜南月), 최운학(崔蕓鶴), 신기원등이 저명한 관상가들이다. 이와 같이 동양의 관상학이 전해져 오고 서양의 문화권에서도 인상학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인상학(Physiognomik)이란 그리스어의 자연(Physis). 그리고 생각,의지(gonome)의 합성어(合成語)로 외모의 구성, 특히 얼굴의 모습을 그 사람의 심성(心性)과 연결해 연구하는 과학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일상생활에서 형성된 정신적 심리적 상태가 외부로 나타난 모습을 근거로 개인의 성격(性格), 체질(體質), 건강(健康)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추론하는 학문이라 할수 있다. 여기서 인상( Physiognomie)이란 넓은 의미로는 인간, 동물, 식물, 토지나 지역의 특성이 외부로 나타나는 모습이며 좁은 의미로는 얼굴의 표현(表現)과 형태(形態) 그리고 영적본질(靈的本質)과 성격의 거울로서의 표정(表情)을 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사람들은 점(占)법이나 관상(觀相)술 등을 통해 그 운명을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받아 들였으며 만학(萬學)의 아버지인 고대(古代)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상학 관련서를 집필(執筆)했으며 사람과 동물을 비교해 보는 물형(物形)법이 나와 있었으며 본격적으로 인상을 활용한 이는 히포크라테스였다고 한다. 그는 얼굴과 체상으로 질병(疾病)을 진단했으니 서구 최초의 인상학자라 할만하다. 사람이 살면서 첫눈에 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별로이지만 볼수록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를 가리켜 “초두효과”와 “빈발효과”라 일컫는다. 초두효과란 대부분의 경우 먼저 제시된 정보가 나중에 들어온 정보보다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하고 그 중에서도 말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빈발효과는 첫 인상이 좋지 않게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반복해서 제시되는 행동이나 태도(態度)가 첫인상과 달리 진지하고 솔직(率直)하게 되면 점차 좋은 인상으로 바꿔지는 것을 말한다. 즉 자꾸 볼수록 인상이 달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시작이 미약하지만 끝이 창대할수 있도록 초두효과와 빈발효과를 충분히 활용하는 나 자신이 되도록 고군분투(孤軍奮鬪)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