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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
경상북도 북부 내륙에 자리한 奉化郡은 동쪽은 울진군, 서쪽은 영주시, 남쪽은 안동시,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 삼척시 태백시와 닿아 있다.
지세를 보면 북쪽은 태백산(1567m) - 구룡산(1346m) - 도래기재 - 옥돌봉(1242m) - 선달산(1236m) 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분수령이, 동북쪽은 면산(1245m) - 석개재 - 묘봉(1168m) - 삿갓재(1119m)로
이어지는 낙동정맥 분수령이 솟아 있다.
태백 금대봉 너덜샘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봉화군의 동부를 남서류 하면서 지류인 '석포리천' '광비천'
'재산천' 등을 합친다.
해발 1000m가 넘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산줄기가 솟아 있어 남한에서도 손꼽히는 산악지역이다.
따라서 오래 전 부터 교통이 불편했고, 아직도 오지가 많이 남아 있다.
한편 내성천은 봉화군의 서부를 남서류 하면서 유역에 약간의 평야를 형성한다.
봉화지역은 원래 고구려의 '고사마현'이었다.
후에 신라에 편입되고, 757년(경덕왕16) '옥마현'으로 개명됐다.
고려초에 '봉화현'으로 개명됐고, 1018년(현종9) 안동부의 속현이 됐다.
1390년(공양왕2) 감무가 설치되어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1413년(조선태종3) 현감이
임명됐고, 1457년(세조3) 문수산 동쪽 지역을 할양받아 縣勢가 증강됐다.
1895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봉화군이 안동군이 되어 안동부에 속했고, 다음해에 13도제의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에 속했다.
1906년 안동군의 재산, 소천, 춘양, 내성 등 4개면 영주군의 임지면, 순흥군의 와단면을 편입했고,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9개면으로 정리됐다.
1956년 내성면이 봉화면으로 개명된 이래 몇 차례의 행정관할구역이 조정이 있었고, 1979년 봉화면이
읍으로 승격됐다.
1983년 소천면과 울진군 서면의 일부 지역으로서 '석포면'을 창설했다.
1읍 9면 72개리로 되어 있다. 인구는 4만명 정도다.
봉화군은 산악지대로 경지면적은 전체의 약12%에 불과하다.
농경지의 2/3가 밭이라 쌀 생산은 적은편이고, 조, 옥수수, 콩, 감자등이 많이 생산된다.
광산 자원이 풍부해 석포면 대현리에 국내 제1의 납과 아연광의 광산이 있고, 소천면 분천리 에는
국내 최고 품질의 텅스텐광이 있다.
1월 평균기온은 -4.8도, 8월 평균기온은 26.1도, 연강수량은 988mm정도다
*명호강
낙동강의 최상류다. 태백의 금대봉 너덜샘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줄기는 발원 연못인 황지에서 숨을
고른 뒤 구문소를 빠져나와 가느다랗게 흐르다 영남 땅으로 들어선다.
이어 태백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해 열목어를 키우는 백천동계곡의 대현천을 받아 들인다.
석포, 승부를 지나 험한 산을 휘돌면서 광회리에선 낙동정맥 통고산(1067m) 에서 발원한 광비천을
받아 들이고 소천에서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현동천을 받아들여 몸을 불린다.
두개의 소수력발전소를 거쳐 명호의 이나리 강변에선,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오롯이 춘양을 적시고
흘러온 법전천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강의 체면을 갖춘다.
이후 청량산을 휘돌아 아름다운 경치를 빚으면서 안동의 도산에서 안동호로 흘러든다.
명호의 이나리 강변을 중심으로 그 상하류는 명호강이라고도 부른다.
*내성천
낙동강의 지류인 乃城川은 백두대간의 봉화군 물야면 선달산(1236) 남쪽 기슭에서 발원해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하기 까지 101.8km를 흐르는 강이다.
물야면을 지나 오면서 남류하다가 신흥가계천이란 이름을 얻어 봉화읍 중앙을 관류하면서 봉화읍을
중심으로 한 봉화군 서부의 젖줄 역할을 한다. 오전약수, 계서당, 쌍벽당, 만회고택과 봉화유기장,
닭실마을 등 봉화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 대부분이 내성천 수계에 속한다.
*청량산
낙동정맥의 통고산(1067m) 남쪽에서 갈라져 나온 淸凉山(870m) 은 높이는 비록 900m가 안되지만
깍아지른 암봉과 낙동강 최상류인 명호강이 한데 어울려 한폭의 산수화 처럼 아름다운 산이다.
산 속에는 27개의 암자터가 있고,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유리보전'과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청량정사'가 있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 이라 이름 짓고 벼슬후 이 산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내 청량사 위 吾山堂이 그러한 장소다.
조선조 주세붕은 기행문<청량산록>에서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청량산이다' 며 청량산의 기품을 표현했다.
또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이 있고, 김생이 10년간 글공부 하던 김생굴엔 9년 공부한후
하산하던 김생에게 부족함을 일깨워줘 10년을 채워 공부하게 만들었던 청량봉녀의 전설이 있다.
청량산에서 글씨를 연습하여 입신의 경지에 도달한 김생의 글씨는 명실공히 당대의 제1인자 였다.
그가 쓴 불경 40여 권은 청량산 '연대사'의 불당 내에 보존되고 있었으나 어느 때인가 없어지고 말았다.
또 남쪽의 축융봉엔 공민왕이 1361년에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쌓은 청량산성과 공민왕이 은신한
공민왕당 등 많은 역사적 유적지가 있다. 주민들이 매년 공민왕제를 지낸다.
청량산 봉우리는 흔히 '육육봉'이라 불리는데 이는 빼어난 12봉우리를 말하는 것으로 주세붕이 처음
붙인 것이다.
이는 최고봉으로서 '의상봉'으로도 불리는 '장인봉'을 비롯해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과 남쪽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축융봉'을
일컫는다.
이외에 풍월을 읊던 '어풍대' '치현대' '반야대' '풍혈대' '요초대' 등 12대가 있다.
*백천동 계곡 열목어 서식지
연어과에 속하는 熱目魚는 20도 이하의 차가운 물에서 사는 민물고기로 여름엔 하천 최상류의 시원한
곳에서 살고, 겨울엔 중류지역 까지도 내려와서 월동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한강 수계와 낙동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봉화 석포면 대현리 백천동 계곡의 열목어 서식지(천연기념물 제74호)은 한반도에서
열목어가 서식하는 가장 남쪽 지역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서식하는 개체수는 매우 적다. 1970년대 이후 열목어 서식이 확인 되지 않자 1986년
내린천 상류인 강원도 홍천군 내면 창촌리 일대에서 100개체를 가져와서 절반은 백천동계곡의 현불사
경내에 있는 연못에 보호하고, 나머지는 백천동 계곡에 방류했다.
봉화군 농촌지도소는 현불사 연못에 서식중인 열목어 성어 24마리로 인공부화에 성공한 치어 117마리를
1990년 백천동 계류에 방류하고, 1991년에는 백천동계곡, 반야계곡, 고선계곡에 각 1500마리씩
방류했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봉화 북지리엔 신라시대의 '한절' 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 했다고 전해진다.
1947년 부지 정리 중에 발견된 북지리의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은 원래 감실 안의 본존불로
조성된 보기 드문 신라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이다.
자연 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거대한 방 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겼다.
현재 감실의 돌벽도 무너졌고, 불상도 군데 군데 파괴되고 풍화됐지만, 부처의 위용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거의 원각상에 가깝고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겼기 때문에 위엄스러운 모습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등을 고려 할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각화사
조선시대에 태백산사고의 수호사찰 이었던 覺華寺는 686년(신라 신문왕6)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예종때 계응이 중건했고, 1926년에 달현이 중수했다.
원래는 춘양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름도 남화사 였는데, 새로 옮겨 지으면서 각화사라 부르게 됐다.
한때 800여명의 승려가 거주할 정도로 대찰이었다.
'각화사귀부'는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의
일부로 전해진다.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는 약간
파손되긴 했으나 거의 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덮여있고, 그 안마다 王 자와 卍 자를 돋을새김했다.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 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적은
감이 든다. 그러나 고려 초반의 귀중한 一例로 주목된다.
태백산 사고는 1606년(선조39)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 해왔다.
능선에 둘러싸인 경사진 지형에 남쪽으로 축대를 쌓아 실록각과 선원각을 지었다.
현재 태백산사고는 불타 없어지고 사고지만 남았다.
태백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중이다.
*청량사
청량산 열두 암봉 한가운데에 연꽃 처럼 자리잡은 淸凉寺는 663년(신라문무왕3)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설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청량산에 '연대사'라는 사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
불교의 요람을 형성했다 한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절은 피폐해졌고, 현재는 청량사와 응진전만 남아 있다.
청량사의 본전인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 제47호)은 모든 중생의 병을 다스리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다.
종이를 다져 만든 紙佛이 라는 점이 특이하다. 지금은 금칠을 했다.
전쟁때 불에 타서 폐사가 된 문수전의 문수보살과 명부전의 지장보살을 옮겨 약사여래불 좌우에 모셨다.
현판은 청량산으로 피신을 왔던 공민왕의 친필이라 한다.
금탑봉 중간 절벽 아래에 있는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암자다.
유리보전에 비해 화려하지도 섬세하지도 못하지만 금탑봉과 잘 어우러진다.
또 남쪽의 축융봉을 바라보는 전망이 좋다.
*축서사
백두대간 지맥인 문수산(1205m) 중턱 해발 800m에 자리잡은 '축서사'는 의상대가 인근의 부석사
보다 3년 앞선 673년(신라문무왕13)에 창건한 사찰이다.
1705년(숙종31)에 작성된 법당의 상량문에 의하면 절 앞에 '광명루' 라는 큰 누각이 있었으며,
법당등이 15채 였다고 한다.
축서와 대웅전 8각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석불좌상(보물 제995호)은 9세기경인 신라 하대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좌상 중 하나다.
동화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 각연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등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으로서 당시의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불상은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기에 조성 됐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신라 후기 불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불신 높이 108cm, 어개넓이 55cm, 머리높이 31cm, 대좌높이 96cm,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상, 중, 하대의
대좌는 온전하게 남아있고, 나무 광배는 조선시대에 짜 넣은것이다.
*오전약수
물야면 오전리에 있는 悟田藥水는 조선 성종 때 어느 보부상이 발견했다고 전한다.
백두대간 박달령에서 발원한 계곡 암반에서 솟아나는 오전약수는 백두대간 분수령에 둘러싸여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공기와 물이 맑고 깨끗하다.
조선시대 물맛이 가장 뛰어난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최고의 약수로 뽑혔다고 한다.
조선 중종때(1542년) 풍기 군수를 지낸 '주세붕'이 오전약수를 마시고 '이약수는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며 물맛을 칭송했다.
약수터 바위벽에는 주세붕이 쓴 휘호가 남아 있다.
사이다 처럼 혀끝을 톡 쏘는 맛이 일품인 오전약수는 신경통, 신경허약증, 고혈압, 위장병과 피부병에
큰 효험이 있다고 한다.
성분은 유리탄산과 마그네슘, 칼슘이온, 망간, 염소등이 함유된 탄산수다.
수량도 많고, 주변 시설도 잘되어 있다.
*다덕약수
봉화와 울진을 연결하는 국도 36번 도로변에 위치한 다덕약수탕은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 하여 '덕이 많은 약수'라 하여 다덕약수로 불리게 됐다.
*두내약수
오전약수 에서 915번 지방도를 타고 주실령을 넘으면서 4~5km 쯤 달리면 문수산 북서쪽 계곡에서
솟는 두내약수탕이 나온다.
봉화 3대 탄산수의 하나인 두내약수 역시 피부병과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두내약수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한적한 편이다.
오전약수와 마찬가지로 백두대간 분수령 가까운 곳에서 솟기 때문에 주변의 산세는 수려하고
공기와 물도 맑다.
약수가 처음 발견된지는 오래 됐는데, 나병환자들이 많이 찾아들자 마을 사람들이 약수를 묻어
버리고 수십년간 잊혀져 왔다.
그러다 1982년 당시 심한 가뭄으로 주민들이 구전되어 내려오던 약수를 찾아 나서게 됐고,
오랜 세월 파묻혀 있던 두내약수를 발견했다.
*권충재 유적지
봉화읍 유곡리 닭실 마을의 권충재 유적지(사적및명승 제3호)는 조선 중종때의 문신 '충재 권벌'
(1478-1548)의 세거지다.
안동 출신 충재는 1507년(중종2)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있던중, 1520년(중종15)에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와서 농토를 마련하고, 14년간 후진을 양성하며 '경학'에 몰두했다.
1533년(중종28)에 복직했으나 을사사화로 다시 파직되고, 그후 전라도 구례, 평안도 삭주로 유배됐다가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청암정'은 충재가 은거하여 도학연구에 몰두하며 장자인 '청암 권동보'와 함께 거북바위에 건립한
정자로서, 건축양식이 뛰아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정자 둘레로 계곡에서 끌어들인 물이 흐르고, 밖으론 나무 울타리가 쳐 있으며, 동, 남, 북쪽으로
3개의 문이 있다.
묵은 느티나무가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마당 한쪽에는 세칸 규모의 '충재'라는 서재가 있다.
청암정을 처음 지을때에는 온돌방으로 했는데 그 온돌방에 불을 넣으니 바위가 울었다.
그러던 중 한 노승이 지나다가 말하기를 이는 거북등에다 불을 지르는 것이니 마루방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마루방을 만들었는데 아직도 온돌방에 불을 땐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거북바위 둘레로 못을 만들어 거불이 편안하게 만들었다.
가뭄에 논에 물이 말라도 이 못에는 항상 물을 대었다고 한다.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응방산과 옥적봉을 지나면서 유곡옥수와 합쳐져 유곡에 이르면 시원한
계곡을 풀어놓는데, 바로 石泉이다.
계곡폭이 넓고 평평하여 넙적한 바위가 자리를 깔아놓은듯 계곡 곳곳에 흩어져 있다
솔숲이 웅찰하면서도 주변 산세가 부드럽다.
청암 권동보가 이곳 반석위에 지은 '석천정'은 봉화에서 생산되던 유명한 춘양목을 재료로 사용했다.
난간에 기대어 계곡을 내려다 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충재유물전시관은 권벌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충재의 유물을 보존관리하기 위해 1989년 에 건립했다.
여기엔 충재일기, 근사록, 고문서, 유물 등 보물 487점을 소장 보관하고 있다.
충재의 수필 일기인'충재일기'(보물 제261호)는 당시 관료의 생활과 중앙정부의 일상행사가 소상히
적혀있어 중종실록을 편찬할때 자료로 채택됐다.
선조 이전의 것으로는 류희춘'마암일기' 이이의 '석담일기'와 함께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근사록'(보물 제262호)은 송나라 유학자인 엽채가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문헌을 골라서 편찬한
일종의 성리학 독본이다.
고려시대의 책이 희귀한 오늘날 비록 중국판을 본 따 만든것이라 할지라도 매두 귀중한 책이다.
충재권벌종손가소장전적(보물 제896호)184책이 있다.
전적은 1489년(성종9)에 작성된 유향계축, 1496년(연산2)에 작성된 사다방목, 1507년(연산13)의
문무잡과방목 등이다.
이들 전적은 조선 전기의 정치,사회,문화발달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닭실 마을 한과는 전국으로 유명하다. 닭실 마을의 안동권씨 종가에서 500여년 전 부터 혼례,
회갑, 제례용으로 사용되어 오던 유과, 입과, 잔과 등의 한과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주문 판매하고 있다.
*만회고택
봉화읍 해저리 오른쪽 깊숙한 곳에 뒷동산을 등지고 남향하여 있는 '만회고택'(중요민속자료 제 169호)은
조선 후기의 문신 '만회 김건수'(1790-1854)가 살던 집이다.
김건수는 1830년(순조30)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현감, 부사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ㄷ자형의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이곳에 살던 여씨에게 샀다고 전한다.
T자형의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으며 1850년(철종1)에 수리했다.
사랑채는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있다.
원래는 ㅡ 자형 중문간채가 있었으나 없어져 현재는 남쪽이 트인 상태다.
사랑채(청풍헌)는 前面柱 만 圓柱 를 사용했다. 정면 4칸중 좌측 3칸은 후면에 2칸통, 사랑방과 사랑마루
1칸을 배설하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배치하며 기둥 밖으로 헌함을 설치했다.
우측 1칸은 후면에 뒤쪽으로 길게 칸 반 크기의 온돌방을 배설하고, 그뒤에 반 칸 크기의 감실방을 두었다
전면쪽은 樓 마루를 돌출시키고 외부쪽 3면벽을 板璧으로 꾸며 두짝열개 울거미널문을 각각 설치해
마루방처럼 꾸몄으며 3면 판벽의 바깥쪽으로는 쪽마루를 뽑아서 헌함을 돌렸다.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뒤쪽에 각각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경북지방
ㅁ자식의 古式 평면배치법이 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청 뒷벽의 兩開 널문이 미닫이로 되어있는 점도 흔치않는 예다.
*쌍벽당
봉화읍 거촌리 雙碧堂(중요민속자료 제170호)은 '쌍벽당 김언구'의 부친인 '습독공 김균'이 풍산의
구담으로 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터전을 잡으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별당에 걸려있는 '쌍벽당 중수기' 의하면 1566년(명종21)에 안채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1864년(고종1)에 남쪽 날개 3칸을 고쳤으며, 1892년에도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지금 쌍벽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별당은 이때 건축된 것이다.
높지 않은 뒷산을 배경으로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어서
행랑채가 낮은 자리에 있고 위에 안채의 몸채가 월등히 높게 지어져 있다.
다른 지방의 ㅁ자형 날개집에서 볼수있는 살림집에 속하는데, 안채의 몸채가 유난히 과장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행랑채에 우뚝 솟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에 달린 사랑방이 마주 보인다.
사랑방은 남쪽의 날개 3칸에 해당되는 부분이며, 쌍벽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이곳이 남자들의
거처였다.
중문채와 사랑채가 맞닿는 부분에 중문이 있는데, 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넓은 대청이 있다.
넓은 대청을 육간대청이라 하는데, 안채 몸채의 특징에 해당된다.
안채의 동쪽 사랑채보다 뒷쪽에 별당인 쌍벽당이 있고, 그 뒤쪽에는 사각형으로 담을 쌓아서
사당을 세웠다.
조선 전기에 지은 집으로 추측되며 후에 2차에 걸쳐 수리했으나 , 평면과 구조의 중요부는 비교적
옛날의 제도를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시대 주택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계서당
물야면 가평리 소나무숲이 우거진 동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溪西堂(중요민속자료 제171호)은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1595-1664)이 1613년(광해군5)에 지었다고 전한다.
계서는 1627년(인조5)에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4차례나 어사에
등용됐다. 뿐만 아니라 사생활과 마음이 아울러 검소하여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사랑채는 후에 넓히거나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쪽 마당 끝에 대문간채를 두고 그 북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형 집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맞은편 높은 곳 서쪽에 중문간채가 있다.
동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사랑채 서쪽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또한 동북쪽에 따로 담장을 둘러 사당을 배치했다. 이곳의 안채와 사랑채는 다른곳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도장방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사랑방은 대부분 홑집으로 구성되는데, 이집은 겹집으로 만들어
안채의 날개집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안채 부분은 얀간 변형됐지만, 경북 북부 지방 ㅁ자 민가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주택
발달사 좋은 자료가 된다.
[성이성은 춘향전 주인공인 이도령의 실존 모델이라는 사실이 최근 연구 결과 밝혀졌다]
*봉화 별미
- 봉성 소나무 숯불구이
- 약수탕 닭백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