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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계리 계촌 주민들이 무더위를 피해 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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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엔 평계리는 평촌이 전부인양 생각하기 쉽다. 평계리의 평촌은 마을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반면에 계촌은 오솔길로 조금 더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에 여간 흥미를 느끼지 않거나 고향이 아니고서야 그 골짜기까지 들어갈리 만무하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보면 계촌의 존재가 보인다. 아마 ‘시내 계’를 써서 계촌인가 싶다.
시냇가를 중심으로 길쭉하게 형성된 마을이 계촌이다. 계촌은 세닷말, 양지말, 꺼깟말, 살구정이, 공촌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닷말과 양지말은 그 마을의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집터는 대나무로 울창하게 뒤덮었고, 콩이나 깨 등 밭작물이 심어졌던 그 흔적만 대충 짐작할 뿐이다. 집이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는 집조차도 식물들의 생명력에 배겨나지 못한다. 아무 말 없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대나무와 넝쿨식물들은 사람이 떠난 집을 삼켜버린다.
계촌의 남아있는 마을 중 공촌과 꺼깟말을 찾았다. 살구정이 마을은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 공촌과 꺼깟말은 지척의 거리를 두고 붙어 있다. 공촌은 그 이름에서 짐작했듯이 대부분 공씨들이 살고 있다.
곡부 공씨. 아시아의 성현이라 일컫는 공자의 자손들이다. 임진왜란 때 공자의 자손인 공원구(당시 종2품 가선대부 벼슬) 조상이 평계리에 뿌리를 내린 후, 지금까지 이어내려 온 것이 공촌 마을의 유래이다. 지금 이장을 맡고 있는 공창식(51) 이장은 바로 공자의 79세손. 그는 2월, 8월에 옥천향교에서 열리는 석전대제에 공자님의 후손을 대표해 꼭 참석한다.
공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공자님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태생적 자부심과 함께 공촌 사람들이 자랑하는 역사는 또 하나 있다. 바로 이 마을 출신 독립투사인 공재익씨다.
◆공촌의 자랑, 독립투사 공재익 그는 이원면 3.1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고, 갖은 고문 등으로 인해 끝내 숨지고 말았다. 의로운 뜻을 품고 기꺼이 나라의 독립을 목놓아 외쳤던 공재익 투사의 집에는 현재 며느리 배정술(72)씨만 살고 있다. 배정술씨의 집에 낡은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명패가 옛날 공재익 독립투사의 흔적을 증명해준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시아버님이 3년간 옥살이를 하셨어요.”
시집오기 전에 이미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시아버님의 얘기는 남편에게서 들은 게 전부이다.
“남편이 4년 남짓 시아버님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으려고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몰라요.”
그녀가 보물처럼 간직하는 꼬깃꼬깃한 종이뭉치를 꺼낸다. 바로 공재익 독립투사의 3.1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흔적을 찾아 헤맨 배정술씨의 남편은 이미 16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갔다. 공창식 이장은 공자의 후손인 곡부공씨 자손들이 공자의 뜻을 받들어 나라에 충의하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고 자랑한다.
◆공촌, 꺼깟말 사람들 공촌과 꺼깟말은 모두 합해서 11가구 30여 명 정도가 산다. 공촌에 9가구 정도가 살고, 꺼깟말에 2가구가 산다. 시냇가 맨 끝에 공창식 이장을 필두로 공상용(85)씨, 공웅근(54)씨, 공영용(80)씨, 배정술(72)씨, 공영조(73)씨, 공문표(38)씨, 공영철(50)씨 등이 살고 진복주(78)씨는 본 마을과 조금 떨어진 소류지 위에 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
공촌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꺼깟말. 꺼깟말에는 공영태(50)씨와 천도성(49)씨가 살고 있다. 공문표씨의 경우, 부천에서 87년도까지 기계를 제작하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일찌감치 고향에 내려왔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그는 고향이 너무 좋아 눌러 앉은 경우다. 지금 공촌 마을에 29평짜리 새집을 한창 짓고 있는 공문표씨는 고향에서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
“도시 사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고향을 지키고 산다는 것에도 자부심을 느끼고요.”
일은 고되지만, 아내 손정애씨와 병석(이원중3)이와 정현(대성초6)이와 4식구 오손도손 사는 것이 너무 재미있나 보다. 이처럼 공촌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하면 30대와 40대, 50대 등이 주축을 이루며 마을을 젊게 이끌고 있다. 여타 시골마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학생들도 중학생 3명, 초등학생 1명 정도로 많은 편이다.
◆공촌의 자랑, 두 개의 돌장승 평계리에는 평촌과 계촌에 각각 마을을 수호하는 암수 돌장승 한 쌍씩이 있었다. 하지만, 평촌의 돌장승이 진입로 확포장 공사로 인해 모두 사라진 반면에 계촌의 돌장승은 아직 마을 어귀를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옛날 공촌마을 진입로(지금은 평촌마을을 거쳐 가는 새로 포장된 길이 공촌마을 진입로)에 그 위용을 자랑하는 돌장승은 세월이 가는 것에 아랑곳 않고 마을을 수호하고 있었다. 그 돌장승은 바로 평계리 선돌. 20여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윗부분을 뾰족하게 다듬은 것이 1호 선돌인 숫선돌이며 윗부분이 타원형으로 손질한 것이 2호 선돌이자 암선돌이다.
이 부부선돌은 지금도 주민들로부터 숭배를 받고 있는데 예전에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을 전후한 깨끗한 날을 받아 제사를 지내곤 했다. 이 제사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것으로 공촌마을 뒷산인 마니산에 옛부터 `산지당'을 설치해 지내 왔으나 현재는 마니산 중턱의 산제 소나무(山祭松)에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는 사람을 선정, 1주일 동안 정결케 한 후 제사를 지낸다. 새벽 1∼2시께 시작하는 이 제사는 산제를 마치고 4∼5시께 마을로 내려와 먼저 숫선돌 앞에 짚을 깔고 간단한 제물로 제를 지낸 다음 암선돌에도 지낸다.
제단까지 마련되어 있는 암선돌은 현재 바위옷이 자라 돌 전체를 감싸 안아 한층 더 멋들어진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독립투사 공재익이 참여한 이원면 3.1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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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투사 공재익씨의 며느리 배정숙씨가 시아버지의 독립운동한 내용을 펼쳐보이고 있다. |
| 고종황제의 국상에 참여하고자 1919년 3월초 이원면 수묵리에 사는 육창주, 허상기, 김용이씨 등이 함께 서울에 가서 국상행사에 참여하고 독립만세 시위에도 참가한 뒤에 돌아왔다. 따라서 이원면 독립만세 운동은 수묵리 사람들이 주동하게 된다.
세 분은 빨리 고향에 가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자는 각오를 굳게 하였고, 이 세분은 그해 3월15일 육창주 댁에 모여서 태극기도 만들고 격문도 쓰며,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실제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한 분들은 육창주, 허상기, 김용이씨 외에도 허상구, 허상준, 공재익, 조이남, 이김봉, 이호녕 지사들이었다. 이분들을 우리 옥천에서는 `독립만세 구현(9명의 어질고 위대한 어른이라는뜻)'이라 일컫게 되었다.
3월27일 이원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수묵리를 출발한 애국지사들은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나누어주면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니 장터는 물론 이원면이 발칵 뒤집혔다. 이날 장에 모인 약 3백 명의 군중이 합세하여 오후 1시경 이원주재소(파출소)로 몰려가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당시 주재소에는 일본 헌병이 있었지만 중과부적이어서 옥천헌병대와 연락하여 완전무장한 헌병 20명이 말을 타고 구듬티 고개를 급히 넘어서 이원장터로 달려오게 되었다. 이때 총으로 대항하는 일본 헌병들에게 쫓긴 군중들은 다시 주재소에서 장터로 몰려와 만세를 다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원주재소 주임 기시모토는 주동애국지사 육창주, 허상기씨 등을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를 본 김용이, 허양, 이면호(후에 옥사), 허상구, 허찬 지사등이 주동하여 다시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에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이들 마저 감금시켜버리자 군중들이 다시 격분하여 주재소 앞에 있는 보안등과 현관 벽, 담장 등을 부수고 투석전을 벌였고 육창주, 허상기 지사등이 이틈을 이용하여 탈출, 또다시 군중의 앞에 서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이원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던 애국지사들은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형기를 다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애국지사들은 옥고에 시달려서 생긴 병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돌아가셨다. 이분들의 독립정신을 빛내고자 `기미 3.1독립기념비'를 이원역 광장(이원면 강청리 신흥)에 지난 1958년 8월15일 당시 제2대 이원면민회 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건립하여 전해오고 있다. |
·인터뷰 … 평계리 공창식 이장· 제일 끝 마을이라 서러움 많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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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창식 이장 |
| 그는 6년째 평계리 이장을 보고 있다. 공촌을 비롯해 평계리 전체 마을 사람들이 그에 대한 신망이 높다. 그런 만큼 어떻게든 마을을 위해 일을 할까 고민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는 친절하게도 일일이 가가호호 안내해주면서 마을의 유래와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을 이장으로서 마을이 안고 있는 민원에 대해서도 요목조목 일목 요연 하게 잘 짚어서 얘기했다. 아마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의 결집이리라.
“마을 회관이 너무 낡았어요. 마을 주민들은 평계리가 옥천 제일 남쪽 끄트머리에 있어 괄세 받는다고 한 마디씩 해요. 많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죠. 그리고 마을 진입로도 큰 문제에요. 평계리를 포함해서 공촌이나 대밭말도 진입로가 많이 좁거든요. 복개공사를 해서 조금더 넓혔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또, 평계리가 산하고 바로 인접해 있다 보니까 멧돼지 등이 출몰해서 애써 농사지어놓은 고구마, 복숭아 등을 다 갉아먹거든요. 이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는 영동군과 옥천군의 경계마을로서 군에서도 주민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촌계와 계촌계로 나뉘어 따로 따로 모임을 갖는 평계리의 단합을 위해 3년 전 평촌과 계촌의 젊은 출향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하나가 되는 상조계를 만들어 1천만원의 기금을 마련해 마을을 위해 쓰려고 하고 있다.
“평계리 출신 출향인들이 애향심이 강해요. 출향인들과 같이 마을을 다시 일으켜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장이 뛰고 있으니 마을 그림도 조만간 많이 달라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