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 장자의 "중생과 부처가 서로 같다"는 이론은, 요컨데 마음을 관찰하여 도에 들어가는 이로 하여금, 항상 자기의 몸과 말과 뜻과 또 모든 행위들은 다 여래의 몸과 말과 뜻과 행위들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실체와 자성(自性)이 없어서 본래 둘이 아니고, 본바탕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법계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나 본성상 조건들에 의존하여 일어난다. 따라서 다양한 조건들로부터 일어난 성질들의 출현은 전적으로 본성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본성은 그 자체가 법계인지라 안도 바깥도 중간도 없다(* 여래는 법계를 몸으로 한다-관무량수경). 우리는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부처와 중생은 본래 근본보광명지의 본성의 바다[性海]에서 허깨비처럼 출현한 것(*일체중생은 성해무풍 금파자용-보리방편문)이라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중생의 모습과 작용에 차별이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근본보광명지의 모습과 작용[相用]인 것(*무수중생의 무상제행은 미타의 일대행상-보리방편문)이다. 그러므로 본래는 한 가지의 바탕[同體]이지만 일으키는 작용은 다종다양하니, 이것은 성기문(性起門 : 색은 공의 여여상-금타화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합한다는 논의가 보인다. 즉 이미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노사나불이 중생의 생멸하는 팔식(八識)안에 있고, 중생도 부처의 지혜 안에 존재한다(*나는 이미 부처의 몸안에 들어와 있고, 내 마음안에는 부처가 있다-종경록). 이것은 원리와 다르지 않은 하나의 현상이 원리의 본성에 완전히 포섭되면, 그 원리와 다르지 않은 많은 현상들이 또한 하나의 원리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원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는 그 몸은 다르지만[體別] 원리가 보편적으로 편재(遍在)되어 있으므로, 그 다른 몸들이 마치 인드라망의 보석들이 그 몸은 다르지만 영상과 영상들이 서로 어울려 비치는 것처럼 드러난다. 이것은 사사융섭(事事融攝)의 연기문에 해당한다.
*보조전서 P 73 / 지눌연구, 보조선과 한국불교 /심재룡
첫댓글 보리방편문을 공부하며 금타스님 청화선사의 법을 공부하는 인연에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