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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종교-신도 90%이상, 불교80%, 기독교 1%미만
한국-무종교 56.1, 민족종교1미만,
기독27(개신교 19,7 카토릭7.9), 불교 15.5정도 2016.12.21 통계청 인구조사 한국 종교 30101^http://cafe.daum.net/aspire7/9z5w/35912?q=2015%EB%85%84%20%ED%95%9C%EA%B5%AD%20%EC%A2%85%EA%B5%90%EC%9D%B8%20%ED%86%B5%EA%B3%84^230GlmZAx4oWJ2dBly^cafe^article^2015%EB%85%84%20%ED%95%9C%EA%B5%AD%20%EC%A2%85%EA%B5%90%EC%9D%B8%20%ED%86%B5%EA%B3%84^230GlmZAx4oWJ2dBly^*
30103^http://cafe.daum.net/aspire7/9z5w/35912?q=2015%EB%85%84%20%ED%95%9C%EA%B5%AD%20%EC%A2%85%EA%B5%90%EC%9D%B8%20%ED%86%B5%EA%B3%84^230GlmZAx4oWJ2dBly^cafe^folder^2015%EB%85%84%20%ED%95%9C%EA%B5%AD%20%EC%A2%85%EA%B5%90%EC%9D%B8%20%ED%86%B5%EA%B3%84^23LR6SVLCFqk-_tYM0^* 30102^^230GlmZAx4oWJ2dBly^cafe^cafe^2015%EB%85%84%20%ED%95%9C%EA%B5%AD%20%EC%A2%85%EA%B5%90%EC%9D%B8%20%ED%86%B5%EA%B3%84^13x3FyxlybCW69reF2^* 30203^http://cafe.daum.net/aspire7/9z5w/35912?q=2015%EB%85%84%20%ED%95%9C%EA%B5%AD%20%EC%A2%85%EA%B5%90%EC%9D%B8%20%ED%86%B5%EA%B3%84^230GlmZAx4oWJ2dBly^cafe^user^2015%EB%85%84%20%ED%95%9C%EA%B5%AD%20%EC%A2%85%EA%B5%90%EC%9D%B8%20%ED%86%B5%EA%B3%84^9aPnn^*
몇 년전 아시아 5개국 기독교 신자수는 ?
1. 한국 : 25% 인구 4900만명 중에 1천 2백 25만명.
2. 일본 : 0.4% 인구 1억 3천만명 중에 52만명.
3. 중국 : 5% 인구 13억중에 6천 5백만명.
4. 인도네시아 : 6% 인구 2억3천명 중 1천3백 80만명.
5. 필리핀 : 9% 인구 1억3천만명 중 9백27만명.
------------------앞으로 종교인들은? 유럽 교회성당이 술집,옷집 등으로 변환되는 이유를 타산지석으로---------
참고기사
"한국" 천주교의 신도는 얼마나 한국적인가?
成 稔 (서강대 철학과 교수)
I. 한국 천주교의 로마-가톨릭적 면모
1.1 우선 부제(副題)의 첫 단어에 둘러쳐진 인용부호가 필자를 적이 당혹하게 만든다. "한국" 천주교라면 단지 한국땅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만도 아닐 것이고(교황대사관과 미국대사관도 한국땅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교회라는 말만도 아닐 것이며("하느님은 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내실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정신과 얼에서 국적을 가진 교회를 뜻하리라. 또 이 부호는 한국 천주교회가 민족의 문제를 고뇌하고 민족의 문제에 투신함으로써 민족의 교회로 자리매김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담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한국천주교를 구성하는 신도들이 과연 얼마나 한국적인지를 묻는 물음은 사회학적 분석이 선행되지 않는 지경에서는 당초 이 글이 필자의 단편적 경험을 토대로 하는 산문이 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1.2 한국교회가 얼마나 로마-가톨릭적이냐면 일반인들은 명동 성당의 건축양식부터 시작해서 미사 중에 구사되는 일체의 용어와 의례와 성가, 수녀들의 복색, 성직자들의 서구적 언행(레오 13세 이래의 방인성직자 로마 교육 정책이 다시 복귀되어 70년대 중반기부터는 한국 학자층 성직자 대다수가 로마에서 지적 양성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창씨개명을 연상시키는 세례명을 받고서 자랑스러워하는 신도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가톨릭이라는 아름다운 신학적 표현을 모르는 국민들은 한국천주교 200주년 행사와 로마 주교 방한을 혼동했을지도 모른다(손님이 가버리자 모처럼 열렸던 사목회의와 그 의안은 없었던 일처럼 되고 말았다). 국제성체대회가 열려도 텔리비젼 화면은 로마주교 손에 들린 보일락말락한 빵보다는 38선 너머를 향해 호소하는 폴란드의 다부진 반공성직자 모습을 클로즈업시켰으니까. 로마 교회의 사절이 한국 사제단의 민족문제 걱정이라던가 신도들의 자발적 사회참여 활동을 시비하고(한국 주교들이 그 시비를 묵살한 것은 경의롭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유치원생"이라고 조롱하고서도(신도 교수들의 항의가 있기는 했다.)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귀환하는 모습도 목격하였다. 한국 정부가 북핵 문제를 전적으로 미국의 주도권에 넘기고만 사실을 탄식하는 지식인들은 한국 주교단이 진보인사들의 방북은 비난한 대신에 북한 교회와의 대화를 교황청의 주선에 의뢰한 일을 놀라워하리라.[1]
1.3 어느 교회가 로마-가톨릭적일수록 그곳 성직계가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일 것이라는 비약적 추정이 가능하다. 비판적인 지성인들의 눈에 로마 주교는 전세계 교회에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교구장들은 로마 주교를 본따서 교구내에서 사법, 입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사제들은 교구장을 본따서 사목구 내에서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공의회야 사제들을 주교들의 보조인 정도로 격하시켰다지만 신도들의 눈에는 사도들의 후계자는 엄연히 사제들이고 주교들은 견진성사 때나 얼굴을 보는 감독관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문화권에, 주술신앙에 종교 캬스트 개념까지 첨가되면 성직자들은 신도들에게서 극진한 공경을 받게 마련이다.[2]
이처럼 로마-가톨릭적이라는 점에서 한국적인 교회라면, 서구 교회식의 민주주의를 거기서 기대하기는 힘들리라. 모든 의사결정 구조는 특정 계층의 소수에 집중되어 있고 주교 개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다.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이 민주화를 통해 조직을 합리화해나가는데 천주교 교계와 운영은 왕권신수설을 연상시킨다. 신도 단체를 포함해서 아직도 교회의 중요한 직책은 선출 방식이 아니라 임명하는 방식을 따른다. 권위가 밑으로부터 올라 오지 않으니까 신도들의 복종도 자발적이지 못하고, 교회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니까 교회 밖에 나가서도 사회 영역에 책임지지 않는다.
여기서 필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신도들의 본연의 자리를 매김함으로써 소모적인 "교회 민주화" 논쟁을 극복케 해 주었다고 본다(II).
1.4 로마 제국과 서구 봉건제후국 분위기에서 2천년간 다져진 성직계가 20세기에 와서야 공의회가 신도들에게 부여한 기본권을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하리라. 한국에서 1968년부터 시작된 신도들의 협의체에 대한 우여곡절의 역사가 이를 방증한다. 평신도협의회,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대학생회 같은 신도운동들은 정치적 입장을 사실상의 이유로 주교회의에 의해서 몇차례나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된다. 신도들의 교회내 활동과 발언은 성직자들의 행정상의 편의와 보조적 역할로 머무는 한에서는 용납되지만, 만약 교계의 권위나 견애에 상충된다고 보이면 본당 사목회는 해산되고 교구단체는 정지되고 전국단체는 중단된다. 그런데다가 신도 단체들마저 교계를 닮았는지 소수 신도들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식의 구조를 보이는 일이많다.
필자는 전국평협 같은 단체에서 신도들의 언행이 담대해질 경우에 주교단을 위시한 교계가 보여온 대응을 회고하면서 그 신도관을 깨닫게 되었다(III).
1.5 천주교가 한국 사회의 역사적 고뇌를 방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정말 로마-가톨릭적이다. 그동안 일부 성직자와 신자들의 사회참여가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일은, 마치 일제시대에는 안중근 의사에게 임종시의 고백성사마저 금지하고서는 80년이 지나서는 조선천주교가 안중근을 통해서 항일운동에 가담했노라고 자랑하는 셈이다.
지난 9월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 20주년 행사를 치른 사실에서 보듯이 과거 20여년간 교회 일부가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해 오기는 했지만 한국천주교 전반에 흐르는 성속이원론이나 정교분리론으로 말미암아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다. 일부 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한용희 회장 시기의 전국평협, 유현석-이돈명 변호사 중심의 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농민회, 가톨릭 노동운동단체들과 명동청년회를 위시한 청년단체들이 국가권력에 저항하여 인권을 옹호하고 민주화를 위해 싸우기는 했지만 그싸움은 한국천주교 전체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보수화된 평협을 떠난 이들은 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을 구성하였고, 노동운동자들은 노동사목전국협의회를, 빈민운동가들은 천주교도시빈민협의회를, 청년단체들은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를 따로 결성하여 자발적인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종교자유만 보장되면, 교회의 권위나 재산(지학순 주교와 문화방송 지분)을 손대지 않는다면, 정치권력과의 갈등을 가급적 회피해온 것이 교계의기본자세였다.[3]
필자는 그 까닭을 물으면서 감상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영성을 지향하도록 교육받는 신도들이 윤리도덕 분야에 매우 피동적이고 둔감하다는 통계적 수치를 몇 가지 환기시키고자 한다(IV). 그리고 이 문제에 상응한 대안은 역시 신도들 스스로 세속이라는 자기 영역에 성숙하고 책임있게 투신케하는 영성의 함양이 아닌가 한다(V).
II. <평신도 그리스도인>과 신도들의 제자리
2.1 신도들의 신원과 역할을 규정하는 책들과[4] 논문들은[5] 상당히 많지만 신도들이 자기 신원과 교회내 위치를 확인하는데 가장 분명한 전거는 역시 요한 바오로 2세의 88년도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이 문서(9항)는 우선 신도들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 "신품과 교회에서 인정된 수도신분에 속하는 이들을 빼고 그나머지"(31항)라고 하던 불쾌한 정의를 다시 쓰기는 했지만 "교회와 그 신비에 대한 신도의 완전한 소속"과 더불어 "신도 소명의 독특한 성격"을 강조하고자 시도한다. "신도들이 바로 교회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를 재인용하면서 문서는 신도들을 피라밋 위계의 맨밑바닥에 두지도 않고 그리스도 신비체의 맨바깥에다 두지도 않고 "교회 생활의 제일선"에 위치시켰다.
2.2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교회관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의 백성" 대신 제 1차 바티칸의 "그리스도의 신비체" 관념("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으로 후퇴했다고 서운할 것은 없다. 또 한 분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그 밑에 사는 "백성"이라는 봉건적 신학용어가 주권재민(主權在民)을 뜻하는 근대 사회학 개념("국민")으로 이해되면서 지난 30년간 교회내 제기되어 온 민주(民主)화 운동을 두고 고민해오던 교황이, 신도들한테 보따리를 들려서 신도들의 "고유한 자리"라면서 세속으로 내보냈다고 하여 슬퍼할 것도 없다. 필자는 공의회가 명기한 신도의 세속성을 되찾아준 것이야말로 현교황이 신도들에게 베풀어준 제일 고마운 공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15항). "세속은 신도들이 자신의 그리스도인 소명을 성취하는 자리가 되고 그 수단이 된다." 말씀의 육화를 신학적 명분으로 하는만큼, 또 "세상 자체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도록 운명지워져 있고 신도들은 (성직자나 수도자와는 달리) 세속 안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를 포기하지 않고서 그 속에 있으면서 누룩과도 같이 내부로부터 세계 성화에 이바지 하는만큼" 신도의 신분은 참으로 긍지를 가질 만하고, 그 사도직은 신도가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은 수행할 수 없는"(평신도 교령, 13항) 떳떳한 역할이라고 본다.[6]
2.3 교황의 문서(18-31항)는 신도들이 접하는 유일한 교회공동체인 본당에 대해서도 신도들이 자기 고유 영역을 위해서 문제들을 연구하고 충전하는 "동네샘"으로 규정해 줌으로써 감상적 신심과 이기적 열성으로 성당의 울타리에서 서성거리거나 성직자들과 자리다툼을 하지 말도록 타이르고 있다. 속된 표현을 쓴다면 사내가 집안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밥먹었으면 "밖으로 나가라!"는 가르침이 이 문서의 근본취지요 교회사에서 신도들을 참으로 어른 대접한 최초의 선언처럼 필자에게는 들렸다. 틈나면 집뒤안곁에 있는 채마밭에서 소일할 수도 있지만 원래 장정의 일터는 들녘의 논밭이 아니겠느냐는가르침이다. 교회 안살림일랑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맡기고 가장답게 밖앝 활동을 하라는 가르침이다(36-44항).
따라서 제도적인 교회 공동체는 신도들의 본격적인 활동 영역은 아니다! 종래의 "사도직 단체"와 신도들의 본래 "사도직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사도직 단체들은 본당 안에 있으나 신도사도직의 본영역은 세속에 있다. 신도들은 교회에 왔다가 세속으로 돌아가서 세속에 "자리잡고" 교회 "밖에서" 활동한다. 교회생활은 신도들의 "참여" 영역이고 사회생활은 "책임" 영역이다. 복음선포는 그 책임 영역에서 직간접적 결과물로서 간주될 따름이다.
III. 신도운동에 대한 한국교계의 시각: 역사적 사례
3.1 역사적으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은 신도들이 박해하는 조정에 맞서서 전개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산물이었다. 국왕들의 무수한 조칙과 가혹한 박해 속에서 온갖 형벌과 죽음을 무릅쓰면서도 국법과 조정에 불복종한 신도운동의 맥이 한 세기를 이어졌다. 필자는 교회나 사회에 중대한 현안문제를 내걸고 성경말씀이나 공의회 및 로마교회의 문서들을 인용하면서 이론적으로 풀어나가는 일이 부질없음을 느끼기 시작한지 오래다.[7] 당사자들이 그 이론적인 배경과 문헌들은 모르는 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 신도들의 본연의 위치와 교회생활에 대한 책임있는 참여에 관해서도 "평신도의 날 담화문" 같은 공문서들이 많지만, 문제는 한국인 신도들의 한국적 처신에 대한 이론의 부재가 아니라 공의회 이래의 신도신학 이론들을 구현되게 하려는 교계의 자세이다. 필자는 70년대 이후 필자가 (평신도 협의회를 중심으로) 경험했던 신도운동 과정에서 신도들의 독자적이고 책임있는 행동방식이 나타날 때마다 교계를 구성하는 이들의 권위주의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회고함으로써 (신학적 교회론적 성찰도 아니고 제도적 교회법적인 검토도 아닌) 영성적 성찰을 유도하고자 한다. 교도권이 권력이냐 봉사냐는 미사여구로 판별되는 것이 아니고 그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태가 발생할 때에 대응하는 자세에서 정체가 드러나는 것 같다. 나무는 잎이 아니라 열매로 안다고 하였다.
3.2 한국교회에서 신도들의 활동이 전국적 차원에서 다시 결성된 것은 1968년(7월23일 대전 대흥동성당), 그야말로 한국교회사 발원 18여년만이었다. 68년에 <한국 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라는 명칭의 신도단체가 결성되어(초대 회장 류홍렬)동년 주교회의에서 인준을 받았고 70년에는 <정의평화위원회>가 또한 결성되었다. 현석호, 양한모, 유현석, 이돈명으로 이어지는 실질상의 신도운동과 병행하여, 류홍렬(1968-72), 김기철(1974-80), 한용희(1986-88)로 맥을 잇는 조직상의 신도운동이 활달하게 전개되는 출발이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촉구를 받아 신도들이 교회내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인 활동에 착수하자마자 성직자들로부터 반발이 나타났고 특히 서울대교구에서 평협 해체론이 대두되었다. 명분상으로는 교구사목위원회와 평협의 공존이 장애가 된다는 이유가 제기되었지만 결국 71년부터 74년초까지의 서울 평협 휴면상태, 72년 전국평협 총회에 서울 평협이 참가를 못하여 이에 따른 전국평협의 활동 약화가 초래되었다.[8]
1974년 김기철 전국 평협 3대 회장의 체제가 출발한 다음, 신도들이 공의회 가르침대로 사회적 의무를 자각하여 미약하나마 유신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한 교회단체들의 관심과 항거운동이 일기 시작하자, 주교들 편에서 제 1차 "전국기구 해체론"이 나왔다. 78년(1.6)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돌연히 전국평협, 가톨릭농민회, 가톨릭 노동청년회, 꾸르실료협의회, 가톨릭 대학생회 등 신도들이 사회적 역량을 발휘할 만하고 실제 발휘하던 단체들을 "전국기구중심이 아닌 교구 단위로 환원, 전국기구로서의 명칭과 운영방법을 폐지한다"는 의안이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결연하고 적절하게 전국평협이 긴급 상임위를 개최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전국평협 총재주교가 해체안에 반대하였으며, 전국평협 임시총회(78.2.5)가 <건의문>을 채택하자 이 해체안은 주교회 상정이 보류되었다.
3.3 1982년 친여 보수인사가 전국평협 회장에 뽑히고 전국평협과 서울평협이 4년간 이분화되는 현상을 빚다가 86년 시대적 흐름의 요청에 따라 한용희 교수가 6대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신도운동은 다시 궤도에 들어섰다. 이러한 궤도수정에는 현석호 선생과 김수창 신부의 간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협 20년사>가 "현실참여와 시련"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기간은 신도들이 대외적으로는 <KBS-TV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86.4.12 마산 상임위 결의)을 비롯한 현실참여에 투신하고 대내적으로는 명실상부하게 전국 신도를 대표하는 기구로서의 평협 위상을 정립하려고 노력하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평협담당주교는 취임 제일성부터 평협의 "협의체로서의 성격을 강조"하여 신도들의 현실 참여 활동을 저지시키고자 시도하였고 한용희 회장은 "협의체로서의 성격만이 아닌 전국 신도를 대표하는 기구로서의 위상 정립, 활동에 있어서는 자율성, 과감한 현실참여"를 추진하였다. "이같은 경향은 교회내에서 환영과 함께 거부반응도 불러일으켜 급기야는 활동을 중지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고 평해진다.[9] <KBS-TV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만 해도 이 결의를 승인한 담당주교가 정부인사의 내방을 받은 후 갑자기 이 운동의 중단을 요청하여 평협 상임위의 거부를 초래하는 등 교계와 신도들의 갈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평협은 주교회의에 건의문을 내어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의 실천을 촉구하고" 신도들의 전국기구마다 담당주교가 있는 만큼 이 단체들을 망라하는 전국평협의 총재는 "주교회의 의장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으로 담당 주교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명하였다.[10] 더군다나 대구의 정기총회(87.2.14-18)에서 행한 양한모 선생의 교계비판은, 200년 교회사에서 신도들로부터 건설적 비판까지도 받아 본 적이 없던 교계의 격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주교회의(87.3.23-27)로부터는 곧 반응이 왔다. 전국평협과 가톨릭농민회가 "새로운 회칙이 마련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지당하였다. 오원춘 사건 이래로 군부독재와의 투쟁에 선봉을 서온 가톨릭 농민회는 비신자가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해서 "가톨릭 농민회의 회칙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다."는 조처를 받았고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새로운 회칙이 주교회의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각교구 평협만 활동을 계속한다."는 결정을 받았다. 평협에 이러한 조처를 취할 만한 법률적 명분은 제시되지 않았으며 사전의 대화는 전무하였으므로 신도들에게는 주교단의 조처가 정치적 판단이요 신도사도직에 대한 교계의 제동으로 비쳐졌다. 더군다나 주교회의 사무처는 이 결정에 대한 <보도자료>까지 돌려 가톨릭농민회와 평협에 대한 이미지 손상을 시도하였고 그 뜻을 받아 정부관보 <서울신문>이 "주교회의 결정은 온당하다"는 신학적 사설(87.4.10)을 실어 사태를 더욱 희화화하였다.
"근간 평협이 너무 중앙집권적 사고방식으로 흐르기에 묵과할 수 없어" 제재를 가 하였노라는 담당주교의 해명(87.9.5)은 계몽된 신도들을 설득시키는데 실패하였다. 담당주교가 친히 작성하여 하사한 평협회칙(87.6.25)은 "총회의 결의 없이 회칙을 만든 것은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신도들에 의해서 거부되었고, 평협의 초안(87.8.19)에 다시 사정없이 손질을 가한 초안(87.9.5)이 주교회의에 상정되어 주교회의(87.11.16-18)는 "4년 시한부 회칙"이라는 것을 내렸다.
3.4 그동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평협의 성명서 및 대정부 투쟁은 보수 성직계와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고, 한국천주교 주교단의 시국과 선거에 관한 담화문(87.11.9)에 대하여 평협이 발표한 <한국천주교 평신도에게 드리는 호소문>(87.12.17)은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교계의 의사표현과는 다른 신도들의 의사표시였다. [11]
신도들은 주교단이 만들어준 회칙을 정면으로 거부하고서 1984년의 회칙을 고수하기로 결의하여 200년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신도들의 주교단에 대한 "불복종" 사태가 발생하였다.[12] 가장 성숙하였다고 평하지는 못할망정 한국 교회사에서 신도들이 자기 의사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해 본 시점이었다.
아울러 70년부터 활동해온 <정의평화위원회>는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문창준, 유현석, 이돈명 등 탁월한 재야법조인들을 회장(담당 두교가 있었음)으로 천주교에서 국민의 인권수호에 훌륭한 보루 역할을 해 오던 중이었다. 그러나 같은 무렵인 87년 가을 주교회의는 정평위의 정관을 개정하여 위원장 주교가 책임지고 총무신부를 두어 신도 법조인들의 적극적 활동을 봉쇄하고 "정평위의 유명무실화"를 얻어냈다.
3.5 한편 86년 김종민 교수의 효성여대 해임을 계기로 대구의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던 진보적 신도들(변호사, 교수, 문필가, 재야인사) 60여명이 성명서를 내어, "유신교구"의 평을 들을 정도로 정권과 유착된 양상을 보인다면서 성직자들의 권위주의를 비판했고, 사제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재임한 교회법 위반여부를 물었으며, 교회운영의 대구 매일신문의 편향적 입장이나 효성여대의 운영방식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팔공산 골프장과 성직자의 연루라는 구체사안까지 규명하도록 촉구까지하였다. 신도들이 교구의 행정과 정치적 입장을 정면으로 공박한 사건이었다.
그 논란과 시비 과정은 차치하고 결과적으로 교구의 진보적 신도운동과 그 지도자들은 교회 공조직으로부터 대부분 배제되고 그 결속이 해체되었다! 청년연합회와 대학생연합회는 활동을 정지했으며, 사건의 발단인 인사는 대구교구 가톨릭 교수들의 모임에서 제명당하다시피 하였고, <가톨릭신학원> 야간부는 "혁명교육"을 시킨다는 루머에 시달리다 신학원 원장의 교체, 신도 교육과정이던 야간부 폐쇄라는 결과를 빚었다.
3.6 1994년 7월과 8월은 한국천주교 한 성직자가 한국 언론의 각광을 독점하는, 한국 교회사의 가장 화려한 시기였다. 예수회 박홍신부가 서강대학교 총장의 자격으로 한 주사파 발언이 북핵문제과 김일성 주석 사망을 계기로 수구세력의 반개혁 반통일 총력전에 어느 정도 활용되었느냐는 역사가 평할 문제이다. 문제는 그 엄청난 발언들이 있을 때마다 본인과 보수언론들이 "증거를 갖고 있다!"는 선언으로 발언의 신빙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달 후 검찰의 조사결과(94.8.19)는 구체적 증거는 없고 그의 발언은 "고해성사 등에서 들은 것"이라는 발표였고 서울방송 뉴스에서는 <고해성사에서 들은 것>이라는 자막까지 나갔다. 이에 놀란 일부 진보적 신도들은 이튿날 국회의원 이원형씨의 기자회견까지 있자 "박홍신부는 고백성사의 비밀을 간접누설한 혐의가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고발장을 서울대교구장에게 제출하였다(8.25). 서울대교구는 사무처장 명의로 그 고발 행위가 "박홍 총장에게 고해비밀 누설혐의를 씌우는 행위요... 고해성사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성명서(8.30)를 발표하고 고발장에 대한 공식 답변은 거절하였다. 고발한 신도들이 소수이기 때문에 고백성사 간접누설이 무혐의요, 박홍 신부가 8월 18일과 19일에 고백성사를 운운하여 고발된 사건임에도 8월 20일과 25일 본인이 부인했기 때문에 무혐의라는 기막한 법리가 답변의 골자였다.
3.8 이상의 역사적 사례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교회관은 천상교회에서 나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신학적 형용일 따름이요, 순례중인 지상교회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로마 교황(敎皇)과 주교(主敎)들이 전권을 행사하는 피라밑 사회를 연상할지도 모른다.
근본문제는 "인간에 대한 신뢰"이리라.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지도적 평신도들에 대해서 교계는 일종의 소모품으로 간주하지 교회를 구성하는 인자로서는 취급을 않는 듯하다.[13] 성직자라는 캬스트로서는 신도가 연로한 변호사이든 대학의 총학장이든 상관없이 그 누구의 의견도 동등한 신앙인의 견해로 존중하여 진솔한 대화를 갖고 합리적인지를 헤아려보기가 그토록 힘든가 보다. 교회의 품 안에서 이토록 멸시받는 신도들에게 교회내에서든 사회에서든 품위있고 책임있는 처신을 요구함은 무리가 아닌가한다. 교회내에서도 성직이라는 캬스트의 방어적 태도와 결국 지도적인 지성인 신도들의 냉소적 무관심("내가 무엇이 아쉬워서?")만 초래되고 교회 구성원들의 상호존중을 기대하지 못한다.[14]
IV. 한국 신도들의 윤리의식과 감성적 영성
4.1 신앙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가치관이 무종교인에 비해서 월등하리라는 선입견 내지 기대는 어느 종교집단이든 가질 만한 긍지이다. 그러나 이 기대와는 무관하게 83년도의 갤럽조사연구는 "한국인의 종교는 健康敎이다"라는 결론을 내는데서 그치고 말았다.[15]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가치관의 물음에 전체국민은 "건강"(19.8%), "유복하게 잘사는 것"(16.7%), "성실한 삶"(13.1%), "사랑과 믿음" (12.5%) 순으로 답을 내놓았고, 건강이 인생의 관심사로 표시한 사람들이 천주교도들은 48% (불교 62%, 개신교 40%)에 이르렀다.[16] 어느 학자는 이 결과를 분석하면서
비종교인, 종교인을 막론하고 세속적 가치관(건강, 돈, 잘사는 것)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였으며, 이념적 가치, 사랑, 믿음은 18-24세에서 최고치를 나타내지만 그것을 최고치로 보는 층은 10%에 불과하므로 "한국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적어도 종교성향에 있어서 드두러진 차이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국인 모두가 현세중심적 건강종교다." 라고 준엄한 평을 내린다.[17]
4.2 위의 83년도 갤럽조사연구에서 종교가 자선사업을 하는 데는 절대찬성(95.4%)이지만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관한 활동을 하는데 대해서 한국의 종교인들은 69.1%(천주교 신자는 63.4%)가 반대하고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근로자, 농민의 집단행위에 종교인이나 종교단체가 지원하는 것은 어떤가?"라는 질의에 대하여 한국의 종교인(천주교 신자 동일)들은 88.7%가 반대(약간 반대 12.8%, 아주 반대 75.9%)하는 입장을 표했다. 80년대의 혹독한 독재하에서도 천주교를 위시한 종교들의 일반 기능은 신도들이 건강하고 잘살고, 덧붙여 약간의 자선을 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얻으면서
민족과 세계의 운명을 외면하고 살아가게 해주는 신경안정제로 파악되고 있었다.
남북문제에서 정부의 기만적이고 미지근한 통일노력에 대해 사제층은 15.3%만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49.8%가 부정적 평가를 내린데 비해서(92년 2월) 신도들은 31.9%가 긍정적 평가, 27.3%가 부정적 평가를 내림으로써(91년 6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사제들보다 현실에 어둡고 보수적임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회의식은 연령 아닌 교육에 따른 사고방식에 있음이 밝혀졌다. 젊은이들 역시 종교단체나 세대와 상관없이 보수적이었으므로 "젊은이의 과격성은 종교단체에 대한 태도에서 여타 세대와 아무런 차이가 없이 보수적 경향을 드러내며, 오히려 젊은 세대만 두드러지게 종교의 사회적 참여에 열성적이라는 시사는 근거없다!"는 결론이 나왔다.[18] 중요한 것은 갤럽의 조사가 내린 "근대화 성향에 관해서 종교의 있고 없음이나 종교에 따른 별다른 차이없다. 종교 차이도 아니고 세대차이도 아니고 오로지 교육 유무에 달려 있다."는 결론이다. 1987년 가톨릭신문사 사회조사에서도 천주교신자들이 교회의 장점으로 꼽은 것 중에 첫째는 "소외되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활동"(22.1%)이었고 "사회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한 노력과 투쟁"(6.0%)은 맨끝이었다.[19]
4.3 신앙과 삶이 신도들에게서 어떻게 융합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다른 예가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의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조사>(1992년도)였다.[20]
이 연구에 의하면 현대에 만연된 "생명경시 풍조의 가장 큰 이유"를 묻는 물음에 천주교 신자들은 그 이유가 "물질만능주의"(26.5%, 국민전체 30.7%)요 "올바른 가치관 부재"(26.5%, 전체 18.4%)요 "개인들의 도덕성 타락"(15.3%, 전체 18.2%)이요 "개인주의, 집단이기주의, 시민의식 결여"(19.3%, 전체 19.8%)라고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천주교 신자 절대대수(87.6%: 국민 전체 87.2%와 조금도 차이나지 않는다)가 이 사회의 생명경시 풍조가 종교 신앙으로 극복해야 할 도덕 영역임을 알고 있다. 그러면 신앙에 입각하여 그 풍조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신도들에게 있는가?
일년에 백만명에 가까운 태아가 살해되는 "낙태 천국" 대한민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귀하는 사람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임신되었을 때부터"라는 정답을 알고 있다(92.3%, 전체 84%보다 약간 높다). 그러면서도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71.2%: 국민 전체 78.6%, 개신교신자 76.1%, 불교신자 79.2%, 유교신자 72.7%가 낙태 찬성),
"낙태 허용에 찬성하는 이유"를 묻자 천주교신자들이 낙태는 하느님 대전에 살인을 저지르는 죄악이라기보다는 "개인 의사"(23.5%)에 달린 일이요 "가족계획"(12.3%)의 일환이요 "산모건강"(19.9%) 문제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당신의 태아가 기형아 혹은 뇌성 마비인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 고 묻자 천주교신자 80.8% (전체 85.9%)가 "떼겠다!"고 선언하였다. 사람의 생명이 출산 때부터 시작한다는 신자(16%)들로서는 "낳지 않겠다!"(87.5%)는 각오가 임신중절이라는 의료행위에서 그치겠지만,
임신되었을 때부터 사람의 생명이 시작한다는 신자들(84%)로서는 "낳지 않겠다!"(85.8%)는 각오는 곧 "살인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같은 조사에서 사형제도의 존속(26.7%)과 폐지(23.8%)가 엇비슷한데 "사형제도의 존속에 대하여 찬성하는 이유"로 천주교 신자 36.3%가, 용서라는 그리스도교 이념과는 정반대되는 딸리오 복수 개념인 "응징"을 내세웠다(전체 46.1%: 개신교 43.5, 불교 46.9%, 유교 31.6%). "사형제도의 폐지"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존중에 위배"된다는 명분이 타종교에 대해서 미약하였다(천주교 58.3%, 개신교 60.9%, 불교 68.4%, 유교 100%). 이러한 조사결과를 평하여 가톨릭신문은 "천주교 신자들의 생명존중 의식과 관련하여 어느 한 가지라도 긍정적인 부분이 없다."고 하였다.[21]
4.4 고려대학교 조무승 교수가 1988년 학위논문 <한국행정인 연구: 인간형, 형성환경, 태도의 분석>을 준비하면서 종교적 요인이 공무원의 정직성에 주는 영향을 예비조사한 결과 그 수치가 "제로!"로 나타나 종교는 아이템에 넣지 않았다는 일화는 학계에 널리퍼져 있다. 인천세무비리, 성동교 붕괴 등을 위시한 관료사회의 총체적 부정을 대면하여 많은 암시를 준다. 다른 종교들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한국 천주교는 신도의 사회적 행동 양식을 좌우하거나 사회적 양심과 윤리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결론이 예측된다.[22]
V. 신도의 영성신학
5.1 필자의 판단에 현재까지 도달해 있는 가장 진보된 신도신학은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밝혀 준 "신도의 세속성"이다. 신도들은 교회 공동체 내에 머뭇거리지 말고 자기 본연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신도들이 참으로 한국적인 신도상을 만들어내려면 신도의 대내적 위치설정에서 대외적 위치설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동네샘이라는 본당에서 복음의 물을 긷고 성찬의 음식을 먹었으면, 로마-가톨릭적인 담장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부부싸움을 그만두고 출근을 서둘러야 한다.
신도들이 자기 소명의 속세적 성격을 확인하고 책임있게 살아가는 문제는 영성신학의 분야이다. 그리고 적어도 공의회와 교황청의 시각에 따르면
신도의 고유한 영성은 성당 울타리 속의 신심에 있지 않고 자기 삶에서 신앙을 구현하는 일이다. 현재까지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감상적이고 개인구원을 위주로 하는 영성은 성속이원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세속 생활을 복음적 가치로 수행해 나가려는 노력은 고차원적 훈련과 양성을 요한다. 교회가 중산층화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학력으로 미루어 신도들이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분석의 수단으로서 사회과학을 방법론적으로 수용하고, 시대의 조류에 대해서 민감하게 대응할 이론체계에 접하며, 신앙의 원리를 실행에 옮겨 보려는 시도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직자들에 의해서 사회적 가르침에 관하여 양성을 받지 않으면,
결국 성사위주의 신앙이라는 것은 꿩먹고 알먹는 기복신앙이므로,
신도들의 영성은 현세위주에다 탈정치적 영성이 된다.
건실하고 이성적인 신앙생할을 희구하는 신도들의 요구와 그들의 열정을 뒷받침해줄 준비가 없으면
신도들은 사적환시를 둘러싼 기도회,
감상적 신심을 강조하는 피정,
방언과 치유로 소문난 성령 기도로 몰린다.
가톨릭 전통대로, 신앙과 신심을 사변적 이성과 온건한 실천으로 검증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바로잡고 사목자들의 합리적인 지도를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성령운동의 도입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경험한바이기도 하다.
그런 신심운동들 안에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는 신도들, 즉 중간지도자들의 양성에 실패하면 그만큼 신심운동이 현실도피로 기운다. 영성 지도자들은 성령운동, 꾸르실료, 레지오 같은 운동의 발원지도 고찰 범위에 넣어 그 진보와 보수를 분별해야 한다.
영성의 배후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이데올로기의 악마적 체취를 맡을줄 알아야 한다(수년전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휴거운동의 문서들에는
새로 부상하는 유럽 공동체가 [미국의 적임에 틀림없는] 악마의 화신으로 지적되어 있었다. 남미의 성령운동에는 미국 공작금이 흘러들어간다는 의혹을 사기도 하였다).
5.2 위에 예거한 단편적인 통계에 비추어 한국 신도들은 합리적 사고와 진지한 실천적 사목 없이 방치된 상태에서 개인주의적이고 감정위주의 종교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일부 성직자들은 이것을 사목(司牧) 아닌 방목(放牧)이라고 자조한다.
과연 "총체적 부패"라고 묘사되는 한국사회 속에서
신도들이 세속 질서안에서 진정 그리스도교적 영성생활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비단 강론과 교리교육, 훈화 등을 통해서 신도들의 영성을 지도하는 하는 사제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도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믿음과 삶을 분리시키는 기복적이고 감상적인 영성은
성직자들에게는 신도의 통솔을 원만하게 만들고,
신도들에게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윤리적 부담감을 피하게 해 준다.
그런데 사회적 양심으로 번민하지 않고 본당에서도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성직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듯한 신도들을 다스리기는 한결 용이하겠지만, 자기구원이라는 이기심에 집중하는 신심은 본당내 신자들의 냉담한 대인관계를 낳고,
신도들이 사제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는 사효적(=주술적) 성사집행 외에 없게 된다.
그런 신도들은 인간관계, 이웃 사랑, 현실문제에 대한 양심적 성찰과 판단은 거부한다.
신앙은 가정, 학교, 사회와 무관한 신앙으로
거기서 부딛치는 양심상의 갈등을 무마시켜주는 안심(安心) 기능에 국한되기 바란다. 중산층 이상일수록 더욱 그러하리라("나머지는 내가알아서 합니다, 신부님!") 서구사회에서, 한국 대도시의 본당에서, 특히 지성인이라는 신도들에게서 얼마든지 보는 태도이다.
5.3 사제들의 주일미사 강론이야말로 신도의 영성이 어디로 흘러가게 만드는지 알려주는 지표이다. 아무리 첨예하고 날카로운 사건과 정황(예를 들어 94년 7-8월의 박홍신부 발언)이 발생하더라도 주일미사 강론이나 신자들의 기도, 교구 주보와 레지오 마리애 훈화, 피정이나 강연에 그 일에 언급되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러면 신도들은 이사건이 신앙상으로 중요하지 않거나 신앙과는 무관하다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교회안팎에서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요!"라는 말이 보통 "신앙과는 무관하오!"라는 의미를 띤다.
선거도 투표도
각자가 알아서
각자의 출신과 정치적 선입견에 따라서 할 일이지
신앙에 입각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설혹 성직자의 발언이 나오면 오히려 사생활을 침범한다는 반발을 초래한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한국적" 신도영성은 대내적 종속으로 대외적 무책임과 영합을 조장하는 영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살 수 있다. 교회로부터 구체 현안에 대한 판단 훈련을 받지 않으면 신도들은 현실 문제에 판단유보를 배우게 된다.
5.4 그러한 타성 속에서는 엄청난 사회악이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느껴지지도 않고 그런 도전에 창조적으로 응전하려는 노력도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그러한 변화와 도전을 신앙과 결부시켜 문제시하고 사목자들과 협의하여 해결하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만큼 사제들로서는 나태하고 열악한 사목 환경이 아닐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시대에 뒤진 과거의 사목방식이 시대착오적으로 반복된다.
시대와 사회의 도전에 무감각 하면 교회내 신학의 발전도 없다.
한국 개신교에서 한국 사회에서 그 나름의 해석과 실천에 대한 반성으로 민중신학, 여성신학, 문화신학을 발전시키고 있음에 비해서
천주교 신학계에서는 아시아의 영성이나 한국인의 심성에 육화해 들어가려는 실천과 그 신학화 작업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23]
더군다나 성직자 아닌 신도들로서는 신학에 무지할 뿐더러 사회적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심함과 세속 질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국적 신학, 특히 신도신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 맨끝에 실린 교황의 기도문은 이같은 현실을 목격하는 목자의 고뇌를 담고 있다. "찬미가를 부르신 동정녀시여, 신도들이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찬미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의 책임 의식으로 세상의 현실에 대처할 수 있게 가르쳐 주시어... 기쁨에 넘치는 희망을 품게 해 주소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진리와 사랑의 문화를 지상에 건설하고 하느님 영광에 공헌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_____________ 각 주 ___________
* [1] 소소하게는, 지금은 서구 어디에도 없는 구습인,
성사표를 발부하고 회수하는 판공성사가 일년에 두세 차례 착실하게 실시된다던가,
어디서나 줄어가는 의무축일이 한국에서는 늘어난다던가,
어디서도 보기 힘든 미사포가 성당을 가득 메운다던가 하는일도 꼽을 수 있다.
* [2] 필자는 근자에 산문 형태로 필자 나름의 사제상을 그려 보았다: 성염, "비성직자가 바라보는 사제상" 가톨릭 신학과 사상 11(1994.6), 88-103.
* [3] 예를 들어 광주학살 때에 주교단의 침묵(상임위의 성명이 전부), 문규현신부의 방북이 있었을 때 주교단과 평협이 취한 태도, 공인과 비공인 시비, 교회내 진보단체들이 교회 건물에 세들어 살기가 힘들었던 차별, 금년 박홍 신부의 정치적 발언들에 대한 교계의 절대침묵(qui tacet, consentit)이 이를 방증한다.
* [4] 신도에 관한 신학적 비중을 가진 연구서들은 우리나라말로도 부족하지 않을만큼 나와 있다. 양한모, 信徒論 (가톨릭출판사, 1982); 양한모, 信徒 그 하찮은 존재인가(일선기획 1990); 양한모, 오늘을 사는 신도 (유고집, 오태순 외 엮음, 기쁜소식,1993) ; 조셉 까르댕 (정향숙 초역), 信徒들을 先頭로 (분도 1983); 이누가이 미찌꼬 (윤원호), 살아있는 돌: 신도신학 (가톨릭 1986); 모리 가즈히로 (표동자), 성직자와 수도자의 그림자 평신도? (성바오로 1991); 한스 큉 (정한교), 왜 그리스도인인가? (분도 1982); 한용희 (정년기념논문집), 敎會도 政治도 刷新되어야 한다 (경세원1992).
* [5] 신도에 관한 교회내 학술지(사목, 신학전망)의 연구논문들도 적지 않다. 신학 전망 6 (1969.12): 특집 평신도 (제 2차 바티칸과 평신도/ 평신도신학의 성서적배경/ 평신도의 사제직/ 평신도와 선교/ 평신도와 성직자의 협력); 사목 74 (1981.3):특집 平信徒의 使命 (평신도활동의 평가와 전망/ 전례와 평신도/ 강생의 신비와 평신도 신심/ 교회사를 통해서 본 평신도의 역할/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평신도상); 사목109 (1987.1) : 특집 平信徒의 召命과 使命 (87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주제/ 평신도의 사도직 소명/ 평신도 평생교육을 위한 제언/ 평신도의 영성생활/ 오늘의 신도상과 평신도의 역할); 사목 149 (1991.6), 63-74 지상토론: 본당공동체와 평신도의 위치 및 역할; 정은규, "평신도와 신학" 신학전망 11(1970.12), 59-68; 정하권, "미래교회의평신도상" 신학전망 58(1982.9), 42-55; 렌겔렝, "전례적 모임과 전례거행자인 평신도" 신학전망 75(1986.12), 39-47; 양한모, "교회 안의 평신도" 신학전망 79(1987.12), 54-67; 이제민, "평신도의 교회" 신학전망 82(1988.9), 33-44; P.린치, "평신도의 교회직무와 양성방안" 사목 167 (1992.12), 45-54.
* [6] 교회는 친절하게도 교회법전에까지도 다음과 같이 신도들의 자리를 매겨주었다. 225조 ① "평신도들은 모든 그리스도신자들처럼 세례와 견진을 통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사도직에 위임되느니 만큼, 개인으로서나 단체의 회원으로서나 하느님의 구원의 소식이 온 세상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수용되도록 노력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이 의무는 사람들이 그들 평신도들을 통해서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하다."
② "각자는 자기의 고유한 조건에 따라 현세 사물의 질서를 복음정신으로 적시고 완성시켜 특히 현세 사물을 처리하거나 세속 임무를 집행하는 중에 그리스도를 증거할 특별한 임무도 있다."
* [7] 필자는 전교조나 파티마 병원 사태 등을 지켜보면서
교회의 탁월한 사회교설이 실천에 부딛치면 허구적으로 그치기 쉬움을 지적한 바 있다. 성염, "2000년대의 교회와 사회" 사목 31(1989.12) 79-84.
* [8] 1974년 서울평협이 재건되면서 "교회행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협정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어 그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한국천주교 평협 20년사 (평협, 1988), 308면.
* [9] 평협 20년사, 214면.
* [10] "우리 전국 평협은 협의체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한국 천주
교회 신도들을 대표하는 기구입니다.... 이 건의는 결코 지금까지의 담당주교님들의 사랑과 지도를 경시해서가 아니라 제도적인 합리화를 위하여 드리는 건의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1986.8.9 부평 상임위: 건의문(평협 20년사, 216-218면).
* [11] "우리는 (주교단의) 이 담화문이 현시대적 요청을 간과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어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바입니다.
1. ...민주화에 대한 강렬한 욕구, 군정의 종식, 부정 선거의 배제 등...에 대한 언급이 추상적이고 소극적인 느낌이 듭니다.
2.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여러 해 동안 부정과 불의에 대해 침묵을 지켜 왔습니다.
3. 이번 주교단의 담화는 외견상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정의를 구현하고 민주화를 원하며 군정 종식을 바라는 국민들의 갈망을 외면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평협 20주년사, 227-228면)
* [12] "전국평협은 상임위원회[87.12.5]의 결의로써 교회의 쇄신, 교회의 현대화,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84년 주교회의가 인준한 회칙에 따라서 전국평협 활동을 계속하기로 하며 성직자, 수도자와 협력하여 평신도의 고유한 사명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87.12.7: <전국 평협 회칙에 관한 우리의 입장> (평협 20년사, 233-235면).
* [13] 가톨릭신문이나 평화신문 그리고 각교구의 주보를 보더라도, 성직자는 그 부모의 부고는 물론 환갑과 결혼기념일까지 보도되는데 비해서 본당이나 교구에서 봉사하고 활약한 신도회장이 죽어 가톨릭 언론에 언급되는 일이 있던가?
* [14] 언급하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성직자들이 신도들에게 "속는다"는 언표나 의구심이 자주 드러난다(1960년 경향신문 매각을 둘러싼 잡음이 대표적인 사건이며 서울교구의 신도 문제의 원죄처럼 내려온다).
교회 건축, 교회가 운영하는 사업, 교회 재정 등에서 일을 저지르는 미덥지 못한 신도들이 없지 않지만, 문제는 그런 인물 뒤에는 반드시 그를 천거하고 후원한 다른 성직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왜 추천자에게는 함께 돌리지 않고 "역시 별수없어..." 라고 단정하는지 의문이다. 성당 건축이나 교회기관 취직에 있어서 성직자의 추천이나 후원 없는 응찰자, 지원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
* [15] 한국갤럽사연구소, <한국인의 여론> 제 4권 (1984).
* [16] 이것은 1994년도에 21세기 위원회가 조사한 결과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를 막론하고 종교에서 기대하는 가치 순위가 "1. 건강, 2. 경제적 유복, 3. 마음의 평화, 4. 신앙적 투신"으로 나타나더라는 통계와 동일하다. [??]
* [17] 심재룡 교수, <80년대 한국청소년의 종교관: 종교성향과 근대화성향은 유관한가?> 서울대, 사회정책연구 [??]호 (1984) 25-50면.
* [18] 상게서, 48면.
* [19] 1987: 한국천주교의 장단점에 대한 한국천주교신자들의 반응 노길명-오경환, 가톨릭신문사 사회조사보고서 [2]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가톨릭신문사 1988), 109-110면. 그러나 같은 가톨릭신문 조사에서 기도회 등을 통한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상당히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찬성 75%, 반대 11.5%). 단지
성명서(찬성 71.4%)나 부정폭로(찬성 80.5%)는 괜찮으나 시국문제로 데모하는 일은 반대(59.4%)였다. 또 여성의 다수화가 교회의 보수화를 부추기는 것처럼 나타났었다
(사회참여에 대해 남성의 81.3%가 찬성함에 비해서 여성은 73.8%가 찬성한다고표명했다).
* [20] 생명문화연구소,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조사> (1993). 일부 결과는 가톨릭신문 (1993.5.9일자)에 보도되었다.
* [21] 얼마 뒤 가톨릭신문(1993.5.30)에 보도된 <보건사회연구원 전국출산력 조사보고>는 "인공임신중절을 피임실천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이 1990년도 기혼부인의 총임신중 약 37%가 인공임신중절로 종결되고 출산 100건당 68건이 인공유산으로 이뤄졌다는 통계와 더불어
"600여명의 가톨릭신자 응답자중 20%(전체 평균은 23%)가
인공유산을 피임의 일종이라고 답하였고", "인공임신중절이 모든 경우에 허용된다"고 답한 가톨릭신자가 50%(전체 평균 61%)라는 충격적인 수치를 제시하였다.
* [22] 필자가 출처를 기억 못하는 라디오 방송에 의하면, 5천명을 상대로 한 청소년 의식조사 연구(1993.5)에서 "성공이란?" "돈을 많이 버는 것!" "그 돈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맘대로, 멋있게!" "돈을 어떻게 벌겠는가?" "무슨 수단을써서라도!"라는 간결한 보고가 잊혀지지 않는다. 이런 세대에게 지존파니 야타족이니 하는 사회병리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으리라.
* [23] 필자가 번역 소개한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1977), 송천성의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1982), 피어리스의 <아시아의 해방신학>(1988)이 그 구독층이나 신학적 영향을 압도적으로 개신교에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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