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엘 비키· 랜들 패더슨의 저자에 대한 소개
토머스 굿윈은 정부의 박해에 대한 청교도들의 저항으로 유명한 지역인 노퍽의 야머스 인근의 롤스비에서 1600년 10월 5일에 태어났다. 굿윈의 부모는 이 아들을 목회자가 되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개인적 모범을 보이고, 최상의 고전 교육을 받게 했다.
어린 시절 굿윈은 여리고 부드러운 양심의 소유자였다. 이미 여섯 살 때부터 그는 성령에 대한 생생한 인상과 체험 속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통곡했고, “하나님과 그분의 일에 대한 생각들 때문에 기쁨의 빛들을 체험했다”. 열세 살 때 굿윈은 “청교도의 둥지”였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리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곳에 윌리엄 퍼킨스에 대한 기억은 강하게 남아 있었고, “이스라엘을 달콤하게 떨어뜨리는 사람”이었던 리처드 십스 또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열네 살 때 굿윈은 부활절 주의 만찬에 참여하려다 어리고 영적으로 미성숙했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고 깊은 상처를 받았다. 한때 아리미니우스주의에 기울어졌으나 스무살 생일을 맞은 직후인 1620년 10월 2일에 회심했다. 친구의 권유로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토머스 베인브리지가 개인의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초점을 두고 눅 19:41-42 본문으로 설교했다. 굿윈은 “우리가 회심한 이후에는 그토록 신실하시고 당신의 말씀에 충실하신 그 하나님 앞에서” 에스겔서 16장에서 오는 구원의 “즉각적 말씀”을 받았다. 그 경험을 묘사한 글이다.
“‘살아나라, 내가 네게 말하노라, 살아나라’.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이 이전에 내게 대해 행하셨던 모든 경륜을 기쁨 가운데 즉각적이고 순간적으로 바꾸셨다. 또 내 영혼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아나라, 살아나라.’ 내가 말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분이 세상과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셨듯이 내 영혼에 새 생명과 새 영을 창조하시고 집어넣으셨다. 이런 위대하고 커다란 변화는 나에겐 참으로 기이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 곁에서 은밀하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내게로 돌아왔고, 나는 그토록 많은 너의 죄를 용서한다. 내가 내 종 바울을 용서하고 죄를 사해 주었던 것처럼 너를 내게로 돌아오게 하노라’.”(굿윈 전집)
회심 이후 굿윈은 자신의 성향을 퍼킨스, 베인스, 십스, 프레스턴의 신학적 전통에 일치시켰다. 그는 향후 개인적 명성을 결코 추구하지 않는 것과 그 대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앞으로 찾아올 모든 시간을 사용할 때의 척도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굿윈의 영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발견했다. 그의 설교는 점점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어 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십스의 조언에 동의했다. “젊은이여, 선한 일을 통해 유익을 끼치려면 자네는 복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설교해야만 한다네”.
1628년에 굿윈은 27세의 나이에 십스와 프레스턴의 뒤를 이어 트리니티 교회의 강사직 임명을 받았다. 1632-1634까지 그 교회의 교구 목사로도 섬겼다. 1630년대 중반 동안 존 코튼의 광범위한 영향 내에서 굿윈도 교회 정치 체제에 있어 회중주의적 혹은 독립교회적 원리를 받아들였다. 1634-39년까지 그는 런던에서 분리주의 설교자로 일했다. 벌금과 투옥의 위협 등 설교에 대한 늘어가는 제한 조치로 1639년에 그는 네덜란드로 피신을 떠났다. 굿윈은 독립주의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개혁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소수적 견해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중주의의 길’을 탐구해 나아갔다.
1641년에 로드 주교가 탄핵된 이후, 굿윈은 비국교도주의자들로 하여금 잉글랜드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의회의 초청에 응답했다. 1642년 의회 앞에서 설교했으며, 곧이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구성원으로 임명되었다. 총회에서 그는 무려 357회를 발언했다. 1649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강사로 임명 되었다. 하원은 존 오웬과 굿윈을 옥스퍼드 대학의 각 칼리지의 학장으로 임명했다. 1650년 굿윈은 옥스퍼드의 맥덜린 칼리지의 학장으로 임명되었고, 오웬은 크리스트 처치의 학장에 임명되었다. 굿윈은 맥덜린 칼리지를 성경의 진리와 경험적 칼빈주의 교리에 충실한 기관으로 만드는 데 기여를 했다.
학장직을 시작했을 때 굿읜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38년에 결혼한 첫 아내는 40년 딸 하나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49년에 굿윈의 나이 49세, 메리 헤먼드는 17세였지만 어린 나이와는 달리 매우 현명한 여인이었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두 딸은 유아시절에 일찍 사망했고 아들 리처드는 젊은 시절에 동인도를 항해하던 도중에 사망했다. 아들 토머스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회중교회 목사가 되어 후일 목회자 양성을 위한 사립 기관을 설립했다.
굿윈의 옥스퍼드 시절은 많은 열매를 낳았다. 굿윈과 오웬은 주일 오후에는 학생들에게 강론을 전했고, 크롬웰의 왕립 목사로 함께 일했다. 따라서 영적 열기가 학생들 사이에 두루 퍼져 나갔다. 매튜 헨리의 아버지 필립 헨리도 당시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1658년 9월 굿윈은 크롬웰로부터 회중교회주의자들의 총회를 개최하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았고 이에 관련된 신앙 고백서를 작성했다.
1660년 찰스 2세가 즉위하고 청교도의 권력이 사라짐에 따라 굿윈은 옥스퍼드를 떠났다. 회중교회 회중들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찰스 2세 치하에서 수년 간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설교했다. 대부분의 기성 교회의 목사들이 도시를 떠나게 만든 무시무시한 역병에도 불구하고 그는 런던의 회중과 함께 했다. 굿윈은 자신의 말년을 설교와 목회 사역과 저술에 바쳤다. 굿윈은 런던에서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은 경건한 아버지였던 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열병의 고통 중에서도 그는 믿음의 힘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확신, 값없는 은혜에 대한 거룩한 존숭, 신앙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에 대해 강론하며, 그 가르침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최상의 감동과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으며, 곧 하나님과 충만하고 일체의 방해가 없는 온전한 교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내가 그동안 교제를 누렸던 세 위격에게로 나아간다. 내가 그 삼위 하나님을 붙잡았던 것이 아니라 그 세 위격의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셨다. 돌아보건데 니는 내 인생 가운데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정도의 믿음을 상상할 수 있던 적이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나 또한 내 능력껏 최선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로 흡수되어 간다--’. 이와 같은 믿음의 확신과 기쁨의 충만함 가운데 그의 영혼은 이 세상을 떠났다”.(전집) .
굿윈은 내란과 공화정 기간에 회중교회의 지도자로 명성을 얻었고,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탁월한 신자, 유능한 설교가, 따뜻하고 참된 목사 그리고 심원한 영적 작가로 또한 알려졌다. 번힐 필드에 있는 그의 무덤에 라틴어로 쓰인 묘비명에는 매우 감동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묘비명은 그의 가장 중요한 은사들을 잘 요약했는데, 굿윈이 성경에 박식했고 정통적이고 건전한 판단력을 지녔으며 복음의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고통받는 양심을 위로하고 달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오류를 격퇴하는 참된 목사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 처음 회심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많은 영혼들을 가르치고 교화했다. 사실상 묘비명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내용은 그의 작품이 재인쇄되고 출판되는 오늘날 성취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가장 비싼 향수보다 더욱 향기로운 향취 가운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릴 것이다. pp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