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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시, 흙의 향기
신 현 득
흙의 시인 혜암 최춘해 선생이 묵직한, 또 하나의 시집을 엮는다. 『시계가 셈을 세면』 이후 아홉 번째로 내어놓는 동심의 다발이다. 이를 이름지어 ‘흙의 향기’라 했다.
이 한 권은 「흙」 연작 60편이 주류이며, 제목을 달리하는 「초롱꽃」 등 19편도 흙의 주제에 이어져 있다. 작은 풀꽃이나, 인간 생활이나, 자연의 모두가 흙에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흙은 자연이 의지하는 어머니이며, 인류를 길러 온 젖줄이며, 우리네의 탄생지이며, 묻히어야 할 따스운 품이며, 신앙이다. 어떤 인간사, 어떤 역사, 어떤 문화, 어떤 발전도 흙 위에서만 영위되어 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어떤 노래보다 흙의 찬양을 앞세웠어야 했다. 그런데도 춘해에 이르러, 춘해를 두고 진정 흙의 시인이 나타났다 함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여태의 서정시, 민족시들이 대상으로 삼아야 할 흙에서 맴돌았을 뿐, 그 중심인 향기를 겨누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춘해 시인은 온갖 우의적인 표현을 두고, 흙을 직접 ‘흙’이라 부르며 노래하고 나선 것이다.
흙에다 시심을 걸어 놓고 연작 60편이라는 끈기를 보인 것도 춘해 시인이다. 흙이 지닌 정감을 이만한 동심, 이만한 사랑, 이만한 서정의 깊이로 노래한 것도 춘해 시인이 처음이다. 흙의 시를 쓰기 위해 아주 흙이 돼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의 집념이었다.
춘해 시인은 지닌 성격과 생활 태도부터 흙이다. 사람들은 춘해를 한치의 틀림이 없으면서 소박한 사람으로 이야기해 왔다. 모자람도 없지만 지나침이 또한 없다. 앉을 자리에 앉고 설 자리에 서는 사람이라는 말들을 한다. 자신에 들뜨지 않고 겸손하기란 시인의 감정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춘해는 그런 성정을 누리면서 존경을 받아 왔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간의 향기가 있다고들 했다. 그것이 흙의 향기 같다고들 했다.
이것은 춘해 시인이 흙에서 배운 성격이다. 흙이 얼마나 정직한가. 흙은 일을 두고 어기지 않는다.
마음의 밭도 흙과 같아
노래를 심으면
노래가 자라고
기술을 심으면
기술이 자란다.
사랑을 안 심고
정직도 안 심으면
잡초가 자란다.
― 「사랑을 안 심으면 (흙·41)」 가운데 부분
이 시가 지닌 뜻은 춘해 시인의 인생 방법 그것이다. 일흔 나이, 오늘에까지 그는 흙에서 배운 올곧음을 지켜 왔다. 이를 45년 동안, 교단에서 교육관으로 삼은 충실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지난 대구 시절, 한 살이 위인 춘해 시인과 하나 아래인 권기환과 나, 다시 하나 아래인 김선주 씨는 또래의 일당으로 어울려 지냈다. 이응창 선생이 회장으로 있던 대구아동문학회 멤버였는데,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어린 일당 넷이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취해도 의연한 쪽이 맏형인 춘해였음은 물론이다.
이에 앞서 춘해 시인과 나와는 상주 시절이 또 있다. 상주글짓기회 월례 모임 때면, 사벌에서 상주까지 이십 리 길을 자전거로 달려오던 춘해 생각이 난다. 그것이 어언 40년에 가깝지만 예나 이제나 그는 흙의 성품이다.
춘해 시인의 출생지는 경북 상주군 사벌면 덕가리 하덕골, 낙동강이 가까운 하덕골은 흙이 좋은 들녘이다. 흙의 시인 춘해는 하덕골 흙에서 태어났다.
흙의 아이로 태어난 춘해는 흙의 향기 속에서 자랐다. 흙의 시인이 될 바탕은 이렇게 이루어졌던 것.
상주군 사벌면 덕골 황새골
우리 밭, 우리 감나무 가지를
붙잡고 있던
엄마 젖꼭지만큼이나
내 손에 익었던 감.
할매 쪽진 머리처럼
꾸미지 않은 감꼭지
― 「꼭지 달린 감」 일부
춘해의 시집 『생각이 열리는 나무』에 실은 명작시 「꼭지 달린 감」의 시편을 보기로 들었다 최시인은 이 몇 구절에서 상주군 사벌면의 감을 노래하고 있다. 그 시골, 그 고향, 그 특산의 감이 잠재의 체질 속에 무의식 형태로 있다가 감동의 시구로 표출된 것이다.
우리 밭 감나무 가지를 잡고 있던 감. 엄마 젖꼭지만큼이나 손에 익었던 감. 할매 쪽진 머리처럼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감꼭지. 그 시어와 주제가 모두 흙이다. 향기 나는 흙이다.
그 이전의 명작시 『시계가 셈을 세면』도 은유적이지만 흙에서 시작된 시였다. 시간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는 자연, 그 자연을 낳은 것은 흙이다.
다시 보아도 춘해의 시는 흙이다. 다시 보아도 그 시에서 향기가 난다. 최시인은 생성의 어머니인 흙을 나의 어머니에 비유하여 인격화함으로써 한국인의 정서에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
돌아간 해 늦가을
흙은 지쳐서 쓰러졌었다.
한 송이 꽃, 한 포기 풀
곡식 낟알 하나라도
품속에서 태어난 건
다 아끼고 싶었다.
모양이야 일그러져도
허물을 묻어 주고 싶었다.
기름기가 다 마를지라도
더 넉넉하게
젖꼭지를 물려 주고 싶었다.
지친 채 누웠어도
가물에 못 견뎌
쭉정이로 돌아온 풀씨가
가슴 아팠다.
― 「쭉정이에 가슴 아파 (흙·1)」의 일부
어머니인 흙은 품속에서 태어난 생명을 모정으로 가꾸고 있다. 자신에게서 기름기가 마를지라도 넉넉하게 젖을 주고 싶어한다. 쭉정이로 돌아온 씨앗을 가슴 아파한다. 이것은 우리네 어머니의 심정이다.
춘해의 시에서는 흙 위에서 이루어지는 우리네 생활까지 흙이라는 이름으로 노래하고 있다. 거기에는 들을 가꾸며 사는 우리네 노동이 있고, 민속이 있고 소박한 우리네 신앙이 있고, 조상을 모시고 사는 우리네 질서, 베풀면서 어울려 사는 따스운 인정이 있다. 이것이 모두 흙에서 이루어진 흙의 정서다. 최시인은 흙에서 태어나는 도깨비까지를 노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도움을 주는 흙이 되고 싶다.
없어서는 안 될 흙이 되고 싶다.
잡초를 안고 키워도
텅 빈 가슴보다야 낫지만
같은 값이면 곡식을 안고 싶다.
― 「땀 냄새를 묻어야 (흙·57)」 앞부분
춘해는 흙이 되어 있다. 생명을 주고 생명을 사랑해 가꾸고 그들과 같이 살고 싶어 향기 있는 흙이 되어, 흙으로 살고 있다. 흙의 시인으로 더 오래 흙을 노래하면서 이 나라에 흙의 향기를 뿌려 주리라.
일흔에 발 디딘 나이, 무게 있는 시로 높직하게 탑돌을 쌓은 혜암 최춘해 시인이 우뚝하다. 오랜 글벗으로 최시인의 책 끝에 어줍잖게 몇 자를 곁들이는 기쁨이 또한 크다. 춘해 시인의 건강과 건필을 빈다.
생명의 젖줄, 흙의 노래
최 지 훈
흙·3
겨울잠에서 깨어난 흙은
몸이 가뿐하다.
나무 뿌리에 물려 줄
젖이 넉넉히 고였다.
분꽃 어린 싹이 제대로 서서
문을 열고 햇볕을 쬔다.
겨울 동안 목이 잠긴 산꿩이
목청을 다듬는다.
종달새가 높이 떠
어서 빨리 자라라고
보리를 꾄다.
흙에서 태어나
흙을 믿고 자라는
한집안식구들
젖줄을 물린 흙은
마음이 흐뭇하다.
1. 같은 제목의 시
시인들 중에서는 같은 제목으로 여러 편의 시를 잇달아 발표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의 제목으로 같은 시인이 여러 편의 시를 써 놓으니 독자가 보기에는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시들은 대개 제목에 번호를 매겨서 서로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를 연작시라고 부릅니다.
이 시의 뜨락에서 이미 문삼석 시인의 연작시들을 소개했었지요?
복습 삼아 연작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시 간추려 보겠습니다.
연작시는 한 가지 주제나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여러 편의 시를 엮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같은 제목의 시를 여러 편 쓰게 됩니다. 물론 제목을 다르게 할 수도 있으나 제목이 다르면 주제나 소재가 같아도 연작시로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들 중에서 한 가지 소재나 주제로 된 연작시를 쓰면서 제목을 다르게 하고 싶으면 이중의 제목을 붙입니다. 예를 들면 「흙·24 : 살골 버스」와 같이.
이때 ‘흙’은 연작시 전체의 제목이고, ‘24’는 연작시의 번호입니다. 정작 이 시의 제목은 ‘산골 버스’이지만, 동시에 이 시는 ‘흙’을 소재로 한 연작시 중의 한 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2. 생명의 젖줄
돌아간 해 늦가을
흙은 지쳐서 쓰러졌었다.
한 송이 꽃, 한 포기 풀
곡식 낟알 하나라도
품속에서 태어난 건
다 아끼고 싶었다.
모양이야 일그러져도
허물을 묻어 주고 싶었다.
기름기가 다 마를지라도
더 넉넉하게
젖꼭지를 물려 주고 싶었다.
지친 채 누웠어도
가물에 못 견뎌
쭉정이로 돌아온 풀씨가
가슴 아팠다.
― 「흙·1」 전문
최춘해 시인의 연작시 「흙」은 1번부터 35번까지 35편의 시로 짜여 있습니다.
최춘해 시인은 경상북도 상주 사람입니다. 상주는 여러 가지로 유명한 고장이지만,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50년대 말엔 ‘동시의 마을’로 유명했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 고장의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를 가르치시던 젊은 선생님들이 유별나다 할 만큼 문학에 열정을 가지고 어린이들에게 글짓기를 지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춘해 시인도 그때 그러한 선생님들 중 한 분이셨습니다. 지금은 다른 고장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지만 그는 상주에서 나서 자랐고, 교직 생활의 대부분을 상주에서 해내셨습니다. 춘해 시인은 그 고장의 동료 선생님이시던 신현득, 김종상 같은 시인보다 훨씬 뒤늦은 60년대 후반에야 문단에 오르고 알려졌지만 지방에서 문학 활동을 해 온 것은 더 오랩니다. 상주는 오랫동안 한국의 아동문학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곳으로 손꼽혔습니다. 서울을 제외하면 전국 어느 곳보다 왕성한 문학의 열정으로 들끓는 젊은 선생님들이 모여들어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 나라 동시 문단에서 손꼽히는 시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동화 작가들이 이 고장에서 태어났거나, 이 고장에서 문학을 시작했거나, 그 역량을 키워 온 분들입니다.
춘해 시인은 바로 그러한 문향(문학의 고장)에서 흙의 냄새를 맡으며, 흙을 밟으며 흙 속에서 시를 정신 없이 빚어냈고 지금도 낳고 있습니다.
연작시 「흙」은 바로 그러한 춘해 시인의 영혼에 다져져 있던 시정신으로 나타난 훌륭한 작품입니다.
연작시 「흙」은 여느 시처럼 춤추듯 노래하듯 리드미컬한 율격과는 좀 거리가 있는 율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산문을 적당히 행가름해 놓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것은 율동적이기보다 밭에서 쟁기질하는 농부나 소의 걸음걸이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텁텁한 운율은 흙이 보여 주는 이미지와 오히려 잘 어울립니다.
춘해 시인은 말을 아껴서 다듬고 간추려 쓰기보다 넉넉하게 부려 씁니다. 게다가 서술문 같은 문장으로 그의 시는 대체로 긴장감이 적습니다. 좋게 말하면 읽기에 편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느슨한 긴장이 연작시 「흙」에서는 오히려 더 훌륭한 효과를 냅니다. 시의 짜임을 편안하게 벌려 놓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시입니다.
흙.
춘해 시인이 그려낸 흙. 곧, 춘해 시인의 시심(시를 길어내는 마음) 속에 자리잡은 흙은 그대로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아기를 포근하게 안고 젖을 먹여 기르는 어머니.
세상의 풀이나 나무는 흙 속에 뿌리를 박고 서서 살아갑니다. 흙이 없는 곳에는 풀도 나무도 살 수 없습니다. 풀도 나무도 없는 곳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물론 맹수도 날짐승도 가축도 마찬가지이며, 작은 벌레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세상 만물은 흙에 기대어 살고, 흙에 뿌리박고 살고, 흙에 안겨 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 속에 사는 생물도 마찬가집니다. 물밑 땅속에 물풀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그 물풀로 하여 물고기를 비롯한 물 속의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흙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은 땅 위에서 사는 동안 흙에 안겨서 흙의 양분을 빨며 삽니다. 그러므로 흙은 만물을 낳은 어머니이며 젖을 주어 기르는 어머니라고 할 것입니다. 곧, 흙은 생명의 젖줄입니다.
말이 없는 듯한 그 흙을 생각하며 소개한 두 편의 「흙」(1, 3)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딛고 다니는 흙, 그 흙을 천대하며 살아가는 우리. 흙을 일구어 씨 뿌리고 바짓가랑이 걷어 올리고 흙을 디디면서 사는 농부들을 우습게 생각하는 아이들은 다시 생각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3. 나무와 흙
상수리나무는 땅을 굳게 딛고
당당하게 서 있다.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
으리으리한 궁궐에
정원수가 될 생각은 없다
뭇사람들이 몰려들어
칭찬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값비싼 귀한 몸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나 또래와 더불어 사는 곳
남들 따라 꽃 피우며 열매 맺으며
가물면 같이 목이 마르고
너와 나, 우리가
함께 사는 곳
여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
― 「상수리나무 (흙·31)」
연작시 「흙」 35편 중에는 따로 제목을 덧붙인 것이 여섯 편 있습니다. 30번부터 34번까지의 다섯 편과 24번이 그것입니다. 따로 덧붙인 제목을 본 제목에 대하여 ‘부제목’ (줄여서 ‘부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 시의 참 제목은 부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소개한 시도 그 부제가 있는 여섯 편 중의 한 편입니다. 본 제목은 「흙·31」이고 부제는 「상수리나무」지만, 이 시만 따로 떼어서 볼 때 참 제목은 「상수리 나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춘해 시인의 시가 갖는 큰 특징은 ‘삶’에 대한 깊은 생각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 춘해는 자연을 그냥 아름다운 대상이나 신비한 사물로 보고 즐기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자연의 비밀과 질서를 사람의 삶에 비추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눈으로 발견한 것은, 자연이 사람의 바른 삶을 위해 주는 상징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는 그 자연을 통하여 발견한 참 삶의 진리를 시로서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이미지의 시라기보다 상징으로 보여 주는 메시지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의 시란 어떤 모습을 그림처럼 한 장면으로 보여 주는 시입니다. ‘비유’라는 색으로 칠하여 곱게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지의 시는 무엇인가 깨달아야 할 일을 말해 줍니다. 특히 진리를 전해 주려고 합니다 이때는 대개 ‘상징’이라는 연필로 써서 읽게 하거나 말로 들려줍니다.
연작시 「흙」은 그러한 그의 생각이 담긴 메시지의 시 중에서 대표적인 시입니다. 여기에서 ‘상주리나무’는 성실하고 겸허한 시인의 삶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이 시의 상수리나무는 시인이 존경하고 이상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사람’의 상징입니다. 내가 보기엔 그 아름다운 사람이 바로 시인 자신으로 여겨집니다. 성실한 사람, 겸허한 사람―그것은 시인의 모습이며 시인의 삶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와 함께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함께 문학 활동을 하던 동료와 선후배들이 하나같이 고향을 등지고 대도시로 나아가 유명해진 후에도 그는 지금까지 고향 땅에 뿌리내리고 살면서 소리 없이 시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세상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 영혼을 지녔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다는 뜻입니다. 땅을 굳게 딛고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교만 방자하게 남을 위압하고 겁주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뒤에 계속된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궁궐의 정원수도, 대중의 환호도, 값비싼 귀한 몸도 되고 싶지 않다는 겸허한 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분수를 알고 겸허하게 이웃과 함께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구김이나 부끄러움도 없고 기죽지도 않는 떳떳한 기개가 곧 성실한 마음입니다.
으리으리한 궁궐로 상징되는 권세도, 뭇사람의 칭찬으로 상징되는 명예도, 값비싼 몸으로 상징되는 귀족적 신분이나 재산에 대하여도 초연한 태도로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며 세상의 이웃과 살겠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소박한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달관한 인격입니다. 향기 높은 인격입니다. 마치 예수가 고행 끝에 사탄으로부터 당한 유혹을 뿌리쳤던 고매한 인격과도 같습니다.
이런 인격은, 바로 우리의 가까운 주위에서 이름없이 자기 일에 성실하며 최선을 다하고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이웃 사람에게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수리나무는 흙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삽니다. 흙은 나무를 감싸고 지켜 주며 먹이고 키워 주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흙은 어머니이며, 가정입니다. 흙 떠난 나무가 살 수 없듯이 어머니를 버리고 가정을 떠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아가 ‘나’를 지켜 주고 낳아 준 조국을 버리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떠나서 제대로 값진 제 생명 값을 지키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흙이 나무의 젖줄이듯이 이 나라 이 땅은 겨레의 젖줄이며, 내가 사는 가정은 내 생명의 마지막까지의 보루입니다. 거기에 뿌리내리고 지키는 자만이 꽃 피우고 열매 맺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흙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4. 겨레의 영혼, 그 전설
옛날 흙은
조화가 많았다.
흙이 몽당빗자루를
품고 있으면
병아리 깨이듯
도깨비가 되었다.
그믐밤 고개를 넘다가
길을 막아서는
도깨비를 만나
장담 센 어른이
밧줄로 꽁꽁 묶어
뻘뻘 땀 흘리며
집으로 끌고 와 보면
지난해 쓰다 버린
몽당빗자루였단다.
우람한 건지산에서
뿌리를 박고
이끼를 입고 점잖게 앉은
산신령 바위는
아들도 낳아 주고
액운도 막아 주었다.
정성껏 빌기만 하면
어려운 소원도
다 들어주었다.
― 「흙·9」 전문
손꼽히는 나라의 민족치고 신화나 전설이 없는 민족은 거의 없습니다. 역사가 깊은 민족일수록 신화와 전설은 다양하고 풍부합니다.
신화나 전설은 겨레의 민중들 마음속에서 생겨나서 그 민중의 마음을 울리면서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전설이나 신화를 보면 그 민족의 정신을 거의 정확하게 짐작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와 전설은 그 겨레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민중의 한이 서리고 기쁨이 담기고 지혜가 숨어 있는 풍요한 신화·전설의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겨레의 마음은 겨레의 영혼이요, 그 영혼에는 겨레의 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와 전설에는 겨레의 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땅을 사랑하고 땅에 의지하여 흙을 파면서 가꾸고 살아온 겨레입니다. 그러므로 선조들의 신앙심은 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흙이 삶의 터요 뿌리요 젖줄이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즉, 신화와 전설이 이 흙(땅)을 떠나서 생겨날 수 없습니다. 도깨비도, 영검 많은 산신령도, 액운도, 행운도 모두 흙을 떠나서는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눈다래끼 나면
땅속에 티를 찾아 빼 주었다.
― 「흙·8」에서
액운이 닥친대도 걱정이 없다.
동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는
잡귀를 샅샅이 찾아내었다.
덜미 잡힌 잡귀는
손바닥 싹싹 빌고 쫓겨났단다.
― 「흙·13」에서
5. 아스팔트에 파묻히는 흙
흙은 땅입니다. 땅은 삶의 터전입니다. 땅은 집터이기도 하고 농토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땅은 국토입니다. 수만 년 전부터 우리의 조상이 갈고 가꾸어 온 겨레의 삶 터이며 역사를 쌓고 전통과 문화를 키워 온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증인입니다. 할아버지가 나셔서 살다가 아버지를 낳아 길러 주시고 묻힌 땅입니다. 그 위에 내가 나서 자라고 있는 땅입니다.
그래서 연작시 「흙」의 열여섯 번째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마을 용둥 할매
등짐 장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쳐서
이 고개에서 숨을 거두었다.
짚신 신들메를 고치기도 하고
새 짚신과 바꿔 신던 고개
고개를 넘다가 돌아가신
우리 할배들
― 「흙·16」 첫째, 둘째 연
그 할배들이 목숨을 바쳐 외적과 싸우며 수천 년을 한결 같이 이 땅을 지켰습니다. 백 년도 안 된 최근에는 왜적의 게다짝에 이 땅이 짓밟힌 적도 있음을, 우리는 잊어 가지만 이 땅은 결단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막신이 게다로 바뀌고
짚신 자국 위에
지까다비 자국이 날 무렵
왜놈의 말 발굽 소리에
숨소리를 죽였던 이 고개
― 「흙·16」 셋째 연
그 고개를 넘나들며 고개 아래 땅이나 비탈밭을 가꾸며 살아오면서도 결코 풍요를 누려 본 적이 없는 농민들의 한스런 추억도 있습니다. 그 농민은 머나먼 다른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였습니다.
보릿고개에
허리가 접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믐밤을 쉬며 쉬며 넘다가
도깨비에 홀려
진땀을 흘렸던 할배들
― 「흙·16」 넷째 연
그러나 그 땅이 지금도 살아 있어서 오늘도 여전히 우리 생명의 젖줄이 되고 있습니다.
밟혀서 쓰러져도
뿌리는 살아
다시 돋아나는 잔디
할배들이 굳이 지켜 온 흙
숱한 고비를 딛고 넘어
이 고개에
버스가 넘어 다닌다.
― 「흙·16」 끝 연
혹시 여러분은 길을 걷거나 놀다가 옷에 흙이 묻거나 흙물이 튀면 기분이 나빠져서 짜증을 부리지 않으십니까? 흙길로 다니기를 싫어하고 피해 다니지는 않으시나요? 시골의 논길과 고갯길을 걷는 멋과 즐거움을 모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외국으로 이민 가는 가족들이 흔히 유리병에 내 땅의 흙 한줌을 담고 떠나는 마음을 아십니까? 로마 교황이 우리 나라에 오셨을 때 공항에 내리시자마자 땅바닥에 엎드려 그 흙에 입맞추신 뜻을 알 듯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그 흙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꽁꽁 가두고 있습니다. 젖줄의 구실을 못하도록 숨을 막아 버리고 있습니다. 뿐 아니라 콘크리트의 높은 건물을 짓고 다시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을 듯이 땅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높은 곳으로 도망가서 삽니다. 그리고 그 높은 아파트의 모말(곡식을 되는 네모난 말) 같은 방에 갇혀 텔레비전의 허깨비 같은 그림과 거짓 이야기에 넋을 뺏겨 영혼이 몽롱하게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춘해 시인의 연작시 「흙」을 읽으며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