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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강해(17)
제목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본문 : 로마서 5장12~21절
지난 두 번에 걸쳐서 우리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통해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가 형성되며,
이 교회라는 영적인 유기적 생명체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긴밀한 교제를 나누게 된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번과 다음에 걸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성도들 개개인에게 찾아오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를 살펴 보게 됩니다.
오늘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부활과 영생”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동안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고 우리가 매주일 예배 때 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해야 하는 이유와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사도신경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겉 사람의 차원에서
윤리적으로 죄인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도신경이 “죄를 사하여 준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를 때,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솔직하게 반성해 볼 때
우리는 죄인임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롬3:10~13절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때는 우리의 겉 사람 속에 나타나는 우리의 마음 상태나 행동이나 삶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다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이 같은 모습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때 이 말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을 죄인이라고 할 때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깊은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특히 교회 역사상 죄문제를 붙들고 가장 크게 괴로워했고 죄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던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경험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다음 항목에 소개된 이야기는 폴랑 베니튼이 저술한 유명한 루터 전기인
『마르틴 루터의 생애』에 있는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1. 루터의 발견:죄의 뿌리는 영혼의 깊은 심연에까지 뻗어 있다
루터는 어느 날 집에서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같이 길을 걷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법률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루터는 수도사들로부터 성실성을 인정받고 수도사의 서약을 할 수 있었고, 수도사가 된 후 마침내 첫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제단 앞에 서서 미사예전의 처음 부분을 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곧, 살아계시며, 참되시고, 영원한 하나님께 바치옵니다.”
남달리 영적인 감각이 예민하고 날카로 왔던 루터는 이 글귀를 읽는 순간 전율을 느끼면서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지금 자신이 완전히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시고, 무한히 크신 전능자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대화를 하는 자기 자신은 더럽고 허물투성이이며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벌레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하찮고 범죄 투성이인 인간이 하늘의 거룩한 페하 앞에 서서 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루터는 공포와 전율에 부들부들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루터는 자기가 느낀 공포를 공습 또는 시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후부터 루터는 몇 년간 죄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나타나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루터가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기울였던 노력은 대체로 세 가지인데,
첫째는 철저한 금욕생활이었고,
둘째는 잉여공로설에 의지하는 것이었고,
셋째는 고해성사에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가지 시도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오늘 말씀과 관련되
세 번째 노력인 루터의 고해성사를 조금 깊이 살펴 보겠습니다.
독일 사람들의 성격 그대로 루터는 한번 고해성사에 매달려서 죄를 털어놓기 시작하자 무서울 만큼 철저하게 죄를 고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생각나는 대로 몇 차례씩 고해를 했습니다.
어떤 때는 내리 여섯 시간 동안이나 고해를 했습니다.
루터는 영혼을 샅샅이 뒤지고 기억을 이 잡듯이 털면서 갖가지 동기들을 저울질했습니다.
한번 고해 할 때마다 죄의 목록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검토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고해하다 보니까 대충 큰 범죄는 분명히 제거되었습니다.
이당시 루터의 고해를 들어주던 수도원장은 스타우피츠라는 사람이었는데,
루터가 이렇게 철저하게 고해를 하고도 여전히 마음이 꺼림찍해서 찾아와서 죄를 말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여보게, 그리스도께 사죄를 받고 싶거든 그런 시시껄렁한 죄는 가져오지 말고 좀 굵직굵직한 것을 가져오게.”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문제는 죄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그 죄가 모조리 토해졌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지은 죄들을 빠짐없이 기억해내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체험을 통하여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영리하게 자아를 감싸고 도는가를 발견합니다.
6시간동안 고해한 뒤에도 검열을 빠져나간 죄가 있었습니다.
기억은 고사하고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는 죄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기억을 통해서 구체적인 죄를 찾아내서 고해하는 고해성사가 인간을 더욱더 깊은 절망으로 몰아 넣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의 한계와 기억의 교묘한 악용으로 언제든지
기억의 검열을 빠져나간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터는 기억으로 다 잡아낼 수 없는 세계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 전체가 타락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 전체가 문제삼지 않고 다만
구체적인 죄의 행위만을 문제삼아서는 고해성사는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도 포기하고 맙니다.
결국 루터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할 때는 겉으로 드러난 어떤 몇가지 죄의 행동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기억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깊은 심연에까지 뻗어 있는 인간의 본성 전체가 타락하고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2. 사도바울의 삼중적 전가론
1) 아담이 범죄한 순간에 온 인류가 범죄한 것으로 여겨졌다(죄의 전가)
그런데 이와같은 루터의 발견은 이미 사도 바울이 계시를 통하여 깨다고 서술한 진리에 가까스로 다가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의 죄의 깊이와 그 기원을 루터보다 더 철저하게 간파한 인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본문이 바로 인간을 죄인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고전적이고 중요한 본문입니다.
본문 12절은 죄가 어떻게 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본문에서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을 말합니다.
우선 아담과 하나님과의 첫 번째 대화를 통하여 무엇이 죄인가가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16,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죄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명령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얼굴이 예뻐지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을 수도 있고, 심지어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하실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로서 하나님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무엇을 명령하시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 죄인데,
이런 죄를 범할 경우에 찾아오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곧 롬6:23절이 말하고 있는 것 처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은 12절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말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다음 구절에서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곧 아담이 범죄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시제는 부정과거의 시제인데,
부정과거의 시제는 어느 한 순간에 행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곧, 모든 사람이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본문의 문맥에 따르면 아담이 범죄한 그 한 순간에 아담과 같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죄의 형벌인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과연 모든 사람이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어떻게 범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바울은 또 14절에서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12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왔다고 말해 놓고, 14절에서는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그들 위에도 사망이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사망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생아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머니 태중에 있다가 죽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때 우리는 이 아이가 지은 죄 때문에 이 아이가 죽는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아이는 분명코 스스로 범한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삯이라고 했으니까 이 아이가 죽는 것을 보니 죄인은 죄인임이 분명한데 그러면 이 아이가 범한 죄가 없는데도 어떻게 죄인이 될 수 있느냐?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14절 하반절에 있는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 표현을 이해해야 이 의문이 풀리며 15절에서 21절까지 계속되는 말씀의 뜻을 비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라”는 말에서 오실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형이라는 말은 상징한다는 말입니다.
곧,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가?
아담의 어떤 점이 그리스도를 닮았는가?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거꾸로 아담으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을 풀어 나가는 방법을 취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아무런 죄도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사망의 형벌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에게 인류가 범한 모든 죄악이 옮아가서 덮어 씌워졌습니다.
죄가 덮어 씌워지니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여기시고는 죄의 형벌인 사망을 그리스도께 덮어 씌워버렸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는 아무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여김을 받고 사망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와 죄의 형벌인 사망이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덮어 씌워진 사건을 가리켜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곧, 아담이 범한 죄와 그 형벌인 사망이 온통 그 후손에게 덮어 씌워져서 모든 후손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했든 범하지 않았든(사실상 모든 인간들의 행동을 조금만 면밀하게 들여다 보면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사람이 없지만) 아담이 범죄한 그 순간에, 심지어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죄인으로 여겨지니까 그 형벌인 사망의 권세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곧 아담이 범한 죄와 그 형벌인 사망이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가 막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인류의 비참함과 비극의 기원을 보게 됩니다.
인류는 아담이 범죄한 그 순간에 모두 죄인으로 여겨짐을 받았고, 사망의 권세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곧 인간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죄인이요, 사망의 형벌아래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아담의 온 후손에게 어마어마한 연대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죄는 아담 혼자 범했으니까 아담 혼자만 혼나고 끝나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범죄했으니까 아담을 포함한 모든 아담의 후손이 죄의 책임과 형벌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온 인류를 한 통속으로 묶어서 연대책임을 묻는 것이 정의에 어긋나는 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인류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그리고 미래를 한 눈에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온 인류는 그저 한 가족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가족을 생각할 때, 가족 식구가 죄를 범하면 그 연대책임을 가족 전체가 지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래야 제대로 된 가족입니다.
이처럼 온 인류가 아담 한사람의 범죄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고 한통속으로 죄인으로 여겨지고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받는 인류의 운명이 우리의 눈에는 참으로 경이롭고 기이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의미요, 인류사회의 비참의 근원입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을 수도 있지만 온 인류는 한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날 때부터 아담의 전가된 죄 때문에 죄인이요,
따라서 날때부터 죽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에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됨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인류에게 죄와 사망의 연대책임을 물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연대책임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이미 준비해 두셨습니다.
아담의 죄가 아담의 온 후손에게 덮어 씌워지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은 아담을 포함한 온 인류의 죄를 사랑하는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전가시키기로 작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이 세상에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가 없는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시고,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대신 받데 하심으로써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터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인류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한 차례의 전가가 더 있어야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와 죄의 형벌인 사망을 담당하셨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와 형벌인 사망을 대신 받으시고 이룩하신 완전하고 흠없는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에게 입혀진 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보시고 하나님의 우리를 의인으로 판단하신 후, 우리를 사랑의 형벌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고 영생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여겨지기까지 삼중적으로 전가가 있게 됩니다.
첫째로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전가됩니다.
둘째로 온 인류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로움을 믿든 자들에게 전가 됩니다.
이와같은 전가론을 배경에 깔면서 바울은 5:15~21절까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는 가운데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를 말합니다. 17~19절 말씀입니다.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3. 전가의 복음은 최초의 인류에게 이미 계시되었다
아담을 포함한 인류의 죄악을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시키고 구원의 길을 여시겠다는 성부 하나님의 마음은 일찍이 최초의 인류인 아담에게 이미 계시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창세기 3:21절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기 위하여 동물을 죽인 것은
에덴동산 안에서 처음으로 거행된 살생사건입니다.
이 살생산건은 아담과 하와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넘길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망의 형벌을 기다리며 극도의 긴장과 불안 속에서 기다리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한번도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광경을 보지 못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동물을 참혹하게 죽이시고 그 자리에서 가죽을 벗기시는 장면을 보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공포로 새파랗게 질렀을 것이며,
자기들이 범한 죄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동물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 보았을 것이며,
아담과 하와에게 칼을 대지 않으시고 동물에게 칼을 대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하나님의 어떤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희미하게나마 자신들이 범한 죄악과 그 형벌인 사망을 하나님이 자신들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에게 대신 내리실 것이며,
한가닥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여기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쫓겨난 이후 곧 동물을 죽여서 제사드리는 일을 시작했고, 이 관습이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하나의 종교적 전통으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 하나님은 인류의 죄악을 용서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자 하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그 마음 깊은 곳에 품고 계셨으며, 동시에 인류가 받아야 할 어마어마한 죄악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시키려는 비장하고 고통스러운 결의를 거듭하여 다짐해야 하는 고통을 역시 그 마음 깊은 곳에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사실은
이미 최초의 인류때부터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말은
그 이후 어느 시대도 구원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음을 불평할 수 없으며, 구원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덧붙여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죄와 스스로 범한 죄를 단번에 용서받고 사망의 형벌로부터 자유케 된 성도들은 계속해서 죄를 범하게 되는데, 이때 이 죄들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면 죄에 대한 회개는 날마다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인의 삶의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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