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의 프로포즈, 부산 그리고 소화방(素花房)>
'부산으로 간다는 언니의 이메일을 받고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아요.
소화방은 정말 그리운 곳 중 하나인데 어떻게 변했을까...
내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보니 짐을 꾸렸다 풀었다하면서 아끼던 것들을 그동안 많이도 없앴답니다.
그런데 잎차 대작 900원, 세작 1100원...이라고 쓰인 명함크기의 소화방메뉴만큼은 미국에까지 따라와서 지금도 서랍 속에 있어요.
언니가 소화방에 간다니까 다시 꺼내보게 되던걸요.
이 메일을 받을 때쯤이면 언니는 부산을 다녀왔겠네요.
모두가 제 마음자리 지키며 편안하길 기원합니다.'
그립다는 말로 그리움을 떨치는 후배에게서 온 메일이 부산행 기찻길 위에서 덜컹대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쇠바퀴에 몽환이 실리고 펼쳐든 책에서 그리움이 물결로 몰려올 양이면 홍차 한잔이라도 벗삼게 되지요.
듣기만 해도 가슴뛰는 청춘의 빛바랜 사진에는 몇 몇 그리운 이들이 시간 속에 멈추어 있고 정지된 영상 속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찻집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흑백에 머문 흔적을 찾아 부산역에 발을 내리면 비린내가 먼저 마중을 옵니다.
그리고 쏴하게 파도 실은 바람이 손을 뒤이어 내밀지요.
광복동까지는 기본요금에 몇 푼 더 얹어 나오니 역 왼편 아리랑 호텔의 승강장에서 택시를 타게 되곤 합니다.
부둣가 샛길을 따라 달리면 뱃고동소리가 마도로스의 느릿한 걸음에 옮겨 오지요.
연안부두를 지나 부산대교 붉은 아치 너머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이 빼곡하고 드디어 활보하던 광복동 너른 거리로 들어서게 됩니다.
아침밥도 드는 둥 마는 둥 길을 떠났으니 배꼽시계에 맞취 부산의 맛집을 찾게 되지요.
이른 아침 시모노세키에서 부관페리호를 타고와 자갈치에서 사시미를 먹고 광복동에서 안경이라고 하나 사 쓰고
저녁배로 돌아가면 일본 내에서 먹는 사시미와 안경 값보다 더 싸다고 해서 일본인들의 일일쇼핑이 많은 남포동, 광복동 거리입니다.
여기 저기 일본어 간판이 내걸린 골목길을 따라 걷다 옛 친구가 안내한 전북죽집 '제주가'로 들어섰지요.
서울에선 생각도 못할 전복죽의 맛
푸른 바다를 통째로 맛보게 하는 성게국
휘휘 저어야 다진 전복알갱이라도 찾아낼 수 잇는 서울 전복죽으로 주눅이 들었던 차라, 부산의 전복죽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답니다.
허나 이게 웬걸, 굵다란 부채꼴 전복살이 그릇까지 차오른 죽의 고명으로 올랐으니 보기만 해도 벌써 남해바다가 뱃속 가득해지던걸요.
부산에서 살았던 일조차 까무룩해지는 전복죽, 성게국 맛입니다. 이대로 몇 시간 눌러앉아 전복죽 한 숟갈, 성게국 한 숟갈씩 갈마들다보면 부산을 다 가져갈 것만 같았지요.
긴 가방 늘어뜨리고 코트자락 휘날리던 청춘의 거리, 오가던 젊은 연인이 그리도 많더니 지금은 일방통행이 되어버린 광복동 거리.
"갱제가 어립다 아이가" 파리떼만 넘보는 체리장수 아지매의 푸념을 한 봉지 사들고 서라벌 호텔 맞은 편 '소화방'을 찾았지요.
남포동 골목 어귀에는 이런 체리장수 아지매가 꼭 ..
서울보다 더 유명한 서울깍두기 집 설렁탕.
간판만 봐도 부산이라는 거 알겠지예~
남겨둔 발자국이라도 찾을 양으로 들어선 소화방은 여전히 격자살 창호문으로 방을 나누고 육중한 탁자와 의자가 스친 손때만큼 반지르르 윤기를 머금었습니다.
긴 촛대가 하늘거리며 반갑다합니다. 여전히 옷깃 여미게 하는 긴장감은 번잡한 도심을 잊게 했습니다.
메뉴판 뒷면에 새겨진 도연명의 국화도 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요.
차꽃을 일러 소화(素花)라고 합니다. 이미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하얀 꽃 '소화'의 고결한 청향을 노래했지요.
석정스님의 '소화방(素花房)' 널조각서체는 이십삼 년 전 문을 열 때부터 이 곳의 상징인양 눈길을 붙들었습니다.
단아함이 있었어요. 무릇 군더더기 없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그를 닮지 않으면 따르지 않듯이 이 곳을 찾는 이들은 아마도 저 서체를 닮았을 것이라는 속단이 드는 것은 왜인지요.
옛 소화방의 전경 사진 엽서 중에서
내 청춘 시절엔 이렇게 남폿불을 켰더랬지요.
이십삼 년 전, 전 주인장은 커피로 상징되는 미국문화에 맞서 우리의 마실 거리로 서로를 나눌 수 있는 마당으로 이 곳의 문을 열었다지요.
생맥주와 로큰롤, 고고(go-go)가 깔린 항구의 중심가에서 젊은 혈기를 차 한 잔의 평화로 이끌어 내던, 남폿불 드리운 얕은 찻물이 희망과 꿈의 깊은 늪으로 되던, 이제 중년의 문턱에 선 이들의 마음자리였지요.
주인장 안태호님은 지난 해 일본 후쿠오카의 북큐슈 여자대학에서 '스타벅스와 소화방'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지요.
뉴욕의 분위기를 찾고 아메리칸 컬쳐에 젖어들고 싶은 젊은이들이 스타벅스를 찾아들 듯 소화방은 한국 정서의 좌표로 삼는 곳이라고 말했듯이 지금도 일본인들이 부산을 찾아오면 소화방을 들러 한국의 정취를 느끼곤 한답니다.
또한 그는 '차뿐만 아니라 생활 속의 문화가 찻집을 중심으로 대중화돼야하고 부흥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지난 여름동안 조각보 전시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도자기, 목기를 비롯해 한복까지 우리 생활을 아우르는 예술을 전시하고 나눌 예정이라니 부산의 소화방은 우리나라 찻집의 부흥 지표가 되리라는 기대가 커졌습니다.
현재의 위치로 이사 후의 소화방
옛 자취를 더듬어 부산을 그리고 소화방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답니다.
건물의 3충이 멀다고 투정을 부리며 들어서는 그들은 불혹(不惑之年) 을 넘고 지명(知天命)을 넘었다지요. 머리에 내린 흰서리처럼 그들의 미련이 서린 소화방은 적당히 실린 긴장으로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던, 육중한 의자에서 비로소 내 의지를 밝힐 수 있던, 흔들리는 남폿불처럼 젊음의 갈등을 톨로하던 그들의 386이란 청춘을 내린 곳이었습니다.
도연명은 가을 국화를 술 위에 띄우고 속을 떠나고자 했듯히 황혼의 깃발아래 드리운 이들은 찻잔 하나 앞에 두고 속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커피메이커에서 차 한잔의 기능성을 조급히 찾는 디지털 시대에 또르르 따른 찻주전자에 자신을 의탁하는 느린 아날로그야말로 참 행복을 깨우쳐 줍니다.
'고운 빛깔 가진 국화를 꺾어 근심 있는 술 위에 띄워 속세에서 멀리 내 마음을 버리고 싶어라'국화 한 송이를 꺾어든 도연명과 같이 마음 버리기가 네게는 왜 그리도 어려운 지. 차라리 여기 차꽃 숙여피는 방에 마음 몇 자락 묻어두고 사람살이 속으로 돌아갑니다. 흑백의 흔적에서 다시 색채 짙은 세상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로 김홍도가 그린 '약초캐는 소년'이 무심히 걸려있더군요.
부끄러이 숙여피는 차꽃의 그늘아래
작은 찻잔 하나로 그대를 덜어 내셨나요
그리고 하늘바람이 춤추는 그대가 되었나요
덜어냄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는 그 마음 온전하시기를....
청춘 시절의 친구인 주인장과 또 한 친구
*이상은 월간 다도 2006년 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첫댓글 맛깔스런 이 글을 보니까 갑자기 부산행에 동승하고 싶네요. 남포동가서도 헤메고 싶고요~소화방, 제가 그곳에서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날을이 있을런지요~
소화방은 부산지역에만 머물 수 없는 곳인가 합니다. 좋은 것도 따르는 사람만 닮는다는 말씀처럼 류정호님의 살아온 내력이나 지니고 계신 품격이 이 소화방을 닮았네요. 어떻게 하면 삶이 곧 멋이 되는지요.
갑자기 고풍스러운 그 곳에서 저도 따끈한 차 한잔 마시면서 인생을 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네요.. 그런 날이 꼭 오겠지요? 류고문님하고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곳 같네요...
정말 따뜻한 차 한잔을 놓고 여유를 부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드네요. 고문님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부산에 가게 되면 이 '소화방'에 꼭 들르세요. 제가 부산에서 갈만한 곳으로 강추하는 곳입니다. 가게되면 주인장도 꼭 만나고요. 여러분의 향기가 차향에 어른대는 한갓진 오후입니다. 내내 향기로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