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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안리 대안마을
임진왜란 때 장성 삼계에서 영광김씨가 친정으로 피난 왔다가 대안에서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기러기가 조선조에 다수 서식하여 안수라고 부르다가 번창하여 안수에 대자를 붙이고 명칭을 바꾸어 대안이라고 하 였다.
○ 월흥2리 월산마을
조선조때 김해김씨 김범도의 12대조가 왔다가 정착하게 되어 마을을 이루 었으며, 마을의 모양이 초승달이 산을 넘어가는 모양이라하여 월산이라고 하였다.
○ 월흥2리 중촌마을
조선조 임진왜란 때 김해김씨 63대손 이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인근
초두와 월산마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중촌이라 하였다
○ 월흥1리 신흥마을
임진왜란 때 창원황씨 11대손 성구, 봉구 형제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이 새롭게 부흥하기를 염원하기 위해 신흥이라고 하였다.
○ 월흥1리 초두마을
임진왜란 때 창원황씨 11대손 성구, 봉구 형제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창원황씨 30여호가 살고 있으며 마을 뒷산에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우산이라 하여 초두(初頭)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와서 초두(草頭)라고 하였다.
○ 남창2리 석정마을
조선조때 광산김씨 32대손 김재철이 무안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마을의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많이 나온다하여 석정이라
하였다.
○ 남창2리 석암마을
조선조때 이천서씨 7대손 서침이 무안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에 고인돌이 많다 하여 석암이라 하였다.
○ 남창2리 육창마을
조선조때 전주이씨 6대손 이세순이 묘량에서 이주하였고 그 후로
광산김씨 등이 입주하면서 이루어졌으며, 마을 뒷산의 형국이 여섯 번 창성할 수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육창이라고 하였다.
○ 남창1리 금동마을
조선조때 남평문씨 24대손 문중이 남평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에서 금이 많이 나온다하여 금동이라고 하였다.
○ 남창1리 묘동마을
조선조때 한양조씨 18대손 조치한이 함평에서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의 뒷산이 고양이 형국이라하여 묘동이라 하였다 하며
요강매라고도 한다.
○ 용암리 평정마을
조선조때 창녕조씨 17대손 조명근이 이거 입주하고 청주한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을 지나가던 고승이 평정이라고 한것에 유래되어 평정이라 하였다.
○ 용암리 용암마을
조선조때 안동김씨 경순왕 23대손 김정이 함평에서 이주한 후 마을이
형성되었고 용촌과 평암의 앞 글자와 끝자를 따서 용암이라고 하였다.
○ 대덕5리 운흥마을
조선조때 영광정씨 35대손 정윤광이 보성에서 이거하여 입주한 후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앞산의 형태가 뭉개구름이 피어오르는
형태를 하고 있어서 운흥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덕리에 편입되었다
○ 대덕5리 율곡마을
조선조때 영광정씨 35대손 정윤광이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의 형태가 밤송이 형체라하여 밤 과실 또는 율곡이라고 하였다.
○ 대덕4리 송림마을
조선조때 신안주씨 21대손 주두선이 임진왜란때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한 후 번창하였으며, 마을 주변의 산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송림이라 하였다.
○ 대덕 4리 하광암마을
조선조때 진주정씨 정찬수의 9대조 정찬식이 무안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광암마을이 번창하여 상,하로 나누어 아래 마을을 하광암이라 하였다.
○ 대덕4리 상광암마을
조선조때 선녕남씨 23대손 남우원이 함평에서 이주하고 그 뒤에
평택임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소나무가 무성하고
바위가 많아서 송암 또는 광암이라고 하였으며 그 이후에 마을을
둘로 나누어서 윗쪽을 상광암이라 하였다.
○ 대덕3리 홍주마을
조선조때 김해김씨 66대손 김양곤이 남창리에서 이거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 되었고 마을의 형상이 홍어와 같다고 하여 홍주이라고
하였다.
○ 대덕3리 신정마을
조선조때 김해김씨 66대손 김근곤이 남창리에서 입주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조선조 말엽에 정자를 새로 세워서 신정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덕리에 편입되었다.
○ 대덕2리 대화마을
조선조때 밀양박씨 혁거세 54대손 박포립이 장성에서 입주하였고,
그 뒤에 인동장씨가 입주함으로써 마을이 이루어졌고, 삼각산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수원이 좋아 곡식이 많고 번창한다 하여 대화
또는 한수라고 하였다.
○ 대덕1리 봉덕마을
조선조때 광산김씨 19대손 김광익이 함평에서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의 뒷산이 봉황과 같이 생겨서 봉덕이라고 하였다.
○ 양덕5리 갑촌마을
조선조 말엽에 창원황씨 18대손 황형연이 검덕에서 입주하고 진주정씨 정옥환이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냇물과 바다물이 먼저 맞닿는 곳이라 하여 갑천 이라고 하였으나 그후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바닷물이 닿지 않게 되자 마을이 형성되면서 갑촌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양덕4리 구산동마을
조선조때 남평문씨 27대손 문덕창이 남창리 금동에서 이거 입주하였고, 그뒤 전주이씨가 차례로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부락주변의 산이 거북의 형태이고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어 용산동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구산동이라고 한다.
○ 양덕3리 양호마을
김해김씨 시중공 7대손 김우윤이 조선조 중기에 나주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8.15해방 이후 양호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덕리에 편입되었다.
○ 양덕2리 검덕마을
창원황씨 9대손 황영동이 임진왜란 때 순직하자 그의 부인이 검덕에 정착 하여 성촌을 이루었다하며 마을에서 검소해야 덕을 쌓고
잘 살수있다하여 검덕이라고 하였다 한다.
○ 양덕1리 장혈마을
김해김씨 수로왕 38대손 김서광이 염산면 두우리에서 이거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하며, 조선조 초에 마을 뒷산이 노루가 새끼를
안고 젖을 주는 형상이라 하여 장혈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덕리에 편입되었다.
○ 설매3리 광대월마을
조선조때 김해김씨 수로왕 7대손 김무홍이 군서면 가사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이루어졌고, 마을이 크게 날 것이라 하여 광대월이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설매리에 편입되었다.
○ 설매3리 석우마을
이천서씨 30대손 서창환이 장성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며 조선조 중기에 마을이 소의 형태를 닮았다하여 수우라고 하던 것이 석우로 되었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설매리에 편입되었다.
○ 설매2리 대삼동마을
조선조말 전주이씨 16대손 이이갑이 묘량면 당산매에서 입주하여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마을 뒷산의 형태가 큰 사자의 형세라 하여
대사동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대삼동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설매리에 편입되었다
○ 설매2리 치산마을
조선조때 청송심씨 17대손 심부식이 군서면 남죽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이루어 졌으며 조선조 초기에 마을 뒷산에 견치형의 명당이 있다하여 꿩뫼 라고도 부르며 치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설매리에 편입되었다.
○ 설매1리 서우마을
조선조때 나주임씨 24대손 임찬수가 무안에서 이거 입주하였고,
그 뒤에 김해김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 이루었다고 하며, 조선조
말엽 동우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우라고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설매리에 편입되었다
○ 설매1리 동고마을
조선조 숙종(1675∼1720)때 전주이씨 13대손 이건이 묘량에서 입주한 후 나주임씨, 김해김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하여 조선 중종때 주씨 한분이 이곳에 집을 지을 때 그 좌향을 동쪽으로 하고 집을 지으니까 그 뒤 그와 같이 집을 지어 동쪽 언덕
마을이라 하여 동고계라 하였다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설매리에 편입되었다.
○ 동월3리 매화동마을
조선말엽 평산신씨 30대손 신금수가 무안에서 입주하여 마을이 이루어졌고 매화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매화고랑 또는 매화골 이라고
하다가 마을이 형성되어 매화동 이라고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월리에 편입되었다.
○ 동월3리 시목정마을
조선조 정조때 함평노씨 21대손 노창안이 함평에서 입주한뒤에,
경주이씨, 영광정씨등이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주변에 감나무가 무성 하였고 마을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 시목정
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월리에 편입되었다.
○ 동월2리 만선동마을
1920년경 진주강씨 강성문이 염산면에서 이주하였고, 2년 뒤 전주이씨 이규백과 김해김씨 김경옥이 입주하여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마을의 터가 만석군이 살 수 있는 동네라 하여 만선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월리에 편입되었다
○ 동월2리 월암마을
조선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창녕조씨 41대손 조승명이 영광읍에서 이주하여 그 뒤에 김해김씨, 강릉유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조선조때 설매산 중턱에 절이 있어 절골
또는 월암이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월리에 편입되었다.
○ 동월1리 순원마을
조선조 중종때 전주이씨 8대손 이규가 담양에서 이주하였고, 그
뒤로 김해 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이루어 졌고, 부락의 형국이
원숭이가 과일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선원동이라고 하다가
지금은 순원동 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월리에 편입되고 일제 말부터 순원동이라고 하였다.
○ 동월1리 순천마을
조선조 중종때 전주이씨 8대손 이규가 담양에서 이거했고, 그 뒤
김해 김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고, 중종때 마을에 큰샘이
있다고하여 샘골 또는 순천이라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월리에 편입되었다.
○ 백양2리 갈마마을
400여년전 인동장씨 24대손 장신립이 함평 양림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조선조때 백암 북쪽에 있는 마을로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의 명당이 있다하여 갈마동 이라고 하였다
하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양리라 하였으나, 1995년 행정운영상 백양2리로 편제되었다.
○ 백양2리 아양마을
1567년 제주양씨 15대손 양덕례가 광주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의 지형이 어린 염소의 형국이라 하여 아양이라고
불리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양리라 하였다. 1995년 행정운영상 백양2리 로 분구 되었다.
○ 백양1리 백암마을
조선조때 해주정씨 11대손 정운백이 장성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 으며 마을 어귀에 흰 바위가 깔려 있다고 하여 백암 이라고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암, 아양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따서 백양리라 하였다 한다.
○ 도장2리 도철마을
조선조때 전주최씨 26대손 최주율이 입주한 뒤 김해김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이 이루어 졌으며 봄이 되면 복숭아꽃이 계곡 물위에
흘러내려 도천 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도철 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장리로 편입되었다.
○ 도장1리 장고마을
조선조때 영광정씨 31대손 정사언이 동변에서 입주한 후 영광김씨
등이 입주하여 이루어 졌고 조선조때 마을 어귀에 큰 무덤이 있었는데 큰칼이 나왔다하여 장검뫼로 불리다가 장고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장리에 편입되었다.
○ 동간2리 오강마을
조선조때 광주이씨 9대손 이상이가 서편에서 이거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형국이 오강과 같이 생겼다하여 오강 이라고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간리에 편입되었고 행정운영상 동간 2구로 편입되었다.
○ 동간2리 서강마을
광주이씨 7대손 이안례가 영성정씨와 혼인하여 입주하면서 마을을
이루 었다고 하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변과 오강을
합하여 서강 이라 하여 동간2리에 편제되었다.
○ 동간1리 동편마을
영광정씨 23대손 정찬이 영성군을 봉하여 이로 인하여 동편에 입주하였고 1586년에 연안김씨 김인택씨가 이주해서 이루어졌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간리에 편입되었고 동간리 동쪽에
위치하여 동편이라고 하였다 한다.
유물로써 연안김씨종택이 중요 민속자료 제234호로 지정되어 있다.
○ 포천2리 양지마을
조선조때 해주오씨 오세윤씨의 7대조 오의수가 200여년전에 입주하였고 그후로 김해김씨, 창녕박씨 등이 차례로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햇볕이 잘 드는 땅이라 하여 양지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포천리에 편입되었고 1980년 행정
운영상 포천2리로 편입되었다.
○ 포천1리 죽신마을
조선조말엽 광주이씨 17대손 이춘중이 서강에서 입주하고 그 뒤
무안박씨 등이 입주하면서 이루어졌으며 마을이 번창하여 산 아래로 내려오면서 마을이 새롭게 태어나 죽순처럼 무성하다하여 죽신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포천리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포천1리로 구분 편입되었다.
○ 포천 1,2리 포천마을
조선조때 경주최씨의 21대손 최철윤이 광산군 대촌에서 이거 입주하고 1920년 반안리 구 장터에서 화적 때문에 포천으로 시장을 옮기게 되어
그후 마을이 이루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령, 내동, 양지를 합하여 포천리라 하였고, 1980년대에 5일시장의 일부와 양지를 포천2구로 분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