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27일 오전 5시 한국인 최초로 혜성(彗星) 발견, 2010년 5월 7일 오전 3시 29분 한국인 최초로 신성(新星) 발견…. 2009년과 2010년 혜성과 신성을 연달아 발견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아마추어 천문가 이대암 영월곤충박물관장에게 인터뷰하고 싶다고 전화했더니, “별을 볼 수 있는 밤마다 꼬박 밤을 새야 해서 시간이 없다”고 난처해했다. 박물관으로 찾아갔을 때도 그는 정신없이 바빴다. 옛 발해 땅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나라 광릉 숲에 이르는 지역에서만 서식하다 멸종 위기에 처한 장수하늘소를 복원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사업을 벌이고 있는데다, 국립국악원으로부터는 고대 가야악기의 복원 설계를 의뢰받았다고 한다.
“장수하늘소 복원 때문에 푸틴 러시아 총리에게 협조를 구하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인터뷰는 여기저기에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중간중간 끊겼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공간, 서울건축, 대우건설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 사무소와 건설회사에서 일한 건축 전문가이자 건축학 박사로, 세경대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클래식 기타로 스페인 유학을 갈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로 음악에도 심취해 있는 그는 건축과 음악을 연결시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요즘도 간간이 음악관련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한다.
2002년 한국 최초로 곤충박물관을 세운 그는 2008년, 신종 나비를 발견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2005년에는 15년간 찍은 구름 사진 2000장을 모아 《구름 쉽게 찾기》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구름도감을 만들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분야로 관심을 뻗으며 각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내놓을 수 있을까? 학문이든 일이든 분업화된 요즘 사회에서는 보기 어려운 ‘르네상스맨’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으려면 하나씩 차례로 물어야 했다. 먼저 우주에 대한 관심. 아마추어 천문가가 혜성과 신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으로 그의 우주 강의가 시작되었다.
“신성은 1년에 5~6개가 발견되고, 혜성을 인간이 발견하는 것은 6년 만에 하나 정도입니다.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죠. 혜성은 얼음 덩어리라 할 수 있는데, 반사율이 아스팔트의 50분의 1로 굉장히 어둡습니다. 그러니 그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는데, 태양 가까이에 왔을 때 태양풍 등의 영향으로 가스를 방출하면서 존재를 드러내지요. 신성은 두 별이 에너지를 주고받다 한쪽 별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수천 배 또는 수만 배씩 밝아지는 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귀다 싸우고 폭발하는 것 같아요.”
이대암 관장이 발견한 혜성(초록색 별) 사진. |
별들이 촘촘히 점을 찍어놓은 것 같은 밤하늘에서 새로 나타난 별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새로운 모래알을 찾아내거나 태평양에서 바늘 하나 건지는 일’처럼 지난(至難)한 과정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해냈느냐는 물음에 그는 “무식한 거죠. 잠을 안 자는 거예요. 밤하늘 사진을 계속 찍어 눈이 빠지도록 들여다보며 바늘 하나 안 들어갈 만큼 빽빽한 하늘에서 새롭게 나타난 점 하나를 찾아내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천체에 대한 기본지식이 축적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구름이 끼거나 달빛이 밝아 별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날이 아니면 그는 밤이면 밤마다 새로운 별을 찾아 ‘잠복근무’를 하고, ‘순찰’을 돌았다고 한다. 이 일을 위해 2006년 말, 대학교수직까지 버렸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고가의 장비를 마련해 밤마다 별을 보는 가장을 가족들이 탐탁해할 리 없다. 그래서 “이혼당하게 생겼다”고 하면서도 그는 다시 대장정에 나설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이제는 초신성을 발견하겠다는 것. 초신성은 항성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별이 폭발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방출, 평소보다 수억 배 밝아지는 현상이다. 별의 일생 중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여주는 초신성은 우주 형성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혜성은 태양계, 신성은 우리 은하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면, 초신성은 외계 은하계에서 찾아내야 해서 장비를 다시 갖춰야 합니다.”
그는 고배율 망원경과 카메라를 갖추고, 천체관측용 돔이 들어가는 개인 천문대를 새로 짓고 있다고 한다. 혜성·신성·초신성에 이어 소행성까지 발견하는 게 그의 궁극적인 꿈. 그는 왜 사재를 털어 넣으며 ‘별 찾기’에 나섰을까? 그 꿈은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때 도서관에서 천문학 책을 발견한 후 계속 우주에 관심이 있었어요. 별에 사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는 ‘나도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고, 그 꿈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래는 ‘청년 이대암이 별을 발견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미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별 보는 데 집중하기 위해 대학교수직도 버려
망원경을 마련하는 데 10년, 별 볼 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데 다시 10년…. 1995년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별을 잘 볼 수 있는 곳을 찾아 영월로 왔다.
“한 신문에 ‘북한은 아직 어둡다’는 제목으로 인공위성에서 찍은 한반도의 밤 사진이 실렸는데, 남한에서 어디가 가장 어두운지(인공조명이 없어) 봤더니, 설악산과 경북 상주, 강원도 영월이더라고요. 마침 영월의 대학에서 교수 모집 공고를 냈기에 바로 왔죠.”
그는 “별이 안 보이는 하늘 아래 사는 것은 시궁창에서 사는 것과 같았다”고 말한다. 2002년 폐교에 한국 최초로 곤충박물관을 세운 그는 낮에는 강의하고, 밤에는 별 보고, 방학 때면 벌레를 쫓아다녔다. 그러다 교수직을 버렸다. 50대 중반에 스스로 직업을 버린 것에 대해 그는 “낙하산 없이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일”이라며 “꿈은 누구나 꾸지만, 그 꿈을 실현하는 데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007년 1월 1일, 그는 ‘이제부터 내 시간과 돈, 정력을 모두 별 찾는 데 쏟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했다. 그 후 춥고 졸린 것을 뿌리치며 별보기에 매달려 한국인 최초로 혜성을 찾아냈고, 국제천문연맹(IAU)이 혜성 발견자에게 주는 애드거 윌슨상을, 일본 동아천문학회의 ‘신(新)천체발견상’을 받았다.
“제가 발견한 혜성의 주기가 2만 년이에요. 1만년 전 길을 떠난 혜성이 태양 가까이 와서 저를 만난 겁니다. 얼마나 감동적이에요? 제가 발견한 신성은 지금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몇 백 광년 전의 빛을 보는 것이니까요. 우주를 알면 알수록, 내가 안다는 게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낄 뿐입니다.”
일본인이 처음 혜성을 발견한 것은 1919년. 일본에는 아마추어 천문가가 흔한데 우리는 찾기 어렵다면서 “이게 우주시대를 맞는 우리와 일본의 격차”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별보기에 대해 “독립운동하는 심정”이라고 말한다.
“혜성·신성·초신성을 하나씩은 발견해놓을 겁니다. 그래야 내 뒤를 좇는 사람이 생길 것 아닙니까? 일본에서는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네트워크를 만들어 분업화해 별보기를 합니다. 우리도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은퇴한 분들이 별을 보기 시작했으면 합니다. 위도마다 별을 보는 사람이 있어 서로 정보와 경험을 나누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으니까요.”
광활한 우주를 순찰하는 그가 사람들이 ‘벌레’라고 도외시하는 곤충에 또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자신을 따라 버스터미널까지 들어왔던 나비 한 마리를 잡은 게 계기가 돼 곤충학자를 찾아가고 책을 뒤지며 곤충 채집가가 되었던 것. 그는 30여 년 채집한 곤충 표본 4000여 점으로 한국 최초의 곤충박물관을 열었다. 대우주와 소우주는 같은 리듬과 질서를 갖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 음악과 건축에서도 그는 그런 질서와 비례를 찾아낸다. 그의 관심은 여기저기 뻗어 있지만, 결국 우주적 질서에 대한 탐구로 귀결되는 셈이다. 결국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게 아닐까? 그는 스스로 “한손에는 망원경, 한손에는 현미경을 들고 있는 ‘또라이’”라고 말한다. “소행성은 찾아낸 사람이 이름도 붙일 수 있는데, 제가 찾으면 ‘김정호’라고 명명할 생각입니다”라고 한다.
“온갖 핍박을 받으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또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또라이가 세상을 바꾸고,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 아닙니까?”
사진 : 김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