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이 전한 漢字의 수수께끼: 덕(德)과 업(業)
작자:우한런(武漢仁) 【정견망 2005년 8월 3일】
역대로 전해진 《노자(老子)》(즉, 《도덕경》)는 《도경(道經)》이 앞에 있고 《덕경(德經)》이 뒤에 있다. 그러나 1973년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에서 출토된 백서 《노자》 갑본과 을본에는 이와 반대로 모두 《덕경》이 《도경》앞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 도덕경(道德經)이 아니라 《덕도경(德道經)》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덕(德)이 도(道)보다 앞에 나오는가? 역대로 《노자》에 주석을 단 학자들은 노자의 진정한 전수를 얻지 못했고 심지어 수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덕과 도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때문에 《덕경》과 《도경》의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노자는 《덕경》을 앞에 놓고 《도경》을 뒤에 놓았으니 이는 ‘덕’이 ‘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덕’이 ‘도’의 기초가 되며 수련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강조하고 ‘중용(中庸)의 도’를 강조했으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역시 ‘인(仁)’을 자기 학설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인’이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중국인(한자문화권을 포함)들이 마땅히 구비해야 할 ‘덕’이다.
덕(德)
설문해자에 나오는 덕에 대한 설명
석가모니부처는 49년간 법(法)을 전했고 지금까지 만권에 달하는 《대장경》이 남아 있는데 그는 대체 무엇을 말했는가? 그는 ‘계정혜(戒定慧)’를 말했다. 석가모니는 만년에 이르러 자신이 열반한 후에는 마땅히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는 모두 인도인(후대의 동남아시아 불교신도들을 포함)들이 마땅히 갖춰야 할 ‘덕’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선지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는 도덕이란 한 사람의 지위, 등급, 재산이나 명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덕적인 승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본성을 찾는 것에 달렸다고 했다. 이는 《설문해자》에서 말하는 “덕이란 올라감이다(德,升也).”와 통하며 현재 파룬궁 수련생들이 말하는 “안으로 수련하고(向內修)”, “반본귀진(返本歸眞)”한다는 말과도 아주 유사하다!
예수는 《신약전서》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완전히 하느님을 믿는 상태에 도달해야 하며 남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유태인(나중에 서양 각국의 백인 기독교신자들을 포함)들이 마땅히 갖춰야 할 ‘덕’이었다.
한자 업(業)
고문(古文) 업(業)
설문해자에 나오는 업에 대한 설명
이처럼 동방과 서방, 도가(道家)와 불가(佛家)를 막론하고 표면적인 설명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 대각자, 성인과 선지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유사하다. 노자,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에게는 ‘덕’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특히 수련인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는 인류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도덕규범이며 속인이 반본귀진하여 좋은 사람이 되는 기초이자 수련인이 법을 얻고(혹은 도를 얻고) 수련하며 공이 자라올라 원만에 이르는 기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덕이란 글자에는 대체 어떤 함의가 담겨 있을까?
덕[德, 恴, 悳, 惪(德의 우변, 十四一心)]에 대해 《설문해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덕은 올라간다는 것이다. 彳은 의미부분이고 惪은 발음부분이다.(德,升也. 從彳, 惪聲)”
여기서 덕이 올라간다고 풀이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덕이란 사람의 도덕이기 때문에 사람이 심성(心性)이 위로 승화되면 덕이 고층차로 올라가는데 덕이란 바로 수련자가 수련에 정진하는 것이다. 때문에 덕이란 글자는 ‘척(彳)’을 부수로 한다. 척(彳)이란 사람의 하지에서 고관절과 정강이, 발이 서로 연결된 것을 그린 것으로 사람이 천천히 걷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덕이란 빨리 뛰거나 도약하는 것이 아니고 평지에서 산보하는 것도 아니며 제자리에서 답보하는 것도 아니며 한걸음 한걸음씩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덕은 사람의 능력이나 행복을 결정하며 윤회의 방향과 층차를 결정한다. 때문에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덕이 있어야 하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어야 하고 버림이 있어야 하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수련자에 대해 말하자면 덕은 수련의 난이도와 공(功)의 높이 및 도달할 수 있는 층차와 과위(果位)를 결정한다.
한편, 《설문해자》에서는 득(得)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득(得)이란 길을 가다가 얻은 것이 있다는 뜻이다. 彳은 의미부분이고 㝵는 소리부분이다. 䙷는 고문인데 彳을 생략했다(得,行有所得也,從彳,㝵聲. 䙷, 古文,省彳.”
이 득(得)이란 글자는 또한 덕(德)과 통하는데 덕이 없으면 얻음이 없고 덕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다. 때문에 ‘㝵’과 ‘䙷’도 모두 덕과 통한다.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덕이 없으면 복(福)이 없으며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덕이 없으면 수련해도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왜냐하면 수련이란 덕을 공(功)으로 연화(演化)시키는 것인데 당신에게 덕이 없다면 전화시킬 공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심성(心性, 심성이란 덕을 포함한다)은 수련자가 층차를 제고하고 높은 공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관건적인 것이다.
그럼 업(業)이란 무엇인가? 《설문해자》에서는 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업이란 큰 널빤지를 말한다. 여기에 종이나 북 등 악기를 매단다. 널빤지를 톱니처럼 깎아서 그것에 흰 칠을 해서 사용하는데 톱니모양이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본뜬 것이다. 착(丵)과 건(巾)은 모두 의미부분이다. 巾은 널빤지를 그린 것이다.
은 고문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업이란 글자는 원래 종과 북을 장식하던 나무판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 글자는 한자에 그리 깊은 뜻이 없다. 지금 이 업력(業力), 업을 짓는다(造業)에서 말하는 업의 함의는 사실 범어 ‘카르마(羯磨 Karma)’에서 온 것이다.
불교에서는 삼계(三界) 내의 생명은 육도(六道) 중에서 생사를 윤회한다고 하는데 이는 업이 결정하는 것이다. 업에는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업이란 악업을 지칭한다. 업에는 신업(身業), 구업(口業)과 의업(意業) 등 3가지가 있다. 이 ‘업’이란 다시 말해 ‘인과응보’의 의미이다.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진 이후 업이란 글자의 내포가 아주 깊어졌다. 물론 중국 고대 문헌 중에도 인과응보와 유사한 말이 존재했다.
가령 노자는 “도로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천하에 무력을 앞세우지 않으니 그 일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以道佐人主者,不以兵強天下,其事好還)”(《노장》제30장)라고 했다. 이것이 천도호환(天道好還)이란 고사성어가 생긴 연원이다.
노자는 또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으니 늘 선한 사람과 함께 하네(天道無親,常與善人)”《노장》제79장)라고도 했다.
덕(德)과 업(業)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수련 중에서 아주 중요한 대응 개념이다. 위에서 우리는 이미 “덕이란 올라가는 것(德,升也)”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업이란 내려가는 것(業,降也)”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속인은 덕과 업이 일종의 정신적인 것으로만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단지 일종의 이데올로기 방면의 개념이 아니며 진실한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의 장(場)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이 세계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여러 층의 물질공간이 존재한다. 우리 신체 주변의 특정한 물질 공간 중에는 일종 백색물질장(白色物質場)이 존재하는데(애석하게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이 장이 바로 덕이다. 동시에 또 일종 흑색물질장(역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업이다.
덕과 업 두 가지 물질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서로 전화(轉化)될 수 있으며 또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계승되거나 자손에게 전해질 수도 있다. 이것들은 신체 주위에서 자라나는데 당신의 주원신(主元神)을 따라 윤회전생한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하거나 얻어맞거나 혹은 욕을 먹거나 고통을 겪고 시달림을 겪으면 덕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곧 백색물질장이 증가하는데 바로 ‘덕’을 쌓은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흑색물질장이 감소한 것으로 ‘업’을 없앤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고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며 남을 기만하거나 살생하면 곧 업을 짓고 업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되면 흑색물질장이 증가한다. 바꿔 말하자면 백색물질장이 감소한 것으로 덕을 손상하고 덕을 잃은 것이다.
업을 지으면 장차 재앙을 초래하고 시달림을 겪게 되는데 금생에 업을 갚는 것을 ‘현세현보(現世現報)’라 하며 여러 세(世)가 지난 후 갚는 것을 ‘격세보응(隔世報應)’이라 한다. 우리가 이쪽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처럼 다른 공간에서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 바로 덕이다. 돈이 없으면 물건을 살 수 없듯이 덕이 없으면 좋은 것을 얻을 수 없다.
만약 당신의 덕이 크다면 당신의 복도 크기에 당신은 큰 벼슬을 하거나 큰 부자가 될 수 있고 땅이나 집을 소유할 수 있으며 부부간에 화목하고 자손이 번창하며 무병장수 할 수 있다. 뜻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고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덕으로 교환해 오는 것이다.
당신에게 덕이 있기 때문에 고층차로 되돌아 올라갈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며 때문에 “덕이란 올라가는 것”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만약 덕이 작다면 도처에 번거로움이 많을 것이며 장애가 큰데 무슨 일을 하든 모두 곤란을 겪는다. 당신은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겪게 된다. 만약 당신의 업력이 크고 덕이 더욱 작다면 무슨 일을 하든 모두 당신의 뜻과 어그러질 것이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어쩌면 밥을 빌어먹는 것조차 어려울지 모른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교환할 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업력이 너무나 커서 덕이 전혀 없다면 심지어 더는 육도윤회를 할 자격조차 취소되는 무생지문(無生之門)에 떨어질지 모른다. 이렇게 되면 소나 말로도 윤회할 수 없으며 최후에 형신전멸(形神全滅)되어 철저히 훼멸된다. 당신의 업력이 크고 덕이 없다면 곧 저층차로 추락할 가능성이 큰데 때문에 “업이란 내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들 중에 아주 나쁘고 인색하며 덕을 많이 잃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나보다 덕이 적지 않은가! 라고 질문할 것이다. 당신은 아마 하늘이 당신에 대해 특별히 불공평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사실 일부 돈이 많은 사람들은 아주 좋지 못하지만 그는 전생에 많은 덕을 쌓았기 때문에 금생에 당신보다 나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덕이 없으면서도 기어이 얻으려 하는데 남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는 훔치고 강탈하며 기만하거나 심지어 살인방화까지도 저지르는데 좋지 않은 수단을 써서 억지로 돈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덕이 모두 소진되어 오히려 적자가 되는데 다시 말해 업을 짓는 것이다. 이 얼마나 나쁜가!
표면적으로 보자면 그는 잠시 당신보다 낫고 당신보다 부유하며 으스대면서 허풍을 떨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가 이후에 어떤 처지에 떨어질지 모른다. 나쁜 짓을 저질러 몸을 망치고 명성에 금이 가며 감옥에 들어가거나 가족들에게 연루되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업의 빚(業債)은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으며 숨으려 해도 숨을 수 없는 법이다. 빠르건 늦건 빚은 모두 갚아야 하며 금생에 갚지 못하면 내세에 갚아야 하는데 내세에는 아마 더 운이 나쁠 것이다.
당신에게 덕이 있다면 설사 금생에 얻지 못한다 해도 내세에 얻을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표면적인 현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이 우주 중에는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며 얻으려면 잃어야 한다는 이치가 있는데 당신이 잃지 않으면 강제로 잃게 한다.”(《전법륜》)
인류사회는 본래 미혹 중에 있으나 우주의 법리는 영원히 공평한 것이다. 덕은 올라가고 업은 내려가며 인과에 보응이 있다는 것은 한 치의 착오도 없는 확실한 진리이다. 당신이 만약 올라가려 한다면 당신은 마땅히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 당신이 만약 나쁜 일을 많이 한다면 곧 아래로 추락하며 업을 많이 짓게 될 것이다. 당신이 만약 심지어 형신전멸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멋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그럼 당신은 무생지문에 들어갈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주 경건하고 늘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고 예배하거나, 사찰에 가서 예불하며 공덕상자에 돈을 넣는다. 하지만 당신이 덕은 올라가고 업은 내려간다는 이 이치를 모른다면 당신이 낸 돈은 헛된 것일지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한편으로는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헌금을 하고 신의 보호를 구한다. 이를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얻으려 하는 것이겠지만 신이 어찌 이런 사람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신은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으로 바로 당신의 심성을 본다. 다시 말해 당신의 덕과 업이 얼마나 되는가에 근거해 당신의 승강부침(升降沉浮)과 생사존멸(生死存滅)을 결정한다.
설마 석가모니나 예수가 권세와 이익을 쫓아 “사찰(또는 교회) 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돈이 없으면 들어오지 말라!”고 할 리가 있는가? 그들이 사람이 낸 돈의 액수에 따라 그에게 복을 내려주겠는가? 설마 염라대왕이 돈을 밝히며 뒷거래를 하면서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에게 함부로 수명을 연장해 줄 수 있겠는가? 당신은 정말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여기는가? 이런 것들은 모두 불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관건적인 문제는 여전히 자신의 내심 깊은 곳으로부터 좋게 변하고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덕과 업이란 이런 중대한 일을 잘해야 하는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일에 달린 것이 아니다.
발표시간:2005년 8월 3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5/8/3/333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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