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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因(환인)⦁桓雄(환웅)⦁檀君(단군)
一. 환인(桓因)
요약단군신화(檀君神話)에 나오는 신적인 존재.
환웅(桓雄)의 아버지이며 단군의 할아버지인 천제(天帝)로, 인간 세상을 바라는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환인은 불경의 제석환인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一然)이나 보주자 무극(無極)이 윤색한 것으로 보이며, 원래는 ‘하늘’ ‘하느님’이라는 한글의 근원이 되는 어떤 어형의 음사(音寫)로 본다.
참조항목 : 단군, 환웅, 한국신화
역참조항목 : 삼성사, 삼신, 천부인, 홍익인간
桓因(환인)
환인(桓因)은 신화 상의 신격(神格) 인물로 환웅의 아버지로 전해진다. ‘단인(檀因)’이라고도 한다. 한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등장하며 환웅이 인간세상으로 내려가 세상을 다스릴 것을 허락하고 천부인 3개를 주었다고 한다.
槪要(개요)
《삼국유사》, 《제왕운기》, 《조선왕조실록》 등에 환인에 대한 짧은 기록이 전해지며,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환인은 하늘의 신(帝釋天)이라고 한다. 서자(庶子)인 환웅이 땅을 내려다보면서 인간세상에 뜻을 두는 것을 알게 된 환인은 땅의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았고, 그곳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다(弘益人間)’고 여겼다. 이에 환웅에게 천부인 3개를 내려주며 땅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제왕운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환인이 상제환인(上帝桓因)이라 한다. 환웅이 삼위태백으로 내려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고 말하자 환인은 이를 허락하고 천부인 3개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가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었다.
出典(출전) : 환인(桓因)이 나오는 《삼국유사》 제1권의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 말함])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天下)를 차지할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人世]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位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인간의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마루턱(곧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 수명(壽命) · 질병(疾病) · 형벌(刑罰) · 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人間)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했다."
— 《삼국유사》 권제1 〈기이(紀異) 제1〉. 한문본 & 한글본
桓因(환인)의 意味(의미)
불교 우주론의 1수미세계(一須彌世界): 가운데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忉利天)이 있으며, 도리천의 왕이 제석천 즉 환인(桓因)이다. 풍륜 위에 수륜이 있고, 수륜 위에 금륜이 있으며, 금륜 위에 4대주(四大洲)와 9산8해(九山八海)가 있다. 수미산은 9산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유사》의 제석(帝釋)이라는 표현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환인(帝釋桓因, 인드라)에서 차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를 원래의 신화에 불교적 색채가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 한편 원래의 신화에서도 환인(桓因)이라는 명칭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를 천신(天神, 하늘님/한님)이나 태양신(환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2]
불교 용어로서의 환인(桓因)은 불교 우주론에서 6욕천 중 제2천인 도리천(33천)의 왕인 제석천(帝釋天)의 다른 이름이다. 제석천의 산스크리트어 원명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산스크리트어: Śakra Devānām-indra, 팔리어: Sakka devānam indo)인데 '데바들의 왕, 샤크라(Śakra, lord of the devas)'를 뜻한다.[3] 음역하여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라고도 하며, 이것을 줄여서 석제환인(釋提桓因) 또는 석가제바(釋迦提婆)라고도 한다.[4][5]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에서 석가는 샤크라(Śakra)의 음역어인데, 샤크라는 힌두교의 신 인드라(Indra)의 여러 다른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제환은 데바남(Devānām)의 음역어인데 '데바들의(of devas, of gods, of demigods)'를 뜻하며,[6] 제바(提婆)라고도 음역하며 보통 의역하여 천(天)이라고 한다. 인다라는 인드라(indra)의 음역어인데 우두머리(chief) 또는 왕(king)을 뜻한다. 따라서 석가제환인다라는 "데바들의 왕, 샤크라" 또는 "신[天]들의 제왕, 샤크라"를 뜻한다. 환인(桓因)은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에서 '환인'을 추출하여 약어로 삼은 것으로, 따라서 환인이라는 명칭은 당연히 원래의 명칭이 뜻하는 바인 데바들의 왕 또는 신들의 제왕을 의미한다.[4][7]
한편 제석(帝釋)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천제(天帝) 샤크라(Sovereign Śakra)' 즉 '신[天]들의 제왕[帝], 샤크라[釋](king of the gods, Śakra)'이며,[8] 산스크리트어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 Devānām-indra, 釋迦提桓因陀羅)의 의역어라 할 수 있다. 즉, 환인은 산스크리트어 원명의 음역어의 줄임말이고, 이에 비해 제석 또는 제석천은 의역어이다. 또한 제석천은 간단히 천주(天主)라고도 하는데, 이것도 역시 '데바[天]들의 왕[主]'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인드라(Indra)를 의역한 것이다.[4][7]
僞書(위서) 속의 桓因(환인)
《환단고기》에는 환인이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가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신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지만 동시에 환국이라는 나라의 군주로도 나타나며, 7대에 이르는 역대 환인이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는 환인의 표기를 일반적인 역사서와 달리 하고 있는데, 桓因과 桓仁의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9] 한편 《규원사화》의 〈조판기〉에도 환인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 다수의 작은 신(小神)을 거느리고, 환웅에게 명을 내리는 존재로서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환(桓)’은 밝은 빛으로 그 모양을 본떴다고 하며, ‘인(因)’은 만물이 그로부터 생겨났음을 의미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조여적이 지은 선가서(仙家書) 《청학집(靑鶴集)》에는 신라인들이 환인(桓仁)을 동방 최초의 선도(仙道)의 조사(祖師)이며 진인(眞人)이라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10]
그러나 일반적으로 《청학집》과 같이 후대에 찬술된 도가의 문헌은 선대의 유명인을 견강부회하여 서술하는 경향이 많아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으며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등의 서적 역시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11]
환인(桓因)과 환국(桓國)
삼국유사#조작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조선 중종때 나온 〈정덕임신본〉 에는, 환인(桓因)이 환국(桓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로 인해 조선 중기 이후의 사찬 역사서들 중 일부에 단군신화의 해당 구절이 ‘환국(桓國)’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불승들이 환국을 환인이라 조작하였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1965년 문정창이라는 재야사학자에 의해 재조명받으며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날조한 것’이라 주장되었다. 하지만 〈정덕임신본〉의 환국(桓囯) 표기는 오각(목판을 만드는 사람이 실수로 잘못 판 것)임이 확인되어 현재는 환국의 존재를 인정하는 국사학자는 없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아직도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다.[12]
二. 환웅(桓雄)
이칭별칭 : 기타 천왕(天王), 기타 신웅(神雄), 기타 단웅천왕(檀雄天王)
정의 :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檀君)의 아버지라고 하는 신화상의 인물.
내용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환웅(桓雄)·천왕(天王)·신웅(神雄) 등으로,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웅(雄)·단웅천왕(檀雄天王)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고기(古記)』에 의하면, 하느님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여러 아들 중의 하나라는 뜻)로서 자주 천하(天下)를 차지할 뜻을 가지고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 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 뜻을 알아차린 아버지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이곳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그리고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과 수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며 교화하였다.
이 때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호랑이와 곰 한 마리에게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었다. 그 결과, 곰이 변한 여자(熊女)와 잠시 사람으로 변해 혼인하여 단군(檀君)을 낳았다고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의 몸으로 변하게 한 다음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단군신화 중 불교적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환인(桓因)이나, 도교적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풍백·우사·운사 등의 사용이 후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단군신화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제왕운기』에서도 환인을 상제(上帝)와 함께 석제(釋帝)라고 표현하고 있어 불교의 산스크리트어인 ‘Sakrodevanam Indrah’라는 말을 한자로 음역한 ‘석제환인(釋帝桓因)’에서 나온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단군신화가 불교나 도교가 수용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신화 생성 후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이 문자화되면서 후대적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환인이라는 단어는 하늘님·천신(天神)이라는 뜻을 문자화하던 시기에 불교 혹은 도교의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내용에 있어서 환웅의 하강은 기존질서에서 일정한 자기위치의 확보가 어려운 존재가 낡은 질서를 탈피하여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이주자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또한 상대적으로 하늘의 능동적인 위치에 의해 삼위태백(三危太伯)이라는 하나의 공간이 선택받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즉, 하늘로부터 하강한 수직적 이주자로서 인간세상을 구하겠다는 행위의 방향과 목적을 설정하여 자기확인 작업을 완료하고, 다시 환인으로부터 자기행위의 정통성을 부여받아 신시를 건설하고, 곰과 호랑이에게 통과의례를 부과하여 기존질서·토착문화집단으로 하여금 환웅 자신의 질서에 적응하게 한 뒤에, 단군을 탄생시켜 질적 변화를 꾀하였다.
환웅의 구체적인 성격은 일차적으로 ‘桓’자의 어의와 의미가 하늘 또는 빛(光明)으로 태양신(太陽神) 내지 천신 또는 천왕을 뜻한다. 그리고 ‘雄’은 글자 자체가 수컷을 나타내며, 웅녀와 혼인한 것으로 보아서도 남신(男神)임을 뜻한다.
이처럼 환웅은 하늘〔天〕·빛·남성·부신(父神)의 성격을 가진 존재인데 비해, 곰은 땅〔地〕·암흑·여성·모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환웅은 유목문화집단(遊牧文化集團)을 상징하고, 곰은 농경문화집단(農耕文化集團)을 상징한다.
따라서 환웅의 하강설화(下降說話)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하늘숭배사상의 문화집단과 곰으로 상징되는 지모신신앙(地母神信仰)의 문화집단이 결합하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환웅은 단군신화 속에서 실질적인 주체자로서 자기의지와 실천력을 바탕으로 새 질서를 창조하였다. 이는 환웅으로 상징되는 문화집단의 정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정착과정에서 발생한 문화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제왕운기(帝王韻紀)』『단군과 고조선사』(노태돈, 사계절, 2000)「신화 속의 단군」(서영대, 『한국사 시민강좌』27, 일조각, 2000)「단군신화(檀君神話)에 대한 구조적 분석(構造的分析)」(윤명철, 『한국사상사학』2, 1988)
『최남선전집(崔南善全集)』2(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3)「단군신화와 민족적 이념」(이홍직, 『국사상의 제문제』1, 국사편찬위원회, 1959)
「단군고(檀君考)」(윤세부, 『학술지(學術誌)』2, 건국대학교, 1959)『단군신화(檀君神話)의 신연구(新硏究)』(김재원, 정음사(正音社), 1947)
三. 檀君(단군)
일연(고려 후기, 1206-1289)이 1281년(충렬왕 7)경에 편찬한 사서.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실려 있는 단군 기록은, 환인의 서자 환웅이 세상에 내려와 곰으로 변한 웅녀와 혼인하여 낳은 아이가 檀君王儉(단군왕검)이라 전한다.
이칭별칭 : 檀君王儉(단군왕검), 檀雄天王 (단웅천왕)
시대 : 고대/초기국가/고조선
정의 : 한민족의 시조로서 고조선(古朝鮮: 檀君朝鮮)의 첫 국왕.
槪說(개설)
단군(壇君)은 단군왕검(壇君王儉)·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 서기전 2333년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조선을 개국하였다.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위서(魏書)』와 우리 나라의『고기(古記)』를 인용한『삼국유사』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반면에 정사인『삼국사기』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비된다.
한편, 고려시대의 기록으로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帝王韻紀)』가 있으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조선 초기의 기록인 권람(權擥)의『응제시주(應製詩註)』와『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반적으로 단군의 탄생과 고조선 건국에 관한 문제를 논급할 때 일차적으로 인용하는 기록은『삼국유사』이다. 먼저『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환인의 서자(庶子: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 환웅이 자주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렸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 속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였는데 3·7일(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이것을 못 참아서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해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壇君王儉)이다. 왕검이 당고(唐高 : 중국의 성군인 三皇五帝 가운데 堯임금을 말함. 당시 고려의 3대 왕인 定宗의 이름이 堯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비슷한 의미인 高자로 대신 쓴 것임) 즉위 후 50년인 경인(庚寅: 당고의 즉위년은 戊辰이므로 50년은 丁巳요 경인이 아니니 틀린 듯함)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弓 대신 方자로도 씀)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하였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나라 호왕(虎王: 주나라의 武王을 말함. 고려 2대왕 惠宗의 이름 武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임금으로 봉하였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한편,『제왕운기』에서는『본기(本紀)』(본기는 ‘단군본기’인 듯함)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 주고 있다.
단군본기인용
“상제(上帝)인 환인에게 서자인 웅(雄)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 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아 귀신〔鬼〕3,000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오니 이가 바로 단웅천왕이다.……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셔 사람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조선 지역에 근거하여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시라(尸羅: 신라)·고례(高禮: 고구려)·남북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扶餘)·예(濊)·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계이다. 1,038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죽지 않은 까닭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단군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두 기록은 기본적인 내용에서는 비슷하나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먼저 단군을 표현함에 있어『삼국유사』에서는 ‘제단 단(壇)’자로 단군을 기록하고 있고『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단(檀)’자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각기 다르게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후자로써 단군을 나타낸다.
한편,『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조에서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함께 기록하고 있으나,『제왕운기』에서는 전조선(前朝鮮)이라는 항목에서 단군에 의한 조선을 기술하고, 후조선(後朝鮮) 항목에서 기자에 의한 조선을 언급하여 후속하는 위만조선과 함께 삼조선(三朝鮮)으로 구분하여 파악하고 있다.
단군신화에 관한 견해
단군신화 관련 내용은 단군 연구에 있어 기본적인 자료로서 활용되었으나, 중심적인 내용은『삼국유사』의 것을 근간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첫째,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한 종족 신화이던 것인데,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민족의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삼국유사』의 편찬 시기가 위에서 언급한 시대와 거의 같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이는 앞서『제왕운기』에서 구월산(九月山)을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는 내용과도 연결된다.
한편,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함께 모신 이후로 단군은 명실상부한 국조(國祖)가 되었다. 또,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 환인·환웅·단군을 배향)가 있고 강동(江東)에는 단군의 무덤이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하였다.
둘째, 단군과 관련하여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라는 견해가 전개되었다. 즉,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민족이 분포하는데, 종족적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문화적으로 일련의 관계가 있다는 견해이다. 여기서 백산(白山)은 그 중심이고 이 문화가 우리 역사에서 구체적 실체로 나타난 것이 단군과 부루(夫婁)라는 것이다.
셋째, 단군신화에 대한 고고학적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돌방〔石室〕내의 화상석(畵像石) 그림이 문헌에 보이는 단군 신화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내용은 북방계의 샤머니즘과 관련되며, 이들 특성은 종족 이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최근 이 견해의 근간이었던 무씨사당 화상석의 내용이 단군신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넷째, 단군신화에 관한 문헌 위주의 해석이 아닌 역사적 입장에서 결론을 내린 견해도 있다. 즉, 이 신화가 삼신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이라는 두 계통의 신화가 혼재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이들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혼재된 것이며, 이것이 고조선의 일부족적 시조설화였던 것인데 삼국통일과 고려시대에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한민족의 시조신화로 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다섯째, 단군신화는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하였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이라고 보고,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적(祭主的) 의의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므로,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여섯째, 단군신화를 단순한 신화나 토테미즘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원시 부족들의 원시 신앙에 관한 내용을『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하여, 농경관계 기사를 곡물 재배 민족의 제의(祭儀)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며,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脫皮)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다.
일곱째, 단군신화의 신화 자체에 나타난 사회상을 강조하고, 또 이를 신봉한 집단이 어떠한 사회집단이었는가를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고조선의 계보가 한족(漢族)의 기자전설이 개입되어 혼란이 있음을 지적하고,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에서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고조선에 단군조선과 종래의 기자조선을 포함시킨다.
이상의 여러 견해들을 감안할 때 단군신화에 대한 이해는 문헌과 고고학적 방법을 연결시켜 분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즉, 단군신화가 포용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가 과연 고고학적으로 어떠한 문화를 내포한 시대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편, 단군을 중심으로 볼 때 웅녀의 존재는 곰의 자손이라는 사상이 중심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신화 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과 연결시켜 고려할 때 고아시아족(古亞細亞族, Paleo Asiatic)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다. 이들의 시조신화에는 곰 숭배사상이 나타나며 그들은 자신들이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고아시아족이 곰 숭배와 함께 갖고 있는 샤머니즘에서의 종교적 요소와 단군신화를 비교해 보면, 최고의 샤먼을 지칭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신화의 ‘단군’, 그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 관념과 단군신화의 신단수 등은 단군신화의 내용을 고아시아족과 연결시켜 파악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되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이라는 사실에서, 단군신화의 시대적 성격이 신석기문화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로 변화한 것이 종족과 문화 변화의 결과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종족이 알타이 계통의 예맥족이며, 그 출현 시기는 이른바 기자조선으로의 변화 시기와 부합한다는 것에서 그 전환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와 함께 단군의 개국 연대가 중국의 요임금과 연결되어 있으나 이 점은 더 연구를 필요로 한다. 최근 이 시기의 문제와 관련하여 요령(遼寧)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 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문화와 우리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약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단군신화를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즉, 첫째 단계에서는 씨족 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 토템이 생겼고, 둘째 단계에서는 ‘군사 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이며, 셋째 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후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보는 것인데, 이에는 보다 철저한 검증이 요구된다.
또, 단군 관계 문헌에 대하여,『삼국유사』를 불가(佛家) 계통의 사서로,『제왕운기』등은 유가(儒家) 계통의 사서로,『규원사화(揆園史話)』·『환단고기(桓檀古記)』등을 도가(道家) 계통의 사서로 보아 단군조선의 역사가 47대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실사(實史)였음을 강조하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단군의 민족사적 의의
역대 단군 인식의 변화를 시기에 따라 네 단계로 구분해 보기도 한다. 제1단계는 고조선 당시의 단군 인식으로 고조선 시조신으로서의 단군이며, 제2단계는 고조선 멸망 이후부터 고려 중엽(13세기)까지로 단군을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지역신으로 인식되던 시기라고 한다. 제3단계는 고려 중엽에서 한말(20세기 초)까지이며, 이 시기는 단군이 한국의 국조, 즉 나라를 처음 있게 한 시조로 숭배되던 시기이며, 제4단계는 한말부터 현재까지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인식되는 시기라고 본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이 단합하는 구심체 구실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다. 개천절은 이 종교에서 행하던 의식이었으나 광복 후에는 정부에서 정식으로 개국에 관한 국경일로 정하게 되었다. 한동안 우리 나라에서 사용한 단기(檀紀)는 고려 말 우왕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처음 사용했으며, 단기 원년을 서기전 2333년으로 보는 근거는, 조선시대의 사서인『동국통감』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임금 즉위 25년 무진으로 본 것에 있다. 단기의 사용은 1962년 1월 1일부터 중지되고 서기로만 쓰게 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三國遺事)』『제왕운기(帝王韻紀)』『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해석』(김정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10)『남북 학자들이 함께 쓴 단군과 고조선 연구』(단군학회 편, 지식산업사, 2005)『단군과 고조선사』(노태돈, 사계절, 2000)『단군과 고조선』(이형구 엮음, 살림터, 1999)『북한학계의 단군신화 연구』(서영대 편, 1995)『단군』(윤이흠 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이상시, 가나출판사, 1987)
『고조선』(유 엠 부찐, 국사편찬위원회 역, 1986)『고조선연구』(리지린, 학우서방, 1963)
『단군신화의 신연구』(김재원, 정음사, 1947)「단군 인식의 변천」(서영대,『고조선사 연구 100년:고조선사연구회·동북아역사재단 편』, 학연문화사, 2009)「한민족의 기원과 형성」(김정배,『한국고대사입문』1, 신서원, 2006)「단군인식의 변천」(박광용,『한국사학사-우송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1997)「고조선의 국가형성」(이기백,『한국사시민강좌』2, 일조각, 1988)「고조선의 재인식」(김정배,『한국사론』14, 1985:『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출판부, 1987)「아사달의 위치문제와 그 명칭의 의의」(이병도,『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단군신화의 문제점」(이기백,『한국고대사론』, 탐구당, 1975)
「고조선의 주민구성과 문화적 복합」(김정배,『백산학보』12, 1972:『한국민족문화의 기원』,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단군신화의 한 연구」(황패강,『백산학보』3, 1967)
「단군신화와 민족적 이념」(이홍직,『국사상의 제문제』1, 국사편찬위원회, 1959)「단군신화와 토테미즘」(김정학,『역사학보』7, 1954)「檀君考」(今西龍,『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1937)「不咸文化論」(崔南善,『朝鮮及朝鮮民族』1, 朝鮮思想通信社, 1927)
첫댓글 귀한글
선배님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