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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강해(18)
제목 : 부활과 영생
본문 : 요한계시록21장 1~7절
얼마전 인도서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공식집계로 만오천명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비공식집계로는 10만명이 사망하는 재해가 있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지진은 온갖 삶에 대한 계획과 기대를 가슴에 품고 일상의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냉정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평소에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의 현실이 우리에게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날 갑자기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고 관계하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우리로부터 단절되고 만다는 생각은 우리의 마음을 허무하게하고 슬프게 합니다.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을 한없이
무력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통곡하게 하는 무서운 현실입니다.
1. 성경은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노래합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면,
참으로 무상하고 덧없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이제 무언가 인생을 알 것 같고 이제부터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로 보람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우리는 인생의 레이스의 반환점을 돌아버린 이후요,
다시 레이스를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린 때입니다.
살아온 인생의 무상함은 이미 많은 성경의 시인들이 탄식한바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 비유했고(약14:4),
욥은 인간의 생명이 “한 차례 내쉬는 호홉에 지나지 않으며, 베를 짤 때 베틀이 돌아가는 북소리보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한탄한 바 있습니다(욥기7:6~7).
또한 모세는 “우리의 인생이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아났다가 저녁에는 베임을 당하여 말라버린 풀과 같으며,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인데, 그 년수도 온통 수고와 슬픔으로 얼룩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날들이 어느 정도로 빨리 가느냐 하면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신속하게 지나간다”고 탄식합니다(시편90:5, 9~12)
2. 그러나 죽음은 성도들에게 유익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은 언젠가,
우리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갑자기 죽을 수 있으며,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무상하고 헛되다는 생각은,
우리를 슬프게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같은 생각들은 성도들에게 특별한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설 때,
비로소 철이 들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많이 했는가를 깨닫게 되고 우리의 얼굴을 차마들지 못할 만큼 수치를 느끼게 되는데,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철이 드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육체적인 욕심을 억제할 수 있게 되고,
속된 생각을 저지할 수 있게 되며,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이 촉진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간이 얼마나 짧은가를 생각할 때,
그것이 짧아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짧기 때문에 소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짧은 시간조차도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이 시간들을 값있고 알차게 살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들판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을 볼 때 이 꽃을 소중하게 여기고,
애틋하게 아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이 꽃이 곧 시들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 꽃이 일년 열두달을 항상 피어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꽃을 그다지 귀중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잠깐 반짝하다가는 곧 지고 마는 우리의 인생은
사실상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품어주기에도 너무 바쁘고 짧은데,
하물며 어떻게 이 짧고 소중한 인생을 미움이라든지 질투라든지 기타 온갖 욕심들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3. 사도신경은 부활과 영생의 고백을 통해 희망찬 미래의 전망을 열어 주면서 종결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시간들을 소중하고 알차게 영위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공포와 쓸쓸함과 안타까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신경의 마지막 고백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고, 죽음이 결코 성도들에게 항상 두려움과 안타까움과 쓸쓸한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강한 소망을 제시하면서 마무리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신경은 우리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영원히 사는 것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사도신경은 신자의 부활과 영생을 고백함으로써 성도들에게 밝고 희망찬 미래의 전망을 넓게 열어 주면서 마무리되고 있는 것입니다.
4. 부활은 성도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부활됩니다
먼저 사도신경은 우리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 바로 앞에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고백이 나오는데,
우리의 죄가 사유함을 받는다는 말은
곧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이처럼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는 고백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몸도 다시 산다고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당시 유대사회나 이방사회를 막론하고,
육체의 세계는 더럽고 악하며,
영혼의 세계는 깨끗하다는 이원론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사도신경은 영혼과 몸의 전인적인 부활을 고백함으로써,
이 같은 이원론을 배격합니다.
성도들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은 사도신경의 중반부에서 이미 고백된바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예고된 약속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이 잠다는 자들 곧,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첫 열매가 곧 이어서 많은 열매들이 열릴 것을 예고하듯이,
주님의 몸이 부활하신 사건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의 몸이 장차 부활할 것을 예고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부활은 성도들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성도들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로마서 8장11절이 이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자이신 예수님을 살리시는 사역을 주도하신 분이 성부 하나님이시라면,
성도들의 죽은 몸을 살리시는 사역을 주도하시는 분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십니다.
5. 부활은 성도들만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성도들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다시 살아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몇 군데의 중요한 본문들이 마지막 날에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부활할 것을 뚜렷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4장15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도 요한복음 5장28~29절에서“[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12장2절에서 “땅의 티끝 가운데에서 자는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함으로써,
부활은 모든 인간들에게 일어나며,
한편은 생명의 부활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요,
다른 한편은 심판의 부활에 직면하게 될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받게 되는 이 때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아예 멸절되어 없어져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6. 심판대앞에 선 부활한 모든 인간들: 성도들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부활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온 모든 여정을 남김없이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과연 의로운 삶을 살았는가에 대하여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 심판에서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여정의 스크린이 돌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될 때, 아마도 부그럽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모습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누가 가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발로 걸어서 무궁한 부끄러움을 받아야 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순간에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흠 없는 의의옷,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가 배어 있는 그 옷에 감싸여서,
가볍게 생명의 나라로 들림받아 올려지는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7. 영생에 참여하는 성도들
이제 생명의 나라로 들림받아 올리워진 성도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도들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약속이 가장 풍부하게 나타나 있는 성경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영생의 복음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6:47,48,5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
부활한 성도들은 고린도전서 15:33절이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썩지 아니하는 몸을 입고” 영생에 참여하게 되는 바, 이 썩지 않는 몸은 빌립보서 3:21절이 증거하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몸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이요,
영원토록 죽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신령한 새 몸입니다.
8. 영생에 관한 오해들: 영생의 삶은 이 세상의 삶의 동질적 연장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삶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영생의 의미를 인간의 이성에 맞추어서 해석해 보려는 이론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론들로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불멸설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한 인간의 생명은 생물학적 번식을 통해서 연장된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결혼을 해서 아들이나 딸이 태어나면 이 아들이나 딸은 부모의 생명을 부여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아들이나 딸은 곧 부모의 생명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아들과 딸로부터 손자가 태어나고 증손자가 태어나고 그렇게 해서 비록 부모가 죽어도 부모의 생명은 자손을 통해서 영원토록 연장된다고 합니다.
둘째로, 사회학적 불멸설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살았을 때에 대인 및 대사회적 관계를 맺는 가운데 알게되고 사귐을 가졌던 친지나 동료들이나 제자들의 기억에 남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어떤 사람이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영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형이상학적 불멸설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향락이나 행복을 억제하고 국가, 주의, 이념, 사상 등 보다 큰 대의를 위하여 살다가 죽는다면 그 대의 안에 그의 정신이 계승되고 있으므로 그는 이 큰 대의 안에서 불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이론들이 주장하는 생명의 연장은 개인 사이의 독립성을 무시하고 개인들의 생명이 한 인간 안에 두섞여 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어떤 사람 안에 아버지도 들어 있고 할아버지도 들어 있고 증조 할아버지도 들어 있어서 도대체 누가 주체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무슨 괴물 비슷한 존재로 변하고 맙니다.
이 이론들은 개인의 독립된 인격과 몸이 다시 살아나서 다른 개인과 뒤섞이지 않고 독립된 개체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어긋납니다.
한편 일부 과학자들 가운데는 의학의 발달을 통하여 생명의 연장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의학의 연구성과가 축적되면
인간이 노화되는 원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처방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날도 오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해서 인간의 생명이 영원히 연장될수 있다 하더라도인간이 불의의 사고를 만나서 죽는 사태를 100% 방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인간이 사는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사고를 만날 확률도 커지고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 수록 치명적인 사고의 위험도 높아지는데, 과연 영원히 허락된 기간 중에 적어도 한번은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사고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라는 의문이 제기 됩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생에 대한 잘못된 이론들의 특강 가운데 하나는 한결같이 영생의 내용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의 동질적인 연장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상 우리들도 영생을 생각할 때 부지불식간에 같은 오해를 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생에 대한 염려가 생겨납니다.
이같은 오해가 아주 잘 나타난 본문이 마가복음12장18~27절에 기록된 부활에 관한 사도개인들의 질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어느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면서 답변을 요구합니다.
어떤 여자가 칠형제가 있는 가정의 맏형의 아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맏형이 죽었고, 대를 잇기 위하여 둘째 형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도 죽고 차례차례로 7형제가 다 죽어서 마침내 이 여자는 차례차례로 7형제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여자도 죽었다가 부활한 후에 다시 7형제를 만났다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가 사두개인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였습니다.
결국 이 사두개인은 부활 이후의 삶을 이 세상에서의 삶과 똑 같이 결혼생활이 계속되는 삶으로, 곧 이 세상에서의 삶과 질적으로 같은 삶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내세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질적으로 동일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거둡난 속사람은 새사람이요,
장차 우리가 가게 될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요, 새 예루렘입니다.
새롭다는 점이 특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새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삶이 바로 우리에게 약속된 영생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처음에는 새롭다가도 잠깐 지난 후에는 한결같이 시큰둥해집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은 항상 새롭게 다가 오는 신선한 감동으로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평범한 사물을 보고도 그것을 보고 새롭게 느끼면서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고 감격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라면, 하늘나라에서의 우리의 삶은 이런 예술가의 삶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날마다 그 하나님은 새로운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새로운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새로운 감동과 감격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수십년 이상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권태를 느껴 보신 분이 있습니까?
이상하게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권태로운 분으로 다가 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 그리고 완전한 모습으로 보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결코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태로운 분으로 다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영생의 세계는 로마서 8장18절이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의 고난으로 점철된 삶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세계로서,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그 세계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 세계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답고 풍성하며 무한한 새로움을 지닌 세계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9. 영생의 삶은 삼위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는 삶입니다
이처럼 영생의 세계는 새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세계일 뿐만 아니라
이 세계는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세계라는 점을 중요한 특징으로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바로 영생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21:3절에보면 영생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성도들과 함께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거하는 것”이 왜 그토록 축복스러운 일입니까?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를 한번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자, 여기 서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생각합니까?
그저 서로 같이 있는 시간을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같이 만나면 할 말도 많고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 같은데 실재로 만나면 정작 할 말이 별로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같이 붙어 있으면 행복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를 위하여 창세전부터 구속의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를 마음에 두신 성부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 위에서 대속제물로 바치셨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내주하시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셨던 성령 하나님을
눈 앞에 보면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명의 근원이신 삼위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런 복된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새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서 새롭게 말련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늘 새로운 감동과 감격이 있는 생활에 참여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삼위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소망을 가질 때, 우리 성도들은 짦고 안개와 같이 빨리 지나가며,
수고와 슬픔과 때로는 한으로 얼룩지기도 한 인생을 꿈같이 살다가 죽음으로 그 짧은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인류 최대의 비극의 순간을 맞이해서도 슬픔과 허무함과 안타까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힘있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소망을 잃지 않는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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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말씀이 먹기 쉬울듯 여기서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