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회의 모원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대성당 외부 모습입니다. 성당 앞에 넓은 회랑(Benefactors’ Cloister)이 있습니다. 2006년 5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
이탈리아 중서부, 로마의 남동 약 120km,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해발 519m의 산으로 산꼭대기에 있는 베네딕토회의 모원(母院)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토(Benedictus)는 수비아코(Subiaco)를 떠나 529년경 이곳에 정착한 후 이듬해에 베네딕토회의 모체일 뿐 아니라 유럽 수도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개인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동방교회의 수도원과는 달리 중용과 공동생활을 중시하는 “수도 규칙서”를 저술하여,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가 되었다.
성 베네딕토가 정착한 몬테카시노는 주요 도로변의 도시와 인접한 곳이면서 외부세계와 격리될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이기 때문에 수비아코와는 달리 단일 수도원만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는 이교 신전이 있었던 자리에 신전들의 폐허를 변형하여 대규모 수도원을 건축하였고, 아폴로의 제단 자리에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Martinus)에게 봉헌한 성당을, 산 정상에 있던 제단은 세례자 요한을 주보로 하는 제2의 경당으로 봉헌하였다. 성 베네딕토는 죽을 때까지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떠나지 않았고,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와 함께 이곳에 매장되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585년경 롱고바르드족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720년 페트로낙스(Petronax)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러나 그 후 884년에 사라센인과 1046년에 노르만족에 의해 재차 파기되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전성기는 데시데리우스(Desiderius, 1058-1087년, 후의 교황 빅토르 3세)와 오데리시우스(Oderisius, 1095-1105년)의 시대였다. 16세기에는 이 수도원이 4개의 주교좌 관구와 1662개의 본당을 관할했다. 17세기 중반에는 수도원의 도서관에 교황과 황제, 제후들이 기증한 1천점 이상의 고문서와 800점이 넘는 14세기 이전의 사본들을 갖추어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관이 되었다. 1866년 수도원은 이탈리아의 국민기념물로 지정되었고,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당했으나 다시 재건되었다. 화강석과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그 크기가 가로 100m, 세로 200m의 대규모 건물로 수도원을 비롯해 대성당, 성 베네딕토와 여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무덤, 박물관, 도서관, 문서보관소 등을 갖추고 있다.
성 베네딕토(Benedictus)와 성녀 스콜라스티카(Scholastica)
성 베네딕토(480?-547년?, 축일 7월 11일)와 성녀 스콜라스티카(480?-555/560년?, 축일 2월 10일)는 쌍둥이 남매로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 누르시아(Nursia)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빠인 베네딕토가 로마 유학 중 도시생활의 혼란과 방종으로 인해 도시를 떠나 수비아코(Subiaco)로 가서 은수생활을 할 때 동생 스콜라스티카도 오빠를 따라 수비아코의 한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
529년경에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정착하여 수도원을 설립한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약 8km 떨어진 피우마롤라(Piumarola)에 수녀원을 설립하고 그곳을 동생 스콜라스티카에게 맡겼다. 이로써 성 베네딕토는 가톨릭 수도회의 아버지이자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립자가 되었고,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33장에 따르면, 베네딕토와 스콜라스티카는 매년 한 두 차례씩 만나 영적 담화를 나누었는데 주로 스콜라스티카가 오빠를 찾아왔다고 한다.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베네딕토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베네딕토 성인이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만나서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는 오빠에게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성녀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기도를 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네딕토 성인과 수사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베네딕토 성인은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당신은 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주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집 34장에 따르면 이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베네딕토 성인은 성녀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비둘기 모양으로 승천하는 환시를 보고 누이동생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성인은 지체없이 수사들을 보내 누이동생의 시신을 옮겨와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성 베네딕토는 547년경 3월 21일 몬테카시노에서 운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성인과 성녀의 정확한 사망연도는 대화집의 증언과는 순서도 다르거니와 정확하지 않다. 위에 있는 성인 성녀의 연도 표기는 새로 나온 한국가톨릭대사전의 내용을 따랐다). 성 베네딕토는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하여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문장은 깨어진 컵, 까마귀, 종, 아바스 문장 그리고 숲이다. 그리고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성녀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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