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착심(着心)을 놓게 한 기도
진주 응석사에서 두 차례 기도를 마치고 나는 외삼촌 진우(震宇) 스님이 머물고 있었던 전주의 조그마한 절로 가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마침 그 절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습니다. 경찰 간부 한 사람이 피난을 가면서 맡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책 속에 파묻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재미없는 것은 한 차례, 재미있는 것은 거듭거듭 읽었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레미제라블, 플루타크의 영웅전, 비스마르크 등을 모두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기가 아까운 문장, 마음에 쏙 드는 글귀들은 대학노트에 촘촘히 적어 넣었습니다. 쓰고 쓰고 또 쓰다보니 어느덧 대학노트가 20권이나 되었습니다. 나는 그 노트의 표지에 '문학의 자물쇠'라는 뜻으로 <문학쇄담 文學鎖談>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혼자 문학도가 되는 꿈을 꾸어 보기도 했습니다.
'이만하면 나도 능히 글을 쓸수 있겠구나. 작자가 될까? 시인이 될까?' 그러나 전쟁은 나를 그 절에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1*4후퇴가 시작되어 피난을 가야만 했고, 문학전집을 보면서 기록한 대학노트를 그 절에 버려둔 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저녁 노을, 수려한 경치를 볼 때마다 <문학쇄담> 생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어 놓은 표현을 살짝 인용하여 가미하면 지금의 이 장면을 아주 멋진 문장으로 묘사할 수 있을텐데.....'
선방에서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 있으면 이 같은 생각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다 못 가게 된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까지 되살아났습니다. 자연 참선이 올바로 될 까닭이 없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나의 발길은 해인사로 향하였고,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藏經閣)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아 놓은 팔만 개가 넘는 대장경판! '아, 부처님이야말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작가로구나. 세계에 4대 문호, 5대 문호가 있다고 하지만 어찌 부처님과 비교할 수가 있으리.'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신심이 샘솟듯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이 장경각에서 기도를 하자. 이렁저렁 시적부적 세월만 보내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된다. 올바로 발심(發心)이 되지 않으면 공부의 진척이 있을 수 없다. 대발심(大發心)을 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기도해 보자.' 나는 해인사 스님께 기도할 것을 허락받고 7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탁을 천천히 치면서 천천히 '서가모니불'을 부르면 마음이 느슨해 지기 때문에, 목탁을 빨리 치면서 빨리 '서가모니불'을 부르는 염불법을 택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전란 중이었으므로 적군의 표적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밤이되면 촛불을 켜지 않고 향만 한 가치 피워 놓은 채 기도를 해 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장경각에 있는 법보전(法寶殿)에서 정성껏 기도를 하였지만 향불 하나밖에 없는 깜깜한 한밤중이 되자 졸음이 찾아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해 장경각 경관 사잇길을 돌며 '서가모니불'을 찾았습니다.
깜깜한 장경각 안을 돌다가 조금이라도 졸게 되면 뾰족 튀어나온 경판의 모서리 부분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깜빡깜빡 졸던 나는 수없이 경판에 머리를 부딪쳤고, 부딪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끼니 때만 되면 당시 해인사에 계셨던 자비보살 인곡(仁谷) 스님이 어김없이 오셔서 나의 귀를 당기며 재촉했습니다.
"가자. 밥 먹으러 가자." 목탁을 놓고 대중방으로 가서 얼른 밥 한술을 먹고는 양치질을 하고 화장실을 찾은 다음, 즉시 돌아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6일을 기도하고 저녁 무렵 소변을 보러 나왔는데, 마침 장경각 뒤쪽에서 지게에 물건을 한 짐 진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지게에 진 것이 무엇입니까?" "송이요." "얼마요?" "2만원이오." 마침 나에게는 꼭 2만원의 돈이 있었습니다. 2만원을 모두 주고 송이를 몽땅 산 나는 부엌으로 가져가서 기쁜 마음으로 적도 굽고 국도 끓였습니다.
"야, 이게 진짜 기도다. 진짜 기도 회향(廻向)이다!" 나는 그 송이로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부처님 전에 올리고, 또 대중공양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3시에 기도 회향을 하고 새벽예불에 참여한 다음, 7일만에 처음으로 등을 방바닥에 붙이자 곧바로 잠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 꿈 속에 우리 친척인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바랑을 짊어지고 나타났습니다.
"네가 아끼던 대학노트를 가지고 왔다." "정말입니까?" 너무나 반가웠던 나는 황급히 달려들어 스님의 바랑에서 노트를 뽑았습니다. 나의 글씨로 빽빽이 채워져 있는 20권의 대학노트! 기쁨에 겨워 열심히 공책을 넘기며 살펴보고 있는데, 나의 도반인 창현(昌玄) 스님이 다가오더니 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영 책 껍데기를 못 벗어나는구먼! 야, 선방에서 책을 주무르고 앉아 있으면 선방 망한다는 사실도 모르느냐? 에잇! 안되겠구먼."
창현스님은 나에게 달려들어 대학노트 20권을 모두 빼앗아 쥐고, 양손으로 확 잡아 찢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20권의 노트가 한번에 다 찢어지면서 콰르르 가루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야, 이놈아! 책을 보면 내가 봤지. 네놈하고 무슨 상관이냐?" 한바탕 싸우려고 벌떡 일어서다가 나는 한 생각을 쉬었습니다. '에라, 책을 봐서 뭐할꼬? 치워 버리자. 본래 없었던 것으로 요량하지 뭐."
그리고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사교입선(捨敎立禪), 문자를 버리고 참된 자기를 찾는 참선 공부에만 열심히 매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는 나의 바랑 속에 책이 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틈만 나면 책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와 꿈을 꾼 다음부터는 학문에 대한 애착심이 남김없이 떨어졌습니다. 아울러 기도의 원력대로 발심이 올바로 이루어져서 참선수행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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