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궁궐(宮闕),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그래서 "궁궐을 알면 조선이 보인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궁궐의 입구, 전각(殿閣)의 모서리, 추녀마루의 끝, 담장 등을 유심히 살펴보면 또 다른 조선왕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말없이 지나간 6백년 세월의 부침(浮沈)을 지켜보며 조선왕조를 말해주는 궁궐의 상징물들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흔히 궁궐의 대표적 상징물처럼 여겨지는 것이 바로 '해태'다. 현재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 바로 앞에 위치한 해태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을 바라보며 세워졌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이른바 화기 제압설에 회의적이다. 원래 해태는 지금의 위치에서 약 80미터 가량 앞에 세워졌고, 육조거리의 사헌부 정문에 세워져 관리들의 공직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상징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시비곡직을 가리고, 불의를 보면 달려드는' 해태라는 상상의 짐승이 가진 속성 때문이다. 『이물지(異物誌)』라는 옛 문헌에 따르면 해태는 '해치'라고도 하며, 잘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거짓말 한사람에게 덤벼든다는 영물이다. 조선시대 관원들의 관복 중, 사헌부 관원들의 흉배에 해치가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아울러 궁궐로 향하는 길목에서 '바른 정사를 펴는' 성군(聖君)이 궁궐에 계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궁궐의 정문과 몇 개의 문을 지나 걸어가면 너른 광장이 나온다. 바로 조정(朝廷)이다. 조정은 궁궐의 최고 의식공간이다. 그래서 궁궐의 상징으로 통한다. 공식적인 대례(大禮)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도열해 조회(朝會)보는 곳이자, 왕의 즉위식 등이 거행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조정마당에는 일정한 크기의 너른 돌이 깔려있다. 화강암 재질의 이 바닥 돌을 박석(薄石)이라 한다. 두께가 엷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박석은 거칠고 모양새도 일정치 않다. 성의가 없는 석공이 다듬었을 리 없고, 어찌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그 까닭을 정확하게 문헌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몇 가지로 그 기능과 의미를 추정해볼 순 있다. 우선 가죽신을 신고 조복(朝服)을 입은 문무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로 인한 미끄럼을 방지하는 기능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거친 돌을 딛을 때처럼 항시 긴장하고 조심스런 몸가짐을 하라는 뜻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음을 다잡으라는 뜻이다. 실제로 종묘 입구에서 정전으로 향하는 신로(神路)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역대 선왕(先王)들을 향해 가는 거친 길을 걸으며 마음을 다잡으란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바라보면 조정마당으로부터 일정한 단을 쌓은 기단이 있다. 그 기단 위에 법전(法殿)이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의 경우, 근정전이 법전에 해당한다. 이 기단을 월대(月臺)라고 한다. 월대는 위, 아래 이중으로 되어 있어 상월대와 하월대로 나뉜다. 말하자면 왕이 임하는 곳이기 때문에 문무백관이 도열하는 조정마당과는 그 격을 달리한 것이다. 그 월대는 계단으로 오르며 계단의 중심부에는 답도(踏道)가 있다. 이 답도에는 일반적으로 봉황, 혹은 용이 새겨져 있다. 용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왕을 상징한다. 그런데 용에게도 격이 있게 마련. 중국에 비해 우리는 이른바 사조룡(四爪龍)을 새겨 넣었다. 황제국인 중국의 경우 오조룡(五爪龍)이다. 용의 발톱이 곧 그 신분과 격(格)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덕수궁의 경우 답도에 새겨진 오조룡을 볼 수 있다. 덕수궁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다. 덕수궁 답도가 오조룡인 까닭은 황제의 궁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경복궁 등은 봉황이 새겨져 있다. 일부에서는 "봉황이 용보다 격이 낮고 중국은 용을 새겨 넣는데, 우리는 봉황을 새겨 넣는다"고 한다. 하지만 용은 왕을 상징함에 틀림없다. 오히려 봉황이 새겨진 까닭을 "선정(善政)을 베풀면 봉황이 나타난다."는 요순시절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즉 '봉황이 나타나 춤을 추는' 선정을 베푸는 공간이라는 의미와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경복궁의 경우, 월대 주변으로 돌난간이 둘러쳐 있고 동서남북 방향의 계단 양쪽에 동물모양의 석상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바로 사방신(四方神)이다. 즉 동쪽을 상징하는 청룡과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과 북쪽의 현무가 각각의 방향을 향해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각각의 방위를 수호하는 별자리에서 기인한다.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울러 그 주변을 십이지신(十二之神)으로 둘렀다. 이 역시 수호신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의 위협적이고 괴기스런 그것과는 달리 매우 순박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차라리 앙증맞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다. 이뿐 아니다 사방신과 십이지신 이외에도 이름 모를 동물들이 있다. 경복궁 남면의 동서 월대의 모퉁이에 있는 부부 동물상이 그것이다. 어린 새끼까지 거느린 모습이 매우 귀엽다. 언 듯 보기엔 해태 같지만, 해태를 상징하는 뿔이나 갈기가 없어 그 정체를 쉽게 알 수 없다.
윌대 위 법전 주변을 살펴보면 향로 모양의 정(鼎)이 있다. 정에 대해서는 그 기능과 의미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향로라는 의견의 경우, 외형 역시 향로이고, 기능적으로도 향로로 쓰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궁궐지, 각종 의궤 등 그 어느 곳에도 이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없다. 향로란 일반적으로 제사공간에 주로 쓰였는데 과연 향로로 볼 수 있냐는 것이다. 하여 왕권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중국 고대사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주변 구주(九州)의 금속을 모아 만든 아홉 개의 솥을 왕위 전승의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에 정은 곧 국가, 왕위, 제업(帝業)을 뜻했다는 것이다.
법전의 양쪽 모퉁이 혹은 앞의 좌우에 놓여있는 또 하나의 상징물, 바로 드므다. 드므란 순 우리말로, '아가리가 크고 넓은 가마솥 모양 그릇'을 뜻한다. 드므는 화재를 예방을 위한 일종의 주술적 상징물이다. 원래 드므에는 항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옛 사람들은 화재를 일으키려는 화마(火魔)가 하늘에서 날아오다가 드므에 비친 흉칙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달아나라는 뜻에서 설치했다고 한다. 그만큼 목조건물이 화재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 다음 법전의 내부, 용상 뒤에 세워진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다. 다섯 봉우리와 해와 달이 그려진 이 오봉병 역시 왕권의 상징물이다. 얼마전 아셈 각국의 지도자들의 만남을 갖는 VIP 라운지 뒷 배경에 일월오봉병을 배치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조선의 왕은 반드시 이 오봉병 앞에 앉는다. 심지어 왕이 승하한 뒤 왕의 어진(御眞)을 모셔둔 선원전에 가보아도 오봉병과 함께 있다. 오봉병의 다섯 봉우리는 오행(五行)을 상징한다. 해와 달은 음과 양을 상징한다. 또한 다섯 봉우리 사이로 떨어지는 두 줄기 폭포는 해와 달과 더불어 생명을 상징한다. 즉 왕이 오봉병 앞에 정좌하면 천지만물의 우주적 질서를 관통하는 존재로 상징되며, 이 장엄한 예술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궁궐의 지붕, 추녀마루 끝에 잡상(雜像)이 줄지어 앉아 있다. 우리의 경우 궁궐건축에만 잡상을 볼수 있는데, 중국은 사찰, 심지어 민가에도 잡상을 올려 놓는다. 잡상의 명칭과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잡상의 정체에 대해 선인(仙人)이라고도 하지만 대개는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삼장법사(三奬法師), 손오공(孫悟空), 팔계(八戒)등의 명칭으로 부른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의 궁궐 장식물이 불교적이라는 것이 특이하지만, 이는 당나라 태종의 고사와 관련이 깊다. 밤 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당 태종이 당나라의 고승 삼장법사의 모양을 만들어 지붕에 올린 뒤,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잡귀를 막기 위한 주술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지붕의 용마루에 취두(鷲頭)라는 독수리의 머리형상을 볼 수 있다. 독수리는 하늘을 나르는 새 가운데 가장 강하고 짐승이다. 건물의 제일 높은 곳에 독수리를 올려놓음으로써 모든 재앙과 악귀를 막고자 했던 벽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도 해석된다.
또 궁궐은 또한 남성인 왕의 공간 뿐 아니라, 왕비와 왕대비 등 여성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궁궐에서 여성들의 영역은 내전에 속한다. 내전은 화려한 문양으로 건물 외벽은 물론 담장을 가득 채워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들 문양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수복강녕(壽福康寧), 다산(多産) 등을 기원한다. 영생을 위한 불로초나 알알이 탐스럽게 열린 포도 문양 등이 그것이다. 경복궁 자경전의 경우 흥선대원군이 조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조대비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이 왕에 올랐으니, 자경전에 얼마나 공을 들였겠는가. 바로 여기의 꽃 담과 십장생 굴뚝이 여성공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 상징물이다. 특히 십장생(十長生) 굴뚝(보물 810호)의 경우, 조대비의 침전(寢殿)에서 뒤로 문을 열면 눈 높이로 보이는 위치의 굴뚝에 십장생 등 길상문양을 새겨 넣었다. 불로장생을 기원한 것이다. 세계에서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굴뚝일 것이다.
이렇듯 구중궁궐 속 깊게 샅샅이 살펴보면 왕조의 통치이념과 번영을 기원하는 수 많은 궁궐의 상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예술적 조형미도 뛰어나 궁중미술사의 정점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렀지만 궁궐의 안팍, 그리고 구중 궁궐의 깊숙한 곳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궁궐의 상징물들. 지나간 세월을 묵묵히 지켜보고 말없이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우리 궁궐의 '궁궐 지킴이'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