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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간 : 2017.09.22(금)~9.24(일)
○ 장 소 :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김삿갓유적지 일원
○ 주요행사
▪개막행사 : 개막식, 김삿갓문학상시상식, 수상자시비제막식
▪추모행사 : 길놀이, 고유제, 헌다례, 추모퍼포먼스
▪문화행사 : 학술심포지엄, 민화강좌, 민화공모전, 시낭송경연 대회, 일반백일장, 학생백일장, 휘호대회, 사생 만화그리기 대회
▪공연행사 : 식전공연
▪체험행사 : 인절미떡메치기
▪전시행사 : 시화, 한국화, 서각, 서예
▪부대행사 : 김삿갓풍자와 해학의 길 걷기
○ 행사 일정표
전국을 방랑하며 시로써 세상을 풍자한 난고 김병연 선생의 정신과 문화예술혼을 추모하고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조선 후기 방랑시인인 난고(蘭皐) 김병연 선생의 시대정신과 문화예술혼을 추모하고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영월 김삿갓 문화제가 개최된다. 매년 10월,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김삿갓 유적지 일원에서 진행되는 김삿갓 문화제는 올해로 제19회를 맞이한다. 다양한 공연행사가 이어지고, 축제 기간 동안 인절미 떡메치기, 해학의길 걷기 등 다채로운 체험행사와 함께 향토음식 먹거리촌 등도 마련된다.
전국을 방랑하며 시로써 세상을 풍자한 난고 김삿갓의 일생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 김병연은 1807년(순조 7년)부터 1863년(철종 14년)까지 방랑시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조부는 선천부사 익순이며 아버지인 안근과 어머니 함평 이씨 사이의 2남으로 경기도 양주군에서 출생하였고 이름은 병연, 호는 난고,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으로 불리웁니다.
권문세족인 안동 김씨 가문이었던 집안이 몰락하게 된 것은 조부인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하지 못하고 항복해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입니다. 후일 조부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으로 감형되었으나 세인의 천대로 모친은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김병연은 가문의 내력에 대한 진상을 알지 못한 채 학업에 정진하다 영월도호부 과거(백일장)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게 되는데, 시제가 바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으로 가산의 정공이 죽음으로 충정된 절개를 지켰음을 찬양하고 적에게 항복한 김익순의 비겁한 죄를 하늘이 알고 있음을 공박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일 모친으로부터 집안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어둔으로 옮겨 은둔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죄인으로 푸른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다하여 삿갓에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금강산을 시작으로 서울,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를 떠돌다가 전남 화순군 동북면구암리 정시룡 댁에서 1863년 3월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후 3년 뒤 아들 익균이 화순의 초분지를 찾아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기슭으로 이장하였습니다. 그 후 김병연의 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16년만에 발견되어 보존되어 오다가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파격, 해학과 풍자
이 형식의 파괴는 한글혼용, 순 한글시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한글의 사용은 이후 현대 문학 조류의 시작인 개화기 문학의 경항과 비추어 볼 때 한글시를 짓는 단초를 열어 준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파괴는 그의 40여편의 희작시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김삿갓 시의 백미는 바로 해학성과 풍자성에 있는데 잘난 척하는 촌부(村富)나 훈장에게 특휴의 야유와 곡설(曲設)로 풍자하고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김삿갓 시의 풍자성과 해학성은 새로운 삶의 형식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풍자는 대상에 대한 부정으로써 악덕하고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해학은 대상에 대한 긍정으로써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인간과 인정이 넘치는 사회에 대한 긍정이었습니다. 김삿갓의 삶의 형식은 바로 악덕하고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부정이면서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긍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비판
김삿갓의 방랑을 개인적 좌절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김삿갓 혼자만의 좌절은 아니었을 겁니다. 시대적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 봉건신분사회를 살았던 대다수의 피지배층과 몰락 양반들의 삶이 그러한 좌절의 삶이였습니다.
김삿갓은 민중의 생활과 일상을 기반으로 한 소재로 구체적인 민중의 삶을 노래하였고 그의 시는 양반은 물론 여염집 아낙이나 동네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향유되었습니다. 김삿갓의 이름이 문헌에서보다 입을 통해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방랑생활 속에서 민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지은 소제시(訴題詩 : 힘없고 못 배운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그들의 대신하여 관가에 제출한 일종의 소송장)를 통해 그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묘쟁(墓爭 : 묘터를 빼앗은 양반사대부가를 비판), 독가소제(犢價訴題 : 빈한한 농가의 송아지를 죽인 소송), 산소소장(山所訴狀 : 다른 사람의 선산에 조상의 묘를 무단으로 쓴 데 대한 소송) 등의 시가 이에 해당합니다.
김삿갓은 조상에 대한 부끄러움, 막힌 출세길 때문에 평생 한을 품고 살았으며 그 한은 시로써 표출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상과 현실의 대립은 자아인식의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즉 끝없는 방랑을 통한 자기 인식이 현실인식으로 발전되었으며 이것이 그의 시로써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방랑을 멈추지 않았던 것도 스스로의 존재인식을 이를 통하여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