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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천년에 본 현대시조의 제 양상
劉 準 浩
1. 들어가는 말
새 천년(千年)의 시조에 대하여 각계 시조시인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양하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전래의 시조 틀을 완전히 부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선 이들의 언급을 소개해 본다.
오세영 (시인, 서울대 인문대 교수)은 ‘정형시(定型詩)로서의 시조’란 글에서 ‘시조는 원래 정형시이고 정형시가 아닌 것은 시조가 아니다. 따라서 시조의 현대성이란-새로운 정형시형의 확립을 제외할 경우-그 형식의 일탈(逸脫)이나 파괴로 이루어질 수 없다. 형식이 사라지면 그 시 자체가 사라지는데 어떻게 ’없는 시조‘를 두고 현대성을 운위할 것인가. 다만 현대성을 운위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용적인 측면(소재)이나 어휘 선택 수준일 것이다.’ 라고 하고 있으며, 유성호(문학평론가, 한국교원대교수)는 ‘타아(他我)가 발화하는 심연(深淵)의 언어’란 글에서 ‘시조는 정형 양식의 속성을 견고하게 유지하면서 그 안에 이채로운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경험과 근원적 감각을 담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종찬(시조시인, 부산대 교수)은 ‘현대시조의 진로 모색과 세계화 문제 연구’란 글에서 ‘현대시조는 자유시의 자유분방함을 경계하면서 정제된 형식미를 존재 이유로 삼아야 한다.’고 하며, ‘함부로 시조의 형식을 부수면 시조가 되지 못한다. 시조는 통사 구조가 맞아야 하고, 음보 개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또한 최승범 시인은 ‘운미(韻味)와 흥(興)을 동시에 품은 시의 세계, 글맛은 풍부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깊으면서도 다 말해버리지 않는 말 밖의 풍취는 시조의 미학(美學)이요, 많은 여운과 함께 동시에 물씬 풍기는 함축미는 시조의 미덕입니다’고 하였으며, 김복근(시인, 문학박사)은 ‘현대시조의 리듬과 이미지’란 글에서 ‘시조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과거에는 음악적 요소인 운율과 리듬을 중요시한 반면 현대에 와서는 회화적(繪畵的) 요소인 이미지를 중요시하고 있다. 결국 시조는 리듬과 이미지의 조화로운 결합이 작품을 지배하는 요소이다. 시적 이미지란 감각적 성질을 지니고 있는 생명의 유기체(有機體)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외에 이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을 소개하면, 김학성(성균관대 교수)은 ‘현대시조의 좌표와 방향’에서 ‘현대시조는 현대+시조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현대성과 시조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즉, 현대성을 충족해야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사라진 고시조의 빈 공간을 메울 수 있는 존재이유가 되고, 시조성을 확고히 해야 자유시와의 경쟁관계에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현대성을 무시하고 시조성만 추구한다면 현대인의 까다로운 미의식(美意識)에 걸맞은 공감대를 획득하기 어려워 시대착오적인 복고주의 혹은 국수주의로 매도되어도 할 말이 없고, 반대로 시조성을 무시하고 현대성으로 과도하게 기울면 자유시와 경계선(境界線)이 무너져 차라리 자유시 쪽으로 나오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양쪽으로부터 경계와 비판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이 현대시조의 문학사적 위상이고 좌표다. 그렇지만 현대시조는 고시조가 갖지 못한 현대성을 갖기에 현대에 존립해야 할 명백한 이유를 가지며 자유시가 갖지 못한 시조성(時調性)을 갖기에 자유시와 당당하게 맞서 경쟁관계를 가지고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므로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다’고 하였으며, 신범순(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은 ‘현대시조의 실험양식과 자유시에의 경계’에서 ‘현대시조의 나아갈 길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먼저 그것의 첫 번째로 필자는 전통적 이념의 새로운 발견에 두고 싶다. 시조의 정형 속에 스며있는 오랜 철학적 이념을 사라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부활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할 때만이 현대에 시조의 존속 이유와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인 문명을 시조의 본래적인 이념으로 비판하고, 현대문명과 불화관계에 빠진 시조의 형태를 불안하게 뒤흔들린 모습으로 창조하는 것은 따라서 의미 있는 시도이다’라고 하였다. 어쩠든 현대시조의 특징을 들면 첫째 현대시조는 내용을 축약(縮約)·암시할 수 있는 제목을 반드시 붙이고 있다. 둘째 시형(詩形)의 배열이 비교적 자유롭다. 현대시조는 그 배열에 수별(首別)의 별도처리는 말할 것도 없고, 초·중·종장을 구별하고 시각적 효과를 통한 배열도 고려하여 쓰고 있다. 셋째 요즘 들어 단시조 운동도 벌어지고 있지만, 연시조를 쓰는 경향이 많았다. 넷째 허사(虛辭)가 배제된다. 다섯째 율격(律格)을 음수율에만 의존하지 않고 낱말이 지니는 의미나 호흡에서도 율(律)을 잡아 음보율로 잡는다. 여섯째 감각적, 비유적 표현을 통한 화화 시조를 많이 쓰고 있다. 여섯째 음풍농월조(吟風弄月調)의 외면세계를 다루거나 표피적 감정처리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각적 비유적 메타포(metaphor)를 즐겨 사용하면서 내면세계로 파고들어 인성(人性)의 심층묘사나 사상성을 다루고 있다.
위와 같은 면들을 고려하여 2000년 이후 시조 전문지 몇 개와 신춘문예, 인터넷에 소개된 작품 등 1,200 여 편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논의의 대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전체 작품 중에서 새로운 시도로 문제가 되는 작품을 중심으로 한다. 여기서 새로운 시도(試圖)란 표현 양식과 표현기법이 전래의 통상적 시조 의 꼴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대상 작품(1,200편)의 통계 숫자는 <1>과 같다. 통계 작품 편수에서 ‘수의 호응’과 ‘장의 연이음’, ‘음보(音步)의 확장(擴張)’, ‘지나친 소음보(小音步)’, ‘음보(音步)의 이탈(離脫)’ 등은 타 통계와 겹쳐서 처리되었다. 통계에서 보면 표현기법에서 닫힘과 단절, 표현 방법에서의 묘사와 사실적, 설명적인 것은 시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전형적 시조 양태임으로 여기서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주로 문제 삼아 살펴보아야 할 것은 새로운 시도를 보인 단장시조, 연첩시조, 탈 시조, 수 구분 불명 시조이고, 장의 연달음질을 한 것과 앞 뒤 수가 서로 호응하여 연결되는 것, 음보가 한 장 4음보를 넘긴 것과 한 음절을 한 음보(音步)로 한 지나친 소음보(小音步) 배치, 그리고 시조의 기본음보가 빠진 것들이다. 이것들이 새 천년에 들어 새로이 시조의 한 지평을 열어가도 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시조는 기본 음보인 4음보를 유지하고 종장 첫 구 음보를 필수 요건으로 하고 종장 둘째 구의 과음보(過音步)는 시조 틀에 맞도록 5∼8자 정도의 통합 1음보가 배치되어야 하며, 자유시와 혼동을 야기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절대 시조 작품에서 금해야 할 것은 탈 시조형태의 모습을 보이는 시조작품과 음보가 이탈되는 작품이다. 종장 맺음 기법인 열린 기법과 특별한 음보 이탈이 이루어지지 않은 작품들은 요즘 심심찮게 나타나지만 이는 시조문학의 자연스런 한 형태로 받아 드려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는 표현의 기법을 넓히며 시조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현대시조로 자리 잡아 통용되고 있는 시조형태는 평시조, 연시조, 사설시조(辭說時調)가 주류이고 70년대 들어와 윤금초 시인이 시도한 옴니버스 시조가 몇몇 관심 있는 시인들에 의하여 발표되는 정도이다. 다만, 단장시조와 연첩시조는 최승범 시인이 시도하여 선을 보이고 잠복하여 있는 상태이다. 이 단장시조와 연첩시조는 좀 더 두고 보며 발전시킬 여지를 실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형태는 이제 이 땅에 시조의 봄을 만나 가까스로 돋아나려고 고개를 내민 시조의 여린 싹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유의하여 우리 기성 시조시인이 신인을 문단에 앞서서 안내할 때 바르게 하고 본인들도 이런 점들을 유의하여 작품을 생산하여야 한다고 본다. <1>에 해당 작품 예시는 몇 분만 빼고 주로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신인 시조작가들의 작품을 들었다. 이들의 작품이 주로 새로운 시도를 꾀하고 있다.
2. 문제(問題) 작품(作品) 살펴보기
1) 형태면(形態面)
① 수(首)⋅행(行) 구분 불명(不明)
이는 연시조의 경우 두 수(首) 이상으로 구분되어 한 편의 작품을 이루는데 그 수(首)가 나누어지지 않고 행(行)의 전후(前後)가 연달아 이어져 표기되는 예이다. 전통적인 시조는 장(章)이나 구(句)는 장별, 또는 구별로 배치하는 것이 예사(例事)이다. 그래서 이들을 장별(章別) 배행 시조, 구별(句別) 배행시조라 한다. 그런데 시조에서 이런 면을 허물고 무더기로 이어 쓰는 모습이 나타났다. 어찌 보면 현대 산문시의 행 배열을 연상케 하는 배행 없는 시조들이다. 잘못하면 현대시가 아닐까 혼동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장별 4음보를 지키고 있어 시조로서의 양태는 지키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 집을 짓더라도 축사는 짓지 말게. 소 돼지 똥오줌이 오염의 주범일세. 결국은 바로 니 입에 똥오줌이 들어가 니 지금 뭐라카노, 축사를 짓지 말어? 그 무슨 잠꼬대고, 집 한채 지어놓고 그 속에 들어가 살면 그게 축사 아니가 님,
선생 하고 ‘님’자를 한 옥타브 높이거나 선생님!, 하고 ‘!’자를 붙이지마 이유도 묻지 말아줘, 지금 여기
축사야
-이종문, 축사에 앉아서, 전수(시조월드 06상반)
㉯ 네가 말 없을라치면 나도 별수 없다. 형틀에 묶인 채 와아 천년도 넘게 산다. 비단 꽃 피워내듯이 꿈이 눈치껏 깊다.
정이야 들었던 걸, 조용히 업을 치러야지. 열 지어 달려드는, 굉음(轟音) 저 파도소리. 꽃 핀 듯 푸르른 속살에 두어 칸 청사(靑紗)가 짜여……
-한분순, ‘푸념조(調)’ 전수-
㉰ 먼지를 닦아내고 허전함 걷어내고 그림을 걸기 위해 벽에다 못을 칩니다 아무나 가 닿지 못할 허공인 줄 모르고 버티는 벽 속엔 무엇이 숨어 있기에 번번이 내 마음 튕겨져 나오나요? 액자 속 망초 꽃들은 우수수 지는데…… 어쩌면 나 모르는 박쥐의 집이 있어 햇살에 눈이 부셔 창문을 닫은 걸까요 오늘도 몸 웅크리고 밤이 오길 기다리며 어둠 하나 보지 못한 그런 눈을 갖고서 날마다 겉모습만 꾸미고 살았으니 한 뼘도 안 되는 거리가 참 아득한 강입니다 비지땀 흘리면서 내일은 산에 올라 내 안에 흐린 안개 죄다 풀어내고 싶습니다. 발 뻗고 누웠던 집이 상처위에 핀 꽃이라니!
-문수영, 먼 길(2005 중앙신인문학상), 전수-
㉱ 꽃 피는 봄 한 때를 풍미했던 세간 살이 볼트의 살점들이 시간으로 조여지면 뼈마디 헐거워져서 퇴적층도 흔들린다. 어디쯤 밀려나가 늑장이 벗겨질까 구멍난 어둠 속에 햇빛이 스며들어 짓눌려 아픈 육신을 철사줄 동여맨다. 무수한 잔해물과 질곡의 흔적들이 이 시대 깊은 상처 질펀하게 널려지고 묻혀진 과거사 정리 그 진상을 증언한다.
-문주환, ‘고물상 부근’, 전수-
위 작품들은 얼핏 보면 자유시 가운데 산문시 유형을 연상하게 하는 시조이다. 그러나 겉보기는 산문성이지만 자세히 보면 ㉮와 ㉱는 평시조 세 수, ㉯는 평시조 두 수, ㉰는 평시조 다섯 수로 이루어진 연시조이다. ㉮는 세상 오염이 축사에서 비롯됨을 첫수에서는 훈계를, 둘째 수에서는 듣는 상대가 맞받는 말로 인간도 짐 한 채 짓고 살면 축사라고 인간과 동물을 동일시하고 있으며, 셋째 수에서는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배 없으니 존경의 ‘님’자에 톤을 붙여 부르지 말라고 하는 재미있는 시적 발상이 평범(平凡) 속에 비범(非凡)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일종의 실험적 발상의 작품이고 ㉯는 세상살이의 얽힘을 죄스러운 시선으로 처리한 작품이다. 서민의 애달픔을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굉음과 파도소리가 출렁인다. 그러나 청사초롱 밝히고 사는 꿈이 또한 있다. 그러나 그 꿈은 고이 간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는 심사위원의 말을 인용하면 ‘비근한 일상사를 밀도 높게 천착한 점과 시조 고유의 가락에 의도한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담아낸 형상 능력이 돋보인다. 또 신인으로서 완결의 미학에 근접한 기량과 안목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신뢰가 갔다. 그리고 다섯 수 모두 초. 중장을 각각 한 행으로 배열한 것과 끝수 종장의 결구는 인상적이다. 다만'내 안에 흐린 안개 죄다 풀어내고 싶습니다.'에서 '죄다 풀어내고'와 같은 구절은 한 음보로서 가락이 순탄치 못하다는 점을 당선자나 그 밖의 모든 응모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는 존재의 대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의미 구조에 무게 중심을 두고 인간 삶의 질곡(桎梏)을 주제로 내세우고 있다.
어쩌든 이들이 유장한 가락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점은 인정되나 현대시조의 배열 방법에서 현대시의 배열과 유사한 점을 간과할 수 없어 그 혼란의 기미를 준 점은 생각해 볼 일이다.
② 단장 시조(單章時調)
이 시조의 형태는 평시조를 더욱 압축하여 초 ·중장을 제쳐놓고 종장만으로 시조의 맛을 내게 하려는 변형 시조이다. 일명 절장 시조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를 두고 유성호 교수는 ‘단장(單章)의 미학을 살리기 위한 모험(冒險)‘이라고 하였고, 이 시조형(時調型)에 대하여 이근배 시인은 ’우리 시조의 뿌리를 찾는 이근배의 시조읽기‘(현대시학 2000. 7월호)란 글에서 ’절장(단장)시조가 왜 좀 더 일찍 그리고 좀 더 널리 쓰이지 않았는지 궁금할 만큼 최승범의 실험은 성공적이다.’ 고 하였다. 이 작품은 그 간결성에서 일본의 하이꾸와 비견(比肩)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실험적으로 단순한 시도에 불과한 형태라고 치부하며 일단 시조의 논의에서 제켜두려고 한다. 그러나 아주 간결하면서도 서정성이 높은 톤으로 부각되는 이 시형이야말로 시조란 이름으로 도모해 볼만한 면이 없지 않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언젠가 현대 시인이 쓴 4행시를 현대문학에서 만나고 참 신선한 시형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 시조에서도 한 번 도모해야겠다고 하였는데 그 간 까먹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런 시조형(時調型)을 만났다. 시조에서 절장이 어디냐고 하면 바로 종장이라고 해야 한다. 그 종장만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매력을 풍기지 않는가?
㉮ 「내 머릴 선산발치에 돌려다오」 호곡 없는
요(寥)
요
적(寂)
적
-최승범, ‘임종’-
㉯ 풀섶길 달려오는 소녀, 하이얀 컬러에 젖어든 향내
-최승범, ‘백합’-
㉰ 날밤을
지새우고 나면
외려 밝은
눈망울.
-반영호, ‘아침이슬’-
㉱ 수억 번
졌었음에도
다시 뜨면
순결해.
-반영호, ‘일출’-
반영호는 그의 시집 ‘퇴화의 날개’에서 이 단장시조를 그 간결성에 매료(魅了)되어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노산(鷺山) 선생이 시도(試圖)했던 양장시조도 본격 시도하여 볼 요량이라고 하였다. 이런 반 시인의 시도를 두고 유성호(한국교원대 교수, 문학평론가)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하며, 반 시인의 ‘퇴화의 날개’를 평하는 글에서 “단장시조는 이러한 단형의 정형(定型) 미학이 갖고 있는 미적 정수(精髓)를 매우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다. 반시인은 할 말을 자제하면서 제 할 말을 다하는 역설적(逆說的)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결과 언어를 통하여 그 언어(言語)를 넘어서려는 시적(詩的)욕망(慾望)을 스스럼없이 내비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와 침묵(沈黙)을 공존시키면서 그 것을 찰나 속에서의 영원으로 표현하는 목표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③ 연첩 시조(連疊時調)
이는 단장(單章), 양장(兩章), 삼장(三章)이 서로 어울려 혼합 구성된 형태(形態)의 시조를 말한다. 이 연첩시조는 2000년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도(試圖)된 시조 형태이다. 이는 이미 이근배 시인이 지적했듯이 아직은 이름도 낯설고 형식도 낯설어 서먹하다. 그러나 노산(鷺山) 이은상이 시조는 ‘정형이비정형(定型而非定型)’이요, 비정형이정형(非定型而定型)’이라고 하여 형식의 탄력성(彈力性)을 말하고, 양장시조이란 새 시조 형태를 실험(實驗)하여 선보였듯이 이 시조(時調) 형태(形態)는 고하(古河)가 시조쓰기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하여 제시한 방법이라고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고하(古河)가 한 번 시도하고 접었는지 버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세상에 선보였기에 상고해 보니 한 번으로 접기는 아쉬운 점이 있어 나도 이를 시도하여 이어보고자 하였다.
㉮ 1
여울져 오는 길은 안개 눈앞을 가린다.
2
쪼달림에 겨운 서러운 처갓집들
꽃봉오리 부풀듯 화사한 걸 바랄 수 없고
늙으신 어머니처럼 산과 들도 여위었다.
3
물줄기 파고드는 인정만을 가슴한 채
되오른 차 안이어도 걷히질 않는 눈안개---.
-최승범, ‘고원의 노래’ 전수(현대시학 00.7월호)-
㉯ 1
가을은
메아리마저 대껴놓아 하얗다.
2
상강(霜降) 지난 이 가을은 한 가지로 흰 빛이다.
앞뒤 없이 흐르는 구름이 그렇고
길가에 조용히 넘친 슬픔 또한 함께 희다.
몸을 털은 이 가을은 가벼운 흰 빛이다.
구불구불 떠나가는 골물소리 그렇고
세월을 접어 서리는 그림자도 바래여 희다.
3
물들여 차려입은 무색옷도 다 벗어
드러난 참한 속살에 설레는 하얀 바람.
-필자, 하얀 이 가을. 전수[한국문학세상 08. 봄호]-
작품㉮는 단장시조, 평시조. 양장시조를 ‘고원의 노래’란 제목 안에 아우르고 있다. 이런 모습은 윤금초가 장형시조의 하나로 옴니버스 사설시조라고 하여 서사 시조를 선보인 바와 유사한 시도이다. 단장시조에서는 고원의 자연 환경의 아물거림을, 평시조에서는 가난하고 고달프나 소박한 심사를 애틋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끝으로 양장시조로 된 부분에서는 그래도 따뜻한 인정이 샘솟음을 연상하고 있다. 삶의 아득함, 절절한 정이 자분자분 느끼지는 시조이다. 그리고 ㉯는 단장시조, 연시조, 양장시조를 어울려 쓴 작품이다. 모든 것이 다 바랜, 그래서 하얗게 비어버린 공허한 가을의 모습을 애잔한 심경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시조형태가 아주 이상적인 모형이라고 생각하여 시도한 것은 아니고 한 번 선보이고 잠들게 하기는 아까운 것 같아서 이런 시형도 현대에는 시조형태로 고려해 볼 만한 것이 아닌가 하여 문학지에 선보인 것이다.
④ 옴니버스 시조(時調)
"옴니버스시조"란 말은 한 편의 연작 시조를 쓸 때 평시조·사설시조·엇시조·양장시조 등 다양한 시조 형식을 아울러 쓰는 형태의 시조로 사설시조의 한 유형을 말한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이 형식을 지배한다."는 전제 아래 1970년대 이후 윤금초의 장편시조 "청맹과니 노래"를 그 시발점으로 한 새로운 장형시조 형태이다. 이 시조형(時調型)은 젊은이들 사이에 많이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 1
부도난 공장처럼 침울한 저자 거리
점포 정리 원가 판매 나풀대던 현수막은
쏟아진 억센 장대비로 후줄근히 젖고 있다.
2
젖어 침몰하는 건
오늘만이 아니었다.
동이 채 쏟아 붓는 사라호의 위세 앞에 아픔을 견디다 못해 허리춤을 꺾던 강둑 갖가지 잡동사니 손때 묻은 조각들은 허허이 동동대며 지형조차 바꿔 갔고 끝내 빈손으로 무너지던 초가 한 채 목이 멘 아버님이 서러움을 말아 피며 황톳물 갈앉은 터에 억새처럼 세워 가던
그 구멍/ 송송 뚫린 천막에도/ 햇살은 쏟아졌다.
3
짓밟힌 잡풀 하나 고개 세워 웃는 아침
젖은 옷 어진 가난 집게 물려 말려 갈 때
하늘은 파란 물감을 풀어내고 있었다.
-추창호, 우기를 지나며-
㉯ 구성진 노랫가락이 바람 따라 빗금 지는
장터어름 골목에서 사방을 둘러본다.
오가는 사람은 몇몇 가게는 절반 문을 닫고
아가씨가 새로 왔으니 놀다 가란 다방에도
굳세어라 금순아로 간판 올린 술집에도
사막의 신기루처럼 낮 등불이 켜져 있다.
저 다방 탁자에서
저 술집 술상에서
아가씨들 둔부에 눈길 모으며
시시닥시시닥 시간을 갉아 먹으며
손가락 끝 줄줄이 그려보던 가야할 길의
그림들,
그러다 그러다 미로의 광장으로
호기롭게 나서던 날,
천만 기침 무릅쓰고 힘겨이 전을 펴며
힐끔힐끔 바라보던 골동품 노점상 그 어르신,
오늘은,
비 오는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산을 걷어치운다.
하늘을 보기 위하여.
-서석조, 하늘 7-
㉰ 김포 검단사거리 지나 이주 노동자 집이 있다.
눈빛만으로 귀 열리는 말씀만으로 배부른
허기에 굶주린 날들 손 내밀면 보풀 이는
몽골인이 주먹을 쥔다. 지구본이 생긴다. 도드라진 힘줄에 이야기 그려 넣으면 지상은 잘 여문 만삭의 과수원 된다. 네팔인이 은근슬쩍 어깨에 힘을 준다. 무딘 연장 보듬어 깎고 또 다듬는다. 깎고 또 보듬으면 상처도 아물 건가. 오늘 하루도 깽깽이걸음 골목길로 내달린다. 세상 곳곳 희고 둥근 것 어디 외따로 있나 굴려보면 네모도 세모도 다 둥근 것 어머니 자궁 속에서 진작 굴러다닌 것을 김포 아득한 들판 이삭 같은 이주 노동자 직선보다 곡선에 기댄 저들 내몰린 삶이, 막장 길 굴렁쇠 엮어 둥글둥글 굴려본다.
공장 담벼락에 기댄 무지갯빛 얼굴들이여
발바닥 티눈 박혀도 일어서는 억새풀이여
두둥실 떠오른 달이 둥글둥글 환하다.
-박지현, 둥글다는 것-
일반적으로 보통의 시조라고 지칭되는 것이 양반 문학의 후예라면 이 사설시조라 지칭되는 양식은 서민문학에 뿌리를 두고 꽃과 잎을 피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설시조(辭說時調)에 대하여 필자가 ‘장형시조(長型時調) 어떻게 써야 하나’란 글에서 지적(指摘)한 바 있듯이 표현 내용면에서는 설명, 해설이 아닌 상징성, 해학성, 우의성, 아이러니, 역설, 풍자, 냉소 등이 어울려 있어 은연중에 골계미(滑稽美), 유락미(遊樂美)와 같은 웃음의 미학이 발현(發現)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표현 언어는 능청 한 가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설시조의 본맛이다. 결국 일반시조와 사설시조는 그 족보(族譜)가 다른 채 그냥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명을 잇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새 이 둘의 관계가 한 가족 관계나 된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연히 따로 논의 되어야 할 문학 장르라고 생각한다. 사설시조와 일반 시조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만, 3∼4음절을 1음보로 하여 성립(成立)되는 전통적 운문 문학이고, 형식상 초, 중, 종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혹자(或者)는 이 사설시조는 현대시의 모태(母胎)라고도 하였다.
⑤ 탈시조형(脫時調型)
시조는 각수(各首)가 수(首) 단위로 표현 의미가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완결되는 시형이다. 그렇게 된 시형들이 다음 수로 이어지면서 의미가 증폭(增幅)되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시상으로 통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쩌면 이것이 시조문학의 불문율(不文律)이다. 그런데 이에 부합(附合)하지 않는 시조 작품들이 심심찮게 눈에 띤다. 이런 작품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 언뜻, 빈혈이었을까
이십 수 년 불임의 세월 품어온 빈 둥지 속
팍팍한 기억 틈새로
외로이 솟구쳐 오르다 낙하하는 어린 바람
-윤연옥, ‘둥지에게 날개를’ 첫수-
㉯ 곁가지 비비대며 그 봄을 맞기보다 상동 잘려나가 내 이름 달고 싶다
비틀어져 빼빼 말라 바람에 서걱거리다
몇 마디 옹이로 남는 아, 산화하는 그날까지
-박희정, ‘가지치기’ 전수-
㉰ 갇혀 사는 안락은 그 날 같은 하루
일어나 밥 먹고 자다 깨다
창밖은 사철 바빴다/ 꽃이 피고 또 지고
-양점숙, ‘벽’ 첫수-
㉱ 밧줄에 주렁주렁 매달려 피맺힌 말편자
유목민의 고단한 삶 끈기로운 일기를 보았다.
물 없는 사막의 길에서 정신 속 물의 솟구침을 보았다.
-김경자, ‘길’ 둘째 수-
㉲ 적의의 눈으로 그대를 지켜봄은
펑크 난 나의 일상 구부러진 좌표 속에
일몰이 가져다주는 알 수 없는 공포 때문
무심코 돌려 대는 볼트와 너트처럼
나는 조이고 있다 때로는 풀리고 있다
감출 수 없는 아픔에 벼랑을 딛고 섰다
-김복근, 볼트와 너트의 시, 전수-
위 ㉮,㉯,㉰에서 친 것이 바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는 초, 중장의 음수율인 초장 4음보와 중장 4음보를 세 줄로 하여 음보 수는 맞지만 행 배열을 억지로 하여 그 호응에 무리가 따르게 배치한 것이다. 즉, 초장의 1 구(句)를 1행으로 하고, 초장 2구와 중장 1구를 합하여 2행에 배치하고 중장 2구를 3행에 배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장(章) 사이의 호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조를 억지로 현대시(現代詩)처럼 행 배열을 하고 있어 시와 시조의 경계(境界)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시조는 시조로서의 장 배치가 드러나야 하는데 위와 같이 장 사이를 섞음 배치함으로써 탈시조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는 초장이 3, 4, 3, 4, 6, 3, 4, 또는 3, 4, 3, 4, 2, 4, 3, 4로 되어 있어 군더더기 음보가 덧붙여 있다. 그래서 비시조(非時調)가 되었다. 또 ㉰는 시조의 음보 개념(槪念)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시조답지 않은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의 음보를 억지로 초장을 4, 3, 4, 2로 4음보로 잡아준다고 하더라도 중장은 3, 3, 4로 밖에 음보를 잡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장에 한 음보가 없다. ㉲는 종장 첫 구가 3, 5가 아닌 5, 3으로 되어 있어 시조의 특성인 음보 배치율에 어긋났다. 그리고 ㉱는 아예 음보가 엉망이 되었다. 초장, 중장이 5음보가 되었고, 종장은 3, 3, 3, 3, 2, 4, 3의 자수율에 의항 음보율을 구성하고 있어 7음보가 되어 종장의 자수율 3, 5, 4, 3을 완전히 외면하였다. 구래도 표현 기법은 ‘말편자’가 ‘유목민 일기장’ ‘정신 속 물의 솟구침’으로 환치되는 은유(隱喩)를 사용하여 치환(置換) 은유적 구성방법을 취하고 있어 기법상으로 볼 때는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음보(音步) 배치(配置)가 이렇게 되면 시조가 될 수 없다. 평시조는 3장 6구 12음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기면 시조라고 할 수 없다. 다행히도 2007년 한국시조시인협회 연간집 “초록동행‘에는 이런 시조가 실려 있지 않았다.
다음 작품은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新春文藝) 시조(時調) 당선작(當選作)인데 작자도 이 시조를 당선시킨 심사위원도 시조로서 틀과 율격을 깜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음보율에 따라 ‘/’로 표기하여 나누어 본다.
뜨건 국밥/ 후후 불며/ 젖 물리고/ 앉은 여자 어린 건/ 한껏/ 배불리/ 빨다가/ 조몰락대다 꽉 쥐고/ 해살거리며/ 또글또글/ 웃는다.
한길에는/ 늦게/ 깨어난/ 게으른/ 햇살들이 엉덩이를/ 흔들며/ 사뿐사뿐/ 걸어가는 살짝 휜/ S라인 여자들/ 발꿈치를/ 좇고 있다. 공갈빵처럼/ 부푼 가슴/ 아슬아슬한/ 실루엣 필라멘트/ 깜빡깜빡/ 전류를/ 방출하는 뾰족한/ 고욤 두 개가/ 손끝만 대도/ 터질듯 휘청/, 가는 허리/ 애기집/ 하나/ 못 얹어도 둥지 속/ 알 넘보듯/ 집요한/ 사내들의 눈/ 왜일까, 늪에/ 빠지듯/ 지독한 허기/ 몰린다. 순환소수처럼/ 잇고 이어/ 사람에/ 사람을/ 낳은 빌렌도르프/ 비너스/ 따뜻한/ 양수의 기억 넉넉히/ 젖 물려주는/ 그런 여자가/ 그립다. -노영임, 젖 물리는 여자-
이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은 ‘당선작으로 택한 노영임의 ‘젖 물리는 여자’는 외모 중시의 덫에 치여 점점 나약해져가고 있는 현대의 잘못된 여성상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동시에 시상을 잡아나가는 구성과 묘사가 빼어나다. 같이 응모한 작품들도 모두 정제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신뢰를 얹을 만하였다.’ 고 구성과 묘사가 뛰어나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친 부분과 같이 문제 야기(惹起)가 되는 부분이 태반이다.
이는 시조의 기본율을 무시한 현대시적 발상이다. 첫 수 중장과 둘째 수 초장은 5음보이며, 넷째 수는 문제투성이이다. ‘애기집/ 하나/ 못 얹어도’ 는 ‘애기집 하나/ 못 얹어도’로 해야 하나 ‘애기집/ 하나 못 얹어도’ 또는 애기집/ 하나/ 못 얹어도‘로 하여야 하나 문제가 되고, 중장은 아무리 보아도 5음보이고, 종장은 2, 3, 5, 3의 4음보를 이루어 종장 첫구 3 , 5를 완전 이탈하고 있다. 억지로 중장 ’왜일까‘를 종장 첫머리로 옮기면 음수율은 맞으나 음보가 하나 늘어난다. 아래 2) 표현면(表現面)의 ⑤ 음보(音步)의 확장(擴張), ⑥ 음보(音步) 지나친 축소(縮小) 및 생략(省略), ⑦ 음보율(音步律) 이탈(離脫)도 탈시조성(脫時調性) 작품이다. 그래서 시조라고 불러주기가 약간은 주저(躊躇)된다.
2) 표현면(表現面).
① 앞뒤 수(首)의 호응(呼應)
시조에 있어서 수(首)의 호응(呼應)은 앞 수 전체와 뒤 수가 서로 하나의 의미 연결고리로 통합되어 어울려야 하는데 이 경우는 끝맺음이 열린 구조어가 아니고 연결어미로 이루어져 다음의 단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시조의 완결성이란 면에서 볼 때 흠결이 아닐 수 없다. 시조는 한 수 한 수가 완결미가 있어야 비로소 시조가 그 역할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추더위 막아주고 어두움 밝혀주고
소식도 전해주고 노래도 불러주어
그 속은 편안도 하여 우리 집 안방 같고
물 조금 먹여주면 언제나 말 잘 듣고
어디를 다녀와도 나 알고 그만 알고
자가용 타고 친정 가면 출세를 하였다고.
-김병훈, 자가용, 전수-
㉯ 입 밖으로 잘 내지 않는 불안과 희망들을
세세하게 끄집어내 내 것이 되게 하는
감정을 심는 솜씨에 보험 하나 들었는데
마음은 보험이 안 돼 깨우친 게 하나 있지
정을 내며 사는 것이 마음 보험 드는 거라고
사람이 사람에 치어 눈물 나고 사무쳐도.
-채천수, 보험, 둘째, 셋째 수-
위의 작품들은 모두 앞 수의 종장 끝 처리어가 닫힘이나 단절, 열림의 기법으로 되지 못하고 연결형으로 되었다. 그래서 뒤 수의 초장 첫머리에 연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는 ‘우리 집 안방 같고’가 ‘물 조금 먹여주면 언제나 말 잘 듣고’로 곧바로 의미구조가 이어지고, ㉯는 ‘보험 하나 들었는데 마음은 보험이 안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첫수는 둘째 수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의미 구조가 맞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자가용 타고’ 와 ‘감정을 심는’이란 구절이다. 종장 음보 처리는 3, 5-8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이 경우는 전수(前首)는 5, 4로, 후수(後首)는 5, 3의 음수율을 가진 역 음보가 되었다.
② 열림 맺음기법
이는 종장 맺음을 종결어미로 끝맺지 않고 연결어미를 배치하여 생략을 통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시와 시조에 있어서의 표현 기법이다.
㉮ 한나절이 짧아라.
한생 또한 짧아라.
공들여 차린 밥상
들자마자 비운 친구
봄바람
쑤시는 삭신
다 잊으라 심방 오는
-현원영, 목련, 전수-
㉯ 소리 없이 흐르면서
깊어지는 강물이,
모난 돌을 수도 없이
애무하며 지나가니,
조약돌
사랑의 돌로
강가를 수놓듯이.
우리네 빛바랜
평생의 빈 하늘
훈풍이 불어와서
안개를 걷어 가면,
세상은
하늬바람에
초원으로 될 터인데.
-안영준, 훈풍, 전수-
위 작품들은 시조의 일반적 규율인 각장 4음보, 1음보 3∼4 음절, 종장 첫 구와 둘째 구 3, 5 음절 배치가 아주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종장 마무리 단어가 ‘∼는’ ‘∼듯이’ ‘∼인데’로 다음에 어떤 말이 연결될 공간을 제공하며 끝맺음을 하는 생략과 여유의 미를 가진 어미 처리를 하고 있다. 이는 읽는 이에게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열린 기법 종장처리이다.
③ 닫힘, 단절 맺음기법
원래 시조는 초장에서 상(想)을 일으키고, 중장에서 그 상(想)을 다듬어 종장에서 상(想)의 점층과 전환을 이룬 다음 종료(終了)하는 것으로 그 맥을 이어 왔다. 그래서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도 이를 물레질에 비유하여 “옛날 밤을 새워가면서 잣던 할머니의 물레질, 한 번 뽑고(초장), 두 번 뽑고(중장), 세 번째는 어깨너머로 휘끈 실을 뽑아 넘겨 두루룩 꼬투마리(가락꼬치)에 힘껏 감아주던(종장)것,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초·중·종장의 3장으로 된 우리 시조의 내재율이다.”고 하였다.
단힘, 단절 맺음법은 종장 끝머리 처리에서 정서의 마감을 하는 마무리 법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이 방법은 대부분의 시조 작품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 꽃대인지 잎사귄지/ 그만그만한 귀한 녀석/
마사토 분을 열고/ 한 열흘 눈치 보다/
미사일 발사 전야처럼/ 꽃대 하나 서더라.//
-이도현. 보세양란, 첫수-
㉯ 참새
멧새
원앙
제비
검수리
기러기
무리들
꿈을 찾아
창공을 간다.
참새는 방앗간을 찾고
멧새는 덤불을 간다.
원앙은 蓮堂에 제비는 江南을 가고
검수리 동행하던 길 잃은 기러기
옛 들녘
찾은 因緣 따라
달빛 아래 날고 있다.
-장춘득, 同行․2, 전수-
㉰ 만 리를 간다 해도 알아볼 이 없더니만
어느 날 우연히도 바람에 실려 온 구름
인연의 끈을 잡은 무지개는 행운의 실타래.
-이용호, “시카고” 산조(散調), 다섯째 수-
㉱ 몸을 낮추고 허리 굽혀
말하는 저 개울물
토담집 연기 흔들고
문 밖에 선바람,
조상이
놓고 떠나신
산촌의
고운 인심.
-유상용, 농가일기, 전수-
닫힘의 방법에서의 종결어미는 대개 ‘∼다.’ ‘∼네’ ‘∼더라’ ‘∼일세라’ 등으로 표기되어 나타나고. 단절의 방법에서는 ‘명사’나 ‘명사형’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위에서 ㉮와 ㉯는 ‘서더라.’ ‘간다’ ‘있다’로 닫힘의 기법을, ㉰와 ㉱는 ‘실타래’ ‘인심’ 과 같이 명사로 단절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위 작품은 사물의 인간화, 무형물의 사물화 기법을 동원하여 작자의 외형적 정서를 감각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는 인간과 자연의 동질감을 통하여 사물의 인간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 ‘同行․2’는 도형(圖形)시조 기법을 동원하여 새들의 질서정연히 나는 모습을 시각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짐승들의 사는 모습을 통하여 인간의 모습을 조명해 본 작품인 듯하다. 또한, ㉰는 이국 만 리 타향에서 느끼는 자연의 섭리를 표현하고 있고, ㉱는 토속적 향촌의 정경을 청각을 동원하여 회고하고 있다.
④ 표현(表現) 방법(方法)
시조의 표현 방법으로는 묘사적, 사실적, 비유적 기법이 있다. 이들은 별개로 작품마다 한 가지씩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얼려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 2008년 동아일보에 신춘문예로 당선되었다가 지방 모 신문에 중복(重複) 투고한 것 때문에 당선이 취소된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 부분을 설명하는데 적절할 것 같아 소개해 보기로 한다.
㉮ 1. 들레는 늦가을 날 하늘 길 빗장 풀 즈음 천수만 저 갈대밭 빈방 여럿 예비하고 제 몸 확! 불질러놓고 연방 풀무질한다. 밀레의 대작이다, 모이 줍는 가창오리 비로소 붓질하듯 군무(群舞)는 펼쳐지고 휑하던 너른 그 들녘, 아연 잔칫집인가. 일 년을 하루같이 덧칠만 되풀이하는 감 물든 여문 해가 낙관 하나 꾹 쏟아내고 저 멀리 물러선 방죽, 타닥타닥 잔불 끈다. 2. 간월암 갈마드는 갯바람에 실린 물결 무르녹은 나의 하루 놀빛 속에 깃들어도 예인선, 예인선처럼 산 그림자 끌고 간다. -김종렬, 천수만 가창오리-
㉯ 저 산이 새라니
꿈꾸는 푸른 새라니
뉘 몰래 뉘도 몰래 육중한 날개 펼쳐
창 닫고
세상이 잠 들 때
땅을 치며 날겠지.
산이 제 살갗 위에
나무 애써 가꾸는 건
하늘 철썩일 날개, 깃털로 쓰기 위함이라
세상 짐
잠시 벗어놓고
별 찾을 꿈 때문이리.
-송선영, 저 산이 새라니, 전수-
위 작품㉮를 두고 심사위원이 ‘그림에서 선과 색채가 예술성을 가름하듯이 시에서는 언어의 연출이 시의 완성도와 직결된다. 이 작품은 4수의 연작인데 1부는 3수, 2부는 1수로 장면을 가른 것도 구성의 치밀성을 보이고 있다. 철새 떼의 군무가 펼치는 스펙터클이 마음껏 휘두르는 언어의 붓끝에서 눈부시게 살아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듯이 노을 물든 서해안 천수만 가을 들녘에 무리지어 둥지 틀고 하늘을 수놓는 가창오라 떼들의 한 바탕의 선회 군무 모습을 흥취 있게 표현하고 있다. ‘들레는 늦가을 날’ ‘모이 줍는 가창오리’ ‘붓질하듯 군무’ ‘감 물든 여문 해가 낙관 하나 꾹 쏟아내고’ ‘산 그림자 끌고 간다.’와 같은 표현법은 다분히 묘사적, 사실적 표현으로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를 구축해 줌으로써 한 폭의 그림을 상상의 망막에 그려주고 있다. 그리고 노을의 피어오름을 ‘풀무질’이라고 비유하고 있으며, 이 외에 ‘잔칫집’ ‘잔불’은 다분히 비유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친 부분이 과음보로 쓰였으나 지나치게 눈에 거슬리지는 않는다.
㉮에 비하여 ㉯의 작가는 우리나라 시조단의 원로인데 이 작품은 산을 새로 환치 은유시켜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주고 있다. 비상하는 이미지가 신선하다. 시나 시조에서 이미지의 간극(間隙)이 클수록 상상의 폭이 넓어 큰 감흥을 자아낸다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이미지의 간극이 넓고 크다. 산이 새가 되어 훨훨 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치밀한 묘사로 회화성(繪畫性)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⑤ 음보(音步)의 확장(擴張)
음보(音步)를 지나치게 덧붙여 표현함으로써 시조의 모습을 상실하게 한 작품이다. 즉 시조에 사족(蛇足)을 붙인 꼴이다. 뱀을 그리라고 했으면 뱀을 충실히 그려 야지 있지도 않은 발까지 그려 넣었으니 작품을 망친 것이다. 쓸데없이 음보를 확장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시조의 얼굴을 찡그리게 한 예이다.
㉮ 먼지만한 사람으로 와 손을 잡기도 하고 뿌리치기도 하고
먼지만한 사람으로 와 오만 허드렛일 붙이다가
없는 몸 없는 이름에 무한천공 떠다닌다.
-홍성란, 별, 전수-
㉯ 입혀준 옷이 너무 곱구나.
조촐한 마음으로도
한 세상 맑게 사느니
피었다 진다해도
걱정 없어라
홀씨는 스스로 날개를 달고
먼 고향 꿈을 그리느니
바람결에도
향방을 알고 있구나.
우리 가는 길
슬퍼말아라
이슬이 영롱한 것은
세상이 아름다운 까닭이다.
오늘 아침풀꽃
반짝이는 햇살
-박옥위, 오늘 아침풀꽃, 전수-
㉮의 친 부분을 보면 한 음보로 잡기가 벅차다. ‘손을/ 잡기도 하고’ ‘뿌리치기도/ 하고’ ‘오만/ 허드렛일’로 2음보를 아마 여기서는 1음보로 취급하여 그리 쓴 모양이다. 그러나 1음보로 하기는 무리가 조금은 따르는 게 사실이다. 의미 표현을 위해서 시조가 여기까지는 감당할 영역은 아닌 성싶다. 이에 비하여 ㉯는 어디까지가 첫수이며, 어디까지가 초장인지 수와 장의 구별이 어렵고 어떻게 음보율을 잡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시인지 시조인지 그 작품 성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러나 시조 전문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⑥ 음보(音步) 지나친 축소(縮小) 및 생략(省略)
음보(音步)에는 평음보가 대표적인데 이것이 우리 민족의 입이 무르녹은 음보이다. 그런데 이보다 한, 두 음절 적은 음보가 있는데 이를 소음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축소된 1음절 1음보를 이룬 예이다. 그리고 시조는 한 장이 4음보로 되는 것은 불문율(不文律)인데 이를 무시하고 한 음보가 사라짐으로써 위 ⑤와는 상반된 결과를 유발하였다.
저
피 토하며 꺼져가는
운명을 보라
애절함이 분노처럼 끓어 넘치는
차라리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장엄한 이별
저토록
처절한 아픔을 어이 하리
저토록
처절한 사랑을 어이 하리
해질 녘
붉은 물결에
꽃그늘로 지는 바다
-반영호, 노을, 전수-
위 작품은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이다. 이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해설적 형상화적 일반적 시조 작법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이미지만으로 해변의 저녁노을을 표현하였다. 이런 자유시적 수법이 시조의 표현 영토를 넓히는데 일조가 되리라 기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위 작품을 음보를 맞추어 보니 초장의 첫 음보를 “저” 한 글자로 하고 있다. 차라리 그것이 유의한 명사였다면 좀 덜 했겠는데 ’저‘라는 막연한 거리를 나타내는 미지칭 대명사로 하여 허사에 가까운 말로 음보를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장은 ’애절함이 분노처럼 끓어 넘치는‘ 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끓어 넘치는’을 2음보로 보기는 어렵고 1음보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 장 4음보 중 1음보가 빠진 꼴이 되니 시조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너무 지나친 음보 배치라고 본다.
⑦ 음보율(音步律) 이탈(離脫)
위에서 문제 삼은 것이 지나친 음보의 덧붙임과 생략이라면 여기서 보이는 것은 음보율(音步律) 잡기의 무리가 따르는 예이다. 억지로 그렇다고 우기면 우길 수는 있으나 곰곰이 따져 볼 문제점이 발견되는 작품들이다.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관계는 1음보인가 아닌가, 부사어+ 용언의 한 음보 잡기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되나, 1음절어는 어떤 경우에도 1음보가 안 되고 다음 단어와 연결되어 하나의 음보를 형성하는 것일까 등등이 시조의 음보 잡기에서 혼돈(混沌)되어 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는 음보율 잡기의 찜찜한 구석임에 틀림없다.
㉮ 윤오월 밑그림은 늘, 눅눅한 먹빛이다.
노란 물감 풀린 들녘 이랑마다 눈부신데
그 많던 사이프러스 다 어디로 가 버렸나.
소리가 죽은 귀엔 바람조차 머물지 않고
갸웃한 이젤 틈에 이따금 걸리는 햇살
더께 진 무채색 삶은 덧칠로도 감출 수 없네.
폭풍이 오려는가, 무겁게 드리운 하늘
까마귀도 버거운지 몸 낮춰 날고 있다.
화판 속 길은 세 줄기, 또 발목이 저려 온다.
모든 것이 떠나든 남든 내겐 아직 붓이 있고
하늘갓 지평 끝에 흰 구름 막을 걷을 때
비로소 소실점 너머 뉘가 새로 열린다.
-임채성, 까마귀 나는 밀밭, 전수-
이 작품은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당선작으로 ‘오베르에서 보내온 고흐의 편지’란 부제가 붙은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은 현대시조 100년을 넘어서면서 새 지평을 여는 작품이라고 말하며, 새 아침의 언어가 신설처럼 차고 희다고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음보 율을 상실한 곳이 있고, 수(首)의 구별도 없어 시적 내용 호흡으로 볼 때 12행 자유시에 가깝다. 특히 친 곳 ‘늘, 눅눅한’은 짧은 단어지만 두 음보이며, ‘무겁게 드리운 하늘’은 ‘무겁게/ 드리운/ 하늘’의 3음보가 되어야 자연스럽다. 그리고 ‘흰 구름 막을 걷을 때’는 ‘흰 구름/ 막을/ 걷을 때’의 3음보로 나누어져야 한다고 본다.
㉯ 파랗게 숨 쉴 때마다 높은 물결 소리 낸다.
물 냄새 나는 수채화
생기 띤 나뭇잎 물고기
아까운 한순간마다 하나로 움직이는 마음
저 혼자의 별자리 숨겨둔 나뭇가지
나의 사랑아, 바람의 말
거둬들여 오래 빛나는
말갛게 여유로워서 무한진리 여기 머문다.
- 황다연, 오월 포플러⋅1, 전수-
앞의 ‘까마귀 나는 밀밭’과 같이 이 작품도 두 음보를 한 음보로 삼아 표현 한 곳이 친 부분에 나타나 있다. 특히 ‘물 냄새 나는 수채화’나 ‘생기 띤 나뭇잎 물고기’는 확연(確然)한 3음보가 2음보로 취급(取扱)되어 나타났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조의 기본 음보를 상실하여 시조로서의 모습을 의심 받게 하고 있다.
3. 마무리말
위에서 2000년대 나타난 시조의 여러 모양새를 살펴보았는데, 시조는 우리의 전통을 잇는 문학 장르임으로 세월이 흘러도 그 장르의 특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조가 그 특성을 잃을 때 시조는 전통(傳統)문학, 고유 문학(文學)으로의 정형시(定型詩) 위치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조는 그 형식은 유지되어야 하며 그 형태는 발전적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시조라는 장르는 3장 6구 12음보를 기본으로 함을 깊이 새겨 음보율(音步律)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3, 4 음절 1음보의 기본을 유념하여 1음절로 1음보 삼거나, 1음보가 5음절을 넘어 초, 중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장 두 번째 구(句)도 7음절 이상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음보는 호흡률임으로 이에 어긋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 2000년도 들어와 특히 젊은 세대들에 의하여 시도되고 있는 제 양상 가운데 위와 같은 점은 고쳐야 할 것이며, 음보의 과대 배치도, 수와 수 사이의 연결어 맺음도 고려할 점이다. 이런 모든 면을 앞으로 눈 여겨 보며 이의 발전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은 심도 있게 다루어 보아야 한다고 본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렇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이런 새로운 시도(試圖)들은 아직 시조가 유동성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다는 증좌(證左)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조에 대한 확립(確立)된 이론이 불비(不備)하다는 말도 되기도 한다. 현대시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져 그 이론적 뒷받침을 마련하고 있지만 현대 시조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은 아직 요원(遼遠)하다. 하루 빨리 지금도 헤매고 있는 시조란 명칭의 구구한 설과 함께 시조의 음보, 장과 구 등이 우리 정형시로서의 확실한 면모를 갖추게 정립되어야 할 문제이고 더불어 요즘 나타나고 있는 시조의 새로운 시도가 확고한 시조 틀의 하나로 정착될 것인지 아니면 일회성(一回性)애 그칠지는 두고 볼 문제지만 이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문학세상 08 가을호]
첫댓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매우 유익한 내용입니다. 고맙습니다.
이우영님 관심 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