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천재적인 음악가이자 풍류객인 임동창 풍류한마당이 있었다. 남쪽나라 한려해상 국립공원인 남해군 남해읍 차산리 남해문화원 공연장에서 만난 출연진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국가지정중요문화재 제45호 이생강 예능보유자와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홍보가’ 이수자 전인삼 교수 등 쟁쟁한 출연진이었다.
임동창 선생이라면, 금산인 대부분 얼마 전 보광사에서 열린“보광풍류회”를 기억할 것이다.
진악산 중턱에 위치한 보광사에서 열린 음악회로, 금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음악의 하모니로 인구에 회자된 한판 놀이마당이었다.이곳 아름다운 보광사에서 9년째 곡을 만들고 책을 펴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임동창 피아니스트는, “금산이야말로 나의 제2의고향” 이라고 선언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당대의 풍류객이며 천재적인 음악가로 일컬어지는 ‘그냥 임동창(그는 아호로 한글인 그냥이라는 단어를 쓴다. 말 그대로 세상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피아니스트를 만나 그의 음악세계와 풍류세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페달이 구멍난 이후 찾은 피아노로부터의
자유
임동창의 ‘공부의 내력’은 매우 특이하다.
15세에 무당 신내리 듯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
다. 이길환선생으로부터 사사를 받은 이후 17
세에는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악상으로
인해 작곡에 손을 댄다.
“나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피아노에 미친 시
절입니다. 그렇게 연습에 몰두하다 보니 20세
에 피아노 페달에 구멍이 났어요.
그러고 나니 피아노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듬해에는 ‘나를 알아야 나의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 는 사실을 깨닫고 인천 용화사로 출가를 했다. 수계법명은 ‘보림’ 이었다.
“음악 공부를 위해 서울 시립대학교에서 작곡 전공으로 공부를 한후에, 저의 음악의 폭이 넓어진 계기는 서른다섯에 김덕수 사물놀이를 만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 분들은 그야말로 국악의 최고 명인 명창들이 아닙니까. 그들과 함께 다양한 공연 방송활동을 하게 됨으로써 국악의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지요.“
임동창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미 사물놀이, 재즈와 협연하는 등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음악과 여타 예술을 넘나드는 독보적인 활동을 해왔다. 한국의 전통 음악인들은 한국음악을 완벽히 이해하고 표현할 줄 아는 유일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그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전통 음악을 피아노로 재창좨 1990년대에 발표했던 5장의 음반은 해외바이어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국음악 음반으로 기억된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제 막 명성을 떨치고 본격적으로 활동해야 할 40대에 그는 홀연히 외부 활동을 접었다. 1990년대 후반이었다.
정말 의외의 선택이었다. 대중적으로 매우 유명해진 상태에서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롯한 내 음악’ 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한국의 전통음악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1년2개월 동안 일기를 쓰듯 500여 페이지를 작곡했습니다.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 작곡한 셈이지요. 그렇게 작곡을 하다보니 인류 음악 역사상 최초의 ‘허튼가락’ 장르가 개발되었습니다. 가곡, 영산회상,여민락,대취타,전래동요,민요, 산조 등을 이 ‘허튼가락’ 안에서 새롭게 작곡했지요. 그때부터 3년 동안 2000여 페이지를 작곡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며 다짐을 보여준다. 그는 9년동안의 긴 칩거를 끝내고 내년 봄 발표회를 준비하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새로운 음악장르 ‘허튼가락’ 탄생하다
음악을 공부하면서 서양클랙식,재즈, 국악, 대
중음악 등 세상의 거의 모든 음악을 흡수하는
동안에도 그가 끊임없이 붙들고 이썬 화두는
‘어떻게 해야 오롯한 내 음악을 만들 수 있을
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은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을 괴롭혀 결
국은 그 해답을 우리네 전통음악에서부터 찾게
되엇다.
“우리의 음악을 세계인들로부터 ‘천상의 음
악’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최상의 격조와 품
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틀에 갇힌 기존의 연주 방식으로는 우리 음악
속에 깃든 정신세계의 정수, 즉 ‘풍류’를 마음
껏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지요. 그래서 결국
저는 모든 사람을 자유로 이끄는 새로운 장르
‘허튼가락’ 을 발명했습니다. 허튼가락은 시간과 공간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절대자유의 음악이라고나 할까요? 하하”
창착곡집 ‘임동창의풍류, 허튼가락’은 매우 독특하다. 악보마다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연주하라는 추가글이 쓰여 있는 것. 한마디로 ‘니 마음대로 하세요’ 라는 뜻이다. 이 허튼가락을 연주해보면 “마치 필터를 통해 흙탕물이 맑아지듯, 연주자에게 즉흥연주의 길이 환하게 열릴 것” 이라고 임동창은 말한다.
책을 통해 음악철학 알리기도
그는 실제적인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지만 무언가 마음 한구석에서 답답한 마음을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것과 우리 조상들의 훌륭한 슬길르 알아주지 않고 풍류에만 그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의 음악과 철학을 담아 글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시대의 비대중적인 답답함과 갈증을 음악철학에 담아 책을 쓰다보니 5권째로 방대해져가네요.“
그는 글을 쓰다보니 답답함이 풀리고 갈증이 해소되어 쓰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그러나 지금도 아니다라고 느낄땐 과감히 태워버리기도 한다.
금산은 어떤 곳?
예술을 하는 그에게 ‘금산’이라는 존재는 매우 특별하다.
보광사 석보선 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공연을 처음하게 된 것도 이곳 금산이었다. 또 그 이후 ‘보광풍류회’ 가 금산 군민들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회원이 모여, 금산은 그에게 제2고향이 된 셈이다.
“또 금산은 자연이 아름답고 조용해 집중하기가 좋아요. 특히 여기 진악산 중턱에 자리잡은 보광사는 곡을 만들고 책을 펴나가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금산을 사랑하는 그이기에, 금산군민이 앞으로 더욱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빼놓지 않는다.
“금산의 자랑인 인삼은 인간의 육신을 보양시켜줘 건강한 사람을 만들어주지요. 여기에 덧붙여 사람들의 영혼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금산문화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그 문화가 비단물결을 타고 전국, 아니 세계로 흘러간다면 금산은 단연 최고의 지역으로 거듭나겠지요.“
금산 문화 발전의 한 날개를 기꺼이 자처하는 그가 금산에 머문는 한, 금산문화의 앞날은 분홍빛으로 물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첫댓글 빛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