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보물 설치하기 쉬운 노즈
지금까지 필자가 알아본 대암벽 등반의 가장 좋은 대상은 순수 암벽등반의 엘 캐피탄과 알파인 등반인 아이거 북벽, 그리고 6,000m 이상의 고소에서 고난도 등반을 구사해야 하는 트랑고타워이다. 그러나 이들 거벽등반을 성공시키려면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란 손자병법 충고대로 각 거벽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등반능력을 냉철히 계산해 등반계획을 세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후라면 5.9급을 간신히 선등하는 수준의 클라이머도 이 거벽들을 거뜬히 오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먼저 엘 캐피탄(El Capitan)의 특성부터 짚어보기로 하자. 이 매끈한 벽의 최고 인기 코스는 노즈(Nose)다. 34마디로 이루어진 이 코스를 성공적으로 등반하기 위해서는 먼저 엘 캐피탄이라는 거벽을 이해해야 한다. 필자가 엘 캐피탄을 처음 올랐을 때는 이 거대한 수직벽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엘 캐피탄을 다섯 차례 오르고 난 지금은 엘 캐피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자신있게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우선 노즈는 크랙 등반 위주이므로 확보물의 설치가 용이하다. 따라서 자유등반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라도 인공등반을 펼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5.9급 수준의 클라이머라도 5.10급 이상의 마디를 모조리 인공등반하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엘 캐피탄에는 식수가 없어서 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 노즈는 등반능력에 따라 통상 2~4일이 걸리므로 식수의 무게만 해도 10kg 정도가 된다. 5.9급 클라이머의 경우 이 정도의 무거운 짐을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홀링(hauling)을 해야 한다. 그러나 5.11급을 자신있게 오를 수 있는 클라이머의 경우, 후등자가 가벼운 배낭을 메고 빠른 속도로 따라올 수 있다면 홀링은 필요치 않다.
이 정도 수준의 클라이머라면 새벽 4시경에 출발해 노즈를 하루만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침구가 필요치 않게 되고 식량과 식수도 가볍게 된다. 이는 물론 대부분의 피치를 자유등반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식수가 적으면 식량에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요세미테에 오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등반대는 식량을 경량화하려고 건조식을 애용하는데 말린 사과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나 신선한 사과만 먹고 물을 안마시는 경우나 짐무게는 똑같게 된다. 알프스의 경우 눈을 녹여 식수를 만들어 건조식과 함께 먹는 게 이상적이지만 엘 캐피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스타일로 할 경우 엘 캐피탄에서는 어차피 식수를 지고 가므로 굳이 건조식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필자가 엘 캐피탄을 처음 오를 때에는 땅콩, 건포도 등의 가벼운 식량만 준비했었다. 분명 무게는 줄었지만 설사를 하는 통에 등반을 잡쳐버렸었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평지식이나 별 다르지 않을 만큼 등반식에 구애받지 않고 있다. 88년 4월에 노즈를 등반할 때는 15 마디의 엘 캡 타워(El Cap Towers)에서 불고기를 굽기까지 했었다.
등반 능력에 따라 공격법 달라
요세미테의 날씨는 대체로 좋으므로 등반속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 이를테면 5.9급 수준에도 못 미치는 클라이머도 등반장비와 식량만 충분하다면 일주일이 걸려서라도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노즈를 오르는 요령을 5.9급 수준의 클라이머와 5.11급 수준의 클라이머 경우로 분리해서 설명해 본다.
● 5.9급 수준의 등반요령
장비를 충분히 가져가 5.10급 이상의 마디를 인공등반한다. 4호 프렌드 크기의 확보물을 최소한 3개는 휴대할 것. 식량과 식수를 충분히 준비해 장기전에 대비한다. 이를 위해서는 홀링준비가 필요하다. 자유등반을 하는 중이라도 추락이 예상되면 즉시 인공등반으로 전환한다. 비박지에 도착하면 위의 한두 피치를 올라 고정자일을 설치해 놓는다. 이는 다음날의 등반시간을 단축하는데 좋은 방법이다. 선등자가 펜듈럼하는 피치를 후등자가 주마링으로 따라가는 연습을 많이 해둔다. 5.10급 수준의 클라이머는 2~3일, 5.9급 정도면 4~5일, 그리고 5.8급 정도면 5~7일을 예상하여 등반계획을 짠다.
● 5.11급 수준의 등반요령
노즈 코스의 하단부를 미리 한두번 올라서 야간등반이 가능할 만큼 루트를 익혀 놓는다. 새벽 두세시경에 출발해 해가 뜰 때까지 야간등반을 한다. 이때에는 확보물을 충분히 설치해야 한다. 후등자는 식수 약 3ℓ와 약간의 식량만으로 짐을 최소화해서 배낭을 꾸린다. 아주 가벼운 비옷을 휴대한다. 요세미테에서는 비가 오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어찌된 셈인지 필자는 항상 비를 만났다. 해가 뜨면 전속력으로 등반해 노즈를 하루만에 끝내도록 한다.
하루에 등반을 끝내지 못했다면 비박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때는 준비한 비옷을 입거나 쓰레기 담는 비닐 봉지를 뒤집어 쓰고 버텨야 한다. 하프돔은 노즈보다 조금 더 쉬우므로 5.10 수준의 클라이머도 위와 같은 요령으로 하루 만에 오를 수 있다.
속공이 정공법인 아이거 북벽
알프스의 공동묘지로 불렸던 아이거 북벽은 무시무시한 죽음의 벽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 어려운 벽은 아니다. '89년 필자가 아이거 북벽을 오르고 난 뒤 느낀 점은 아이거가 여러가지 면에서 엘 캐피탄과 전혀 다른 성질의 벽이라는 것이었다. 아이거 북벽의 날씨는 대체로 나쁘며 낙석과 낙빙이 엘 캐피탄과는 비교할 수 없게 심하고 기후와 기온에 따라 벽의 상태가 수시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하얀 거미와 같은 설벽부분은 해가 들지 않는 오전 중에 오르는 것이 안전을 도모하는 방법이 된다.
이렇듯 날씨의 영향에 민감한 아이거 북벽이지만 등반기술상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벽이 아니다. 적어도 중간지점인 람페(Rampe)까지는 확보가 필요없을 만큼 수월하다. 또 어느 곳에서든 식수를 구할 수가 있으므로 짐의 무게가 가볍고 홀링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조건을 보면 어떤 방법으로 이 벽을 올라야 할 지 해답이 쉽게 나온다. 아이거 북벽에서는 낙석에 희생된 등반가보다 폭풍우에 갇혀 조난당한 산악인이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악천후가 엄습해 오기 전에 재빨리 올라버리는 속공법이 가장 안전한 등반방식이다. 요세미테식으로 사나흘씩 북벽에 매달려 있다가는 십중팔구 악천후를 만나게 된다. 이 경우 기관포처럼 쏟아지는 낙석을 피하려면 불안정한 벽의 표면이 얼어붙은 야간에 등반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된다.
기온변화에 따라 벽의 상태가 변화무쌍한 이 북벽에 신설이 살짝 덮인다면 아이거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암벽이 되고말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눈이 녹아 없어지고 바위를 살짝 덮은 살얼음도 모두 녹아내린다면 5.7급 수준의 클라이머라도 휘파람 불며 오를 만큼 수월한 벽이 될 수도 있다. 아이거는 4,000m가 채 안되는 산이므로 비교적 기온이 높아 신설은 사흘 정도면 녹아 없어진다. 따라서 신설이 녹을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은 현지의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고 북벽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 공격 시기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북벽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폭풍이 밀려오기 직전에 출발해 기온이 몹시 낮았다. 그 덕분에 낙석은 거의 없었으나 람페와 엑시트 크랙에 살얼음이 덮여 5.10급 정도의 동작을 여러번 해야만 했다. 클라이머마다 방법은 다르겠지만 필자가 다시 아이거 북벽을 오른다면 이렇게 해보겠다. 새벽 1시경에 갱도에서 출발한다. 지난번에는 새벽 2시30분에 출발했는데 머리등을 켜고 등반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단부는 쉬우므로 자정에 출발해도 무방할 듯하다.
다음엔 장비를 최소한으로 하겠다. 지난번에는 나이프 하켄 3개, 트리플 1조, 프렌드 중형 1개, 아이스 스크류 5개, 그리고 카라비너를 20개나 가지고 갔는데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나이프 하켄 2개, 트리플 중형 2개, 2호짜리 캠어럿 1개, 아이스 스크류 3개, 카라비너 10개만 있으면 좋은 날씨에서는 충분할 것으로 여겨진다. 난이도 높지 않은 북벽의 하단부에서 선 · 후등자가 동시에 등반하면 시간은 절약된다. 이때 선등자는 가능한 한 많은 중간확보물에 줄을 통과시켜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또 될수 있는 대로 고정 하켄이나 프렌드, 트리플을 이용하면서 하켄을 박지 않아야 한다. 하켄은 회수하는 데 많은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자정에 출발했다면 해 뜰 무렵에 제2설원을 통과하고 오전 7~8시 경에는 람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부터는 등반이 어려워지므로 빌레이를 보면서 격시등반을 해나간다. 정오경에 하얀거미를 통과하면 오후 4~5시까지는 엑시트 크랙을 끝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동시등반으로 정상설원을 뚫으면 오후 6시경에 정상에 설 것이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북벽의 경우가 가장 이상적일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비박을 할 수밖에 없다. 람페의 중간지점과 신들의 트래버스 직전에 훌륭한 비박지가 있으니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진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넓은 테라스가 있는 트랑고 타워
불행히도 필자는 트랑고 타워를 오른 경험이 없어서 실감나는 설명은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트랑고 타워 원정계획을 세우면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간접적이나마 설명해 보겠다. 북부 파키스탄에 위치한 6,000m급의 트랑고 타워에는 여러 개의 코스가 개척되어 있는데 이곳 역시 아이거 북벽과 마찬가지로 수시로 상황이 변한다. 그리고 6,000m라는 고도의 영향을 이겨내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 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의 클라이머가 가장 먼저 시도해 볼만한 코스는 남동벽의 유고슬라비아 루트가 아닐까 한다. 이 루트의 정점은 5,300m 지점에 넓은 테라스가 있어서 캠프를 설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캠프에서 장기간 채류하다가 좋은 날씨를 만나면 1박2일의 속공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 테라스까지는 등반이 어렵지 않으므로 이틀 정도면 충분히 1주일 분의 식량과 장비를 홀링해 놓을 수 있다.
필자의 등반계획은 다음과 같다. 벽의 출발지점은 4,7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다. 5,300m의 어깨지점까지 1주일 분 식량과 장비를 홀링해 공격 베이스캠프(ABC)를 설치한 뒤 식수가 풍부한 이곳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린다. 날씨가 좋아지면 암벽화를 신고 등반을 시작한다. 암벽화는 발의 동상을 막기 위해 양말을 두껍게 신게끔 큰 것을 사용한다. 선등자는 배낭없이 등반하고 후등자는 배낭을 메고 주마링을 한다.
5,800m의 비박지에서 1박을 한 뒤 정상공격을 하고 그날로 5,300m의 어깨 지점까지 하강한다. 하강루트는 볼트가 설치되어 있어 신속한 하강이 가능하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유고슬라비아 루트가 비교적 쉽기에 가능한 것이다. 마크 윌포드와 그렉 차일드가 시도한 트랑고 동벽 같은 데는 적용되기 어렵다. 그들은 트랑고에서 가장 어려운 루트의 개척을 시도했었다. 불행히도 악천후로 인해 실패는 했지만 히말라야 역사상 가장 어려운 암벽등반을 시도한 그들의 노고는 높이 사야할 것이다. 그들의 등반이 얼마나 극한적이었는지는 다음의 대목을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스카이훅을 설치한 뒤 피시훅(대형 스카이훅)을 걸고 리벳과 스카이훅 및 불트 하나을 설치했다. 이어 카퍼헤드를 몇 개 붙이면서 계속 피시훅으로만 올라갔다. 위에서 떨어지는 얼음장들이 비수처럼 날라온다. 폭풍이 시작될 무렵에야 겨우 이 지긋지긋한 피치를 끝냈다. 곧바로 홀링을 시작했다. 후등자도 주마링을 시작했으나 자일이 얼어 계속 주마가 미끄러지고 있다. 그를 위해 얼지 않은 새 자일을 던져주려 했지만 루트가 비스듬한 까닭에 자일이 미치지 않는다. 홀링을 하던 확보지점의 하켄 하나가 '핑'하고 튕겨 나온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겨우 반쯤 박힌 나이프하켄 4개 뿐이다. 마침내 후등자가 올라오고 우리는 볼트 한 개를 박아 포타렛지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6,000m의 고산에서 A4~A5에 이르는 극도로 위험한 인공등반을 감행했던 것이다.
<월간 「사람과 산」에서 - 주영 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