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슬픔의 노래"
♠ 死의 讚美 (죽엄의 창가) ♠
작사 윤심덕 (추정)
작곡 Iosif Ivanovich (이오시프 이바노비치)
원곡 Donauwellen (도나우강의 잔 물결)
노래 윤심덕
<부산영도에서 바라본 대마도[対馬島:つしま(쓰시마)]>
. 설레는 두근거림이 남아있는 사랑스러운 연인들의 왈츠를 강의 잔물결로 섬세하게 표현해 낸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h)의 왈츠 A단조, '도나우 강의 잔물결' 이다.
. 그러나 이 곡이 우리나라에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926년, 윤심덕의‘死의 찬미’였다. '사의 찬미'는‘도나우 강의 잔물결’ 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인 노래로 윤심덕이 이 곡을 녹음 하면 서 하염없이 눈물흘렸다는 일화도 전해졌다.
. 원곡은 왈츠였지만 이 곡이 슬프게 들리는 데는, 윤심덕이 붙인 ‘사의 찬미’라는 제목과 삶에 대한 허무를 말한 가사 때문이기도 하다.
. 윤심덕은 이 곡을 녹음한 직후 그녀의 애인인 극작가 김우진과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자살을 함 으로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놨다.
. 이 후 <사의 찬미>의 주 멜로디가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임이 밝혀지며, 이전 군악대에서 연주됐던 밝고 경쾌한 이미지가 슬픔과 허무의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 누군가는 도나우 강을 보며 연인들의 사랑스러운 왈츠를 떠올 렸고, 어느 누군가는 그 왈츠를 보며 이루지 못하고 비극으로 남은 사랑을 표현했다.
♥ 윤심덕과 '사의 찬미' ♥
. 이 땅에서 처음으로 서양풍의 노래를 불렀던 가수 윤심덕! 음악, 영화, 방송 등 서양문화가 한참 들어오고 있던 시절 국비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윤심덕은 음악교사, 배우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 1921년 외국곡을 편곡 개사하여 현재 <희망가>의 원곡인 '이 풍진 세월'이 불리고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 반달이 불리는 등 서양음악과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가 불리기 시작 하던 때다.
. 그 시절에는 성악이나, 가곡, 동요, 대중가요의 경계가 없던 시절 이어서 서양풍의 노래를“창가”라는 말로 표현하던 시절이었다. 일반적으로 불리던 노래를“창가”라고 하던 시절에도 윤 심덕을 보도 할때는 '일류 성악가' 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 1920년대는 서구문물이 한꺼번에 소개되면서 이전과 다른 풍경 을 볼 수 있었다. 양장차림을 한 모던보이들이 카페에 자리 잡았고, 단발머리를 한 신여성들이 거리를 누볐다. 유성기의 보급으로 음악 이 대중화되기 시작하고, 유성기 음반인 레코드도 인기를 얻었다. 1920년대 중반까지는 기생과 명창들의 민요를 녹음한 레코드가 대다수였는데, 서양 벨칸토(bel canto:이탈리아의 가창기법) 창법으로 노래한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가 소개된다. 바로 윤심덕 이다.
. 윤심덕은 경성 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 도쿄의 우에노 음악원 에서 유학한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가곡을 불렀던 성악가로, 세계 에 우리의 음악을 알리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 1926년 일본 닛토(NITTO:日東) 레코드에서는 윤심덕에게 음반 취입을 제안했고, 오사카로 건너가 녹음 후 발매한 음반 안에 <사의 찬미>도 있었다.
‘사의 찬미’는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조선어 노래였고, 여기에 윤심덕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더해져 곡은 더욱 유명해졌다.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 김우진과의 만남 >
<김우진> - - ------ - - -<윤심덕>
. 그녀와 사랑에 빠진 남자는 도쿄에서 영문학을 유학한 극작가 김우진이었다. 1926년 8월 4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해서 부산을 가는 관부연락선에 타고 있던 남녀가 쓰시마섬(대마도) 부근 현해탄 해상을 지날때 바다에 몸을 던졌다. 즉시 수색작업 이 이루어졌지만 바다에 빠진 남녀를 결국 찾지 못했다. 승객 명부에는 김수산, 윤수선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이는 가명이었고 실은 윤심덕과 김우진이었던 것이다.
. 김우진은 아버지가 전남 장성 군수를 지낸 목포의 거부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가 구마모토 농업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와세다대 영문과로 옮겼다.
. 윤심덕은 평양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넉넉지 않은 형편 에도 딸의 재능을 살리고자 평양 사립 숭의학교에 보냈다. 노래 실력이 뛰어났던 윤심덕과 피아노를 전공한 여동생 윤성덕, '들장미'의 가사를 번역한 남동생 윤기성 등 음악적 소질이 있는 가족 이었다.
.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유학 중인 1921년 '극예술협회' 에서였다. 극예술협회는 홍난파가 자신의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한 <최후의 악수>로 대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했는데, 김우진 은 연출자로서의 책임을 맡았고, 윤심덕은 공연 중 막간에 노래 하는 성악가로 합류했다.
<영화 '윤심덕'에서 윤심덕역을 맡은 문희>
.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에 미모와 재능이 있는 신여성이라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김우진은 내성적이라 다가서지 못했고, 게다가 고향에 아내와 딸이 있었기에 마음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했다.
. 그러나 순회공연을 다니는 동안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솔직하고 당당한 그녀의 성격답게 적극적으로 감정 을 표현했다.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것은 험난한 여정을 담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택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예술 적 이상을 함께 할 상대라는 확신이 있었다.
. 귀국 후 윤심덕은 스타의 반열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수입은 많지 않았다. 이때 갑부와의 스캔들에 휘말려 잠시 활동을 접고 북만주 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돌아온다.
. 다시 돌아온 그녀는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이를 돌파하려 악단의 여왕에서 배우로 변신하기로 한다. 당시에 배우가 된다는 건 일개 광대로 취급되어서 많은 희생과 용기를 필요로 했고, 많은 것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심덕은 김우진 과 함께할 수 있음에 신흥 극단 '토월회'에서 배우로 나선다.
. 그러나 관객의 반응은 좋지 않았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라고 칭송받던 위치에서 실패한 배우로 손가락질받는 것은 윤심덕에게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 그 당시 김우진은 가업을 잇게 하려는 아버지와의 극심한 갈등에 부딪혀 낙심하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가업을 물려받아 낮에는 회사 일을 했으나, 밤에는 책을 읽고 희곡을 쓰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주변 여건과 부딪혀 낙심한 김우진은 일본 오사카로 말도 없이 떠나버린다. 윤심덕은 연락처를 알아내 그 쪽으로 향했다. 이미 일본 레코드사와의 음반 취입 계약이 되어 있었던 그녀는 사의 찬미를 비롯한 28곡의 녹음을 마치고 김우진 을 만난다.
<윤심덕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윤심덕, 김우진의 자살을 알리는 조선일보 1926년 8월 5일자 사회면 기사>
. 두 사람은 오사카에서 며칠을 함께 한 후, 조선으로 돌아가는 관부연락선에서 두 사람은 죽음을 택한다. 사고 발생 일주일 후 윤심덕 '사의 찬미' 앨범이 발매됐고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 으로 제기됐다. 동반자살한 이후의 상황도 의문이었지만, 자살 동기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큰 의문이었다.
. 이 거대한 사건의 의혹은 관부연락선의 종업원이 발견했다는 짤막한 유서 이외엔 이들의 동반 자살을 입증할 만한 아무런 증거 가 없다는 점이다.
<배에서 발견된 김우진이 아내에게 남긴 유서>
. 그러나 1930년 제기된 윤심덕 생존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또 한 가지 의문은 두 사람이 과연 정사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는가 하는 점이다.
.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여러 남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김우진 역시 함께 죽어야 할 만큼 윤심덕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김우진은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도 윤심덕을 사랑 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 윤심덕은 유부남인 김우진만 사랑한것이 아니라 홍난파, 채동선, 그리고 윤심덕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하자 정신병원에 입원까지한 박정식등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염문을 뿌렸다.
. 당시 조선사회에는‘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부 남과 처녀가 살림을 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 그런데 생존설이 끊이지 않던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의 어느 사업가가 두 사람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 했다는 것은 한낱 연극일 뿐이고, 실상은 도쿠주마루 일등선실 급사를 매수해 정사한 것처럼 위장한 후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 로 가서 중국인 명의로 다시 이태리로 건너간 후 로마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는 것이다.
. 이탈리아 주재 일본 영사관은 이탈리아 내에 김우진 윤심덕이라 는 이름의 사람들이 살지 않는다고 공식 통보했지만 사람들은 윤심덕 김우진 두사람이 중국 여권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 당시 유부남과 처녀의 연애가 용납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어서 자살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점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장해 로마에서 신분까지 속이고 함께 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 그래서 윤심덕의 이른바 "현해탄의 정사"가 자살이 아니라 기획 타살을 자살로 위장발표된 것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 하려는 일본 음반산업이 계획한 타살 극이거나 닛토레코드사에서 노래를 히트 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전해지고 있다.
[당시에 일본과 조선을 오가던 관부연락선 (關釜連絡船)]
<관부연락선 덕수환 (德壽丸:도쿠주마루) 윤심덕과 김우진은 이 배를 타고 귀국하다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관부연락선 시대]
. 윤심덕은 신라환(新羅丸:시라기마루)이라는 관부선을 타고 부산 을 출발 했다가 덕수환(德壽丸:도쿠주마루)이라는 관부선을 타고 귀국길에 대마도 부근 해상에서 정사한 것이다.
. 당시 관부 연락선은 고려환(高麗丸:고라이마루)과 신라환 등이 있었는데 이 배는 3천 102톤 짜리로 6백 11인 승이었다. 두 배는 똑같은 규모였다.
. 한일간의 이동 수단은 지정학적으로 뱃길 밖에 없었다. 초기는 군함, 부정기선, 우편선 등이 부산, 인천 등에 이어졌으나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이란 이름은 1905 년 9 월 11 일 쓰여지기 시작했다.
. 1921년에는 경복환(景福丸), 덕수환(德壽丸), 창경환(昌慶丸) 등 3 척을 여객전용선으로 띄웠다. 주야 2 회 취항했다. 이 배들은 3,619 톤짜리였다. 여객이 폭주하자 신라환, 고려환 등 3 척을 추가로 배치했다. 이 배들은 부정기선으로 화물을 주로 실어 날랐다. 이 배들은 우리 나라의 옛 나라 이름, 그리고 궁궐의 이름 을 붙여 한국으로 가는 배임을 확실히 한 것이다.
★영화로 보는 '윤심덕'과 '사의 찬미'★
<영화 '윤심덕' 포스터>
. 그들의 이야기는 영화와 뮤지컬로도 작품이 나와 있다. 영화 <윤심덕>은 1969년 안현철 감독 작품으로 문희, 신성일, 이순재, 주증녀가 출연하였다. 이 영화 속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신성일과 문희는 당대의 톱스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지금은 우리 에게 탤런트로 잘 알려진 이순재의 영화 속 모습도 영화를 보는 색다른 재미를 더해준다.
<대마도앞 현해탄 해상에서 촬영된 영화 '윤심덕'중 이순재>
<영화 '사의 찬미' 포스터>
. 또한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는 1991년에 김호선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되었다. 노래의 제목을 따서 영화 제목도 <사의찬미>로 결정되었는데 윤심덕 역에 장미희, 김우진 역에 임성민, 홍난파 역에 배우 이경영이 열연하였다. 시간이 흘렀 어도 구성이 탄탄하고, 장면이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그리고 2015년,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뮤지컬화가 되었다. 뮤지컬 <사의 찬미>는 대학로에서 관객들의 호평 속에 공연되었다고 한다.
◆ 윤심덕 '사의 찬미' 음반 최고가 6080만원 ◆
<'사의 찬미' 축음기 레이블>
. 디지털 음원에 대한 반작용으로 최근 주목받는 LP음반 열기가 유성기(축음기·SP) 음반으로 확산되면서 윤심덕의 ‘사의 찬미’ 가 들어간 유성기 음반이 역대 한국 가수 음반 가운데 최고가로 팔렸다.
. 2016년 1월 27일 밤 일본 야후 재팬 온라인 경매에 나온‘사의 찬미’유성기 초반(初盤·최초 음반)이 550만 엔(약 5600만원, 수수료 포함 6080만원)에 낙찰됐다. 종전 최고 기록은 지난해 2015년 7월 19일 야후 재팬 경매에 출품된 윤심덕의‘사의 찬미’재반(再盤·두 번째 찍은 음반)이었다. 당시 이 음반은 521만 엔 (약 5300만원)에 팔렸다.
. 국내 음반전문가에 의하면 현재 국내에서도‘사의 찬미’음반이 4장 정도 발견되었으며 시중에 유통될 경우 1억원이상 호가 할것 으로 예상했다.
. 유성기 음반은 LP가 본격 생산된 60년대 중반까지 주로 제작 됐다. 일제강점기 음반 가운데 윤심덕의‘사의 찬미’, 이애리수 의 ‘황성옛터’,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3대 명반으로 꼽힌다.
<2016년 일본 야후 재팬에서 550만 엔 한화 약 5600만원에 낙찰된‘사의 찬미’경매 화면>
< 배경음악 >
▶ 김정호-섹소폰연주-배호의 노래가 메들리로 나옵니다.
아래 개별곡을 감상하실때는 음원을 꺼주세요.
< 번안곡 듣기 >
♬ 사의찬미 (死의 讚美) ♪
※ 우리가 '사(死)의 찬미(讚美)’ 라고 하는 노래의 원 제목은 ‘죽엄의 창가’였다. 여기서 '찬미' 는 '창가' '음악'이란 말이었다. 그 때는 음악을 '찬미'라 썼다.
작 곡 : 이바노비치
작 사 : 윤 심 덕
노 래 : 윤 심 덕
※ 작사자가 김우진이란 설도 있지만 작사자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단정하기 어려운데, 가사 내용으로 보아 백만장자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가 지독 한 허무와 염세에 가득 찬 노랫말을 지었다는것은 납득하기 어렵 고, 당시 20세 처녀가 별로 없던 시절에 나이 서른 살이 되도록 미혼으로 살았고 갑부와의 스캔들에 휘말려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해 매우 힘겹게 살아온 윤심덕 자신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쓴 노랫말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있어 보인다.
<1926년 오사카의 닛토(日東)레코드에서 녹음한 원본 음원>
☞ 자그마치 1억원 짜리 음원입니다. 후회합니다. 안 들으시면....
<1>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 있느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 *
<2>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3>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유성기 원판에 들어있던 '사의 찬미' 가사지>
. 한편, 현재 남아 있는 음반이나 가사지에는 위에 소개한 3절까지 만 나와 있지만, 1926년 당시 신문에는 사의 찬미 가사가 5절까지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음반회사에서는 발표하지 않은 가사가 신문에는 나오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데, 어쩌면 5절 까지 나와 있는 가사 원본을 당시 신문사에서는 따로 입수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4>
잘 살고 못 되고 찰나의 것이니
흉흉한 암초는 가까워 오도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내 님도 다 싫다
<5>
살수록 괴롭고 갈수록 험하니
한갓 바람은 평화의 죽음
내가 세상에 이 몸을 감출 때
괴로움도 쓰림도 사라져 버린다
. 가수 배호는 가사를 완전히 바꾸었다. 곡조는 윤심덕이 뽑은 그대로인데 슬픈 가사를 걷어내고 다뉴브강을 즐기는 자연 서사로 고쳐냈다.
♬ 다뉴브 강 / 배 호 ♪
붉은 노을은 달빛을 가리고
송화 강변에 나부겨 있는곳
흐르는 은물결 꽃바다 이루고
지저귀는 새 여기가 다늅강
* * 어기여차 배를저어 달그림자 깨여지고
은파영월 일엽편주 동실며 나간다 * *
<반복>
. 한편 이 <사의 찬미>는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하던 만주의 우리 동포들이 즐겨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독립군이 부르면 또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노래방에서 흔히 부르는 <사의 찬미>가 바로 독립군 버전이다. 독립군 버전을 김정호 노래로 들어보자. 요절한 가수라 울림이 또 다르다.
. 가사를 바꾸어도 김정호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러 가는 독립군 의 비장함보다 윤심덕의 애절한 체념이 더 느껴진다. 독립군 버전 은 이를 악물고 웃으며 불러야 한다. 그래야 독립군 기상이 나온다.
♬ 사의 찬미 / 김정호 ♪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 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 항일 독립운동의 노래 "
♣ 영문 밖의 길 ♣
(새찬송가 158장 '서쪽하는 붉은노을')
작사 : 주기철 목사
노래 : 미상
‘영문 밖의 길’‘영문’은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을 말한다. 마치 영문 밖의 길은 우리나라 국경넘어 만주벌판을 연상케하며 여기서 피흘리고 돌아가신 예수님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조선의 젊은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며 노랫말을 지으 신것 같다.
서쪽하늘 붉은노을 영문 밖에 비추누나
연약하온 두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한발자욱 두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간악한 유대관헌 포악한 로마병정
걸음마다 자국마다 가진포악 지셨구나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없이 못가는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 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아픈다리 싸매주고 저는다리 고쳐주사
보지못한 눈을열어 영생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할지라도 제십자가 바로지고
골고다의 높은고개 나도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가신 길이오니 내가어찌 못가오랴
주님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아오니
고생이랴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리
. 부르면 절로 눈에 눈물이 거렁 거렁 해지는 노래.
.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강탈하고 식민지화 시킨 것에 대한 일제를 용서치 않으시고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위하서 강요한 신사참배에 반대하면서 다섯 차례나 검거 되시어 옥고를 치르신 분이 바로 주기철 목사님이시다.
. 주기철 목사님은 1938년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 총 5년 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시다 조국해방을 목전 에둔 1944년 4월21일에 순교했습니다.
. 바로 이노래는 복음송가의 옷을 입힌 항일 독립운동의 노래였던 것이다.
|
첫댓글 삼일절을 앞두고 왜정시대에 관련된 자료를 찾던중 무척 슬픈이야기와 노래가있어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곡은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다늅강의 잔물결이란 곡에 가사를 입힌것으로 원곡은 설 전에 포스팅 하겠습니다. 원곡은 상당히 밝고 경쾌합니다 기다려 주세요.